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소녀 [갯 바위 마을 - 21.]
fithr 2023-11-19 2
“이야, 이전의 경험을 밑거름 삼아 처음부터 환각을 몇 중으로 걸어놨었거든요.”
“환각…….”
“예, 지금쯤이면 슬슬 제 능력을 알아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세 분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각자 다른 암시를 걸어두었습니다.”
암시의 내용은 간단했다.
서로를 다른 인물로 인식하게 하고, 위치를 다르게 인식하게 하는 것.
“그렇게 해서 제가 있던 위치가 아닌 엉뚱한 곳에 당신은 능력을 사용했고, 저 둘은 서로를 저로 인식해 서로를 공격했죠. 뭐, 제가 총을 쏠 때는 능력을 살짝 풀어서 서로를 제대로 인식시켰지만요.”
그 뒤는 가연에게 건 암시를 통해 루시와 자신을 반대로 인식시켰고,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만들어 앞을 뒤로 바꾸는 등 인식이라는 부분에 조금의 착각을 가하자. 자기 손으로 동료를 그것도 아끼는 동생을 공격하는 그림이 완성되었다.
“뭐, 이런 식으로 능력을 쓰면 저한테도 부담이 심하긴 하지만-”
“내… 내가… 내가 루시를… 내가… 내가…”
“효과는 기대 이상이군요.”
환각을 응용한 암시에 각자 다른 암시하는 내용이 달라 상당한 집중력과 위상력이 소모되긴 하지만, 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 손해 본 건 아니라 여기며 루시를 공격해 정신이 위태로운 가연을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짓는다.
‘역시 육체가 죽지 않는 거지, 정신은 꽤나 쉽게 무너지는군.’
이 상태라면 간단한 암시만으로 교단까지 데리고 갈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치직-
세분! 들리십니까?! 제가 조금 늦었군요! 고출력 위상력 억제기, 기동 완료입니다!
원래는 섬의 주민들이 지금보다 안전하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안한 거지만… 앞으로 쓸 일도 없겠죠. 리미터도 풀어버리고, 최대 출력으로 기동시켰습니다. 이러면 저 관리자의 위상력도 충분히 억제되겠죠! 물론 여러분의 위상력도 떨어지겠지만…… 가연 씨! 두 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연결된 무전을 통해 기계 가동이 성공했고, 그와 함께 그 자리에 있는 네 명의 힘이 제어되지 않았다.
“응?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힘이 제어가 안 된다니…!”
“내가… 루시를… 내가… 또……”
위태로워 보이던 가연의 정신은 이제 완전히 무너져 내려가는 성과같이 황량한 잔해만이 남아 그곳에 원래 무엇이 있었던 곳이라는 걸 알리는 듯 산산히 흩어진 정신이 떠올리고 싶지 않던 일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또… 죽게 한 거야… 내가… 내가 또… 죽게 했어……”
… 여…
“자,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도망같은 거… 다시는 안 할게요… 다시는 안 할 테니까… 제발…”
……연…
“그 애를……”
“가연!?”
“연이 언니!”
!?
무너져내리는 정신의 파편 속에서 소녀를 꺼낸 강렬한 폭음.
“하… 하아…. 이제… 정신이 좀 드세요?”
“루, 루시…”
“하… 이제야 우리 목소리가 들리나 보네요.”
“은하… 씨….”
무너져 내리는 정신 속에서 점차 묻혀가던 가연의 의식을 끄집어낸 두 소녀는 고통에 신음하면서 가연의 의식을 꺼내왔다.
“하… 진짜… 이놈의 오지랖은… 언제나 문제라니까….”
“그러…게요…. 은하 씨가 몸 바쳐 지켜주셨는데… 이렇게 당해버렸네요.”
두 사람 다 견딜 수 없는 통증에 결국에 주저앉고 말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내가 루시 너를…”
“…괜찮아요. 언니가 저를 노리시고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치만… 나 때문에… 루시 네가 다쳤어… 나 때문에…”
의식은 돌아왔지만 지금 가연을 채우고 있는 뿌리깊은 죄책감.
자기가 소중하게 대하는 사람이 자기 때문에 다쳤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깊은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위상력의 운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이전에 은하한테 했었던 상처를 냉기로 살짝 얼리는 식의 응급처치는 할 수 없는지. 자기 옷을 찢어 지혈하는 등 가연이 알고 있는 선의 응급처치를 하였다.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에도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가연의 태도에 은하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상체를 일으켜 세운다.
“하, 더 이상 못 들어주겠네.”
“……네?”
“왜 그렇게 사과하는 거예요. 이미 금발은 언니를 용서하는데.”
가연이 보이는 자기혐오와 짙은 죄책감이 은하한테 있어선 건들이면 안 되는 기억을 건들인 것 같았다.
“자기 스스로를 용서 못 하겠다는 말 같은 건 하지도 마요. 아니, 꺼내려고 하지도 마.”
“…….”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가연은 그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은하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하-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는데.”
“왜 그렇게까지 죄스러워하는 거야. 나랑 금발한테 일어난 안 좋은 일이 죄다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거야 뭐야. 금발이랑 주변 사람들이 자꾸 엄마같다 하니까 진짜 엄마처럼 모두 책임져주기라도 하려는 거야?”
“그, 그건… 단순히… 걱정이 돼서….”
“걱정? 걱정은 좋지. 하지만 그게 과하면 참견이야. 네 실수로 금발이 다쳤어도 금발이 괜찮다고 하잖아, 너를 용서하겠다고 말하잖아. 피해자 가해자를 용서하는데 어디서 가해자가 피해자의 용서를 받내 마내질이야. 그리고, 남 다치는 거에는 그렇게 과민반응 하더니 자기는 어차피 안 죽는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네가 죽지 않는 거지 아픔을 못 느끼는 건 아니잖아!”
“으, 은하 씨…”
“그러니… 앞으로는 다른 사람 목숨만 신경 쓰지 말고… 너 자신의 목숨도 조금 신경 써….”
점점 힘이 다하는 건지 몰려오는 피로감에 눈이 감기기 시작하는 은하가 마지막 힘을 내 입 밖으로 한마디의 말을 내뱉는다.
“가… 연아….”
마지막 말을 내뱉곤 힘이 다한 것처럼 은하의 눈은 스르륵 감겼다.
“쯧, 힘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겠죠. 암시가 아닌 기절을 시켜서라도 교단으로 데리고 가야겠군요.”
그런 말을 하며 사육사들이 짐승을 잠재우는 데 사용하는 마취 총을 꺼내 가연을 노리자.
카앙-
“!?”
“하아… 하….”
가연의 공격에 당해 쓰러져있던 루시가 나타나 관리자가 겨누고 있던 총을 감옥 관으로 후려치며 힘들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분신이라서 그런지 육체의 손상에도 별문제가 없나 보군요.”
“하아… 하… 아니요. 솔직히 지금 당장이라도 이 몸이 무너질 것 같아요. 하지만…”
- 나 때문에… 루시 네가 다쳤어… 나 때문에…
“당신 때문에 연이 언니가 울었어요. 제 이름을 부르면서 괴로워했어요.”
“이름? 본체에서 떨어진 분신 주제에, 이름이라고?”
“그래요! 저는 루시 플라티니!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 소중한 이름을… 제 소중한 사람이 슬픔에 괴로워하며 부르게 한 당신을 저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요!”
그 순간 주변에 있는 이들의 힘이 루시에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큭…! 힘이… 저 인형한테 빨려 들어가고 있잖아…?! ……그렇군, 이제 알았어. 잃어버린 본체를 대신해 다른 존재의 위상력을 흡수하며 연명했던 거였군!”
“맞아요, 지금까지는 마물들의 것을 흡수해서 형태를 유지해왔죠. 하지만… 본체와는 엄연히 다른 속성의 존재들이니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은하 씨를 쏴서 상처에서 위상력이 흘러나왔을 때,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버리고 말았어요!”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듯 괴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흡수의 기세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이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당신은… 당신만은…!!”
“큭, 크아아악!”
힘을 흡수당하고, 계속 공격을 받던 관리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크흑, 크하하하하핫! 저만은 이라고요? 누가 들으면 악인을 잡는 정의로운 영웅이라도 되는 줄 알겠군요. 당신…… 그저 사람의 힘이 맛있어서 견디지 못하는 거잖아요?”
“!? 그게 무슨?”
“그도 그럴게, 지금 당신의 얼굴이 아주 달콤한 것을 먹는 것마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거든요. 자, 마음껏 흡수하시죠. 제 몸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말이에요. 그렇게 하면 영영 그 쾌락에서 나오지 못할 테죠?”
“아, 아니야! 나는… 그런 존재가…!?”
루시가 혼란스러워하자, 힘의 흡수가 멈췄다.
“흠? 흡수가 멈췄군요, 그만두신다면 이만 실례하도록 하죠. 다음에는 망설이지 마세요. 계속 살아남고 싶다면. 그럼, 다시 만나죠. 흡혈귀.”
그렇게 말하며 떠나려던 관리자의 발목을 붙잡는 건 다른 무엇도 아닌 일순간 이 공간을 가득 채운 위상력에 의문이 생겨, 위상력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루시의 흡수로 인해 몰랐을 뿐 이전부터 개방돼있었던 소녀의 방대한 위상력.
본인의 눈동자 색을 닮은 회색빛의 위상력이 텅 빈 이곳을 순식간에 가득 메웠다.
관리자의 말에 정체성의 혼돈으로 괴로워하는 루시에게 다가가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의 볼을 가볍게 쓰다듬고, 정신이 흔들리는 루시를 품에 안아 조용히 등을 토닥여주었다.
‘……상처가.’
몸에 나 있던 상처가 씻은 듯 사라졌고, 혼란스러웠던 정신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오…… 오오-!! 이건. 아-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모습, 온전히 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스러운 신녀의 자태-!”
관리자는 지금 자신이 도망치려던 사실조차 잊은 채 위상력을 개방한 가연에게 찬사를 표하며 상당히 정중한 자세로 예를 취해 가연에게 자신과 함께 가줘달라는 부탁을 하였지만-
“이전에도 당신한테 같은 질문을 받았었죠. 그리고 지금 제가 할 말 또한 그때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안타깝네요, 신을 받아들일 자격을 지닌 성스러운 신녀께서 저희와 함께해주지 않으시겠다면, 조금 거친 방법을 써야겠군요.”
그 말과 함께 총을 겨누었지만-
“결전기…”
가연의 쪽이 훨씬 더 빨랐다.
[결전기: 여름 하늘 소나기]
순식간에 상공을 꿰뚫고 나간 섬광은 수십, 수백 갈래로 나뉘어 지상을 적시는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크악-!?”
하늘에 떨어진 화살들은 맹렬한 화염과 서늘한 한기를 내뿜으며 지상을 태우고, 얼려 버리며 보는 이로 하여금 가공할만한 위력을 선보였다.
“큭… 이번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뵙죠. 신녀님.”
얼음과 불의 소나기 사이로 정중한 인사를 건네며 사라지는 관리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루시의 어깨에 조심히 손을 올렸다.
“루시야. 이제 좀 괜찮니?”
“아… 네예. 많이 괜찮아졌어요.”
“그래? 그럼 이제 돌아가자.”
온화한 미소에 루시는 관리자 한 흡혈귀라는 말에 받은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옅어지는 것 같았다.
“언니가 안아줄까?”
“아, 아니에요. 그 정도로 안 좋지는 않아요.”
“으… 그러면 나는 뭐 다 죽어가서 이 언니한테 업혀있는 거예요?”
“은하 씨… 일어나 계셨어요?”
줄곧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은하가 가연의 어깨에 턱을 괴곤 죽을 것 같다는 듯한 표정을 보이며 말하자, 일어난 줄 몰랐다며 루시가 의아스러워한다.
“어, 그 빚쟁이가 위상력 빨리고 있을 때? 아마 그쯤부터 정신은 조금씩 들더라.”
생각보다 훨씬 일찍 정신이 든 은하의 말에 루시는 들키고 싶지 않았던 비밀을 들킨 것마냥 표정이 어두웠다.
“아, 그런데 돌아가서 저쪽 돕는 다거나 같은 말은 하지마요. 이미 우리 셋은 할 만큼 했으니까.”
하지만 은하는 루시가 걱정하는 것과 달리 태연히 가연과 대화를 나누며 모르는 척을 해주었다.
이에 가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 등 뒤에 업힌 은하를 힐긋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음- 애초에 도우러 갈 생각은 없었어요. 그리고… 이미 도와드렸는걸요.”
“……응?”
희미하게 귓가를 스쳐 지나간 뒷 말에 그게 무슨 소리냐 묻기도 전에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루시의 손을 잡고 갯 바위 마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