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녀와 소년은
아스카 2015-02-25 2
추운 겨울의 한기가 모두 가시고 핑크빛의 벚꽃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계절. 봄이다.
다들 얼어붙은 몸과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에 환호하며 즐겁게 나들이를 나가거나 노곤한 몸을 겨누지 못하고 편히 휴식을 취할 때. 한 명의 소녀는 마냥 즐거워할 수는 없는 처지에 처해 있었다.
벚꽃보다도 밝게 물든 핑크빛 머리카락. 전혀 한국인의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푸른색의 두 눈동자. 어른스러운 표정과는 다르게 발달이 조금 더딘 신체. 검은색과 하얀색을 대조한, 푹신푹신한 양을 연상시키는 옷을 입은 소녀. 이름은 이슬비라고 한다.
팔짱을 끼고 인상을 찡그린 그녀가 봄을 만끽할 수 없는 데에는 심오한 이유가 있었다.
세계평화. 딱 그 말이 어울린다.
"……너 진짜 그 게임기 부숴버린다?! 빨리 꺼!!"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나머지, 빽 소리를 지르고 만다.
그런 슬비의 분노에도 아랑곳 않고 익숙하다는 듯이 손의 휴대용 게임기를 붙잡고 있는 소년이 있다.
"기다려 봐. 지금 서번트들이 다 죽기 전이라고. 빨리 가서 막타 치고 유니크템 얻어야 한단 말이야."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그리고 지금 회의 중인거 안 보여?!"
슬비와 디자인은 비슷한 옷을 입고,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진갈색의 눈동자를 가진 소년. 딱 보기엔 슬비보다 나이가 많아보이지만 이 둘이 사실은 동갑이라는 것을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세하. 검은색의 장갑을 끼고도 현란한 솜씨를 자랑하며 게임 속의 보스를 퇴치하기 직전이었다.
뚝.
게임기의 화면이 검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게임기의 내장 스피커에서 들려오던 요란한 소리들도 멎었고, 게임기의 전원이 꺼졌다는 것을 눈치채기엔 몇 초의 시간이 흘렀다.
"………………………………."
"뭐야, 이상한 소리나 하더니 잘 끄네. 앞으론 작전 회의나 작전 도중에 게임은 그만……,"
음음, 하며 조금은 미소를 지으려던 슬비. 그런 만족스러운 미소는 눈 앞에 보이는 광경에 부서지듯이 사라져버렸다.
"안 돼!!!!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방전이라고?! 왜?! 어째서?! 석봉이한테 배터리 개**지 받았는데?!"
"그럼 이틀 내내 게임기를 틀어놓고 있는데 방전이 안되겠냐!!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이 게임 폐인아!!"
으아악!! 하며 무릎을 꿇고 소리를 지르는 세하. 머리를 벅벅 흐트려뜨리며 절규에 가깝게 울부짖는 그의 머리통에 슬비의 주먹이 꽂혔다.
퍼억! 하며 수직으로 내려꽂힌 그 주먹에 세하의 몸이 순간 휘청거렸다.
주먹의 주인인 슬비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세하 훈련생. 우리는 아직도 작전 회의 중이거든? 집중 좀 해라, 진짜!!"
강한 압박감을 느낀 세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슬비의 말을 듣는 척 하면서 자리에 앉은 세하였지만, 속은 온통 회의실에 전기 콘센트가 더 남질 않았다는 것에 대한 푸념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 리가 없는 슬비는 손에 들고 있는 포트폴리오를 한 장 넘기며 말했다.
"……일단 강남의 GGV 일대를 순찰하는 것이 오늘의 임무가 되겠어. 질문 있어?"
사뭇 진지한 슬비와는 반대로 세하는 퉁명스러운 반응만이 가득했다. 게임을 끝까지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슬비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그럼, 오늘의 작전은 대충 얼마나 걸려?"
"빠르면 밤 8시 정도면 끝날거야. 지금이 오전 10시 22분. 대략 10시간 정도라고 생각하면 돼."
"야, 그냥 대충대충 하고 끝내자. 나 오늘 석봉이랑 같이 랭겜 돌려야 한단 말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게임이구나, 넌."
한숨을 푹 내쉬는 슬비. 그 모습에 은근히 열이 받친 세하는 그대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야, 이슬비. 그렇게 내가 한심하게 보이냐?"
남자의 자존심이라는 것일까. 자신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는지, 세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짜증이 가득 섞인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런 말에 이미 익숙해진 슬비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맞아. 아직 우리 팀원이 나랑 너밖에 없다고는 해도, 일단 우리는 유니온 소속의 클로저야. 민간인을 지키고 차원문을 닫는게 우리의 임무란 말이야."
"그래서? 내 사명을 다해라, 이거야? 미안하지만, 나는 클로저가 될 마음은 쌀 한 톨 만큼도 없었어. 엄마가 강제로 시킨 일이란 말이야. 그럼, 내 의지랑은 상관 없으니까 딱히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되잖아?"
빠득. 이 가는 소리가 회의실에 들려왔다. 그 소리가 슬비의 치아 사이에서 났다는 것을 금방 눈치채고는 더욱 더 시비조로 다시 말을 잇는다.
"애당초, 그렇게 하고 싶으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서 혼자 열심히 순찰이나 돌다 오지 그러냐? 나는 그냥 방에 틀어박혀서 게임이나 하고 있을……."
"……너는, 그렇게 나오는 대로 말하고 싶어?"
한 순간. 비웃음까지 짓던 세하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슬비의 목소리에서 깊은 분노가 느껴져서 그렇다는 것을 체감하기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슬비가 손에 들고 있었던 포트폴리오를 책상에 내던졌다. 콰앙! 하고. 어떤 힘에 짓눌린 것처럼 포트폴리오를 중심으로 책상이 산산조각났다.
슬비가 주먹을 쥐며 말했다.
"뭐? 엄마가 시킨 일이야? 네 의지랑은 상관 없어? 혼자 열심히 하라고? 그게 네 생각이야?"
그렇게 말한 직후.
아찔한 느낌을 받은 세하가 시야를 되찾았을 때엔, 이미 슬비가 세하의 몸을 회의실의 벽으로 밀어붙인 뒤였다.
세하의 멱살을 고사리같은 양 손으로 움켜쥐며, 세하보다 아래에서 세하를 올려다보며.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살기와 분노로 채워진 표정으로, 외쳤다.
"그럼 당장이라도 그만 둬!! 나도 너같은 인간 쓰레기랑은 같이 다니기 싫으니까!! 엄마가 시켰어?! 너는 위상력을 가진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그냥 어느 순간 너한테 떨어진 콩고물로만 보이니?!"
슬비의 말을 들은 세하는 간단한 생각밖에 떠오르지 못했다.
무슨 소릴 하는거야, 라고.
다른 차원에서 지구로 건너온 차원종. 그들이 타고 건너온 '차원 게이트'가 열림과 동시에 소수의 인간들에겐 '위상력'이라는 초능력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이 초능력자들은 아무런 공격도 통하지 않던 차원종들에게 공격을 가할 수가 있는 존재들이었고, 이들이 차원문을 닫는 자들이라고 불리워지며 '클로저'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이슬비와 이세하. 이 둘은 클로저다.
아직은 겨우 훈련생에 불과하지만, 나이가 들고 경력이 쌓이면 이들도 언젠가 정식 요원으로 발탁돼서 차원문을 닫을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을, 세하는 원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의 어머니가 '차원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던 전설의 클로저, '알파 퀸'이라는 이유로 막대한 위상력을 물려받고, 그 위상력은 세하가 강력한 클로저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받게 했다.
주변의 시선. 기대. 소망. 그것에 심한 상처를 받았던 세하는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는 게임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던 세하의 어머니, '알파 퀸'이 세하를 클로저가 되도록 강요한 것이었다.
세하에게 위상력이란 단순한 저주에 불과했다. 당연하게도 자신의 이런 태도를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소녀는 울고 있는 것일까.
푸른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뭘까.
그 해답은 소녀가 직접 찾아주고 있었다.
"위상력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가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네가 알기는 해?! 나는 말이야!! 차원종한테 부모를 잃은 다음에서야 위상력에 각성했어!! 이미 모든 것을 잃은 다음에야 힘을 얻었다고!!"
처음 들었다. 슬비의 과거에 대해서도, 위상력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위상력이 없어서 불행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그저 막연하게 강한 클로저가 민간인을 구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내가 싫었어!! 엄마랑 아빠를 죽인 차원종을 죽인 다음에도 나 자신이 너무 싫었어!! 이럴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각성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고, 차라리 엄마랑 아빠랑 같이 죽는 편이 나았다고!! 이런 힘은 필요 없으니까 엄마랑 아빠나 되돌려달라고!!! 그런데, 넌 뭐야? 대체 넌 뭐하는 놈이냐고!! 강한 위상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우쭐해지니? 다들 너처럼 막연하게 게임이나 하면서 사는 줄 알아?!"
그래서, 미안해졌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노력으로 겨우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하고……이제야 차원종들을 섬멸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하필이면 너같은 놈이랑 만나서……!!"
미안해져서 어쩔 수가 없었다. 세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억울함을 토로하는 그녀를, 자신이 울렸다고. 그렇기에 사과해**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세하 스스로도 거의 들을 수가 없을 정도로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정말로, 미안."
자신의 멱살을 쥔 채로 눈물을 흘리는 소녀를, 조용히 양 팔로 감싸안았다. 평소의 자신이 아닌 듯이, 그 행동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미안해. 정말로. 이 말밖엔 못하겠다."
어느새 자신의 멱살을 놓고 그저 조용히 자신에게 안긴 채로 흐느끼는 소녀를, 세하는 그저 양 팔로 품에 안을 뿐이었다.
자신의 미숙함과 어리숙함이 슬비를 울리고 말았다. 그녀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의 편의에 맞춰서 말했다.
그래서 더욱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이 이상의 말은 그녀를 더욱 서글프게 만들 뿐이었으니까.
'아아, 그렇지.'
항상 혼자였던 그녀를, 누군가가 지켜줘야만 한다. 지켜주진 못하더라도, 곁에 있어줘야 한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가 되자.
항상 그녀의 곁에 남아서, 그녀가 혼자 남지 않도록 있어주자. 그녀가 울어줄 때엔, 다시 이렇게 안아주자.
그녀와 공감해주며, 그녀의 편이 되어주자.
아픈 과거는 행복한 현재로서 뒤바꿔주자.
그렇게 각오하며, 소년은 소녀를 품에 안았다.
그 날은, 유난히도 분홍빛 벚꽃이 많이 흩날리는 날이었다.
===========================================================================================================
...잠이 오질 않네유...그냥 심심해서 글 한번 끄적여봅니다ㅋㅋㅋㅋ
p.s 슬비 유리 세린 정미 더스트 캐롤 유정 미스틸 덮밥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