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버넌트 - 죽음에서 돌아온 소녀 [갯바위 마을 - 17.]
fithr 2023-09-19 1
“한 기남 씨!”
서둘러 갯 바위 마을로 돌아온 세 사람은 곧장 한 기남을 찾았고, 그들의 부름에 마을에서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한 기남은 서둘러 달려왔다.
“은하 씨가 총에 맞았어요. 빨리 탄환을 뽑아내야-”
“이런!? 괜찮으십니까?! 이거 아무래도 보급형 위상 관통탄 같은데…!”
은하의 어깨에 박힌 탄환이 무엇인지 단번에 파악한 한 기남의 말에 가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괘, 괜찮아요. 이 정도는… 깡으로 어떻게든…”
“될 리가 없잖아요!”
뭐라 소리치려던 한 기남의 목소리보다 먼저 들려오는 가연의 목소리.
“은하 씨는… 아무리 상처를 입어도 끝없이 회복할 수 있나요. 탄환이 박혀도… 몸이 재생하면서 박힌 탄환을 밀어낼 수 있어요. 아무리 죽을 정도의 치명상을 입어도 죽지 않을 수 있냐고요.”
평소나 전투 중일 때와도 다른 가연의 목소리.
하지만-
“은하 씨의 목숨은… 하나뿐이잖아요.”
그 목소리는 슬픔을 머금고 있었다.
“…….”
가연의 말에 뭔가 예전의 친구가 생각났다.
연습 중에 자기가 다친 것도 아니고 진짜로 다친 것도 아닌데도 걱정해 주던 친구.
“저… 일단 탄환을 척출하겠습니다.”
“아, 네. 부탁드려요.”
큭- 크윽… 하아…!
어깨의 탄환을 척출하자마자 곧바로 회복 앰플을 상처 부위에 뿌린 뒤 남은 앰플을 먹였다.
“은하 씨의 상태는 어때- 으윽…!”
은하의 처치가 끝나자마자 은하에게 다가오는 루시가 비틀거렸지만-
“루시야, 아직 다 낳은 게 아니잖아.”
“연이 언니…”
어느새 루시의 뒤로 간 가연이 루시를 잡아주며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한 기남 씨, 은하 씨의 상태는 어떤가요?”
“다행히 급소는 피한 것 같아요. 가연 씨 정도는 아니더라도 위상능력자는 회복이 빠르니 회복 앰플로 치료하면 어떻게든 될 겁니다.”
“죄송해요… 제가 제대로-”
궤를 달리하는 가연의 회복력보단 못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위상능력자의 회복력은 일반인보다 월등한대다 회복 앰플까지 사용했으니 회복까진 얼마 안 걸릴 것이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이 루시를 옮아맸다.
하아…. 하아…….
“뭘 미안해하고 있어… 방심한 건 내 쪽이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희미해져 가는 의식을 잡고 죄책감을 느끼는 루시에게 그럴 필요 없다며 자기 실수에 괜히 죄책감 같은 것 가지지 말라는 은하는 이 이상은 무리라며 잠깐 눈 좀 붙인다며 잠들었다.
“네, 푹 쉬세요.”
잠든 은하의 엉망이 된 앞머리를 살짝 정돈해주며 잘 자라 인사하고 한 기남이 펼쳐준 간이침대에 은하를 눕혀 놓자. 그제야 보이는 루시의 상태에 괜찮냐고 묻자, 어색하게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려던 루시의 어깨를 붙잡는 가연.
“루시, 아까 또 비틀거렸지. 너도 다 낳을 때까지 쉬고 있어.”
“이, 이제… 많이 괜찮아졌어요.”
“안돼, 간이침대 하나 더 펴 놓을 테니까 거기서 쉬고 있어. 또 멋대로 움직이면 안 돼 알았지.”
뭔가 타협 따위는 없어 보이는 가연의 말에 루시는 작게 프랑스에서 엄마한테 혼났을 때가 떠오른다며 중얼거리는 루시의 말에 연이는 내심 그렇게까지 엄마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연 씨, 가연 씨는 어디 다치신 데 없으신가요?”
“아,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한 기남 씨 혹시 저희가 한 전투를 기록하신 게 있나요?”
“네? 아… 영상은 없지만, 소리를 녹음한 레코드라면 있습니다. 주변 소리는 지우고 사람의 목소리만 남겨뒀습니다. 한번, 들어보시죠,”
레코드를 재생하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연은 돌아오면서 느낀 위화감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사람의 목소리만 남겨두셨다고 하셨죠.”
“예.”
“애초에 그곳에 없었네요. 전우치라는 사람은….”
오직 자신들의 목소리만이 흘러나오는 레코드를 통해 드디어 알아차렸다.
“네, 아마 그럴 겁니다. 교전 상황 중에서도, 세 분의 목소리만 들려오더군요.”
“환영… 아니, 그보단 세뇌라고 생각하는 편이 맞겠네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환영보다는 뇌리에 전투 장면을 새기는 세뇌나 최면이 타당하단 생각이 들었다.
“워낙 희귀한 능력이라 저도 한 분밖에는 모릅니다. 그것도 직접 만나서 길게 이야기해 본 적은 없지만-. 그런 능력자 중에는 차원종의 정신을 조종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환각을 보여주고 기억을 조작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 이 섬의 아이들은 섬에 도착과 동시에 바깥의 기억을 잃어버렸다… 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네요.”
가연이 무심히 뱉은 말에 한 기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 소거 장치는 엄중히 관리하는 기술이니 외부로 유출될 확률은 희박하죠.”
“그렇죠. …그런데 그 능력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는지 모르면, 저희가 상대할 방법 자체 없는 거나 마찬가진데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요.”
“그거라면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해결책을 궁리해 볼 테니.”
곧 방법을 찾아내 보겠다는 한 기남의 말에 가연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응? 저기 아라가 오는군요. 유니온의 관계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어볼 필요는 있을 테니까요.”
*
“아, 연이 언니.”
“아라야, 잘 다녀왔어.”
“응!”
가연을 보자 연이에게 다가오는 아라를 받아주며 밖에서 놀다 온 딸을 맞이하는 어머니같이 행동하는 연이, 그런데 아라를 제외한 희망과 다른 아이들이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아, 연이 언니 우리 곧 섬을 나갈 거 같아.”
“…정말이니?”
“응. 그래서 나만 짐 좀 챙기러 돌아온 거야.”
섬을 나간다면 두 손 들고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이렇게 갑자기 나가게 된다는 사실에 솔직히 놀랐다.
“의사 언니가 그랬어. 우리들을 데리고 섬에서 나갈 거라고. 중개인 언니도, 중개인 언니와 함께 있던 심부름꾼 언니랑 아저씨도 다 그러자고 했어.”
아마 루시가 들었다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겠지만, 그 사람에 관한 생각이 조금 바뀔 것 같다.
“희망 오빠는 말할 힘이 없어서 말을 못 했는데… 내가 그러자고 했어.”
가연에게 붙어있던 아라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나… 잘 선택한 걸까? 나중에 일어난 희망 오빠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럼 잘했지. 여기에 있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다 같이 치료도 받고 건강해지면, 다시 희망 오빠랑 애들이랑 다 같이 놀러 가서 실컷 놀기도 하고, 같이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훨씬 즐거운 일이 많을 거야. 그러니 우리 아라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옳은 선택을 해서 대견스럽기까지 한걸.”
침울해 있던 아라의 눈을 마주보며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자. 어두웠던 아라의 얼굴에 다시 밝은 빛이 돌아왔고, 그걸 보고있던 트럭 안의 반금련이 조용히 엄마냐…라는 말을 중얼거리긴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런데… 희망 오빠,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말할 힘도 없을 만큼…?”
“응… 그런 것 같아. 자꾸만 정신을 잃어버려. 그래도 마지막에 일어났을 때, 나한테 그랬어. 가연 언니한테 말을 전해달랬어. 자기한테 연락을 해달라고 말이야. 비둘기로 희망 오빠한테 말을 걸어줘. 난 짐 챙기고 있을게. 커다란 가방에 차곡차곡.”
해맑게 웃으며 짐을 챙기러 가는 아라를 보고 비둘기를 연결하자.
“아, 연이 씨. 다행이에요. 제가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 연락이 들어와서….”
“아라한테 들었는데, 섬에서 나가기로 하셨다면서요. 정말 다행이에요. 이제 제대로 된 시설에서 치료받을 수 있겠네요.”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에 그렇게 결정이 났네요.”
정말 다행이라며 미소짓는 가연을 보고 희망 또한 같은 생각인지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잘 됐어요. 이걸로 아이들은 구원받을 수 있을 테니… 모두 구원받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이야…!”
창백한 희망의 얼굴 위로 안도감 가득한 기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이대로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가진 않을 거예요.”
기쁨도 잠시 다시 현실로 돌아온 희망은 차분히 현 상황을 생각하였다.
“섬의 관리자가… 이 섬을 방관할 리 없겠죠. 틀림없이 무슨 책략을 꾸밀 거예요. 섬의 차원종이 난폭해지는 것도, 독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는 것도 관련이 있겠죠.”
정신계의 능력을 지닌 관리자라면 아마 차원종의 정신에 간섭했을 가능성도 있고, 섬의 독기도 확실하진 않지만, 관리자와 뭔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관리자는 영리하고 잔혹한 사람이니 틀림없이 이중, 삼중으로 덫을 놓겠죠. 그러니 부탁할게요. 아이들이… 무사히 섬에서 나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부탁하시지 않아도 돼요. 오히려 제가 돕고 싶은걸요.”
순수한 선의로 가득한 연이의 말에 희망은 그간 품고있던 의문을 지금에야 입 밖에 뱉었다.
“가연 씨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저희를 돕는 건가요?”
“…….”
희망의 질문에 한참을 말없이 서 있기만 하던 가연이 입을 열었다.
“……한 아이가 있었어요.”
“…네?”
가연은 예전에 그에게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처럼 조곤조곤히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 아이는 처음엔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의 사랑을 받으며 하루하루 행복 속에서 살았던 아이에게 사건이 일어났죠.
부모님을 잃고 그 충격으로 목소리를 잃은 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홀로 외로이 버틸 수밖에 없었어요.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그 누구 하나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없었죠.
오히려 손을 내밀어달라 간절히 부탁해도 그 누구 하나 그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았고.
도움을 바랄수록 아이의 괴로움은 점차 커져만 갔죠. 하지만, 그런데도 아이는 계속해서 간절히 도움을 바랐어요.
더 괴롭기만 할 걸 알면서도… 그것 이외엔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그거라도 하지 않고선 자신이 무너질 것만 같아서… 알면서도 놓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간절히 빌어도 아이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도움을 바라는 이들의 손을 외면할 수가 없어요.”
그 손을 내미는 사람의 고통이 얼마나 클지… 너무나도 잘 아니까.
너무 잘 알아서… 그 손길을 외면할 수가 없어.
마치 괴로운 옛 기억을 꺼내는 듯 씁쓸함만이 감도는 목소리로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 이야기 혹시-”
“이야기가 너무 어두웠네요. 많이 피곤하실 텐데 그만 쉬세요. 저도… 잠깐 바람을 좀 쐬고 올게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비둘기의 연결을 종료한다.
‘내가… 왜 그 얘기를 했을까.’
“……왜 그랬을까.”
바닷바람을 맞으며 홀로 길가를 걷는 동안 가연은 끊임없이 자신한테 건네는 질문.
괴로움에 몸부림칠 때 늘 원했던 구원의 손길.
그게 누구라도 좋았다.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
그런 생각을 가진 채 지옥에서 살아갔고, 끝내 살아선 나갈 수 없던 그곳에서-
죽어서야 나갈 수 있었다.
“처음엔 왜 이곳에 온 건지도 몰랐는데……”
시간이 흘러 선명해진 기억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난 이미 섬에 들어오기 전에 한번 죽었었다.
그리고… 되살아났다.
위상력을 각성한 채로-.
*
“아, 연이 언니, 돌아왔구나.”
“응. 우리 아라, 혼자서 짐 챙겼어? 대단하네.”
“헤헤- 이제 희망 오빠랑 다른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혼자서 짐을 정리하던 아라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칭찬해주자.
아라는 예쁜 미소를 보여주며 다 챙겼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려던 아라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짐 사이를 뒤지더니-
“아, 찾았다!”
짐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두 쌍의 방울.
웬 방울인지 궁금해 흥미를 보이는 가연에게 방울을 내밀었다.
“애들이 처음 만난 날 구해줘서 고맙다면서 전해주라고 했던 거야.”
“나, 나한테…?”
“응!”
환하게 웃으며 건네는 방울을 받으며 얼떨떨한 가연은 아라한테 잘 받았다며 고맙다고 전해주라 말하고, 머리를 땋은 노끈을 풀고 방울을 엮은 끈으로 다시 땋았다.
다른 이들이 보면 그저 평범- 아니, 어쩌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가연의 수려한 외모는 그런 이상함마저 묻어버리고 오히려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
“어… 어때…?”
“엄청 예뻐!”
아라의 반응에 가연이 옅게 미소 지으며 방울을 찾느라 어지른 짐을 같이 정리해주던 중.
“아라는 이제 섬에 나갈 수 있으니까 좋아?”
“응! 좋아. 그런데… 한편으론 걱정돼.”
이제 곧 나갈 수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기뻐하면서 무언가 생각난 듯 근심으로 가득한 아라.
“응? 뭐가?”
“섬에서 나가는 거 말이야…. 예전에 어른들한테 들었어. 이 섬을 나가려고 하면, 섬의 주인이 화를 낸다고.”
섬의 주인-?
폐쇠된 환경에서 극한 상황에 몰린 인간이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신앙에 매달린다는 건 어딘가에 갇혀있는 동안 자주 봤던 적이 있었기에 가연은 아라가 말하는 섬의 주인 역시 그러한 신앙의 상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화를 내면서,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마구마구 잡아먹는다고 말이야.”
“그건… 주인이라기보다는 그저 괴물… 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은데.”
“괴물…? 우리 섬에 있는 그 이상하게 생긴 것들 말이야?”
“어…… 비슷… 하다고 봐야겠지?”
아라한테 괴물이란 말의 정의는 섬의 차원 종일 테니.
확실하진 않지만 비슷하다고 하는 편이 그나마 낮겠다 싶었다.
쿠구구구구구구구-----------
갑자기 땅이 크게 흔들리며 굉음이 울려 퍼진다.
“아라야!?”
“아, 아아… 아아아아아…”
갑작스런 지진에 당황하면서도 무엇보다 먼저 아라를 감싸며 보호하려는 가연은 겁에 잔뜩 질려 떨고 있는 아라의 모습에 어떻게든 진정시키려던 순간.
“섬의 주인이… 화가 난 거야…”
섬을 나가려는 우리를……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잡아먹을 거야…!
개발자 노트에서 나온 시즌 4에 언급된 어나더 클로저와 신규 NPC 스토리 너무 기대 됩니다.
제가 쓰는 작은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보러오시는 많은 분들께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