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식의 계승자 EP.4 사냥꾼의밤 마지막화 [침식의 계승자]
Heleneker 2023-05-18 4
"....끝났구나."
뷜란트가 그들이 소멸한 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한때는 동족, 한때는 침략자, 한때는 권속, 결국엔 배신자와 광기로 몰락해 소멸해버린 오랜 악연에 마음이 시원하면서도.... 아련해졌다.
"아직이야. 내가 끝나도 쿠르마를 끝내지 못하면.... 다 의미없거든."
"그 아이들이라면 잘 해낼...."
"아니. 몇 번 있었어. 쿠르마를 끝내도, 잃었던 가능성이."
자온은 기묘한 말을 하더니 손을 앞으로 뻗었고,
"와라, 나의 마음. 산산조각의 깃발."
슈르르르륵------
화륵......!
잿빛의 실과 불꽃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누더기같은 낡은 깃발이 되었다.
"아가, 그건....!"
"매핑, 시작."
깃대를 내려치자, 실이 펼쳐지며 주위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면으로만 뻗던 실은 이전과 달리 수직으로도, 거기에서도 또 수평으로 뻗으며 입체적인 형태로 변화하였다.
"이 기교는....!"
아가의 기억을 공유받았기에 확실하다. 이 감지 방식은 분명 아가의 형, 비운의 기술이다. 확실히 그 아이의 기술과 경험은 네 안에 자리잡고 있고 네 계승의 힘을 깨달았으니 쓰는 건 이상하진 않지만.....
"어디냐.... 어디....."
자온은 무언가를 색적하다가,
"이번은, 여기구나....!"
타닷!
"아가!? 갑자기 어디가느냐!?"
무언갈 색적하곤, 갑자기 자리를 박차며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쯧.... 내 몸 너무 느리네. 아직 스승님을 만나지 못했다지만.... 어느 가능성과 비교해도 몸이 너무 망가졌어."
그는 여전히 기묘한 말씨로 몸을 확인하더니,
"와라, 칼날."
주위에 칼날을 구현시키곤 무언가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밟고 빠르게 가속하기 시작했다.
"저 기술은.....!"
자온이 보인 기술에 뷜란트가 크게 경악했다. 아직 그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던, 자신이 아꼈던 세 아이 중 하나였던 바람, 풍백의 바람의 흐름을 타고 가속하는 기술이였으니까.
익숙하지 않은 기술을 능숙히 사용하는 모습이나 알려준 적 없는 기술을 다루는 등 명백하게 그에게서 이질감이 느껴져왔다. 하지만 광기같은 부정한 느낌은 아닌..... 먼 옛날 갑자기 나타났었던 [그]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똑같은 기술로 자온의 뒤를 뒤따라가보니 저 멀리서 루시와 은하, 그 앞에 쿠르마가 조종하던 거대한 기계인형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흐름은..... 아가, 저거....!"
기계인형을 제압했는지 여기저기 파손되어 있었지만, 인형의 내부가 마치 폭발하기 직전처럼 흐름이 응축되며 뒤틀리고 있었다.
루시와 은하는 엉망진창으로 피투성이였고, 그 와중에 루시가 정신을 잃어 축 늘어져있는 은하를 관 안에 넣곤, 자신의 앞에 힘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루시!!! " "루시 아가!!"
둘은 더 빠르게 가속해 다가갔지만,
콰과과광!!!!!!!
그 두사람에게 닿으려는 순간, 기계 인형이 폭발하며 폭발의 폭풍이 그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상쇄해야.....아니, 염라의 갑주를.... 너무 늦었어.....!! 밀쳐내도 무조건 휩쓸려.....!!"
폭발이 그들의 눈 앞까지 다가온 그 순간,
"그렇다면.... 표용하ㄹ.....!"
----------!!!
모두 태울 것같은 폭발이 그들을 집어삼켰다.
슈륵.....
촤르르르륵-------
폭발 속에서 잿빛의 실이 솟아나며 서로 엮이더니, 폭발의 범위보다 더욱 넓은 장막처럼 펼쳐져 거대한 구체로 엮여졌다.
"이번 세상에선 처음이니까 집중하자..... 폭발을 실에 조금씩 침식시켜 무력화시킨다."
실을 아주 세밀하게, 치밀하게 제어하기 시작했다.
쿠우우우......
실의 구체가 폭발과 그 여파만을 끌어당기며 조금씩 작아지더니,
우우우....
작아지고, 작아지고, 작아져,
우.....우우........
어느새 손 안에 들어올만큼 자그마해지더니,
사락-------
그대로 부드럽게 손을 겹쳐 구체를 감싸며, 폭발을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후우... 여기선 처음이라 좀 힘들었네. 갑주... 환인의 포용... 역시 쓸만하네."
뒤돌아 루시와 은하의 상태부터 살피기 시작했다. 루시는 처음부터 막지 못한 폭발에 피부가 제법 데이고 정신도 잃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더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은하는 관 안에 있던 덕인지 더한 상처가 없었다.
"다행이다.... 이번은, 지켜냈어."
나는 안도하며 살며시 웃었다.
"아가."
"아, 영감. 이제 급한 건 다 끝났어. 돌아가자, 거점으로. 지금쯤이면 쿠르마도 끝났을테니까. 은하 좀 챙겨ㅈ...."
"너, 정말 아가가 맞느냐?
영감은 내 앞에 서며 물었다. 저 걱정스런 표정. 뭘 생각하는건지 알고 있다.
"걱정 마, 영감. 지금 이 상태는 아주 일시적인.... 미련같은 거거든."
조용히 웃어보이며 루시를 조심스레 업었다.
"이 순간을 제대로 기억 못 할테지만..... 걱정 마. 나는 여전히 나고, 앞으로도 나일테니까."
"--------"
".....그래. 자, 돌아가자."
자온은 뷜란트를 스쳐가며 조용히 뭔가 속삭였고, 뷜란트는 잠시 놀라면서도 아련히 웃으며 은하가 있는 감옥관을 챙겨 그와 함께 거점을 향해 걸어갔다.
******
".....으. 여긴?"
"안녕, 잘 잤나요? 잠꾸러기 아가씨?"
".....꿈인가? 이 모지리가 갑자기 왜 이래....?"
눈을 뜬 은하 앞에 자온이 평소답지 않게 능글맞게 웃으며 평소라면 하지도 않을 말을 걸어왔다. 아니.... 그 전에 왜 머리색이 회색이야? 눈은 또 왜 하나가 역안이고....?
잠이 덜 깼나 싶어 눈을 비비는 와중,
"야, 영감. 나이 들어서 뭐 하는 거야? 그 얼굴로 놀리지 마!"
"왜? 잘 잤냐고 물어보는 것도 안 돼?"
"묻는게 아니라 놀리고 있으니까 그러지!!"
익숙한 말투에 다시 눈을 떠보자, 똑같은 얼굴이 똑같은 목소리로 투닥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꿈인가, 왜 쟤가 둘이나 있어?"
아무래도 꿈이 맞는 거 같다. 한쪽은 못 보던 옷이고, 한쪽은 머리색이랑 옷색이 완전 다르잖아. 꿈이라 치부한 은하가 다시 누우려는 순간,
"정신이 들었군."
"빅터......?"
빅터의 목소리에 은하는 그제야 잠이 깨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지? 난 분명 막판에 힘이 다해서 쓰러졌는데......"
"루시가 들고 있던 관 안에 있는 너를 저들이 데리고 왔다."
"그럼 쟤들이 둘로 보이는 게 헛것이 아니라는...... 잠깐! 내가 관 안에 있었다고? 그럼 루시는?! 걔는 지금......?"
"무사하단다. 자, 보렴. 은하 아가."
"우와왓?! 내려주세요, 뷜란트 씨!"
어느새 루시를 잡아온 뷜란트가 그녀를 목마를 태우고 있었다.
"무사해 보이네. 다행이다..... 그런데 왜 쟤가 둘이예요? 그리고 상황은, 상황은 어떻게 됐어요? 김철수 아저씨랑... 미래는?"
"승리했어! 그 거북이 녀석도 쓰러졌고, 미래와 김철수 아저씨도 무사해! 그리고 왜 자온이 둘이냐면....."
"아가의 새로운 힘 덕분에 여기서도 활동할 수 있는 몸이 생겼거든."
"몸이요....? 잠깐, 그 말투는 설마...... 영감님?!"
"정답! 정식으로 너희 곁에 함께할 거 같으니 다시 한 번 잘 부탁하마."
"뷜란트 씨! 좀 내려달라니까요!?"
"영감, 루시는 좀 내려놓고 말해! 아까부터 내려달라고 하잖아!"
"성에 다 차면 내려주도록 하마. 히히히히."
여전히 목마 태워져 곤란해 하는 루시와 서로 투닥거리는 뷜란트와 자온, 그 둘을 말리려 끼어든 김철수와 미래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은하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어떻게.... 살아남긴 한 모양이네요. 다들..... 다행이야...."
"자, 그 바보같은 거북이를 쓰러트린 후로 통신도 회복되었고, 잽싸게 밀수업자한테 전화를 해볼까....."
"그거 파시는 거군요...."
"아가를 통해 보긴 했지만 당돌한 아이구나. 허허."
"아, 여보세요? 밀수업자? 나야, 나. 저수지. 팔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말야. 그것도 두개나."
"....어라? 은하 씨, 자온 씨 어디 갔나요?"
"방금 거기 있었..... 뭐야, 없네? 저기요, 그.... 영감님? 자온 어디갔어요?"
"응, 잠시 어디 좀 갔단다. 금방 올테니까 뭐.... 그러니 쉬면서 시간이나 때우자구나."
뷜란트의 대답에 은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분명 성실하게 대답해준건데 저 능글맞은 저 모습이 묘하게....
"....왜 그 녀석이 당신이랑 얘기하면 뭔가 짜증내는지 알 거 같기도 하네요."
"말씀하는 어투나 행동이 묘하게 방정맞으시달까요, 자온 씨의 기분을 알거 같기도 하네요."
"허허. 칭찬으로 들으마."
"....짜증나."
두 사람이 뷜란트와 얘기를 나누며 한숨 돌리는 사이, 자온은 어디론가 조용히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사냥터지기 성 지하,
[이런, 이건 좀 아까운걸. 눈 앞에서 바로 재보를 놓치다니.]
[자아, 일어나게. 내 귀중한 재보를 소모해줄테니 이번엔 허튼 짓하지 말고, 기계왕의 파편을 가져오게나.]
차갑게 식었던 쿠르마의 사체 속에서 작은 불꽃이 타오르자,
.....근......두근......두근.....
사체가 꿈틀거리더니 곧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커..... 커...커헉.....!"
마른 기침 소리와 함께 쿠르마가 되살아났다.
"내가..... 내가 살아난 건가.....? 이 패배한 노장에게 또 다시끔 기회를 하사하시것입니까, 불꽃왕이시여?"
살아나기 직전에 들려왔던 목소리를 다시 곱씹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감사합니다, 왕이시여. 내 이번엔 반드시 그대가 바라시는 보물을 담아 돌아가겠나이다. 다른 것에 한 눈 팔지 않고 그대의 보물상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겠나이다.....!!"
"일단, 숨어야겠지. 힘을 회복한 후, 최대한 빨리 기계왕의 파편을 가지고 돌아....."
"별 하나에, 작은 소망을."
콰아아아아아아--------!!!!!
깊숙히 숨으러 들어가는 쿠르마 옆으로 거대한 붉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툭
그와 동시에, 발밑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 두꺼운 물체가 떨어져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건......뭣........"
앞에 떨어진 것을 확인한 쿠르마는 황급히 시선을 자신의 왼쪽 어깨를 향해 돌렸고,
"크, 크아아아아악?!!!!"
어깨 아래로 통째로 사라진 왼쪽 팔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사라진 어깨 아랫부분을 감싸며 비명을 지른다.
"쉬이이잇. 조용."
딱!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그의 팔을 날려버린 빛이 실처럼 풀어지며 쿠르마와 실의 주인을 감싸 가두는 거대한 돔으로 변했다.
"역시나. 이번 세상에서도 살아있었네."
"침식황의 계승자....!?"
눈 앞에 차원종의 갑피를 두른 한 인간이 모습을 드러내자, 쿠르마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놀랐다.
"그대가..... 그대가 어떻게.....?"
"뭐가? 네가 살아있는 거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아님.... 내가 왜 멀쩡한 모습으로 네 앞에 있는지?"
"아주 옛날이라고 할까.... 처음 흑지수 씨가 서지수 누님이 네 목에 블레이드를 꽂아 넣어서 숨통을 끊었는데 살았다고 말했었어. 초반엔 몰랐지만.... 불꽃왕, 그 놈이 기계왕의 파편을 수집하려고 널 딱 한번만 더 살려줬더라고."
쿠르마는 자온의 대답이 기묘하단걸 느꼈지만, 주위를 재빨리 살펴보면서 그 행동을 간파당하지 않도록 말을 걸었다.
"그걸 예측한 건 분명 놀랍긴 하나.... 그것보단 그대의 몸과 정신은 분명히 침식당해 무너지기 직전이였을턴데.....?"
"그거 말이지? 네가 부추켜서 날뛰기 시작했던 광기들, 모조리 불태웠어. 이젠 다시는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완전히 말이야."
"이번 세상이 마지막이 아니더라도 네가 그들을 완전히 활성시켜주지 않았으면 완전히 없애는 건 힘들었을거야. 그런 의미에서 너한테 고맙다곤 해야겠지. 네가 활성시켜준 그 광기가 날 몰아세운 덕분에 난 이 마지막 세상에서의 내 마음을 알아채고, 진정한 의미로 그들을 완전히 멸하는 새로운 힘을 발현했으니까. 고맙다, 쿠르마."
자온은 웃으며 한발짝 쿠르마에게 다가섰다.
쿠쿵.....!
쿠르마는 무심코 뒷걸음질을 쳤다. 저 기묘한 어투는 신경쓰이지만 더 신경쓰이는 건.... 지금의 저 모습이였다.
침식황의 잿빛 갑주를 둘렀음에도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빛을 머금은 모습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너무나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쿠르마는 잃은 왼팔을 누르던 팔을 떼고 힘을 짜내어, 장벽을 강하게 후려쳤다.
쾅!!!!!!!
........
그러나, 장벽에는 조그만 실금조차 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힘이 빠진 상태라곤 하나, 견고의 용이란 이름을 가진 이몸이 있는 힘껏 내리친 일격이.....!
"쓸만하지? 방패로서도, 감옥으로서도. 실을 거의 전부 써야 된다는 단점은 있지만야, 네 마지막이 될 지옥으론 딱이지 않아?"
쩌적....쩌저적..... 후두둑.....
몸에 있던 갑피가 조금씩 부숴지며 떨어지는 와중, 쉽게 깨지는 것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레 장벽을 만지며 말했다.
"넌 모를거다. 이 기술이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한 결과인지. 이젠 사라져버린 가능성의 [내]가 모두를 잃고 나서야 피눈물을 흘리며 공부해서 만든거니까."
저 인간.... 아까부터 기묘한 말만 하는군.... 하지만.... 동시에 말이 많군.
쿠르마는 속으로 음흉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자온의 능력과 방금한 그의 말을 통해 깨달은 사실. 자신에게 쏘았던 말도 안되는 위력의 화살과 이 장벽을 유지하는데에 쓰이는 실의 총량은 거의 같다는 것.
그렇다면....지금이 기회다. 그 화살은 지금 못 쏜다는 것이지.
쿠르마가 지혈하던 힘조차 조용히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남아있는 힘을 모두 쏟아서 저 인간을 제압하고 몸을 숨겨야겠군. 기계왕의 파편을 회수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또 다시 기회를 주신, 나의 왕에게 다시 한번 보석을 헌상하기 위해 그 정도의 인내는 감수할 수 있지.....!!
"그.....그아아아아아!!!!!!"
남은 힘을 전부 끌어모은 쿠르마는 자온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를 으스러뜨리기 위해 자신의 견고한 몸을 포탄으로 삼아, 지금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렸고,
"극궁-대별왕의 화살."
파아아아앙-------!!!
어느새 활을 당기고 있던 자온이 활시위를 놓자, 쏘아진 잿빛의 화살이 쿠르마의 한 쪽 다리를 꿰뚫어 날려버렸다.
쿵!!! 콰가가가--------
한쪽 다리를 잃은 쿠르마가 몸의 균형을 잃고 선혈을 날리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떻게......? 분명히.... 그 화살은 쓰지 못할터일텐데....?"
"응, 맞아. 네 몸을 뚫었던 그 화살은 지금 못 써."
나는 태연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뗐다하며 말했다.
"힘으론 안 뚫리는 장막과 한껏 방심하는 내 모습, 그리고.... 이 장막에 실을 거의 썼다고 말하면 널 꿰뚫은 화살은 못 쏠거라 생각하고 달려드는게 최선이라 생각했겠지. 내게 새로 생긴 변수만 없었다면 그대로 이뤄졌을지도?"
"방금 네게 쏜 그 화살은 네가 자폭시킨 기계인형에서 나온 폭발을 응축시킨 화살이야. 무력화시킨 힘을 방출할 수 있도록 능력을 진화시켰지. 자, 이걸로 내 친구들을 날려버리려고 했던 빚은 돌려준거다?"
이젠 눈 앞에 있는 이 인간을 죽일 방법도, 도망칠 방법따위도 없었다. 죽음이라는 절망이 등 바로 뒤로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완벽한 외통수에 쿠르마는 자포자기하며 저주하듯 말했다.
"광기가 사라졌다해도 침식황의 그 힘은 탐욕, 그 자체이니... 그대는 반드니 그 죄업에 무너져 파멸할 것이요. 반드시......!"
"상관 없어. 소중한 인연을 잃을 바에는 무너져 파멸하는게 훨씬 나으니까."
쩌저적----!! 파칵!!
몸에 붙어있던 갑피에 더욱더 금이가며 떨어져 나갔다.
"내가 그 파멸을 선택할지라도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의지가 아닌 온전한 나의 의지로 선택하는 거겠지. 내 소중한 인연을 지키기 위한 나의 파멸임을 확신한다."
"설령 파멸을 맞이하더라도 파멸에 절망하기보단 그걸 넘어서는 미래의 기대를, 파멸의 끝에 후회하는 대신 희망을 가지고 한 걸음 더 내딛겠다."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가능성의 시간이 걸렸는지..... 참, 오래도 걸렸다."
[나]는 너털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나의 소중한 인연을 지키기 위해, 죄업과 너희에게 끝까지 맞서 싸울거다. 나의 마음, 나의 모든 것을 다해서."
"나는 이제, 너희의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쩌저적---------!!!
챙그랑-----!!!
모든 갑피를 부서지자,
화륵..... 화르르르르륵!!!!!
그 속에서 진홍의 불꽃이 피어오르며 자온을 불태우기 시작했고, 쿠르마는 그 불꽃을 마주하자마자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공포를 느끼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 불꽃은 한없이 작은 불꽃일터인데, 나의 왕에 비한다면 불꽃이라기에도 하찮을 터인데 어째서.... 어째서 저 작은 불꽃따위에 위축하는 것인가?
우연히 흩날린 작은 불꽃 티끌이 쿠르마의 몸에 닿자,
"-------!!!!"
쿠르마는 비명조차 나오지 못할 만큼의, 그 한 조각이 온몸을 넘어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운다고 착각할 만큼의 극통을 느꼈다.
저 불꽃 아니, 저 권능에서 침식황이 느껴져왔다. 흐릿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기에 무시할만 했던 전과 달리, 군주와 군당장을 압도하며 침식했던 그 침식황과 동등한, 아니. 전성 기 시절의 침식황을 넘어서는 압도적인 권능감이 느껴져왔다.
불꽃 속에서 흐릿하게 그의 형체가 보였다. 분명 한 명의 형체임에도, 마치 수백, 수천.... 아니, 아니야. 셀 수 조차 없다. [셀 수조차 없는 무수한 존재들]의 존재감이 느껴져왔다.
"누구냐......? 그대는, 그대는 대체... 누구인 것이야......!?"
"나? 나는..... 별칭은 여러개랄까?
불꽃 속이라 형태만 보이는데도, 마치 [그]는 흐릿하게 미소짓는 것 같았다.
동시에 불꽃 속에서 별과 닮은 보석이, 푸른 하늘과도 같은 하늘빛을 품어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만나지 못한 한 위대한 영웅의 제자이며,"
"외로움을 많이 타는, 가장 다정한 재해의 기대이며,"
"스스로를 희생한, 한 아름다운 대행자의 희망이며,"
"눈물 젖은 유언을 지키는, 가장 어두운 밤을 끝내는 자이기도 하지만...."
"그래.... 이번은 네가 붙여준 별명을 써볼까."
츠팟----!
불꽃 속에서 한 자루의 창이 불꽃을 휘감으며 가르자, 남은 불꽃이 흩날리면서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처음 마주했던 그 모습으로 나타난 자온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정식으로 침식의 권능을 계승한 자이며, 마지막 그 작은 소망을 담은 마음을 이어줄....."
"침식의 계승자, 자온이다."
자온의 팔은 불꽃을 품은 채 하얗게 백열하고 있었고, 쥐고 있는 창은 불꽃과 빗방울을 머금은 채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창은 모든 것을 적시는 빗방울. 모든 것을 반드시 적신다는 필연처럼, 마지막 간절한 바램을 담은 한마디 유언은 반드시 기적이 됨을, 필연으로 만들지어다.....! 반드시....!"
"유언을 기적으로 이끌 필연의 창, 그 창은 노린 것을 반드시 꿰뚫을지어니.....!"
불꽃과 빗방울을 머금은 창이 반짝인 순간, 나는 순식간에 자세를 잡았다.
"간절하고 다정했던 마음을 내게 남겨준 영감의 아이들과 형님, 그리고.... 내 친구가 가장 어두운 밤을 끝내는 이 빛을 볼 수 있도록, 이 이름으로 고한다."
"창의 오의,"
WILL OF WISH. [희망의 유언]
------------!!!!!
불꽃과 빗방울을 머금은 빛이 쿠르마를 스쳐 지나갔고, 몸 한가운데를 꿰뚫린 쿠르마는 피를 쏟아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
"****..*.*..*****!!!!"
쿠르마는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뒀고,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자온은 쿠르마가 재가 된 장소를 잠시 바라보다가, 지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동료이자 친구이며,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