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감성
아마네세르 2023-04-08 4
※ 캐릭터(볼프강 & 애리)에 대한 개인적인 해석 有
※ 12.5지역 신서울지부 지휘통제실 스포일러 有
※ 의외의 조합이거나 보고 싶은 조합 추천 받습니다.
신서울지부 지휘통제실에 마련된 간이 취침실.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모르는 판국에, 지부 건물에 간이 수면실이 있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간이(簡易)’라는 말이 붙어있는 관계상, 일반 가정집에서 누리는 질 좋은 숙면 같은 건 꿈에도 못 꿀 뿐이었지만.
게다가 지휘통제실 안에 있는 수면실이다. 차원종의 섬멸과 그에 유용한 지휘 및 훈련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곳에 수면실이 있다는 건, 어떤 위급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상시대기조라는 소리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지휘통제실에 있는 간이 취침실을 클로저가 사용하는 경우는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그 얼마 안 되는 절호(?)의 기회를 전부 다 가져가게 된 건 김유정 임시지부장 휘하에 있는 4개의 클로저 팀, 그 중에서도 각 팀의 최고 연장자들이었다.
사냥터지기 팀의 볼프강 슈나이더. 기어이 그 4명 중에 1명으로 꼽히고 마는 비운(?)의 클로저이다. 휴가를 꿈꾸지만 – 사실은 휴가뿐 아니라 퇴직도 같이 꿈꾸고 있었다 – 제대로 된 휴가를 즐겨본 적이 요 몇 년 사이 손에 꼽히는 자였다. 적절한 휴식은 일의 능률을 올리건만, 지난 몇 년 간 상부에서는 볼프강 슈나이더에게 쉴 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볼프강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으로 그를 조이는 목줄을 더 견고히 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나,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이거였다. 볼프강의 능력이 너무도 희귀하였기 때문이다.
단순히 희귀하다면 그냥 저냥한 클로저로서 그치겠지만, 희귀할 뿐만 아니라 능력이 활용될 수 있는 영역이 무척이나 넓었다. 희귀한데다가 범용성까지 좋은 능력. 이런 인재(?)를 절대로 가만히 둘 유니온이 절대 아니었다. 이는 독일지부에서 신서울지부로 이적했을 때에도 별반 달라지지는 않았다.
볼프강 또한 이러한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숙명이니 운명이니 혹은 죄겠거니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받아들였다. 그래도 독일지부에 있을 때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았다. 현재 볼프강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는 검은 책. 이 차원종의 무기가 어떠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독일지부에 있을 때보다는 책을 사용하는 당사자인 볼프강 본인이 훨씬 더 잘 알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로 인한 예방도 어느 정도 미연에 방지가 가능해졌으니까.
아무튼 이것은 신서울에 이틀에 걸쳐서 나타난 악몽들과의 사투가 얼추 마무리 된, 김유정 임시지부장에게서 받은 일주일간의 휴가에서의 2일차 밤과 3일차 새벽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혹시 만약의 사태라도 대비해 하루 정도는 각 팀에서 1명씩 지휘통제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한 밤의 이야기.
신서울에 이상한 차원종들이 나타났었다. 그리고 그 해결 방책이라면서 나름 이 분야의 전문가(?)의 말에 따라, 강제 수면제를 2번이나 맞아 억지로 잠을 자게 되었다. 그로 인한 부산물인지 정신적으로는 무척 피로한 상태였음에도, 수면을 억지로 취한 몸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도저히 잠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캐롤리엘이 만든 위상능력자들도 곧바로 자게 만드는 수면 주사를 다시 맞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하루아침에 또 잠자리가 바뀐 탓일까. 그리고 그 바뀐 잠자리가 최고급 호텔의 푹신한 매트리스 위가 아닌 간이 취침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접이식 침대이기 때문일까. 눕는 자리도 그닥 편안한 것도 아니었고, 잠은 이미 실컷 자버린 꼴이 되어서인지 결과적으로 볼프강 슈나이더는 3일차 새벽으로 넘어갈 때까지 침대에서 몸만 뒤척일 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잠을 자는 것을 포기한 볼프강은 간이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왼쪽에는 자신과 마찬가지인 이유로 지휘통제실에서 비상근무를 하게 된 제이가 곤히 자고 있었다. 제이는 생각보다 아주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차원전쟁 시절, 어떻게 해서든 잠을 자야 하는 상황이 있으면 억지로라도 잠을 자야 했던 습관이 몸에 배여 있는 듯 했다. 마찬가지로 볼프강의 오른쪽에 있는 김철수 또한 생각 외로 잘 자고 있었다. 교단의 히트맨이었다고 했었던가. 그렇다면 거기도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이 불규칙했을 수도 있으니, 제이와 마찬가지로 잠에 들어야 하는 상황이면, 바로 잠에 드는 습관이 자기도 모르게 몸에 배여 있을지도 모른다.
볼프강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런대로 속 편하게 잘 살았던 걸까.
클로저로 일하면서 나름 못 볼꼴,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자신의 양 옆에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숙연해지곤 했다. 위상능력자라고 해도 인간으로서의 한계에 계속 부딪혔음에도 결국에는 일어서고 마는 영웅과, 이게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극의 경지에 달해 노련함이 저절로 묻어나오게 되는 사람.
이런 못된 생각을 하려던 찰나, 볼프강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나름 새벽 시간대라고 감성이 풍부해졌나보군.’
만약 지금 자신이 생각했던 것들을 당사자들 앞에서 말했더라면, 아마 당사자들은 높은 확률로 화를 내지 않았을까. 전자는 그저 모두가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싸워왔던 사람이었고, 후자는 모종의 뒤틀려진 이유와 아마 높은 확률로 타의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이었으니까.
일단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긴 했는데, 멀뚱히 앉아있는 것도 좀 그래서 – 혹여 제이나 철수가 일어났을 때 그냥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는 볼프강을 본다면 놀랄지도 모른다 – 볼프강은 간이 수면실을 나왔다.
새벽녘 복도는 어두침침했다. 그래도 몇 개의 전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켜져 있어서, 막 어두워서 길을 해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볼프강은 며칠 전으로 기점으로 신서울지부를 처음 와봤다. 신서울에 들렀던 적은 더러 있었지만, 이렇게 본부에 들어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큰 건물의 위용에 파트너의 말처럼 – 물론 조금이지만 - 압도당했다. 그런데 앞선 상황에서 바로 휴가부터 받아본지라 이 건물 안은 제대로 구경을 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아무도 없고 잠도 안 오는 이 새벽 시간대에, 볼프강은 신서울지부 안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원래부터 훈련 프로그램을 위한 연구실이 베이스가 되었기 때문일까. 몇 블록 간격으로 규모가 크든 작든 훈련실 같은 것이 구비되어 있었다. 그 중에는 가상현실을 이용한 훈련실도 있었지만, 흔히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게 되는 몸을 직접 움직이는 훈련실도 더러 있었다. 거기에 더해 곳곳에 트레이닝 시설까지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건 싫지만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체력을 조금 길러볼까, 라고 생각하는 볼프강이었다.
그렇게 얼마동안 구경을 하고 있었을까. 볼프강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탕!
‘총 소리인가.’
아니지, 총 소리가 아니었다. 총 소리는 이것보다 더 크고 시끄럽다. 이건 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보단 무언가 바람을 가르고 어디에 정확하게 명중하는 듯한 소리...
탕!!
다시금 그 맑은 소리가 들려왔다.
볼프강은 금방 이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화살 소리이군.’
볼프강이 이렇게 금방 화살 소리인 것을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볼프강의 아버지인 슈나이더 교수는 볼프강이 어렸을 때부터 이것저것 많이 시켰다. 어렸을 때의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면서.
승마, 펜싱, 악기 연주, 회화, 조각 등등...닥치는 대로 배웠다. 심지어 요트 조종까지 배웠었다. 볼프강은 그 때를 잠시 회상하며 혀를 내둘렀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볼프강은 거의 대부분 아버지인 슈나이더 교수에게서 배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전공이 뚜렷하게 있는 교수라고 하는 사람이 그 많은 것들을 수준급의 실력으로 한다는 것부터 보통 인간이 아니라는 걸 의미하는 건데, 어렸던 볼프강에게는 그게 당연했다. 아버지니까 당연히 할 수 있는 거겠지, 라고 간단하게 생각했다.
아무튼 그렇게 닥치는 대로 배웠던 것 중에는 양궁도 있었다. 활시위를 당기기 직전까지 유지해야하는 평온. 어렸던 볼프강에게는 그게 참으로 어려웠다. 그래도 양궁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의외라고 해야 할까? 사실 어렸을 때의 볼프강은 딱히 좋아하는 것은 없었다. 잘 하는 것들은 꽤나 있었지만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슈나이더 교수가 닥치는 대로 무엇을 시켜든 군소리 없이 잘 따라갔던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적어도 평균 이상의 실력이 되면 – 어떤 경우는 거의 전문가 수준까지 도달할 때도 더러 있었다 – 볼프강은 해당 특기를 관두었다. 아버지 슈나이더 교수의 교육관, 그리고 볼프강 본인의 성향. 이 두 개가 잘 맞물리다 보니 볼프강은 웬만한 것들은 어느 정도 하게 되었다.
아무튼 지금 이 새벽 시간에 신서울지부 안에서 화살을 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이에 대답 또한 간단하게 나왔다. 화살을 사용하는 위상능력자, 클로저는 별로 없었다. 볼프강은 자신의 머릿속에 그 후보군 몇 명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지금 이 곳, 신서울에 머물고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한 답이 정답인지 알아보기 위해 볼프강은 조금 잰걸음으로 해당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갔다. 도착한 곳은 지휘통제실에 여러 개나 있는 훈련 시설 중 한 곳이었다. 다만 이 곳 훈련 시설은 활 쏘는 걸 전문적으로 하는 훈련 시설인 것인지, 갖추어진 물품이 과녁과 활, 연습용 화살밖에 없었다.
멀리서부터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 어두침침한 복도라서 훈련 시설 안의 전등만 다 켜도 바깥에서 바로 보일 정도였다 – 훈련 시설을 이용하는 것은 역시 볼프강의 예상대로 애리였다.
볼프강은 애리가 눈치 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애리는 볼프강이 들어오는 것을 모르는지 계속 활을 쏘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다. 애리의 옆얼굴은 평소에 웃음기가 머금어져 있는 것과 달리 사뭇 진지했다. 진지하게 과녁을 눈으로 좇고 있었다.
탕!!!
볼프강이 훈련실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들은 소리였다. 역시 직접 옆에서 듣는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남다르게 컸다. 그렇게 계속해서 구경하고 있으려니 – 할 것도 없었으니까 – 이런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볼프강 씨.”
“어...?”
볼프강은 조금 얼빠진 목소리가 나가버렸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계속해서 자신의 존재는 모르는 채로 화살을 쏘고 있을 것 같았던 애리가 갑자기 자신이 있는 뒤쪽을 향해 고개를 틀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가운 아침, 아니 새벽인사까지 하였다. 그러는 동시에 화살을 계속해서 쏘는 것 또한 멈추지 않았다. 볼프강은 갑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세가 흐트러진 애리가 쏜 화살이 잘못 날아가는 건 아닌지 괜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런 볼프강의 유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볼프강에게로 시선을 돌린 애리의 화살은 정확하게, 아주 여유롭게 과녁의 정중앙에 꽂혔다.
사실 아까부터 계속 쏜 듯한 애리의 화살은 전부 정중앙에 꽂혀 있었다.
역시 신묘한 솜씨라고 볼프강은 또 생각했다.
그리고 상대가 말을 걸었는데 이걸 무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볼프강은 맞받아치는 겸 방금 전의 일에 대해 사과를 했다.
“미안. 훈련하는 중인데 방해했나 보군.”
사과하는 볼프강에게 애리는 옅게 미소 지어 보였다.
“방해 안 되었어요. 어차피 고정되어 있는 과녁인 걸요.”
어차피 고정되어 있는?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뒤이어 애리가 덧붙이는 말을 통해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게다가 바람도 안 불고요.”
아. 볼프강은 뒤늦게 깨달아버리고 말았다.
고정된 과녁을 향해 바람의 영향 없이 활을 쏘는 건 이미 애리와 같은 숙련자에게는 숨 쉬듯 간단하고 쉬운 것일 터.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쏘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약간 돌릴 수 있는 건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다른 활을 쏘는 사람들은 몰라도 애리는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금 전까지의 기묘한 10점을 정확히 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터.
“계속 봐도 정말 대단한 실력이군.”
“움직이는 대상만 쏘다가 저렇게 고정되어 있으니 좀 지루하기도 해요.”
오히려 애리는 재미없다는 평이었다. 볼프강은 문득 궁금해진 것이 있어서 물어보았다.
“그런데 언제부터 내가 들어온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요.”
“내색은 안 하던데.”
“볼프강 씨가 놀랄까 봐요.”
애리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대단한 실력인 건 변함이 없다고.”
“과찬이에요.”
“혹시 그 쪽으로 선수 활동을 한 적이 있다던가...”
“그럴 리가요. 전 움직이는 걸 정말 싫어했어요.”
가끔 체형 교정할 겸 발레랑 승마를 약간 한 거 빼고는? 애리의 중얼거림에 볼프강은 경악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실력이라고?”
아마추어이긴 하지만 활을 잡아본 적이 볼프강은 아무래도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한 듯 했다. 이에 애리는 이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노력했으니까요.”
“노력?”
“네, 노력했어요.”
애리는 그 때를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지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이 지금의 귀신같은 활솜씨를 가지게 된 경위를 ‘노력했다’는 말 한 마디로 간단하게 간추렸다.
노력했다.
정말로다가 노력했다.
볼프강에게 털어놓았던 것처럼 몸을 움직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음에도 다분히 노력했다.
그로 인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몸을 바삐 움직인다는 건, 사색에 빠질 생각을 주지 않는다는 걸.
그럴수록 더욱 악착같이 활을 쏘는 것에 대해서만 집중했다.
활을 쏘지 않을 때는 단검 같은 것을 손에 익혔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저격수가 근거리에서 기습을 당할 때를 대비한 호신술이었다.
그 때의 습관이 남아 있어서인지 애리는 지금도 일상생활을 할 때에도 단검 몇 자루를 몸 이곳저곳에 배치해두곤 했다.
그렇게 한 명의 클로저...아니, 집행자로써 얼추 완성되었다고 여겨질 때부터는 몸을 그렇게까지 움직인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래도 생각보단 괜찮았다. 저격 대상을 향해 활시위를 겨눌 때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활시위를 당긴 채로 몇 시간 동안 대기해야 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 때마저도 평온하였다.
활시위를 당기기 직전이,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고요한 시간이다.
괜히 우울한 생각이 들려고 하면, 애리는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적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곤 했다. 괜한 잡생각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우울해질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미하엘 폰 키스크는 악독했다.
독을 사용하는 위상능력자가 그의 휘하에 집행자로 있다는 건 그 당시 클로저들이라면 알음알음 알고 있는 사실. 그렇게 의문의 죽음을 맞은 클로저들의 몸을 분석하면 당연히 애리의 맹독 성분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미하엘은 바로 자신이 암살을 지시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감추지 않았다. 제3자가 바로 눈에 띄기 쉬우라고 ‘독화살’을 쏴서 죽일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암살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누가 배후에 있는지 감추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배후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이는 암살이란, 자신에게 거역하지 말라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그걸 그 당시에 깨달은 게 아니고 18년 만에 깨어난 후 사색에 잠기다보니 도출하게 된 결론이었다. 어쩐지...활 같은 거 한 번도 쏴본 적 없는 애리에게 독화살이 최적의 기술이라고 설득했던 것부터.
그렇게 해서 지금의 진기명기의 활 솜씨를 가진 애리가 탄생하게 되었다. 좋지 못한 연유로 만나게 되었지만 지금의 애리에게 있어서는 친우(親友)까지는 아니더라도 악우(惡友) 같은 포지션의, 어쨌든 만나게 되어 다행이긴 하다, 의 느낌이 되었다.
어쨌든 애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하나쯤 쓸모 있는 기술이 되었으니까. 끝만 좋다면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누구에게나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는 법이니까요.”
애리는 나름대로의 적절한 핑계와 함께 적당히 선을 그었다. 그리고 이 핑계는 볼프강에게 아주 잘 먹혀들어갔다. 김유정 임시지부장에게서 설핏 들었다. 애리가 차원전쟁 시절 미하엘의 최측근인 집행자의 얼굴 마담으로 활동했었다는 사실을. 하긴 애리가 처음 위상력을 각성한 게 그쯤이니 활을 잡기 시작한 것도 당연하게 그때쯤부터일 터.
애리가 자신은 위상력에 각성하면서 처음으로 활을 잡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이상.
볼프강 또한 미하엘에게 당해왔던 것이 있는 만큼 애리의 ‘상상도 하기 싫은 인간’이라는 측면에서는 공감이었다. 게다가 우연일지 일부러인지는 모르지만 애리는 ‘누구에게나’라는 말을 힘주어 덧붙였다. 애리뿐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볼프강에게도 그런 과거가 하나쯤은 있지 않으냐는 듯이.
애석하게도 그런 과거를 실제로 가지고 있는 볼프강이었기에 애리의 곤란하니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는 제스처를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참, 볼프강 씨도 활 좀 쏴보실래요?”
“응? 이렇게 갑자기?”
“전투를 할 때 가끔씩 활을 쏘시는 것 같았거든요.”
“눈썰미가 좋군.”
“저격수라서 시력이 좋아야하거든요.”
얼마만큼 시력이 좋은 거야. 항상 엄호를 한다고 자신들보다 훨씬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 같았는데. 볼프강은 훈련실에 배치되어 있던 연습용 활들 중 아무거나 하나를 잡았다.
“그런데 전문가의 앞에서 자랑할 실력은 아닌 것 같은데?”
“볼프강 씨야말로 예전에 활을 쏴보신 적이 있으세요?”
질문의 형태였지만 애리는 거의 확신하고 있는 듯 했다. 볼프강이 오히려 되물었다.
“...어떻게 알은 거야?”
“보통 위상능력자나 클로저가 활을 잘 쏘면 활을 잘 쏘는구나, 라고만 생각하지, 그쪽으로 활동한 적이 있냐고 먼저 물어보진 않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볼프강 씨는 저와 달리 전문적으로 배우신 경험이 있으신가 해서요.”
사람은 경험하지 않으면 말을 못 하더라고요. 의외로 말이죠. 거짓말 같은 건 능청스럽게 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더 엄청난 의미의 인재가 있었다.
볼프강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닥치는 대로 시켜서 한 것들 중에 있었지.”
“그런 거라면 오히려 제 쪽이 아마추어 아닐까요? 저, 전문적인 양궁 같은 거와는 확연히 다른데.”
“글쎄? 가끔씩 쏘는 나보다는 매일 같이 쏘는 그쪽이 더 전문가가 아닐까?”
다행히 화제는 잘 넘어갔다. 활을 주무기로 쓰는 애리의 앞에서 긴장되었지만 그럭저럭 일반인치고는 평균 이상의 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애리가 잘 하시네요, 라고 담백하게 감상을 말했다.
“겸양할 실력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당신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대충 합격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 영광이야.”
“영광까지야.”
저야말로 그런 자격 하나도 없는데. 이렇게 조그맣게 덧붙인 말을 볼프강은 미처 듣지 못했다.
서로 번갈아가면서 활을 쏘기를 몇 번, 그제야 볼프강은 계속해서 물어보고 싶었던 걸 드디어 물어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 꼭두새벽부터 훈련 중이었던 거지?”
“잠이 안 와서요. 너무 많이 잤기도 했고.”
“18년 동안...잠들어 있었다고 했지?”
“네, 지루하기 짝이 없던 시간이었어요.”
그래도 그 18년의 고행이 도루묵으로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덕분에 이번 신서울사태를 일단락시켰으니까요. 뿌듯한 것보다는 어찌 되었든 다른 쪽 면목을 애써 바라보려고 하는 것에 더 가까운 태도였다.
농담이라고 해도 그런 식이면 듣는 입장에서도 전혀 재미가 없는데.
“그러는 볼프강 씨도 잠이 안 오셨군요?”
“캐롤이 만들어낸 수면제가 너무 효과가 좋아서 말이지...”
“그래도 조금이라도 자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만요.”
그렇게 따지면 애리도 그랬다. 그러고 보니 애리는 왜 지금 이 시간에, 신서울지부 건물 안에 있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애리와 같은 팀인 김철수에게서도 딱히 전해들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왜 애리, 당신도 여기 지휘통제실에 같이 있는 거지?”
“네?”
“시궁쥐 팀 쪽에서는 김철수가 자기가 당번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저는 당연히 남아야죠? 제가 제일 전문가니까요?”
그리고...애리는 또 조그맣게 말을 덧붙였다.
“아직은 어색하기도 하고요.”
“시궁쥐 팀 말인가?”
“시궁쥐 팀에 속했다는 것이 후회가 된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냥...”
...제가 너무 못났으니까요. 괜찮다가도 가끔씩 보이는 저 침울함의 근원은 아무래도 어떤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생각보다 잦게 보이는 애리의 그러한 침울함에 – 볼프강 본인의 제자들 중 한 명이 순간적으로 겹쳐서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 볼프강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마침 좋은 기회이지 않나?”
“좋은 기회요?”
“아무도 들을 사람 하나도 없기도 하고...상담받기에 아주 좋은 타이밍이라는 거지.”
“볼프강 선생님께서 제 고민을 들어주시는 건가요?”
애리가 기어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원래 사람은 새벽에 가장 감수성이 풍부해진다고 하잖아.”
“그 말은 못 볼 꼴 다 보일수도 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요?”
“뭐, 어때. 어차피 나 말고 볼 사람도 없는데.”
“...”
볼프강의 말을 즉각 받아치던 애리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떡하면 좋을까, 저 선인(善人)을. 애리는 참 애가 탔다.
그것조차 힘들어서요. 애리의 자기비하는 생각보다 깊고 어둡고 함부러 내보일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애리는 볼프강이 방금 그랬던 것처럼 발랄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냥 별 거 아니에요. 가끔씩 쓸데없는 상상을 하곤 하거든요.”
“쓸데없는?”
“과거에 일어난 일들 전부를 후회하는 거요.”
볼프강 또한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쩜 저렇게...예전의 자신과, 아니 지금의 자신도 가끔씩 하는 듯한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는 걸까!?
하지만 볼프강 역시 지금까지의 생활을 허투루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놀라웠을 뿐, 그 놀라움을 여과 없이 내비치는 건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상대에게 얼마나 예의 없는 것인지를 알았기에 볼프강은 재차 확인만 하기로 했다.
“왜 그게 쓸데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애리는 자신의 품에 있던 단검 2개를 꺼내 저글링을 하며 대답했다.
“어차피 시간을 되돌려서 그 때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
“그리고 또...내가 만약 다른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그 때 했던 선택이 그 당시로써는 가장 현명했을 선택이라는 걸 저는 아주 잘 알거든요.”
그걸 알고 미하엘은 본인을 이용해먹은 것이었겠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꽤 많이 한다. 미하엘을 만나기 전 차라리 도망을 갔으면 어땠을까. 지금의 자신이 이렇게 살아있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게 정말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걸 알지만...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계속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요. 그러다 어디까지 가게 되냐면...”
애리가 작게 숨을 골랐다.
“위상력이 각성되지 않았으면, 이라는 전제로까지 가게 되는 거죠.”
이러나저러나 정말로다가 그랬더라면 저수지를 만나지 못했겠지.
그래서 애리는 이게 의미 없는 짓임을 깨닫게 되어, 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애써 안 하게 되었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이따금씩 떠오르곤 하는 가설들은 어쩔 수 없이 그냥 흘려보내게 되었다.
볼프강도 어쩔 때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본인이 위상력에 각성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위상능력자에게 흔한 미약한 염동력이 아닌 다른 능력으로 각성했더라면. 그렇게 된다면...
선배는 죽지 않았겠지. 대신 지금 볼프강이 여기 신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는 절대 없었겠지.
볼프강이 천천히 운을 띄웠다.
“후회는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
“...”
“그걸 잊어버려서는 당연히 안 되겠지. 암, 당연하고말고!”
지금의 볼프강에게 있어서 정말 싫은 녀석 중 하나인 힘을 갈구했던 볼프강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던 것도 같다.
애리는 볼프강의 연설을 저글링을 멈춘 채로 경청하고 있었다.
“다만...”
볼프강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마무리를 지어야 할까? 명확하게 결론을 짓지 못하겠다. 후회? 하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그로 인해 자신이 해버린 모든 것들을 부정한다? 그건 그냥 도망치기에 급급한 겁쟁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렇다고 모든 지점에서의 후회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 이건 너무 팍팍한 삶이 되지 않을까? 아니, 당연하기도 한데...절충안을 찾지 못하는 볼프강에게 애리가 질문했다.
“많이 어렵죠?”
“...”
“그런데 원래 그렇더라고요.”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더라고요. 이렇게 말하니 자신이 너무 나이를 먹은 것 같이 말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그저 정체되어 있지만 않으면 돼요.”
과거에 짓눌린 채로, 현재에만 급급한 채로, 허황된 미래만을 쫓는 것보단...
뭐든지 적절하게, 다만 멈추지는 말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보다는 덜 멈춰있었으면 했다. 너무 오랫동안 과거에 망집이 잡혀버린 자신이 이 말을 하는 건 좀 주제를 넘어선 것 같지만 말이다.
하지만 제법 산뜻한 말이지 않나?
나아갈 수 있다는 건, 발전할 수 있다는 소리니까.
“뭔가 잘난 척 하는 것 같네요. 저도 제가 말한 것처럼 잘 사는 사람...아니, 악마는 아닌데.”
“...”
“아, 악마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논의하니까 좀 많이 이상했나요?”
“글쎄...”
볼프강의 뜻밖의 동의에 오히려 애리가 놀라 눈을 크게 끔뻑였다. 볼프강은 머리를 긁적이며 그러고 보니 제이 선배님한테도 비슷하게 들었던 말인데 나 원 참...이런 식으로 또 듣게 되다니, 라고 중얼거리는 게 언뜻 들렸다.
이렇게 새벽 시간에 이루어진 갑작스러운 상담은 얼추 마무리가 되어졌다. 애리는 자신이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한 것 같아서 – 역시 볼프강의 말대로 사람에게 있어 새벽 감성이란 정말이지 무서운 걸까!? - 돌이키고 보니 조금...아니 많이 부끄러워졌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이것 때문.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을까.’
이렇게나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하게 자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이상한 부분에서 떼를 쓴다는 것이.
역시.
‘인간은 참 재밌어.’
도통 속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또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점에서도.
볼프강 씨는 그러고 보니 꿈이 있었나요?
어렸을 때는 딱히 없었어. 지금이야 뭐...완벽한 휴가를 즐기는 거지!
저는 말이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었어요.
...뭐랄까, 지금의 당신과 다를 게 없는 것 같긴 하지만.
그 때에는 다 그랬어요~
애리는 또 그렇게 얼버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