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식의 계승자 EP.4 사냥꾼의밤 15화 눈물로 지운 기억[신의 기대, 인간의 희망](2)
Heleneker 2023-03-03 1
24년도 개정판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방금 그건 뭐였지.....?"
눈 앞에서 흔들린 기묘한 일렁임에 정신을 차리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딛는 것도, 떠있는 것같지도 않은 묘한 감각, 형형색색의 수많은 실이 강물처럼 흐르며 내 주위를 맴돌고 있는.... 아주 기묘한 공간이였다.
그리고 왜인지.... 처음보는 광경임에도 낯설지가 않은 느낌이 드는 신비한 공간이였다. 마치 햇살 속에 있는 것만 같은......아니지, 일단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부터 파악해보자.
다시 한 번 정신을 버뜩 차리곤 지금의 상황을 복기하기 시작했다.
어떤 대가를 치른 영감이 감찰관에게 눈의 힘을 건네줬고, 감찰관도 뭔가 대가를 치러서 그들에게서 나를 빼냄과 동시에 여기로 보냈다...
대체, 왜 날 여기로 보낸걸까? 어디길래 이렇게나 친숙하고 따뜻한거지? 그리고.... 내게 보여준 그 광경들은 대체....?
내게 보여진 누군가들의 기억. 그 광경 중 처음으로 봤던 광경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다음으로 보여준 광경에서 잠시 보였던 아이는 분명히...... 어린 시절의 나였는데....
[-------!!!!!--!!!----!!!!]
홀로 생각하고 있자니, 저 멀리서 누군가가 싸우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공간 특유의 감각 때문에 허우적거리며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그러니 빨리 먹어치우자고 했잖아!!!]
[이게 무슨 꼴이야!!!? 마지막인데 다 망쳤잖아!!!!]
[닥 쳐!!! 마지막이니 조금만 즐겨보자고 동의들 했으면서!!!]
인간과 차원종을 뒤섞은 듯한, 그러나 그 어느쪽의 형태도 갖추지 못한 검붉은 이형. 분명 광기로 몰락한... 과거의 패배자들이였다. 싸우고 있는 거 같은데 좀 더 들어볼까....?
주위에 있는 실에 몸을 숨겨 천천히 다가가다가,
쿵!
"쿠앍!?"
투명하고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였다. 아으, 아파라.....
[....아직 끝난 건 아니야. 그 증거로 우리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으니까]
[그래.... 아직, 아직 기회는 있어]
[하지만 그분과 방관자 그년이 이렇게 대범하게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지]
[그 [어떤 시간]에서도 이런 식으로 나온 적은 없었지]
[[마지막]인 만큼 그들도 필사적으로 나온 거겠지]
[그래도.... 이렇게 보면 재미있지 않아? 여유 있는 척 했던 그들도, 필사적으로 아등바등 거리는 거잖아]
[그래.... 그것도 그렇네. 키키키키키킥]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을 나열하며 웃고 울고 분노하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방관자라고 불린 감찰관의 정체도 정체지만..... [마지막], 이라고? 대체 무슨 말인거지?
생각해 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늘어났다. 누구든 이 삶 자체가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마치 자기들은 몇 번이나 기회가 있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그들은 뭘 감추고 있는 거지? 내 몸을 빼앗아서 뭘 이루려고 하는 걸까? 고민만 점점 깊어지는 와중,
[........네 노오오오오옴!!!!!!!!]
콰앙!!!!
날 발견한 그들이 절규에 가까운 괴성을 터트리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투명한 벽에 의해 가로막혀 벽만 두드리며 분노를 터트렸다.
[네놈네놈네놈네놈네놈네놈네놈네노오오옴!!!!]
[거의 다 왔는데!! 네 놈이 쓸떼없는 발악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잊혀진 시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었는데에에에!!!!!!]
이성을 잃은 건지, 아니면 이제 속일 생각도 없는 건지 그들은 벽에 막힌 채 눈을 부라리며 벽을 마구 두들겼다.
"....네 놈들,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이놈들은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성을 잃은 것같은 지금이라면 정보를 일부 캐낼 수 있을지도...!
나는 그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닥 쳐어어어!!! 네 놈이 저항하지만 않았으면 됐잖아아아아아!!!!!]
[내 놔!! 몸 내놔아아아아아아!!!!]
그러나 그들은 대화다운 대화가 성립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내 놔라, 내 놔라!!!!]
[너와 그 권능을 집어삼키고, 우리는 마지막 승자로 거듭날 것이다!!!]
[광기로 모든 것을 압살했던, [광기의 군주]로서 다시 한번 말이다아아아!!!!!]
섬칫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광기의 군주]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알 것 같았다.
내가 먹히는 순간, 이 세상은 멸망보다도 끔찍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그나마 다행인건, 지금 저들이 내게 제대로 간섭 못한다는 건가? 머리를 차갑게 식히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감찰관이 이 정체 모를 공간에 보낸 건, 분명 저들에게 대항할 방법을 찾기 위함일 터. 그럼.... 방금 같은 기억들에 힌트가 있겠지. 계속 훑어보면 되려나? 어떻게 보는 거지?
다른 누군가의 기억으로 보였던 광경을 어떻게 다시 봐야할지 생각해보는 와중, 외면하고 있던 벽 너머의 그들이 저주하듯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고상한 척 한다고, 수많은 가능성들을 짓밟은 네 죄가 사라질 것 같으냐!!!?]
[끔찍한 놈!! 끔찍하게 더럽혀진 자야!]
[자신의 끔찍한 능력을 잊은 채 살아가는 더러운 존재야!!]
[다른 존재의 영혼을 가져다 쓰는 끔찍한 자야! 끔찍한 너의 능력을 다시 기억해내라!!!]
슈르르륵------
유독 탁한 빛을 내는 실이 내 손목에 감기더니, 그대로 어떤 광경을 재생하기 시작했다.
치.......즈즈...치직..직
눈을 뜨자, 그 앞에 익숙한 빛깔의 두루마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모습은 분명 처음 만났을 때의... 영감이잖아?"
차원종 갑피가 인간의 몸 대부분을 덮고 있는 저 모습은, 분명 힘의 계약을 마친지 얼마 안 됐을 적의 모습이였다.
"그런데 왜... 표정이 안 좋은거야?"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영감은 누군가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영감의 시선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영감처럼 갑피를 두른 작은 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이제 다시는 못 볼, 익숙한 얼굴이였다.
"저 아이는..... 나?"
상처투성이인 반차원종의 어린 아이. 분명 아직 능력이 익숙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그런데..... 어린 나는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상처 때문인가? 아니야. 그 시절엔 고통에 눈물나긴 했어도, 저렇게 까지 울은 기억은 없었는데....
[신님.... 왜 저는... 이런 힘을 가진거죠?]
어린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깊은 절망감이 담긴 목소리가 비통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힘과 경험을 가져가는 힘]이라니.... 이 능력이 아니였다면 형님은.... 살으셨을 수도 있었을텐데!!!!]
방금..... 뭐라고 말한 거야....? 내 능력이 타인의 힘을 가져가는 힘이라고....? 게다가 그 능력 때문에..... 형님이 죽으셨다고......!?
[계승의 능력이라고요? 저는 그런 거, 바라지 않았어요....! 형을 구하고 싶었는데.... 되려 그 마지막 힘을 가져가는 힘이라니.....!!]
생각을 정리할 순간도 없이, 어린 나는 계속해서 비통함을 내뱉었다.
[내가 바란 건 이런 힘이 아니였어요. 그저.... 그냥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랬단 말이예요. 힘을 가진다면, 누군가의 힘을 빼앗을 수 있는 힘이 아니라 그냥 평범하게 형과... 다른 사람과의 인연을 함께할 수 있을 다정한 힘을 바랬단 말이예요.....!!]
[끔찍해요. 저 자신도, 이 힘도 다...... 다 끔찍하고, 증오스러워요.....!!]
어린 내가 양팔를 꽉쥐며 통곡했다. 저 모습에 뒤늦게 알아차렸다. 어린 나의 몸에 난 상처들은 수련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저 조그마한 손을 뒤덮은 날카로운 갑피로 자기 스스로 상처입힌 것이란 걸.
자신의 능력을 혐오하며, 그 능력으로 형의 마지막을 앞당긴 자신을 혐오하며 상처입히고, 또 상처입혔던 것이였다.
[아가야......]
영감은 자해하고 있는 어린 나의 손을 풀곤 꽉 안아주기 시작했다.
[신님, 제발 이딴 힘 없어도 되니까.... 아무것도 아니여도 되니까, 제발..... 제발 형을....형을 돌려주세요....으흑...우.....흑......]
푸북, 푸우우우욱-----
제어력을 잃은 어린 나의 갑피 능력이 영감의 몸을 찌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영감은 어린 나를 더욱 꽉 안아주었다.
절망과 비통이 가득차서 마르지 못할 눈물이, 조금이나마 줄어드는 그 때까지.
******
"흑지수 씨가 말했던 위화감이.... 이거였던..... 거야....?"
[다른 사람과 겹쳐보인달까. 마치 네가 아닌 듯한....]
흑지수 씨가 말했던, 다른 사람인듯한 위화감. 이걸 보고서야 이제야 이해했고..... 이제야 조금씩 기억나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고유의 능력..... [계승], 다른 존재의 능력과 기억, 경험과 습관조차 모조리 받아들이는 이 힘을. 그리고 이 힘으로 형님의 마지막을 끝내버린 나를 증오한 나머지...... 스스로 잊어버린 것 까지도.
점차 선명하게 기억났다. 형님과 같은 실 능력이라고 열심히 수련하다가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고, 그때마다 나 자신을 증오하고 자책했다. 스스로를 죄책감에 짓누르다가, 결국 고통에 스스로 기억을 지워리곤..... 다시 실 능력을 수련했다.
이 짓을 몇 번이고 반복하자 보다 못한 영감이 그에 관한 기억을 묻어주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기억을 다시 기억하며 죄책감에 스스로를 짓눌렀다.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영감이 기억을 망각시키는의 반복 끝에, 나는 그 때의 기억을 묻을 수 있었지만.... 그 때의 감정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흉터로 새겨져서, 죽음에 대한 강한 악몽으로 남은 거였어.
"아으..... 으으..읏... 끄흣....."
잊혀졌던 그 날의 감정과 기억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 때엔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앎에도, 되돌릴 수 없음을 앎에도, 이 능력에 대한 혐오감이, 형님을 내 손으로 끝냈다는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 숨을 막는 답답함이 되어 나를 점점 짓눌러왔다.
.....쩌, 쩌저.....적.....!
그들과 나를 가로막고 있던 장벽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그 모습에 과거의 패배자들에게서 광기의 웃음꽃이 피어났다.
[끔찍한 놈]
[형을 끝장낸, 패륜의 아이. 키키킥]
[그래. 수많은 가능성에서의 대부분의 너도 그 기억에 거의 무너졌지]
[증오해라, 너 자신을]
[비통해해라, 네 능력의 과오를]
[원망해라, 그 능력의 원래 주인을]
[짓눌려라, 잊혀진 가능성을 소멸시킨 죄업을]
[너 스스로의 죄책감에 짓눌려라.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시간의 죄업에도 짓눌려라]
[그렇게 죄업에 절어진 너를 삼켜 세상을 침식하는 광기를 되찾아, 종말조차 침식하는 [광기의 군주]로 다시 거듭날지어다]
[키힛키캬하캬하하히힛캬힛캬하캬키하히힛캬하힛캬하힛힛하캬하히키키캬키키키킥하히힛키키힛캬하힛캬하힛캬하캬하히키키키킥하히캬하힛캬하캬하키히힛]
죄책감에 무너지고, 광기에 휩쓸리려는 순간, 유구히 흐르던 실들의 일부가 나를 감싸며 내 눈물을 머금더니, 또 다른 기억을 재생시키기 시작했다.
치....지직.....
사바바박----!!!
따스한 햇살 아래, 작은 풀숲을 헤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님~~~~~!"
서로 닮은 듯, 다른 세 아이가 나를 향해 웃으며 다가왔다.
"예를 갖추라고 하지 않았나, 바람."
"에이, 어차피 여기에 막 들어올 수 있는 건 우리랑 신님 밖에 없는데 뭐 어때. 안 그래, 비?"
"....구름 말대로나 넌 좀 침착해졌으면 좋겠어, 바람."
"후에에엥! 너무해애애!!!"
"그래도 말이지.... 바람 말대로 여기선 좀 편해져도 되지 않겠어, 구름?"
"네 놈은 너무 무르다, 비. 편들거라면 한 쪽만 들어라."
봄처럼 활기차게 자기 감정을 꽃피우는 바람.
겨울처럼 스스로에게 늘 엄격한 구름.
가을처럼 온화하게 모두를 품는 비.
가장 처음에 살린 세 아이들은 투닥거리면서도 사이좋게 함께 내 곁에 앉았다.
"사이좋아 보여 보기 좋구나."
"구름이 맨날 저 괴롭히는데도요!?"
"예를 안 갖추니 그런 것 아니냐! 지난 번에도 다른 아이들 앞에서 신 님께 민폐를 끼치지 않았나!?"
"지, 진정하고 구름..."
"비, 너도 마찬가지다! 넌 바람에게 너무 무르다! 둘 다 앉아라! 이번 기회에 둘 다 예를....!"
언제나와 같은 광경에 웃으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신으로서의 나의 고독을 줄여주는 바람과 신으로서의 나의 위엄을 지켜주는 구름, 그 둘 사이에 끼어 고생하면서도 둘을 존중해주는 비. 셋 모두 성향을 달랐지만, 나를 위해준다는 그 마음만은 같았으니까.
나의 오랜 고독과 기다림에 보답을 해주듯, 너희들은 나를 따라 세상을 아름답게 살리는 모습에 기뻤단다.
하지만 그보다도 나를 기쁘게 한 것은 되살아난 세상보다도 더 아름답게 웃는 너희의 모습이란다.
아아. 나의 오랜 기대는 망상보다 뛰어났고 아름다웠으며, 늘 그 이상을 찬란히 비춰주는구나.
아이들아, 나의 기대를 이리 비춰주었으니 나는 너희를 위해 살아가마.
이제부터 할 나의 각오를, 이 말을 나의 진언으로 삼아 감히 내 [운명]을, 뒤바꾸마.
[나의 영혼으로 이 세상을 다시 비추고, 나의 의지로 굳건히 너희와 함께 하겠다.]
[잊지 말거라. 나의 영혼이, 나의 의지가 오랜 세월이 흘러 사그러든다 하여도,]
[나의 마음이, 이 [기대]를 잊지 않는 한, 나는 영원불멸히 존재하여 너희를 지키겠다.]
[그것은 나의 마음, 나의 모든 것이 될지니.]
[나는, 너희와 행복할 이 길을 앞으로도 기대하마.]
그 순간 나의 진언과 나의 일부가 하나로 어우러져 내가 되살린 세상을 이어주는 하나의 거목이 뿌리를 내렸고, 그와 함께 나는 [기대]를 스스로 저버리지 않는한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불멸성을 가지게 되었다.
치즈즈즉.......츠측...
부우우우우우-------
낮과 밤이 바뀌기를 반복한지 벌써 며칠 째일까, 메뚜기들의 날개짓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처음 저 흉물과 마주했을 때엔, 불안한 감정이 일렁거렸지만, 나타난 이후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기에 시민들은 당장 닥친 위기였던 메뚜기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가벼운 기침을 하고, 가려움을 조금씩 호소해도 그저 서로 도우며 버티면, 클로저가 도우러 올 것이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메뚜기들을 처리해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클로저는 오지 않았고, 메뚜기들은 그 수가 줄기는 커녕 끝없이 늘어났으며,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점점 상태가 나빠졌고, 어느새 하나둘씩 숨을 거두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까운 사람이 죽어가도 가슴이 지끈거리는 정도는 있었지만, 마음이 그렇게 동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족이, 어르신이, 모르는 타인이 하나씩 녹빛의 거품을 내뱉으며 죽어갈수록 지끈거림은 격통으로 변하고, 격통은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고, 눈물은 메말라 있던 내 감정을 적셨다.
어째서 나만 멀쩡한 것이지? 위상력을 각성해서? 하지만 내가 만났던 다른 위상능력자들도 다른 이들처럼 중독되어 숨을 거뒀었다.
그렇다고 내 능력이 정화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만을 정화하는 능력이라면 끔찍하기 짝이 없는 능력이지만, 나는 단 한번도, 내 능력을 발현한 감각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내 곁의 사람들이 아프다 독에 문드러져 죽고, 나만이 멀쩡한데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죄책감이 커져버린 절망과 슬픔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졌다.
모든 이들을 보내는 고통과 슬픔에 지치고 지쳐, 멈추고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 했다. 아니, 절대로 멈출 수 없었다.
내게 남은 마지막 가족, 해랑이 네가 남아있으니까.
독기와 죽음만이 가득함에도, 가장 여리고 어린 네가 이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는데 어떻게 내가 포기하겠어.
"형아.... 안 다쳤어...? 오늘도.... 괜찮아....?"
"응, 괜찮아. 형은 괜찮아....."
비집고 나오려는 눈물을 틀어 막곤 네 피부에 쌓인 독을 닦아주며 웃어보였다. 하지만 랑아. 내 걱정 대신, 너 스스로를 더 아꼈으면 좋겠어.
랑이의 입에선 초록빛 거품이 흘러나왔고, 내가 자리를 비웠던 사이 메뚜기들에게 반 가까히 뜯어먹힌 다리는 독과 섞여 곪다못해 썩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조심해.... 다치면..... 아프잖....아..... 히히."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 있는 거야. 닦아내도 다시 묻는 독에 문드러지는데, 숨쉬는 것조차 아프면서, 아이인 네가 어째서 아프다는 말보다 내 몸을 걱정하는 말을 하는거야?
"콜록! 콜록, 콜록!!"
내 곁의 사람들이 죽어갔을 때와 같은 녹빛의 진액. 기침을 한 랑이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져갔다.
갈아줄 붕대도, 증상을 억제시켜줄 약도, 통증을 눌러줄 진통제도 이미 다 떨어진지 오래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약을 찾아 나설 수도 없다. 이미 한계인 네 몸은 아무 돌봄 없이 버틸 수 없으니까.
"형.....아.... 나, 졸ㄹ......"
"랑아! 랑아아아!!!!"
눈을 감은 네 몸을 감싸며, 갈라질대로 갈라진 목소리로 하늘에 비탄을 토해내었다.
"안 돼. 신이여.... 안 됩니다....!!"
"제발, 랑이만은 데려가지 말아주세요.....!"
"이 따뜻한 아이를.... 아픈데도 다른 사람을 더 걱정하는 따뜻한 이 아이를 데려가지 마세요....!"
"제게 마지막 남은 [희망]이란 말입니다....!!"
"저 혼자만 멀쩡한 이런 힘, 필요없단 말입니다.... 제 영혼, 제 의지, 제 마음 모든 것을 가져가도 되니...."
"제발...... 정말로, 정말로 신이 있다면 이 아일......!!!"
"구해 줘......!!!!!!"
캬아아아아아아!!!!!
눈물과 절망을 담은 마지막 바램을 토해냈으나,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차원종의 울부짖음과 날카로운 이빨 뿐이였으니.....
정녕, 신은 없었구나.
그렇다 해도 마지막까지 싸울게. 너만은 지키겠어.
나의 [희망]. 나의 마음, 그 모든 것이 꺼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내 몸을 펼쳐 가로막자, 차원종들이 내 목을 물어 씹기 위해 달려들었고,
나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
.....
.........?
이상하다. 왜 아무런 고통도 없는 거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죽은 걸까?
이상함에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그러자,
화르르르륵.....!!!
불꽃이 보였다.
독기와 차원종을 태우는, 뜨거우면서도 따뜻한 푸른 불꽃.
그 푸른 불꽃이 네게 한마딜 건넸다.
"늦어서, 미안해요."
나는 그 평생 잊을 수 없는, 절대 잊지 않을 [희망]의 푸른 불꽃을 두른 작지만 다정한 등을 만나게 되었다.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