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식의 계승자 EP.4 사냥꾼의밤 14화 눈물로 지운 기억[신의 기대, 인간의 희망](1)
Heleneker 2023-02-27 1
24년도 개정판으로 수정되었습니다.
가라 앉아 있는 동안, 꿈을 꾸었다.
어릴 적, 형님이 자주 읽어 주셨던 ---의 영웅기. 그러나 영웅담 치고는 상당히 이상한 내용이라 항상 의아했었다.
마지막 가족을 죽인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힘을 기른 그 영웅은 오랜 시간을 방황했다.
때론 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강적들과 싸워 수없이 많은 이들을 구했지만, 누구도 알아주지 못했다.
때론 많은 이들에게 속고 이용당해 상처입었음에도, 그 아픔을 홀로 감내했다.
가족을 죽여 인생을 망가트린 원수를 눈 앞에 두고도, 결국 그들을 용서했다.
절망과 후회에 짓눌려, 상처투성이인 그의 이야기를 왜 좋아했을까?
형님에게 물어봤지만, 늘 돌아왔던 것은 그 영웅을 연민하는 듯한 슬픈 미소 뿐이였다.
******
"잠시만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흑지수 씨를 불러주세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젓곤 푹 숙였다.
"무슨 방법을 쓴지 모르겠지만.... 놈들이 간섭할 수 없는 지금이 기회예요."
피와 진액 투성이의 옷 사이로 반신에 거의 완전히 동화해 있는 검붉은 갑피들을 통해 지금도 느껴져왔다. 감찰관이 몰아버린 그들의 광기 어린 집념이 그들을 몰아내고 가둔 방벽을 깨부수려 하고 있는 것이.
"서지수 누님의 불사살해의 능력. 흑지수 씨도 같은 영혼의 힘을 가지고 있으시니 분명히 저를.... 죽여줄 수 있겠죠."
두들겨 맞고 사과받으면서 흘리듯이 말하셨던 게 설마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세상 참 모를 일이군.
다행이다. 머리나 심장을 날려도 죽지 않는 이 저주받은 재생능력을 끊어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곁에 있어서.
"감찰관. 더이상 설득할 필요 없어요. 이대로 사라지는게.... 모두를 위해서도 좋을테니까요. 내 의지는 견고하질 못해서..... 어리석고 나약한 탓에 그들의 의지에 휩쓸려서 먹혔죠. 지금은 정신차렸지만 그들은 여전히 내 안에 있고요."
밀려났음에도 그들은 내 머리 속을 악의에 가득찬 목소리로 가득 채웠다. 한번 무너지고나니 이전보다 더.... 버티기가 어려웠다.
이번처럼 그들이 폭주한다면..... 더 이상 막을 자신이 없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내 손으로 내 동료들을 해치는 게 더 무서워요.....!
아직도 생생했다. 그 자리에 있던 내 동료들을 죽이려고 달리고 손을 뻗었던 그 감각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무서웠다.
무력감과 두려움, 허무함이 나를 짓눌러오는 와중에,
쩌적, 쩌저.....저쩍....!
부서지려 하는 위상력 억제 수갑을 통해 그들이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감찰관, 서둘러요. 이제..... 오래 억누를 수 없어요. 나를 죽여주세요. 나를 죽여주...."
와락!
"감찰관.....?"
"으으... 조금 부끄럽네요."
감찰관이 갑자기 나를 가슴폭에 꼭 끌어안았다. 뭔가 좋은 향이랑 부드러운 감촉이....?
"자온 씨, 눈을 감고 제 목소리에만 집중해주세요. 지금은 그 누구도 당신에게 간섭하지 못 해요. 아무 생각 마시고 천천히 숨을 쉬면서 주변의 소리를, 심장 소리를 들으세요."
두근...... 두근...... 두근.......
....찌르르르
나지막히 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틈으로 감찰관과 내 심장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조용하다. 방금까지 들려왔던 그들의 목소리는 착각이였었다. 지금도 내 몸을 빼앗으려고 악을 쓰고 있는게 느껴지는데도, 목소리는 조금도 들려오지 않았으니까.
"진정, 되셨나요?"
그제서야 감찰관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감찰관은 살짝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옅게 미소 짓고 있었다.
"자, 그럼 다시 이야기 해봐요. 아까 얘기한대로 지금은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니까요."
"그 눈은....!"
감찰관의 눈을 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치 영감의 눈과 같은, 보석처럼 반짝이는 팔각의 별이 감찰관의 눈에 담겨져 있었으니까.
"자온 씨가 생각하시는 그 눈이 맞아요. 필멸의 눈이라고 불리지만..... 실상은 그게 아닌데 말이예요."
"감찰관, 당신은 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죠? 그 눈도 눈이지만, 그 놈들은 당신을 [방관자]라고 불렀어요."
"설명드리고 싶은 건 많지만.... 알려드릴 수 있는 것도, 알려드릴 시간도 부족하네요. 저는 이제 곧 뷜란트 씨에게 전해 받았던 모든 진실을 잊을테니까요."
"잊어... 버린다고요?"
"....지금의 저는, 당신의 수많은 시간을 기록하는 [기록자]예요. 본래라면 당신이 걸어왔던 길을 지켜만 봐고 기억하는 게 제가 뷜란트 씨에게 부탁받은 일이죠."
기록자....? 내가 걸어왔던 길을 지켜만 보고 기억한다고? 이해 못할 말에 뭐든 물어보고 싶었지만, 감찰관은 다급하게 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번은 마지막 시간. 마지막인 만큼 그들도 당신을 끌어내리겠지만.... 이 끝이 최악으로 끝나지 않도록 저도, 뷜란트 씨도 대가를 치르기로 결심했어요."
"뷜란트 씨는 죄업을 가중시켜 자신을 무력화시키는 대가로 당신을 되돌리기 위한 마음을 제게 새겨넣었죠. 그리고 저는 이 대화와 당신이 걸어왔던 시간들의 기억을 대가로, 일부 진실과 이 마음을 사용했고요."
"그게 다 무스....읍..?!"
이해할 수 없는 말은 계속 나오고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은데 감찰관이 내 입을 막았다.
"미안해요. 무슨 말인지 이해시켜주고 싶은데..... 정말 시간이 없거든요."
감찰관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히 대답했다.
"자온 씨. 그들을 이겨내려면 강인한 의지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들의 집착은 상당히... 강대하거든요. 버티는 걸로는 결코 그들을 이겨낼 수 없어요."
"그렇기에 반드시 자온 씨만의 간절한 마음이 필요해요. 저와 뷜란트 씨는 마음이 모든걸 이겨내고 끝낼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마음만으로.... 마음만으로 무얼 할 수 있는거죠? 그 의지들 앞에서 제 의지는 덧없었요. 아무 의미.... 없었다고요."
"미래 씨와 은하 씨에게 해를 가하려던 그들을 막은 건, 간절한 마음이지 않았나요?"
"......."
"간절해야 해요. 영혼에 새기고, 의지가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간절히, 아주 간절히요."
"뷜란트 씨가, 비운 씨가 그랬던 것처럼 간절히요."
왜..... 왜 형님의 이름이 거기서 나오는 거지? 형님에게 무언가 있는 건가?
"그건 이제 직접 보고 오세요. 모든 해답은 기억들 속에 있으니까요."
감찰관과 다시 눈이 마주하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많이 아픈 기억들이 있을거예요. 너무 끔찍한 기억도 있어서 좌절할수도, 고통스러워서 그만보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우면서도 간절했던 두 분과 당신들의 마음을 보고 오세요."
"그 기억들이 당신의 마음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랄게요."
눈꺼풀이 점차 감겨감에도, 감찰관의 말만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앞으로 있을 당신의 아픔을 함께해 주지 못해 미안해요. 하지만 모든 걸 잊은 저라도, 곁에 항상 있을테니 의지하러 와주세요."
"[바로 이전의 세상]보다 더 다정한, 아름다운 마음을 찾을 수 있기를."
"다시 만나요. 그리고..... 안녕."
나지막한 마지막 말과 함께, 내 의식은 잠 속으로 가라앉았다.
*****
암흑이였다.
아니, 이 곳을 암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딛는 감각도, 그렇다고 떠있는 감각도 들지 않는 조용하고 기묘한 공간. 그런 공간을 가득 메운 일렁이는 잿빛의 구름, 부슬거리며 내리는 비. 그리고 잔잔히 불어오는 바람.
아, 그래.... 이것은 [나]의 태초의 모습, 나의 끝을 함께할 나의 영혼이였지.
수많은 동족들이 작열하는 세상을, 녹아내리는 세상의 붕괴를 막으려 내게 부탁해왔었지.
오늘도 나는 동족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새겨놓았던 나의 혼을 통해서 그들을 세계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세계를 지켜보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의 모습은 기쁨에 빠지면 잔잔해졌으며, 분노하면 거칠어지기도 하였고, 슬퍼하면 잔잔히 울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슨 감정이였든, 창조할 수 없는 내게 있어 가슴 아린 고독으로만 느껴져왔다.
쓸쓸하다. 하지만 누구도 강렬한 내 몸을 견디지 못한 채 떠나갔다.
마음을 쑤셔오는 끝없는 공허함에 슬프고, 아려왔다.
슬프고, 아려와서 오늘도 그것을 잊기 위해 잠을 청했다.
언젠가, 나의 아이들과 행복한 미래를 그리는 미래가 오길.
[나]는 그 미래를 [기대]하며, 이루지 못할 덧없는 꿈을 또 다시 반복하기 시작했다.
*******
쒹-----!! 푹!!
짝짝짝짝짝짝------
날카롭게 날아간 화살이 과녁 정중앙에 박히자, 수많은 박수 갈채들이 쏟아졌다.
언제 봐도 훌륭한 자세. 미래가 기대되는 자제십니다.
저 활솜씨는 날이 갈수록 빛이 나는 듯합니다. 하하하.
어르신도, 자제분의 앞날이 참으로 밝습니다. 허허.
클로저도 아니니 전장에 나가지 않아 다행입니다. 껄껄껄.
그나저나 유럽 쪽에 엄청난 차원종이 나왔다고 하던데...
울프팩 팀이 출전했다고 하니 금방 끝나겠지요. 허허허.
어느 날처럼 칭찬하는 타인의 목소리. 나를 향하기도, 나를 핑계로 아첨하는, 늙은 이들의 목소리.
달콤하게 다가오는 그들의 목소리에 현혹된 가족은 나를 앞세워
그들의 말과 행동, 선의와 악의, 무엇이 섞여있는질 알며 느꼈지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아니, 관심 없었다.
누구에게 애정을 받던, 느껴지는 건 항상 공허함과 허무. 그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평범한 사람처럼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형아----"
"아, 랑아!"
하지만 단 한명, 그 아이만큼은 달랐다.
나의 하늘, 나의 태양.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느껴기게 해주는 나의 심장.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만큼은 내가 지켜줄게.
늘 그래왔던 너를 안아주며 속으로 맹세했지만,
쩌적-----
불길한 소리가 하늘에서 울려퍼지더니,
쩌저적------!!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하늘이 찢어지면서 허공에서, 벌레가 나타났다.
나온다.
나온다.
또 나온다.
벌레들이 하늘을 뒤덮는 그날, 거대한 무언가가 허공을 찢으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곤충을 여럿 뒤섞은 것만같은 추악한 모습과 입으로 추정되는 것에서 나오는 녹빛의 진액과 안개. 그것을 따르는 수많은 벌레떼.
그 차원종을 처음 본 순간, 끔찍하다는 말만으로 부족하다 생각될 정도로 끔찍하게 느껴져왔다.
경보음과 총기 소리가 하늘을 뒤덮으며,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날은 고향 부산의 끔찍한 악몽의 시작이자,
내가 처음 위상력을 각성한 날이기도 하였으며,
[나]의 [희망]을 위한, 운명의 시류가 흐르기 시작한 날이기도 하였다.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