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있었냐, 꼰대
Heleneker 2022-12-24 1
짹, 짹짹
바스락---
푸드득-----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한때, 잎사귀를 밟는 소리에 새들이 날아간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책으로 햇빛을 가리며, 날아가는 새를 잠시 바라보던 남자는 다시 숲속을 걸어가기 시작하며 나지막히 중얼거린다.
"ㅈ장. 쓸데없이 외진 곳에 안치해놓기는."
바스락, 바스락. 살짝 마른 잎사귀들을 밟으며 남자는 숲을 점점 깊숙히 들어간다. 이윽고, 남자가 발길을 멈춘 곳엔 작고 푸른 빛깔의 호수가 펼쳐져있다.
남자는 호수 외각의 꽃들이 옹기종기 피어난 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남자가 다시 발길을 멈춘곳, 그곳에는 꽃들로 둘러싸이고, 정갈한 하얀 꽃다발이 올려진 누군가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먼저들 왔다갔었나. 웬일로 레비아 녀석도 볼일 있다며 안 따라온다 했더니."
털썩-----바스락
남자가 중얼거리며 묘비 옆에 앉아 들고 온 책을 펼치려다, 꽃다발 옆에서 난 작은 소리에 꽃다발을 치워본다.
-To. 나타에게-
작은 쪽지 겉면에 적힌 남자의 이름에, 남자는 쪽지를 펼쳐본다.
[우리 섬세한 나타 씨는 우리랑 같이 오면 절대 안 울려고 할테니까, 혼자만의 시간을 줄께요. 후훗.]
쪽지를 읽은 나타는 쪽지를 찢으려든다.
팽--------
그러나 쪽지에 무언가 특수한 처리가 되어있는지 찢길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타가 쪽지를 다시 살펴보자, 작게 다른 글씨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나타, 너는 하피가 적은 것만 보고 이 쪽지를 찢으려 들겠지만 안타깝게 됐군. 이미 수를 써놨다.]
[이번에 벌처스에서 새로 개발 중인 특수 코팅제를 발라놨죠. 벌처스의 기술력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답니다.]
[ㄴ, 나타님. 트레이너님에게 안부 잘 전하고 오세요.]
"이것들이...."
나타는 쪽지를 내던지려다 내려놓으며 가져온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한다.
팔락......팔락.......
째잭, 짹짹
퐁------ 사아아아------
종이를 넘기는 소리,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물 소리와 가볍게 부는 바람 소리. 책을 반 정도 읽던 나타가 조심스레 한마디 입에 담는다.
"....잘 있었냐, 꼰대?"
사아아아---------
불어오는 바람에 꽃다발이 조금 움직이자, 묘비의 주인의 이름이 그 틈새로 드러난다.
-강준성-
한때는 차원전쟁의 영웅, 벌쳐스의 트레이너로 불린 남자이자, 나타가 속해 있었던 처리부대 늑대개 팀의 대장.
세계의 존폐를 건 남극에서의 전투. 그 끝에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웃으며 숨을 거둔 늑대개의 대장의 묘. 나타는 읽던 책을 덮으며 묘비를 가볍게 털어낸다.
"그 녀석들도 잘 지내고 있다고, 꼰대."
찢으려 들었던 쪽지 뒷편에 무언가를 그리며, 나타는 혼잣말을 조곤조곤 내뱉는다.
"도둑 여ㅈ.... 하피는 술 끊고서 가끔 답답하다고 가면 쓰고 뛰쳐나가는데, 그때마다 모범생 놈이 잡아와서 철 좀 들라고 한소릴 듣는걸 나한테 푸념하고 있다고."
"깡통.... 티나는 댁이 그랬던 것처럼 교관직을 하고 있다고. 가끔 멍청한 놈들이 시비걸면 부자집... 아니, 바이올렛 녀석이 개조해준 초급냉동고로 얼려버리더군. "
"바이올렛, 그 녀석. 요즘 짬짬히 쓰던 소설 투고하고 있어. 최근에 신인상 탔다고 비서 놈이 얼마나 난리를 쳐대는 줄 알아? 뭐.... 나중에 한대 맞고 끌려갔지만 말이지."
"레비아 녀석은, 쉬는 날에 피아노 쳐달라면서 귀찮게 한다고. 반주에 맞춰서 노래부르는데, 뭐.... 제법 들을만 하단 말이지."
"가끔은 시궁쥐 녀석들이랑 과자 만들어서 오는데.... ㅈ장, 꼰대. 도대체 레비아한테 뭔짓을 한거야? 열번중 두번 정도는 댁이 만들었던 시궁창 같은 어묵 맛이 난다고."
"그래..... 그 어묵같은 시궁창 같은..... 맛이....."
한창 무언갈 그리던 손이 멈춘다.
"혼자 어제에 남으니까 좋냐? 그딴 방식으로 가버려서 날 승자로 만드니까 좋냐고, 빌어먹을 꼰대."
"이젠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당신이, 그 녀석들이 내 앞에 흔들던 그 빛나는 내일로 가는데......!"
"당신은..... 왜 다같이 힘들었던.... 어제에 혼자 남아버린거냐고."
"짜증난다고. 한심하게 패자가 되서 어제에 남아버린 당신을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고!!"
"그런데..... 그런데도.....!!"
"그렇게 짜증나는 꼰대 당신이,"
"그리워서.... 보고싶다고...."
사아아-------
마지막 한마디를 가리려는 듯, 바람이 잎파리를 세차게 흔든다.
"......ㅈ장. 괜히 와서 궁상이나 떨고 있는 꼴이니."
나타가 쪽지를 묘비 위에 던지고, 자리를 털며 일어선다.
"간다, 빌어먹을 꼰대. 다음엔 이 망할 쪽지나 남긴 그 녀석들이랑 올테니까"
"그러니까"
"거기서 지켜보고나 있으라고. 당신이 지켜낸 늑대들이 살아가는 걸."
나타가 떠나고, 자리에 적막함이 머무른다.
사아아아------ 팔랑
묘비 위에 던져졌던 쪽지가 날아가려 하자,
착---
어느샌가 나타난 남자가 쪽지를 붙잡는다. 남자는 쪽지의 내용을 보고 피식 웃다가, 뒷면을 돌려보곤 나타가 떠나간 길을 바라보며 말한다.
"잘 살아가거라, 나의... 늑대."
쪽지 뒷면에 그려진 미소 지은 자신의 초상화처럼, 남자는 웃으며 조용히 사라진다.
-fin-
추운데 백야 브금 듣다가 그 이후의 나타가 혼자 성묘 온 이야기를 적어보고 싶어져서 적게 되었네요.
트저씨는 이제 안 나온다 생각하니......
트저씨가 읍어도 나타가 행복하길.
그럼 언젠가의 또 다른 단편으로, 그리고 침식의 계승자, 자온의 이야기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