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살아 갈 이유
프라미우스 2022-10-31 1
" 태워도, 태워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그건 환상인거야? "
타닥타닥 타 들어가는 네 뒷모습에 쓸쓸함이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타박해야 할지, 위로해야 할지 선택할 수 없어 조약한 침묵을 내밀자 너털웃음을 지었다.
눈치를 보듯 눈동자를 굴려 옆자리를 응시하다가 도망치듯 아래로 흘렸다. 외로운 구석이 있었지만 의연하게 넘기던 녀석은, 이제 그런 방법조차 잊어버린 듯 회색빛이 되었다. 서유리, 팀의 두 번째로 들어온 여자이자 웃음이 예뻤던 아이. 클로저가 되지 않았더라면 소소하게 살아갈 평범한 여자아이.
클로저가 되지 않았더라면 언젠간 꽃집을 할 거야. 들꽃을 모아 한 아름 꽃다발을 만들고 따듯한 미소를 머금곤 했다. 늘 꽃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꽃이었던 모양이다. 활짝 피었던 것이 손길 한 번에 그대로 꺾여 이세하의 품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꽃을 끌어안은 그의 얼굴에 쓸쓸함과 비틀린 괴로움이 자리 잡는다.
쥐고 있던 무기를 놓고 울지도 못한 채 몸을 수그린 모습을 보며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제이형 뒤늦게 온 제이에게 묻자 언제나 현명한 답을 내려주던 그는 말을 고르듯 숨을 두어 번 내고 이세하의 뒷덜미를 쳐 기절시켰다. 겁쟁이처럼 조심스레 뻗은 걸음 아래로 정말로 죽은 서유리와, 죽은 것처럼 잠든 이세하가 있었다.
이세하가 눈을 뜬 것은 그녀의 발인이 있는 날이었다.
일어나자마자 한 줌 눈송이가 돼 버린 그녀를 보며 까맣게 죽은 눈으로 제이를 아프게 때렸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뼈에 사무친 괴로움이 도드라졌다. 정작 중요할 때 우리 곁에 있어주지도 않는데 뭐가 형이냐고! 문 옆에 기대 입술을 깨물었다.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서, 현실을 외면하듯 일을 찾아다녔다. 생각할 시간이 없을 만큼 몸이 고되면 악몽도 꾸지 않고 잠들 테니까.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마시지 않는다. 억지로 하면 토해버리고 눈을 떼면 자해했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괴로워 보여서,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잠든 얼굴을 보니 그 위로 그녀의 얼굴이 보여서, 이대로 보내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다시 잃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살뜰히 챙기거나, 보살펴주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억지로 밥을 먹이고 강제로 물을 먹였다. 싸움과도 같았다. 죽을 녀석을 잡는 나, 죽음으로 뛰어드는 너.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 조금씩 지쳐갔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 날의 하늘은 붉은 물감을 쭉 짜서 물을 흠뻑 먹인 붓으로 문지른 것처럼 너저분했다. 엉망진창이 된 병실을 닦고 보호자 침상에 털썩 앉았다. 옷이 더러워져서 갈아입어야 했지만, 기력이 쭉 빠져 무릎에 팔을 기대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이슬비 입에 풀칠을 한 것처럼 말 한마디 꺼내지 않던 네가 처음 던진 한 마디는 잔뜩 젖어 마른 종이 같았다.
잘못 건드리면 처음부터 끝까지 부서질 것 같아 고개를 든 채 얕은 숨을 쉬었다. 왜 나지막이 답하자 허공이나 창밖만 바라보던 네가 처음으로 눈을 마주했다. ‘넌 서유리가 보고 싶어?’ 일상을 말하듯 던진 문장에 헛숨을 삼켰다. 가슴 한 편에 묵직한 바위를 내려둔 것처럼 소화되지 못한 감정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추를 단 것처럼 바닥으로 떨어진 눈동자에 덜 닦은 물웅덩이 위로 하늘이 기울어져서 보고 싶어 라고 답했다. 적막이 흘렀다. 흔한 바람조차 불지 않아 서로의 숨소리만 떠돌았다. 이세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고는 그래. 라며 나직하게 답했다.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다. 다만 순응하듯 주변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저더러 사람 하나 살렸다며 어깨를 두들겼지만 저게 살아있는 거라고 느낄 수가 없었다. 밑바닥이 다 무너진 불안한 탑은 잘못 건드리면 무너질 것 같은데 그래도 탑이라고 말했다. 그 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메어와 제이 오빠에게 말했다. 같이 다니게 해 달라고. 인력 낭비임은 알았다. 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제이는 잠시 시간을 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차원종과의 싸움은 아직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어서, 수많은 전장을 거쳤다. 경험은 나와 녀석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몸도 많이 자라 이젠 어린 아이가 아닌데, 정신만은 영원히 서유리가 죽었던 그 순간에 박제된 기분이 들었다. 언제라도 그 시간으로 되돌아갈 것 같아 뜻 모를 말을 던지면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네가 고개를 움직여 시선을 주었다. 검은 눈동자는 별 한 점 없는 그믐밤 같았다. 손이 뻗어오기에 피하지 않으니 손목을 우악스럽게 쥐고 당겼다. 공원의 흙바닥에 무릎이 닿았다. 붉게 변한 눈동자는 익숙한 형태를 그렸다가 이내 낯선 모양으로 변했다.
"추억을 다 태웠는데 서유리가 더 이상 보이질 않아."
선명한 색채 위로 정말 모르겠다는 듯 의문이 기울어졌다. 이글거리는 불안감의 실체를 조우한 기분이 들었다. 서유리의 죽음을 받아들인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든 세계에서 쌓아왔던 추억을 곱씹고 또 곱씹어 태우고 또 태워 살아왔던 거였다. 첨예하게 갈린 그녀의 감이 지금 죽이던가, 피하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하지만 두 개의 선택지는 어느 쪽을 선택해도 그보다 더 큰 해일이 될 것임을 예감했다. 괘종시계의 추처럼 양 옆으로 왔다갔다 흔들리는 정신을 추스르고 짧게 숨을 쉬었다.
" 유리는 죽었어. "
회피하는 것도 죽이는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다른 선택지를 만들었다. 차가운 손등 위를 짚고서 마주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현실을 말했다.
" 유리는 죽었다고. "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깨를 짓쳐오는 움직임은 뒤이어 큰 소리를 불렀다. 등이 욱신거렸지만 묵직한 체중이 내려앉아서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목 부분에 닿는 것이 시린 날붙이였다. 찌푸린 얼굴로 무표정한 이세하를 바라보았다. 시선과 시선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아 서로의 가슴을 후볐다.
" 이세하, 다시 한 번말할게, 유리는 죽었어."
" 거짓말 하지 마! "
목선을 따라 흐른 피가 바닥을 적셨다. 고개를 저으며 현실을 보고 있지 않아서, 그게 너무 화가 나서 입술을 깨물었다. 손목을 움켜쥐고 날붙이를 떼어냈다. 목을 움켜쥐고 내리깔았다. 턱 하고 막힌 숨소리를 냈다. 덩달아 숨이 거칠어졌다. 가슴에 잔뜩 쌓아 둔 둑이 무너질 것 같아서 이성을 집어다 쌓아**만 덩어리 진 것은 눈가를 떠나 이세하의 뺨을 적셨다.
" 유리는 죽었다고.. "
말꼬리가 잔뜩 바스러졌다. 계속 삼키고 삼켰지만 넘어가지 않던 감정이 눈물과 함께 주룩 쏟아졌다. 발버둥 치던 이세하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 현실을 외면하지 마. "
목을 놓고 가슴을 툭툭 쳤다.
" 마주하라고. 유리는 죽었어. 돌아오지 못한단 말이야! "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이런 거던가. 뜨거운 숨이 연거푸 튀어나와 주체할 수 없었다. 눈물로 젖은 이세하의 얼굴을 손으로 쓸었다. 끝이 벌벌 떨렸다.
"금방이라도 따라갈 것처럼,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처럼."
길게 패인 상흔이 목을 긁어서, 형태가 뭉개졌지만 멈추고 싶지 않았다.
" 남은 사람이 그런 널 보는 기분… 어떤지 생각하기는 해봤니? "
머릿속을 지배하던 이성은 날아가 버렸다. 정리되지 못한 감정이 남아 입 안이 시고 쓰게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고 양 손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보기 흉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계속 닦아내는데 소용없어서 두 눈을 감았다. 끝없이 흐르는 눈물에 눈동자가 불타는 것 같았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는건데.."
뜨거운 어둠 사이로 비스듬히 빛이 기울었다. 마주한 얼굴은 울지도 웃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엉망진창이 된 머릿속에 말들을 줄지어 봤지만 마땅한 것을 찾을 수 없어서 그냥 마음이 가는 걸 골라 내밀었다.
" 살아. "
달 뜬 숨을 삼켰다.
" 앞으로 살아서 찾는 거야. 뭘 해야 할지. "
우리는 원하던 원치 않던 세상에 태어났고, 누군가와 엮이며 맞물려 살아간다. 거기서 답을 찾기도 하고, 헤매기도 하지만 살다 보면 마음속에 쌓인 것들이 이유가 되는 거다.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눌렀다.
" 혼자서 무섭다면 곁을 지켜줄게. "
뺨을 따라 눈물이 흐른다.
" 절대로 떠나지 않을게. "
붉게 타오르는 불길이 점점 검게 물들었다.
" 그러니까 살아. 살아서.. "
허리를 숙였다. 가슴에 이마를 기대고 속삭였다.
" …같이 답을 찾자. "
할 수 있는 건 이런 것 밖에 없었다. 나조차 한 치 앞을 모르니까. 등을 감싸는 손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재만 남은 검은 눈동자 위로 빛이 모여들었다. 그것들은 둥글게 모여 눈가를 타고 흘렀다. 숨을 꾹 눌렀지만 무너진 둑은 여러 감정을 싣고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그 날의 얼룩덜룩했던 하늘과 다른, 맑고 갠 하늘이 따듯한 빛을 기울였다. 조금씩 밝아 온다.
" 살게.. "
뜨거운 한숨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떠나보내듯 아침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다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