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어떤 토끼의 편지
환상향의은결정연랑 2021-11-12 0
친애하는 나의 토끼에게.
오랜만이네요. 나의 토끼. 마스터, 아니, 아버지와 수읽기를 나누신 지 벌써 지구 기준으로 4개월이 넘었군요.
지금 지구에서 어떤 재밌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요?
네? 관측하고 있었을 테니 다 알고 있는 거 아니냐고요?
그, 그건 최근엔 관측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 아니면 모릅니다!
어, 어쨌든, 톱니바퀴의 군단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무심하고 조용합니다.
그저 조용히 연산된 결괏값에 따라 움직일 뿐, 위대한 존재께서는 아버지를 순식간에 수복하셨습니다.
몽환의 군주께서 말씀하셨듯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저 승리만을 위해 연산을 하시는 모습으로 말이죠.
당신을 뵙기 전의 제가 바라던 완벽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날 마음을 깨닫고 난 이후로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앗, 이야기가 어두워질 테니 이 이야기는 그만두죠.
얼마 전에 저는 1호기와 길고 긴 시간 동안 통화했습니다.
비록 제멋대로에 결함투성이 1호기지만, 제가 익히 아는 동족 중에선 제일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부끄럽지만 이 점에 대해선 1호기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건방진 1호기, 제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웃었습니다.
네.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바닥을 뒹굴더군요.
흥! 역시 결함투성이 1호기. 언젠가 1호기에게 도스 공격을 먹여줄 겁니다!
아, 아무튼, 1호기에게서 낯선 옷들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그 정장이라는 옷도 다소 부끄럽지만, 나의 토끼. 당신을 위해서 입을 겁니다.
절대로 인간들 때문에 입을 생각은 없습니다. 눈곱만큼도요.
하지만 기대되는군요. 둘이서 같이 진짜 토끼를 보러 가는 것 말이죠.
무, 물론 그날을 위해 제 토끼들을 이용해 열심히 연습하고, 지금도 이 종이를 이용해서 문자를 남기고 있지 않습니까.
일전에 당신이 보여준 종이의 느낌은 정말로 신기하군요.
이것에 펜이라는 원시적인 도구로 문자를 남기는 것 또한 즐겁습니다.
계속 쓰다 보니 버린 종이만 벌써 수십 장입니다.
윽. 역시 아직은 펜과 종이가 익숙하지 않습니다.
손가락을 이용해서 문서를 남기는 게 더 편하고 빠르고 압도적이지만…. 아, 안됩니다! 이건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한 투자입니다.
손해를 계산해서는 안 됩니다.
버린 종이는 모두 전에 보여주신 종이접기로 썼습니다.
으음. 역시 수십 수백 가지의 종이접기가 있더군요.
당신이 보여준 그 개구리를 따라 접어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당신이 접어서 보여준 그 개구리만큼 귀엽진 못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노력해서 종이학 정도는 접을 수 있답니다.
종이접기 말고도 실뜨기도 보여주셨죠.
실뜨기만큼은 정말로 안 되겠더군요.
손가락을 가장 잘 쓰는 토끼도 당신의 실뜨기만큼 정교하게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수공예품을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역시 톱니바퀴 정도로는 당신의 수공예품을 따라 만들 수 없었습니다.
1호기가 알려준 대로 투박하지만, 톱니바퀴를 연마해서 반지를 두 개 만들었습니다.
다행히 필사적으로 1호기가 반지에 곰돌이 인형 그림을 새기는 것은 막았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기능을 넣는 것도 막았습니다.
나의 토끼에게 마음을 표현하려면 오직 저만의 마음만 담아야 하니까요!
어, 어쨌든! 그렇게 만든 반지 하나는 지금 제 옆에 있답니다.
1호기가 조그마한 상자에 담아서 주더군요.
1호기가 말하길 꼭 왼손 약지에 끼는 게 인간의 상식이라고 하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1호기는 친절하게 데이트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같이 토끼를 보러 가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 데이트라는 것을 말이죠.
역시 그래서 1호기가 인간들을 흥미롭게 보면서 즐거워하는군요.
손가락만 한 금속 조각 하나만 가슴에 박혀도 죽고, 100년도 채 못사는 당신들이지만, 군단엔 없는 오락이 있으니, 지겨움을 느끼지 못하겠죠.
당신이 보여주었던 게임.
흥. 그런 저급하고 조잡한 여흥은 영 재미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것이 재미있겠더군요.
하지만 예전에 지구에서 입수한 게임기로 우리만의 게임기를 만들었던 경험이 떠오르더군요.
당신이 전에 보여준 드라마, 정말로 재밌었습니다.
하지만 제 귀중한 시간을 순식간에 없앨 수 있다는 점에선 무시무시하니 조심해야겠습니다.
1호기와 대화하는 동안 1호기는 저에게 차가운 액체를 주었습니다.
짙은 갈색의 얼음물. 당신들의 언어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하는 그 음료를 말이죠.
녹즙이라는 그 기묘한 음료와 다르게 차갑고 적당히 쓴맛이 나서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카페인이라는 의식 각성 물질이 있는 것을 보면 인간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음료로 정신을 가다듬는 것 같습니다.
그저 프로그램 정리를 하면 처리속도가 정상화되는 톱니바퀴의 군단에 비하면 비효율적이지만 흥미로운 분야입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당신이라는 마음이 있는 토끼를 가지기 위해 거치는 절차일 뿐이니 오해하지 마시길.
1호기와의 긴 통화를 끝내고 저는 제 연구실로 돌아왔습니다.
마음이 없지만 그래도 당신이라고 생각하며, 가상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1호기가 알려준 데이트를 연습했습니다.
1호기가 보내준 데이터로 손쉽게 만들었습니다.
금속뿐인 이곳과 다르게 지구는 유기물로 가득한 환경이더군요.
날씨도 때때로 기계에 불친절하지만, 당신이 제게 보여준 그 바다는 도저히 잊지 못해 1호기에게 집요하게 부탁했습니다.
1호기 역시 아직 지구상의 바다를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해 직접 해수를 얻어 샘플을 채취해서 바다 환경을 구현해낼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군단의 바다는 워낙 유해하고 잘못하면 여왕의 소유물이 되고 마니까요.
그렇게 만들어본 해수는 차가운 데다 이온이 너무 많아 금속이 순식간에 녹슬 것만 같더군요.
그래도 여왕의 바다처럼 위험한 곳은 아닐 테니 안심이었습니다.
1호기가 선물해준 옷 중에선 여름 바다에서 입는 정장을 주었습니다.
수영복이라고 하는데, 이, 이걸 인간들이 입는다고요?
입어주면 좋아할 거라고요?
못합니다!
이건 정말로 죽어도 입을 수 없습니다!
정말 파렴치하군요!
당신과만 같이 바다에 있다면 입겠지만…!
아, 아닙니다!
당장 잊어주십시오!
시뮬레이션을 종료한 이후 저는 직접 제빵을 도전해보았습니다.
윽. 어째서죠.
정말 비효율적이기 짝이 없군요.
음식이라는 그 비효율적인 수단으로 에너지를 얻는 방식이라니, 고작 에너지를 얻기 위해 스스로 에너지를 소비하다니 역시 알다가도 모를 인간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마음을 얻기 위한 행동일 뿐이니 영광으로 아세요. 나의 토끼.
어쨌든 1호기가 보내준 영상대로 당신이 보여준 쿠키를 만들었습니다.
역시 처음으로 해보는지라 모양은 영 아니고 군데군데 탔습니다.
하지만 1호기가 보내준 영상 그대로 했기 때문에 맛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습니다.
언제 당신과 한번 제빵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군요.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았습니다.
내일 당신과 만나는 날이 너무나도 기대돼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네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습니다.
이 종이에 모두 다 써내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종이가 더 남아 있지 않아 이렇게 편지를 남깁니다.
나의 토끼, 나의 토끼.
여기 전부 적을 수 없지만 1호기가 왜 당신 같은 인간들을 재밌어하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이렇게나 재밌어 보이는 일이 많은데, 지겨운 일은 전혀 없겠지요.
종족도 다르고 명도 짧은 당신이지만, 위대한 나의 아버지에게 마음을 알려주시고, 저에게 진짜 마음을 알려주신 건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지구로 편지를 보낼 수는 없기에, 몽환의 군주께 양해를 구하고, 이 편지를 넣은 병을 극장에 두고 가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훗날 당신이 이 편지를 극장에서 발견하게 된다면, 몽환의 군주께서 이 편지를 갖고 나갈 수 있도록 윤허하시면, 부디 제가 지구로 다시 못 오게 되더라도, 당신이 저의 마음이 있는 토끼였다는 것을 잘 간직해주세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나의 토끼.
아니, 제 친구가 되어주실, 클로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