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가 세린과 노닥거릴뿐인 이야기

사일로시빈 2015-02-24 20

"뭔가 비장의 개그가 필요해."


 구석에서 누워있기에 자는 줄 알고 무시하고 있던 제이 아저씨가 문득 엄숙하게 선언했다.

굉장한 실력과 경험에 비해 늘 물탄듯 맹한 일상을 보여주는 언밸런스한 아저씨로, 쉴 때는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빈도가 늘어난다.

휴식 중엔 헛소리 발생확률 15%증가 패시브라도 찍은 잉여한 캐릭터를 보는 기분이다.


"저번에 은이 누나한테 개그 실패한게 때문에 그래요? 언제나 실패하고 있으니까 이상할 일도 아니잖아요."

"아, 아니... 언제나 실패하는게 이상한 거라고..."

"아저씨 개그는 80년 전 스타일이라 요즘은 안 먹히는게 당연하죠."

"너무 뒤로 갔잖아 임마!"


 아무리 그래도 "유리는 오늘도 유리유리하구나."라던가 "요리왕 쿠킹!"같은 말의 어디에 웃음 포인트가 있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게 재밌고 다른게 재미가 없는 감각이라면, 분명 아저씨는 굉장히 지루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한편으로는 그런 삶이 어쩐지 측은하게 여겨졌다.


"너 왜 날 동정하는 눈으로 보고있냐."

"어쩌다가 아저씨의 유머감각이 그렇게 되었을까 생각했더니 눈물이 나네요."

"어디가 어때서?!"

"우리 엄마도 그거에 웃었어요?"

"그땐 내가 별로 농담을 안 했지. 하면 누님이 쥐어박았거든."


 엄마가 저런 거에 웃지 않아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아들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이 아저씨.

예전부터 감각이 저랬다는 건 이미 천성의 문제다. 고칠 수 없다. 개조수술이라도 받지 않는 한 무리다.


"일단은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한테 시험해보는게 어떨까요? 한두살만 차이나도 세대차이를 느끼는 법이잖아요."

"그러냐?"

"당장 고등학생들이 중학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 봐도 그렇죠. 중학생도 초등학생을 애 취급하구요.

어른들한테는 다 똑같은 애들인데 말이죠. 오히려 나이가 좀 더 많은 사람한테 개그를 시험해보는게 어떨까요?"

"음. 그때도 실패하면?"

"패배를 인정하고 다른 개그를 연습해야죠."

"큭.... 뭐, 좋아. 그럼 가면을 쓴 가면이한테 가면 되겠군."


 자칭 신강고 1학년 김가면씨말이군. 아무리봐도 제이 아저씨보다 아저씨인데 나를 꿋꿋하게 형이라 부르는 근성의 상인이다.

제이 아저씨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등을 구부린 채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대기실을 빠져나갔다...했더니 뒤를 돌아본다.

몇걸음 걷고 다시 뒤를 돌아본다. 조마조마한 모양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절대로 하나도 안 웃기니까 기대하지 마세요."

"매정한 자식."

"웃음은 정이 없다던가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무슨 "넌 이미 죽어있다"같은 기술도 아니고 질러놓고 나중에 웃음이 터지는 개그라던가를 상상하는거부터 글러먹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면 비웃음이라도 새어나오지만, 내가 볼 때 저런 농담은 웃음의 영역에 있지않다.

단지 아, 지금 저 양반이 기분이 썩 나쁘지않구나하고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지표로 작용할 뿐이다.


"그런데 넌 왜 오늘 게임은 안 하고 문자나 보내고 있냐?"

"게, 게임이거든요. 스마트폰으로도 얼마든지 게임은 할 수 있잖아요."
"게임화면이 아닌데? 대장이냐?"
 

 마른 기침이 터졌다.


"슬비?! 왜 제가 그런 애랑 문자같은 걸 주고받아야 하죠?"

"역시 문자군. 짜아식 부끄러워하기는. 형이 다 알아 임마."

"하나도 모르고 있는데요?!"

"설마 유리냐? 바람둥이자식."

"절대로 이거 명예훼손이죠?"


 제이 아저씨가 정말 쓸데없이 위빙을 구사하며 어깨의 가드를 뚫고 손에 쥔 폰 화면을 보려고 노력한다.

고글에 형광등의 반사광이 비쳐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필사적으로 방어했음에도 아저씨는 곧 만족한 미소를 흘렸다. 


"오세린양이군. 이거 의외인데."

"그, 그, 그냥 선배가 뭣 좀 물어본다고 해서 대답해주고 있던 거뿐이에요."

"호오. 곧 A급으로 승진하는 고참선배가 이제 정식요원으로 승급한 우리 세하한테 물어볼 것이 있으시다?"

"그런게 아니라, 목도리를 짜려는데 어떤 무늬가 좋겠냐고..."

"누구 줄 목도리인지 아주 궁금해지는데 그래."

"낸들 알아요? 부모님 선물이라도 만드나보죠."


 다시 문자알람소리가 울린다. 폰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아저씨를 견제하는 폼으로 노려봤지만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오늘들어 가장 밝은 목소리로 놀리기 시작했다.


"후, 좋을 때구만. 세린양도 아주 훌륭하지.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벌써...."

"벌써? 벌써 뭘 어떻게 했을거란 이야기인가요 제이씨?"

"..........."


 어쩐지 은하제국 총사령관의 테마가 깔리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한 여름의 아**트 도로에서 따끈따끈한 아지랑이가 오르는듯 유정 누나가 상냥...하진 않고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다.

제이 아저씨는 잠깐동안 피를 토할듯이 기침하다가, 바로 회복하곤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지금 유정씨한테 하는 것처럼 했겠지. 아니지, 10년이나 젊은 유정씨를 상상하는 것도 꽤..."

"에?! 사, 상상하지 마세요 이 **!"


 잠깐이지만 코트를 끌어모아 몸을 가리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다고 생각되었다.

바들바들 떨며 입술을 깨무는 유정 누나한테 아저씨가 또 쓸데없이 멋진 상쾌한 미소를 날린다.


"그러니까 너무 질투하지 말라고. 저번에도 말했지만 난 나이가 나랑 비슷한 사람이 취향이니까."

"하아?! 질투?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요. 그리고 제이씨 취향은 하나도 관심없거든요? 그만두세요."

"뭐 이렇게 만난 기념으로 건강차나 한 잔 하러 갈까?"

"절대로 싫거든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세요." 

"역시 차 한 잔 마시는 걸로 끝내기엔 아쉬운 모양이군. 그럼 데이트는 어때?"

"기가 막혀?! 당신 자꾸 계속... 아, 아니, 제이씨가 계속 그러시면 정말 저 화내요?""


 둘이 너무 알콩달콩해서 보고있으려니 어쩐지 위가 쓰려왔다.

저기요, 제가 아메리카노에 시럽 빼라고 말씀드렸잖아요하고 점원한테 항의하고 싶은 기분이다.

그보다 지금 '당신'이라고....?


"부부싸움은 나가서 해주실래요?"


 유정 누나가 확 얼굴을 붉혔다.


"얘, 얘가?!"

"그러자고. 잠깐, 부부싸움이면 내가 지잖아."

"제이씨는 좀 조용히하세욧!"

"섭섭하네. 내가 유정씨를 위해 힘들게 황금크림을 구해왔다고."

"헤? 그, 그런게 있으면 얼른 내놓으세요."

"그럴 순 없지. 어때? 한번 오빠라고 불러주면 얼마든지 찾아줄텐데말야."

"절대로 안 할 거거든요? 제이씨 혹시 양심이 뭔지 아세요?" 

"그런 건 옛저녁에 버려서 전혀 모르겠는걸."


 투닥거리던 연인-본인들은 결단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들이 방을 나가자 고요가 돌아왔다.

어쩐지 아저씨가 나가면서 엄지를 치켜세웠는데. 뭐야, 의미를 모르겠으니까. 그런 배려 필요없다고.


 슬비는 말할 것도 없고, 유리나 미스틸도 같이 있을 때는 사람을 귀찮게 하는 것에 일가견이 있다.

다들 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이란 상대방을 귀찮게하고 또 귀찮게해서 귀찮게 만드는 일입니다'하고 가르치기라도 하나?

아니 그보다 같은 학교잖아. 난 '상대방에게 민폐를 끼치지 맙시다'라고 배웠다고.

어쩐지 목이 말라졌다. 게다가 방에 있으면 분명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한창 중요한 시점일때 훼방을 놓을 것이 분명하다.


"이세하, 넌 게임 외에는 전혀 할 일이 없는 거니?"

"세하야! 저번에 맛있어보이는 가게를 발견했어! 다 같이 가자?"

"형. 저 숙제 좀 도와주실래요?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잖아요."


 .....상상했을 뿐인데도 귀찮다.

좋아. 도망가자. 휴게실에서 아무 사람도 아닌척 완벽한 은닉상태로 조용히 게임을 즐기는 거야.

출동명령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오늘도 무난하게 쉴 수 있을 거야. 평화와 일상이 실존하는 여성이었다면 바로 고백했을 거다. 

일단 자판기에선 뭘 마실까. 커맨드 입력이라도 하면 정말 신기한 음료가 나오는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위아래 위위아래! 여기서 좌우! 그리고 B! A! 그러면 제이 아저씨가 무단으로 숨겨놓은 궁극의 강장제 한살포션이 나온다던가...

굳이 그런 수상쩍은 약을 그리 힘들게 먹고싶진 않은데, 더 멋진 음료가 생각나지 않는 내가 밉다....


 그러다가 자판기 앞에서 평화와 일상을 발견했다. 그렇군. 그 단어에 부합하는 완벽한 여성이 있지않은가.

고속도로에는 휴게소가, 산에는 약수터가, 사막에는 오아시스가, 학교에는 쉬는 시간이 있다.

이러한 안식의 중점이 되는 것은 물이고, 물은 곧 치유에 부합하니 선배의 클래스는 분명 힐러일 것이다.


 베레모 아래로 단정하게 고개를 올린 잿빛 머리카락이나, 선이 가느다란 몸이 무척 아기자기한 인상을 준다.

세린 선배의 푸른 눈은 겨울의 얼음같은 슬비나 여름의 바다같은 유리의 것과는 온도가 다른 파랑이다.

사진으로만 보던 봄의 물망초색을 눈 앞에서 볼 수 있을줄은 몰랐다. 

이쪽을 발견하고는, 이내 포근한 화색을 띄며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세하야!"

"아, 선배. 안녕하세요."

"나 보러왔어?"

"네? 아, 그렇죠?"

"농담이었는데 그렇게 대답해주고 세하는 여전히 착하네."


 선배는 이젠 사람을 놀릴 줄도 알고 많이 밝아졌다.

밝은 척하는걸 수도 있지만, 처음에 봤을 때 늘 풀죽은 표정을 짓던 것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역시 웃는 모습이 훨씬 예쁜 사람이다.

생글생글 웃던 선배가 버튼을 누르니 복숭아맛 음료가 떨어진다.

이쪽도 동전을 넣어볼까 했는데, 선배가 잽싸게 지폐를 넣었다.


"갑자기 만난 기념으로 선배가 쏠께."

"멋진 서비스네요. 감사합니다."

"어떤걸 마셔?"

"음.... 오늘은 그냥 아무거나 눌러서 나오는걸로 정하려고 했어요. 눈 꾹 감고 커맨드 입력하는 것처럼요."

"그래? 그럼 한번 보여줘."

"부끄러운데요."

"보고싶어."

"음....."


 난처하다. 유리도 그렇고 예쁜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고있으면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는데.

결국 자판기 앞에 서서 '누카콜라 맛있다 맛있으면 또먹지'하는 식으로 왔다갔다 타깃을 정하다 벌처럼 버튼을 향해 쏜다!

.....버튼은 커녕 유리창을 누르고말았다. 이럴 거면 굳이 눈을 감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선배는 입을 가리고 한참 배를 잡고 웃더니 옆에 가만 다가와 손을 붙잡았다.


"?!"

"너무 빗나갔잖아. 자."


 부드럽게 손을 잡아끌어 가까운 곳의 버튼을 눌러준다.

그런데 어째 심지어 탄산음료도 아니고 캔커피가 나왔다. 다음부터는 객기를 부리지말자는 교훈을 얻는 하루다.

자연스럽게 둘 다 휴게실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아. 세하한테 자랑할 거 있어."


입술을 축이던 선배가 손뼉을 치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는 털실로 짠 귀여운 모자를 베레모 대신에 푹 얹어쓰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짠!"

"두둥하고 말했으면 더 귀여웠을 거 같아요."

"흐에?! 무, 무슨 소리야 세하야..."

"아! 아뇨. 혼잣말이에요."


 얼굴을 붉힌 선배가 모자를 끌어내리며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사진 찍으면 비싸게 팔리는거 아닐까? 하고 순간 나쁜 마음을 먹을 정도의 비주얼 아닌가.

세린 선배 빨리 클로저 그만두고 아이돌이 되는건 어떨까요?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없었다.


 털실모자는  어쩐지 노르딕 패턴으로 짜여져 알록달록하고, 끝에 큰 방울이 달려 굉장히 귀엽다.

물론 모델이 좋아서 귀여운 탓도 있다. 내가 쓰면 벨기에 파란 난쟁이처럼 어딘가 어설픈 모양새가 되겠지.


"실력이 엄청 늘었네요."

"왠지 하다보니 재밌는 거 같아. 일이 없을 때는 스웨터도 짤 수 있을걸?"

"유능하시네요."

"너, 너무 띄우지마..."


 얼굴을 붉히면서 모자를 꼭 움켜쥔다. 슬비도 이 정도로 귀여웠다면 훌륭한 치트 캐릭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 사람은 토끼같다. 늘 귀를 쫑긋 세우고, 가까이 다가가면 도망가고, 계속 쳐다보면 굴 속에서 눈을 깜빡거린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며 관심을 안 주고 있으면 사방팔방 신나게 뛰어다니며 풀을 뜯는 것이다.

그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인상이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을 폭신폭신하게 해준다.

이 사람 옆에 있으면 어딘가 안심이 된다.


 토끼... 바니걸... 바니걸 복장의 선배...

요염한 복장의 선배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물 좋은 거 있어요! 나 말고 물건말이에요!"하고 말하는 것을 상상했다.

글러먹은 후배라 죄송합니다.


"세하야?"

"넵?!"

"우응. 너무 당황해하는게 수상해."

"아뇨. 잠깐 통돌이 MKⅢ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거 뭐야? 먹는 거야?"

"어딘가의 납작한 인어같은 발언 하지말아주세요."


 선배가 옆에서 다리를 까딱거리며 이쪽을 흘겨본다. 양 손으로 모아쥔 캔이 몸의 리듬에 따라 오르락내리락거린다.


"그래서말야. 아직 답을 안 해줬어."

"그게.... 약간의 사정이 있달까... 하하...죄송합니다."

"응? 별 것도 아닌데 뭐. 지금 답해줘."

"음. 그럼 다시 한번 보여주실래요?"

"그래."


 선배가 폰을 들어 화면을 가까이 한다.


"어떤 무늬가 이뻐?"
 

 화면에는 실뜨기로 구현할 수 있는 다양한 동물의 무늬가 나타나있다.

선배는 요즘 정신집중에 도움이 된다며 부쩍 열정적으로 취미생활을 갈고닦기 시작했다.

확실히 실뜨기를 시작한 이후로는 좀 더 밝은 모습을 많이 보여줘서, 도움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저번에는 머펫을 만들어온 적도 있었다. 선배는 비록 상관에게 배신당했지만, 그 일에 대해 언제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위상력을 잃어 실직한 클로저들을 위한 인식개선 행사로, 어쩐지 소아층을 대상으로 인형극을 하고있는 모양이다.

언젠가 어른이 될 어린아이들에게 클로저란 괴물이나 장기말이 아니고,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둥글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모두의 온도가 조금이라도 올라간다면, 그것도 세상을 구한 것이 아닌가.


 선배는 생각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다.

더 이상은 우는 얼굴을 **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목도리를 선물하신다면서 미리 말해도 괜찮은 거에요?"

"그렇지만 깜짝선물보다는 미리 내용을 알려주고 완성을 기대하는 편이 더 좋지 않아?"

"그럴까요?"

"왜. 깜짝선물이라면 세하는 분명 인상을 쓰고 떨떠름하게 마지못해 감사하다고 할 거야."

"그, 그렇지 않아요."


 항변해봤지만 매끄럽게 무시당했다.


"그러니까 선물도 맞춤형으로 제작하기로 한 거야!"

"다른 애들한테도 해줄 생각이세요?"

"응? 일단 세하만....? 반응이 좋으면 다른 고마운 분들한테도 드려야지."

"다, 다들 분명 좋아할 거에요. 그나저나 실뜨기도 많이 좋아하게 되셨네요."

"응! 정말 좋아해!"

"..........."


 뭐야, 잠깐 혼이 빠져나갔었나. 역시 선배의 미소는 심장에 좋지않다.


"그래서말야. 요즘 슬비나 유리하고는 좀 어때?"

"언제나와 같죠. 다들 절 못마땅해한달까.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모습이 못마땅한거겠죠."

"글쎄? 어떻게든 세하의 관심을 끌어보고싶어서 그런 거 아닐까?"

"제 관심을 어디다 쓴다고."

"선배는 알 수 있는걸. 설마 나도 귀찮아?"

"그, 그럴리가 없잖아요."


 이미 캔은 비었지만 마시는 척을 하며 시선을 피한다.

선배는 다시금 민들레 홀씨처럼 간지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토끼가 좋겠어요."

"그래? 왜?"

"아무래도 귀엽고.... 뭐....."

"기린이랑 펭귄도 귀여운걸?"

"기왕이면 준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동물이 좋으니까요."

"에.....?"


 사람은 누구나 입이나 손이 자기 멋대로 움직일 때가 있다. 분명 이성이 제대로 일을 안 하고 있는 탓이다.

뭔가 영양분이 결핍되서 일어나는 사태가 틀림없다. 선배는 요원복 재킷과 비슷한 정도로 얼굴을 붉혔다.

초연한척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아마 내 얼굴도 비슷한 색깔이었으리라.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무릎 위에서 손가락만 꼼질거리고 있는데, 무전이 울렸다.

내쪽이 아니라 선배쪽이다. 선배가 벌떡 일어났다.


"아! 호, 호출이다! 먼저 가볼께! 또 봐!"

"엣, 네, 또 뵈요."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이니 선배가 헤픈 미소와 함께 손을 팔랑거려주었다.

그리고는 후다닥 뛰어간다....싶더니 후다닥 돌아와 반즘 열린 문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한숨이 새어나오다가 선배 얼굴을 보고는 도로 폐로 빨려들어가버렸다.


"세하야! 저, 저기! 가끔은... 전화해도 돼?"


 요즘은 선배라고 허세도 부리면서, 아직도 이렇게 소심하게 양해를 구하고는 한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제가 먼저 할께요."


 선배는 후에 멋진 목도리를 완성해서, 슬비와 유리가 보는 앞에서 보란듯이 목에 감아주었다.

그리고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역시 하얀색하고 파란색을 쓰길 잘했어! 요원복이랑 잘 어울린다 세하야."하고 말해주었다.

정중하게 감사를 표하려고 했더니 유리가 "언니이- 나는요?"라며 몸을 흔들며 앙탈을 부려와서 흐지부지 넘어갔다.


 나중에는 슬비도 목도리를 받았다.

녀석은 언제나처럼 딱딱한 표정이었지만, 폭신폭신한 털실 속에 손을 넣고는 이내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보니 옆으로 묶은 짧은 머리가 방금 잠시 꼬리처럼 흔들렸는데. 저거 설마 꼬리야? 기분 탓이지?


 물론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차원종들은 여전히 신서울을 침공하고 있다.

나는 여전히 게임을 하고있고, 슬비는 여전히 내 게임기를 부수려하고, 유리는 여전히 과자를 들고온다.

제이 아저씨는 여전히 건강식품을 개발하고, 미스틸은 여전히 숙제와 씨름을 하고, 유정 누나는 여전히 윗선에 치여서 힘겨워하고.


 손끝으로 목도리를 만져본다.

 코끝이 시리고, 눈송이가 어깨에 내려앉는 날에는 어쩐지 더 고맙게 느껴졌다.

아니, 실은 많은 것이 변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느새 그렇게 싫어하던 어른이 되었고, 그 어른이란 생각보다 시시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눈을 감고있자니 전화가 울렸다.


"아, 선배."

"오늘은 겨우 통화가 되네! 그동안 바빠서 못 만났지."

"선배도 바빴잖아요?"

"나보단 세하가 걱정인걸."

"저도 이제 나름 성인인걸요."

"후후. 곧 크리스마스인데, 알고있어?"

"차원종만 쉬어주면 모두가 쉬는 날이죠."


 간단한 농담을 하니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려온 후 선배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단어를 고르는 듯 옅은 숨소리에서 머뭇거림이 전해져왔다.


"저기.... 나, 세하한테 하고싶은 말이 있어. 실은 예전에 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되서... 어.... 그, 그러니까아....만날래?"

"....네. 제가 그쪽으로 갈께요."

"에? 여기로?"


 별로 어른이 되고싶은 마음은 없지만, 나도 예전보다는 좀 둥근 성격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조금은 더 따뜻한 사람이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을텐데. 그래야 온도가 비슷한 사람과 어울릴 수 있을테니까.

좋아한다는 말은 전화로 전하는 것이 아니다. 전파로는 온도를 전할 수 없다.

이젠 제대로 마주보고 말하자.

좋아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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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하세린 단편입니다. 완벽한 세린 루트입니다. 세하도 세린을 좋아하는 쪽으로 캐릭터를 잡았습니다.

유리나 슬비를 견제하면서 구워삶은 세린 선배는 진짜 선배!

오세린은 G타워 후반 이후로는 캐릭터가 많이 밝아지는 것처럼 보여서, 게임 내에서 보이는 것보다 밝은 캐릭터로 설정되었네요.


 그리고 깨알같이 전반부에 튀어나오는 제이유정.... 이쯤되면 이 아저씨는 어떤 장면이든 끼어들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닌가...

'당신'은 부부 사이에서 상대를 높여이르는 말입니다. 러브러브한 표현이죠! 


 뭔가 고유명사를 쓸 수가 없어서 패러디가 곳곳에 섞여있지만 못 알아볼 분이 많은 느낌입니다.

이런 잔재주를 부린다고 글이 재밌어지는게 아닌데 말이죠.


 언제나처럼 모자란 글이지만, 읽어주신 분들에게는 늘 감사합니다.

이제 세하슬비 한편만 더 써야징...

2024-10-24 22:23:4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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