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의 주인 3장 6화, 책임 +선택
AI미스틱 2021-03-30 0
그 한 마디에서 새어나오는 그리움은, 언제적의 것일까.
적어도 부산이, 아니 더 나아가 신서울에 차원종이 갑작스레 나타나기 이전의 이야기겠지.
모두가 평화로웠던 그 시절의 옛 이야기.
유물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강하게 덮여있던 오래된 먼지의 카페트를 걷어내고, 추억이라는 자그마한 보물 상자를 꺼내서 열었으니, 그곳에 남아있는 것은 엣 친구들과의 이야기 뿐이었다.
“아직도 게임하냐? 이세하.”
“…단아?”
마지막 한 마디로 그의 정체를 짐작한 이세하가 혹시하는 마음에 물어보자, 그것에 이젠 잊어버렸냐며 섭섭하다는 말투로 일어선 청년이 말했다.
“3년만에 만나네.”
“네가 왜 여기에….”
단지 ‘반응’을 쫓아왔을 뿐인데, 그곳에 있는 것이 왜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인 단아란 말인가.
혼란이 스며들어와 뭐가 뭔지 이해조차 못하는 상황에서 세하가 고개를 젓고 있노라니, 유리는 발빠르게 나아가서는 단아를 꾹 잡아 끌어안고서는 말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넌 여전히 개방적이네, 오랜만이야. 보다시피 잘 지냈…으려나.”
스스로 잘 지냈는지 인정할 수 없을 시기를 보내왔기에, 의문으로 문장을 끝낸 단아는, 유리를 살며시 밀어내며 빠져나오더니 이윽고 봉을 휘둘렀다.
“뒷처리는 깔끔하게 해야지.”
후웅, 마치 낚시대처럼 끌어내리자, 허공으로 떠오른 차원종 여러마리를 바라본 단아의 눈에서 살의가 새어나오더니, 이윽고 옆으로 그어내니 그대로 절반으로 잘려 절명하였다.
당연하지만 그의 위상 능력이 무엇인지 이해할 리가 없는지라, 보는 순간 살짝 놀란 유리가 물었다.
“아까 그건 뭐야? 응?”
“잠시만, 서유리… 자리를 조금 비켜줄 수 있겠나?”
“아… 네….”
이대로 가다간 대화가 시작조차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인지한건지, 티나가 앞으로 나와서는 물었다.
“이곳으로 떨어진 위상 반응이 하나 있다고 들었다. …너인가?”
“아마도 그렇겠죠. …저는 유니온 징계위원회 산하의 하늘새 팀 2분대 현 리더, 현단아라고 합니다. 당신은?”
“늑대개의 티나다. …여러모로 사정이 있어 자세히는 말해주지 못하겠군.”
“그런가요. 그럼 저쪽은?”
나타를 봉끝으로 가리키며 말하니, 봉끝으로 가리켜졌다는 것에 기분이 상했는지 고개를 틀어버린 나타를 대신해 세하가 말했다.
“저녀석은 나타야. 늑대개 팀의 일원이지. …보다시피 자기 기분이 상하면 말도 안하지만.”
“…기분이 상한건가?”
“아마도 그럴걸.”
“니 마음대로 내 기분 상태를 결정짓지 마, 이세하!”
“아 그럼 말을 하던가!”
갑작스레 벌어진 티격태격하는 상황에서, 피식 헛웃음을 흘린 단아는 주변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거점으로 돌아가서 하자. 여기선… 말하지 못하는게 많을 것 같으니까.”
“그러자고.”
단아의 의견을 받아들인 세하가 반발하는 나타에게 한 마디를 내었다.
“그럼 누가 먼저 돌아가나 승부할래?”
“쳇, 그런건 당연히 이 나타… 야, 야! 먼저 가는게 어딨냐!”
“…정말 다루기 쉬운 사람인데.”
승부욕이 강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저런 내기에 잘 걸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뒤를 따라가고 있노라니 문득 티나가 물었다.
“네가 가진 능력… 유니온 데이터에는 기술되어있지 않았던 데이터였다.”
“그렇겠죠. …그 사람들, 나를 아카데미로 데려가려 할 때에도 이 능력만큼은 해석할 수 없었으니까요.”
“도대체 무슨 능력이지?”
그녀의 질문에 단아는 별 것 아니라며 답했다.
“‘공간’이죠. 공간 조작, 공간 압축, 개방, 이동… 수많은 공간 계열 능력을 전체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일종의 개념말이에요.”
“그렇군. …그래서 유니온에서도 기술할 수 없고, 측정할 수 없었던 건가?”
“글쎄요. 애초에 관심도 없었을 수도 있고요.”
유니온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다는 듯 말한 단아는, 잠시 티나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 몸… 인간의 신체는 아니군요.”
“알아본건가?”
“공간 계열 능력을 다루다 보면 여러모로 알고 싶지 않은 것도 알게 되죠. …그렇게 좋은 건 아니지만…. 어떻게 된거죠? 유니온에 의해 되살아난 건가요?”
“되살아났다라… 그런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클론이 아닌 하나의 병기로 탄생했었으니까. 내 ‘교관’의 뇌 일부를 사용하여, 나는 위상력을 가진 로봇으로 탄생한거다.”
“그렇군요. …불편한 이야기일텐데, 억지로 대답한거라면 미안한데요.”
“괜찮다. 이미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으니까.”
가짜라 할지라도, 철로 이루어진 병기라 할지라도.
이 몸을 가지고, 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 이상, 그녀는 ‘티나’로 있으리라.
“나보다 걱정되는건 이세하다.”
“세하? …유니온에서 뭔가 저질렀나보군요. 어머니를 복제하기라도 했나요?”
“잘 아는군. …네 아버지도 이세하의 어머니와 함께 활동하던 울프팩의 일원이라 들었다. 그렇다면 너도….”
“저는.”
티나의 말을 살벌하게 끊은 단아는, 더 이상 이야기 하기 싫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무리 철로 이루어진 차가운 몸이라 한들, 주변을 뜨겁게 달구는 증오의 열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던지라, 물어볼 시기가 잘못되었거나, 애초에 물어봐선 안 되는 것이었다는 것을 인지한 티나는 입을 다문 채, 거점 지역이 어디인지 모르는 그를 위해 한 차례 먼저 앞장서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단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먼저 그렇게 반응해서… 클론에 대해서는 저도, 썩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진 않았거든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
침묵을 유지하는 단아를 보던 티나는, 그만큼 가슴아픈 일이 있으리라 이해하며, 그의 침묵을 받아들였다.
머지않아 도착한 거점 지역에 내려앉인 단아는, 실로 일주일만에 보는 북적한 부산의 모습을 보더니, 봉을 꾹 붙잡고는 다행이라며 목소리를 내었다.
그도 그럴게, 1주일이라는 시간동안 저 안에 있었다.
불합리하며, 불확실하며, 정의는 물론 법칙마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그 세계에서 1주일이라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 시간동안 어비스에게 공격받을까봐 마음을 졸이고 졸였으니, 끝내 보게 된 부산의 모습이 평화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야 간신히 다행이라는 마음을 품고, 몸의 긴장이 풀렸다.
몸이 축 늘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붙잡아놓은 채 서 있자니, 천천히 다가온 어떤 한 커다란 남성이 말하기를.
“네가 하늘새의 ‘현단아’인가?”
“…그런…데요.”
“나는 늑대개의 트레이너라고 한다. 우선 쉬어라. 모든건 그 다음에 알려주도록 하마.”
“그, 그러죠….”
그가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위압적인지라, 당황한 채 대답하니, 숙소로 안내해주겠다며 아오츠키 아오이의 안내에 따라갔다.
오랜만에 재회한 두 친구와의 이야기마저 못 나눈 채 끌려오듯 숙소로 들어오니, 그런 단아를 보며 아오이가 말하길.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두 분 역시 이제 20살. …어린 나이는 아닙니다.”
“…그랬죠.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 나이 감각이 옅어진 것 같아요.”
그 날… 그 사건 이후.
졸업조차 하지 못한 채 학교를 떠나왔기에, 자신이 성인이라는 것에 아직도 크게 와닿는 것이 없었다. 씁쓸한 과거를 곱씹으며 옛날 일을 떠올리며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해가 뚝 떨어졌을 때.
피곤한 몸을 쉬게 하려고 침대에 누웠다가 잠에 빠진 단아가 간신히 일어났다.
자기 시작한 시각은 태양이 기울기 시작했을 때였는데, 어느새 시간이 지났는지 해가 기울다 못해 저물어가는 시각이 되어버린 와중, 비몽사몽 한 몸으로 한참이나 그저 앉아있기만 하던 단아는 몇 분이 지난 다음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그 녀석들, 출격중일까.”
사람들의 클로저를 향한 불신은 나아지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으니, 그들의 그런 행보야말로, 이 부산에 다가온 재해의 원흉이라는 점을 누가 알랴.
단지 원망하기만 한 그들이, 어떻게 누군가에게 구원받고, 도움을 받을 파렴치한 생각을 하는 건지.
“정말… 덧없는 이야기로군.”
허공에 흩어지는 꽃잎보다도 덧없는 업보와, 그 횡단의 고리에 걸쳐있는 단아는, 그저 한없이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이 얼마나 덧없단 말인가. …이 얼마나, 안타깝단 말인가….
그리고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으니, 누구인진 몰라도 우선 문을 열어 맞이한 단아의 앞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세하가, 웃음을 지은 채 게임기를 들고 서 있었다.
“어때, 오랜만에 같이 하는 건?”
“출격은 어쩌고?”
“오늘은 여기까지래. 해안 쪽도 잠잠해졌고, 무엇보다 차원종 출몰이 드물어졌다고 하더라.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총장이라는 인간 쪽에서 뭔가 하는지 모르겠네.”
“나 들어간다?”
“들어오던가.”
계속 밖에 세워두기에도 뭐 했기에 현관 안쪽으로 들이니, 침대까지 그냥 곧바로 들어간 세하가 물었다.
“근데 너도 총장 쫓아서 온 거야?”
“…너흰 총장 쫓아서 왔다며? 1주일 전에 총장이 부산으로 도망쳤었나?”
“아마 그 정도 됐을 거야. …확신은 못 하지만.”
“그래? 그럼 우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못 들었겠네.”
전화기를 내려놓자, 세하가 잠시 쳐다보더니 물었다.
“뭐했어?”
“치킨시켰어. 30분만 기다리면 올 거야.”
“난 후라이드 파인데.”
“난 간장이랑 양념. 원하면 따로 시키던가?”
피식 웃으며 수화기를 내밀어주니, 그 성격 여전하다며 받아든 세하가 주문을 완료하니, 숙소까지 이송된 자신의 소지품에서 TV랑 연결할 수 있는 케이블과 타블렛PC를 든 단아가, 의자에 앉아선 탁자 위에 게임기를 올려놓은 채 게임을 하염없이 즐기고 있던 그에게 말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 너희는 정확하게 듣지 못했겠지만, 아마 너희 쪽 그 사람… 트레이너 씨는 알고 있을 거야. 우리 정보는 유니온 공식 기록으로 남아있거든. 물론 나같이 유니크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만 제외하고.”
TV와 타블렛PC를 연결한 단아는, 잠시 몇 번 잘 작동되나 화면을 옮기더니, 이윽고 자신의 요원 등급을 이용하여 하늘새 팀의 공식 기록으로 들어가서는 말했다.
“사실상 1분대와 2분대의 기록 조회까지가 내 요원 등급으로 열람할 수 있는 상한선이야. 굳이 보여주는 이유는 그냥… 보고 싸움만 걸지 말라고. 애들은 다칠 수도 있고, 형누나쪽은 잘못 건들면 네가 빠싹 구워질 수 있거든.”
“그것참 도움 되는 조언이네. 그래서?”
“우리가 여기 부산까지 온 이유는 단순해. 너희가 만났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비스’. 차원종과는 다른, 또 다른 차원에서 온 신 개체들을 쫓기 위해 한국에서 파리까지 갔다가,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거야. 물론 이 어비스라는 개체뿐만이 아니라 1분대의 개인 사정도 들어있지만.”
“개인 사정?”
“그래. 그리고 총장… 총장이라고 해야 할지 의료기술부 총괄팀장이라고 해야할지, 거기 인간도 엮여있어. 우리 하늘새 2분대의 애들을 볼모로 잡아서 우리를 파리까지 끌고 간 장본인이기도 하고. 사실상 우리가 파리로 간 이유도 딱히 어비스를 쫓았다기보다는 2분대 애들 때문에 갔다가 어비스에 엮였을 뿐이야. …기록 조회, 여기서 보면 되겠네.”
관리 요원이 아니었기에 작전 기록 조회 외에는 대부분이 막혀있었기에, 전후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작전 기록 조회로 들어간 단아가 세하에게 말했다.
“신종 개체 어비스… 그들은 차원종의 ‘군단장’과 비슷한 개념의 개체인 ‘주인’이 있어. 그 주인을 기반으로 세력을 꾸리고 있고. 그리고 우리 하늘새 1분대의 형누나들은 그런 ‘주인’과 깊은 인연이 있어서 우리가 쫓고 있는 거야.”
“인연?”
“너희 기록을 조금 조회해봤어. 옛날 기록밖에 조회되지 않았지만, 그걸로도 충분히 알 수 있더라고.”
‘연하은’.
한 마디에 세하의 몸이 움찔하더니, 그 반응을 본 단아는 역시 그랬나, 라며 말을 이었다.
“우리 하늘새 1분대가 쫓고 있는 건 ‘어비스의 주인’… 통칭 ‘우리엘’. 전前 클로저 연하은이야.”
“하은이…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고?”
“하은? …그렇게 평범하게 반말로 부를 나이는 아닌데….”
그녀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듯한 세하에게 오류를 정정해주듯, ‘연하은’이라는 인물에 대해 단아가 알고 있는 선상에서 천천히 전해주기 시작했다.
“20년 전 벌어진 ‘차원 전쟁’. 그중에서도 알파나이트가 이곳 부산으로 오기 전, 부산에 잔류했던 최후의 클로저… 그것이 바로 하은 누나야.”
“…거짓말.”
“정말 관리요원으로부터 한 마디도 못들었어? …하늘새 팀 관리요원인 리르 누나가 직접 찾아가서 대화까지 했다고 들었는데….”
달칵, 세하의 손에서 게임기가 벗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시엔 단지 어른들의 일이라며 알려주지 않았었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숨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세하가 주먹으로 탁자를 쾅! 치며 반응했다.
“어떻게 우리에게 숨길 수가 있지? 도대체 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한 세하를 바라보던 단아는,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샘물같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더니 나지막히 물었다.
“그 시절의 너는… 어른이었나?”
“뭐?”
단아의 넘겨짚는듯한 질문에 세하가 인상을 찌푸리며 답하니, 게임기를 한 손으로 들고 몇 차례나 허공에 흔든 단아가 말했다.
“알려줘서, 뭐가 달라지지? …뭘 할 수 있지?”
“무슨 의미야, 너….”
“그 시기의 우린… 단지 돌봐지는 어린… 순한 양에 불과했다는 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어른들의 돌봄 아래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던, 그런 어린 양.
천천히 일어난 단아가 탁자 위에 주먹을 쥔 세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예정보다 많은 출격 수와, 일주일 간의 변화가 컸던걸까. 생각 외로 야위어 가냘파진 몸의 모습은 세하의 튼튼해보이는 근육에 비해 초라해보일 정도였다.
한 차례 쉬어가듯 숨을 내쉰 단아가 이윽고 재차 물었다.
“그런 네게 막중한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 너는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을까?”
“그래서, 알려주지 않는 게 정답이었다는 거야?”
“…글쎄? 하지만 우린… 과거의 우린 사소한 변덕 하나에도 쉽게 흔들리는 나뭇가지나 다름없었어. …적어도, 그 조치가 틀렸다고 말하고 싶진 않아.”
선택지가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그 시절의 우리는 두려워할 터였다.
어른이 아닌 아이였기에,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의 무게에 짓눌린 채 나아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그렇게 책임에 온몸이 짓눌릴 때가 되어서는, 마치 물이 새어나가듯 책임마저 놓고 만다.
한동안 적막함만이 울리고, 게임의 데드엔딩 소리가 징징거리는 상황 속에서 세하가 뭐라 말하고자 했으니.
“야, 그럼….”
“치킨 왔다. 받고 올게.”
세하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난 단아는 서둘러 현관으로 나갔고, 약 10초 정도 혼자 있던 세하는, 자신이 붙잡고 있던 게임기를 바라보더니, 허망함에 게임기를 꺼버린 채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이윽고 자신의 몫을 챙겨온 단아에게 물었다.
“그럼…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낫다고?”
“선택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알게 되는 게….”
“그래서, 그때가 언제인데.”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난 세하가 치킨을 내려놓은 단아와 눈높이를 같이했으니, 조금 더 키가 큰 세하가 내려다보는 구조가 되었다. 밝게 빛나는 황금의 눈동자가 살짝이나마 위로 향한 채 노려보고 있음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물러설 기미도 보이지 않은 그가 묻자, 단아는 잠시 딸려온 감자튀김을 한입 물더니 시계를 바라봤다.
“…글쎄.”
“…응?”
그 때가 언제인지, 그런걸 누가 알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좋든 싫든… 우린 알 수밖에 없다는 거지.”
그것이 설령 몸을 해치는 극독이라 할지언정, 우리는 알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다.
진실 없이 주어지는 자유는 없었으니, 그 자유로부터 비롯되는 책임마저 우리의 것이리라.
“문제는 자세한 걸 아는 어른들이 한마디도 채 하지 않는다는 점이겠지만.”
“물어보면 대답해줄 사람들도 아니잖아.”
“…….”
물어본 적이 없어 확신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얼마 가지 않아 어른들이 직접 말해주겠지.”
“어째서?”
“말했잖아.”
─우리가 부산에 온 이유.
개체명 ‘우리엘’을 쫓아 온 그들과 함께 활동하기로 정한 이상, ‘진실’ 없는 싸움은 그저 허공의 방망이질밖에 되지 않는다.
부산의 인근 공원.
땅을 발로 툭툭 치며, 신서울 지부에 있던 혈액을 사용한 수혈을 통해 그나마 나아진 몸의 상태를 확인하는 하얀과, 마치 자듯이 벤치에 앉아있는 유주의 정적 속에, 어둠 속에서 어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퍼레이터인 앨리스, 한때 늑대개의 대장이었던 트레이너와 검은양의 제이.
늑대개의 하피와, 오늘 밤에 막 도착한 ‘사냥터지기’의 관리요원 재리, 1분대 요원 볼프강 슈나이더와 파이 윈체스터.
리르와 마나가 없는 모임이긴 했으나, 대다수의 인원이 모인 것이 확인되자 목소리가 울렸다.
“얼추 다 모인 것 같군.”
트레이너의 한 마디로 시작된 어른들의 집합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정적을 깨트린 트레이너 본인이었다.
“우리는 총장과 하버트 웨스트 호프만을 체포하기 위해 사냥터지기 성으로부터 이곳까지 왔다. …또한, 이곳에서 마주한 새로운 그들의 수하와도… 적이 되었지.”
간결하다 못해서 목적만을 말해주는 그에게 유주가 정말 그것뿐이냐고 되물으니, 정말 그것뿐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한 트레이너의 확고함에 여전하다며 유주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단지 하나. …‘우리엘’을 쫓아서 이곳까지 왔다.”
“단지 그것 뿐인가?”
“단지 그것 뿐이야.”
목적은 단 하나.
‘우리엘’의 생포, 혹은 사살.
물론 프레이 아델 로는 생포를 가장 우선시하기를 원했지만, 생포를 우선시하다 이쪽이 죽게 생겼기에 사살을 목적으로 행동해도 좋다는 답을 받았다.
하지만.
“기록을 봤다면 알다시피, 우린 실패했어.”
“그래, 확인했다. …날개를 잡아 뜯었다고 기록되었더군. 그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트레이너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듯 싶은 유주의 정적이 이어지고, 이윽고 그가 되물었다.
“당신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만약, 세상의 법칙을 지우고 새로 정의할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있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은거지?”
“…세상의 법칙을 지운다? 그것이 너희가 일주일간 사라져있던 이유인가?”
“아니, 그렇게 간단히 볼게 아니야.”
한 주 동안 부산에 새겨져 있던 검은 ‘세계’는 확실히 법칙조차 존재하지 않는 허무의 공간. …그 안에서 어떠한 법칙이 정의되는 순간, 그것은 순식간에 팽창해 지금의 우주를 집어삼키리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어째서?
“우리엘은 자신에게 있던 ‘6개의 흑색’을 사용해서 세계를 비틀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냈다. 하지만, 그 세계가 팽창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기적인가?”
“기적이 아니야. 그건….”
“그건?”
떠올린다.
그 ‘기적’을 과연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오래된 인류사의 희망으로부터 출발한 그것은, 어느새 자신에게 깃든 ‘불합리’를 ‘합리’로 변화시키기 위한 별의 기도로 변화했고, 의지를 가진 ‘별’의 뜻에 따라 갈라진 틈새로부터 주르륵 흘러내린 한 방울의 성수였으니.
“그건, 내 인생에서도 처음 보는 기적이었다.”
유주가 20년 내내 활동하면서 바라본 세계의 불합리─위상력 중에서도 가장 불합리한 힘.
“검은 세계를 가두는 또다른 세계 속에서,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 거짓된 불합리의 세계는 검은 세계의 팽창을 먹어치운 채, 새어나가지 않도록 붙잡았다.
‘주인’이라 불리는 개체와 격을 동등하게 만들어내는 이 세계 최고의 불합리성.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위상력이 처음 탄생했던 그 때부터?
차원 전쟁이 발생했던 그 때부터?
아니면… 검은 별의 의지가 아이를 낳았던 그 때부터…일까…?
“그 날, 우리엘은 ‘검은 날개’를 잃었다.”
한 차례 소진된 세 쌍의 날개는 회복될 기미조차 채 보이지 않았고, 세계를 찢던 굉음과 비틀린 정의定義의 세계는 어느샌가 사라진지 오래.
일주일에 닿을 정도로 강한 줄다리기 속에서 끝내 승리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인간의 의지를 가진 ‘황금’이었으니, 그녀는 그 불합리한 세계를 자신의 날개로 찢어버린 채, 홀몸으로 날아 사라졌다.
“불합리…? 세계를 가두고, 우주의 팽창을 막다니… 그런게 가능한건가요?”
“당신은….”
“사냥터지기의 관리요원, 재리에요. 그 말씀… 과학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요.”
“그것도 그렇겠지.”
씁쓸한 표정으로 유주가 그의 의문을 긍정했다.
“그곳은 ‘불합리’로 이루어진 세계니까.”
합리성도, 불합리성도.
모든 것을 ‘불합리’로 밀어붙일 수도 있는 세계, 그것이 그 세계였으니.
“인간이 있는 것을 불합리로 여긴다면 인간이 없는 세계로 변화하고, 더러움을 불합리로 여긴다면 깨끗함만이 남는 세계로 변화하겠지.”
“합리성으로 이루어진 세계…인가요?”
“그건 나도 잘 몰라. 내 힘이 아니니까.”
“그럼….”
“자세한건 본인조차 모를거야.”
스스로 어떻게 발현했는지도 모르는 그 힘을, 과연 그는 자유자재로 꺼내서 쓸 수 있게 되었을까.
“궁금하다면 그 아이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도 좋겠지.”
“그 아이라면, 현단아 군을 말하는건가?”
“잘 아는군, 트레이너. …녀석은… 우리와 ‘달라’.”
태생인지 혈육인지, 혹은 애초부터 일그러져있는 것인지.
어디서부터 틀리고 어디서부터 갈라졌으며, 어디서부터 일그러졌는지조차 아무도 모른다.
한참동안이나 이어진 정적 속에서, 밤고양이 우는 소리에 고개를 든 하얀이 안쪽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이곳에 온 이유… 잘 알고 있어. 총장을 쫓아서 온 거겠지.”
“그래. 그에 대해서 협력을 구하고 싶다만.”
트레이너의 대답에 고개를 저은 하얀이 답했다.
“하은은… 기다려주지 않아.”
“그 말은.”
“아마 금세 또 돌아올거야. 그리고… 우린 싸우게 되겠지.”
협력이나 그런 선상이 아니었다.
부산의 괴멸을 막기 위한 일시적 동맹. ─그리고 총장은, 그런 부산이 괴멸되던 말던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입장.
놓여있는 입장의 차원이 달랐다.
또한 하늘새는, 다음 ‘사냥’에 성공하게 된다면.
“부산에서 물러나게 될 거야.”
“당신들이 그렇게 쉽게 물러날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볼프강의 한 마디에, 유주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좋아서 여기에 있는게 아니야. …물론, 하은을 찾는 것에 우리 둘의 의사가 강하게 있었다곤 해도, 부산에 계속 체류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거든.”
“총장파와 손을 잡은건가?”
“…그건….”
하얀이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피하니, 제이가 나서서 물었다.
“무슨 이유라도 있는건가? 부산에 체류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건… 인질이라도 잡혔나?”
“…그런 셈이지.”
제이의 질문에 유주는 나름대로 긍정의 의사를 비췄다.
인질이 있는 이상 세세한 부분까지 알려줄 수 없는 그들을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인 제이였지만, 그와는 반대로 트레이너가 말했다.
“하지만 이러면 우리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상황밖에 되지 않는다. …자네도 잘 알고 있을텐데?”
“알아.”
부산을 지켜야하는 그들의 입장상, 다시금 ‘우리엘’이 나타나게 된다면 좋고 싫음을 떠나서 어쩔 수 없이 대응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하늘새의 ‘사냥’ 작전에 공조하게 되는 것이며, 뜻하지 않아도 그들을 도와주는 꼴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만나고 대화를 나눈 이상, 그것은 이미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이다.
그런 합당한 트레이너의 질문에 긍정을 표한 유주는 꾸욱, 주먹을 쥐면서 말했다.
“아마, 갚지 못할 빚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가 너희를 도와주게 된다면… 어른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저질러버리게 돼.”
“…그런가.”
그 말 속에 깃든 의미를 파악한걸까, 아니면 단지… 이해해주기만 하는 걸까.
단적으로 대답한 트레이너였지만, 그런 트레이너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파이가 나서서 말했다.
“곤경에 처한 이를 돕는 것이야말로 저희들의 사명. 시민들 외에도 누군가를 지키고, 도와줘야 한다면 이 칼날… 망설이지 않을 겁니다.”
“…당신들에게 있어서 득될게 하나도 없을텐데도?”
“그래. 결국 같은 사람이니까.”
유주의 의문 섞인 질문에, 제이가 당연하다며 답했다.
“누군가가 곤란해한다면, 도와주고싶어하지. …빚이든 뭐든 좋아. 그런 식으로 생각해야지만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생각해. 너희들의 소중한게 저들에게 붙잡혀있다면, 움직일 수 없는 것도 당연한 거겠지.”
─아마 유정씨가 있었다면, 클로저로서 해야할 일 중 하나일거라고 말했겠지.
그리 중얼거린 제이의 말과 동시에 앨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개체명 ‘우리엘’을 붙잡기까지, 하늘새 팀과의 일시 동맹이 되겠군요.”
“그렇지. 그 이후… 저들이 적이 될지 안될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적어도… 적이 되지는 않을거다.”
볼프강의 말을 강하게 부정한 유주는, 밤중의 회의를 마무리짓듯, 다행이라며 말했다.
“이곳에 온게… 당신같은 사람들이라, 정말 다행이야.”
‡ ‡ ‡
부산의 인적 드문 해안가에서.
검은 소녀가 누군가랑 만나고 있었다.
새까맣다 해도 좋을 정도로 어두운 빛을 가진 그녀는 유일하게 빛나는 황금의 눈을 가졌지만, 그마저도 아름다움을 잃은 듯 싶을 정도였다.
─우리엘.
재해라 불리우는 특S급의 괴물을 상대로 앞을 막아선 것은, 누구인지 모를 자였으니.
온몸을 가려 자신을 가린 그것이 천천히 말했다.
“‘우리엘’….”
“누구…야….”
부들부들, 숨 쉴틈 없이 떨리는 전신의 요란에 비틀거린 우리엘이 되물으니, 단지 ‘조력자’라며 말을 아낀 그것은 천천히 품에 손을 넣더니, 마치 카드처럼 생긴 무언가를 내밀었다.
“당신의 괴로움을 덜어줄겁니다.”
“…….”
정체를 알지 못할 그것이 하는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이상의 지옥이… 있을까…?’
어차피 한 차례 나락으로 떨어진 인생이다.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삶이다.
그런 삶이면, 애초부터 뭘 하던 아무래도 좋은게 아닐까…?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 불합리한 삶.
감히 생각하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인형같은 삶.
꿈에 갇힌 채, 한없이 아우성치는… 단순한 그런 삶일 뿐이거늘.
괴로움을 덜어준다면, 그걸로도 좋은게 아닐까….
AI미스틱입니다.
꽤 멀리 왔습니다만, 슬슬 선택을 해야겠죠.
만약 여러분들에게 고통으로 가득 찬 인생이 있다면.
만약 여러분들에게 단지 삶 그 자체가 절망이라면.
이름도 형체도,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하물며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저것이 내미는 것을.
받겠습니까…?
모든 선택지가 엔딩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선택지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여러분들은 이 ‘어비스의 주인’에서 나아갈 방향을, 그 길로를 잡을 수 있게 되겠죠.
자… 여러분.
이 선택지는 어디로 흘러갈까요.
과연 합리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을까요…?
‘받는다’와 ‘받지 않는다’… 어느 쪽이 정답일까요.
아니, 정답따윈 애초에 존재하지 않겠지만… 여러분에게 있어선 무엇이 정답일까요?
부디… 고민해주세요.
이상입니다.
코로나가 아직까지도 활개를 치니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