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소녀 김기태 EP:002 아침에 일어났더니 여자가
핑핑핑소마 2021-03-15 0
의료용 간이침대와 화장실과 샤워실을 겸한 반투명 유리 부스가 놓여있는 새하얀 방.
유니온 신서울지부장급 부터만 출입권한을 가지지 못한, 유니온 최고 상부층을 위한 리조트 시설.
김유정 임시지부장은 이 리조트 시설에 출입할 권한이 있지만 그 권한을 사용하는 일은 없다.
한국에 나타난 차원종 문제를 해결하느라 휴가까지 반납하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리조트 지하에 있는 총장 직속 연구소의 정체에 대해서는 절대로 밝혀질 일이 없다.
사냥터지기 저택 지하의 연구소에 대해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아아아아악!"
깊은 바다 속의 빛깔로 덧칠된 듯한 검푸른 머리카락,
그리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알몸의 여자가 샤워부스 안에서 거울을 보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자신의 뺨과 머리카락을 마구 매만지며 경악에 가득 차 크게 뜬 눈으로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
잠시 침묵한다.
그리고 뺨을 주욱 꼬집었다 당기다 입을 몇번 뻐금뻐금 벌리더니 다시 비명을 지른다.
"아아아아아아악! 이게 뭐야! 이건 누구야!
나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야!"
몇번이나 비명을 지르며 그에게 익숙한 거친 목소리를 내어보려 해도, 목구멍 사이로 빠져나오는 건 가녀린 여자의 비명소리 뿐이다.
"콜록, 콜록, 콜록! 대체 이게 뭐냐고... 이 김기태님이 왜 이런 젖비린내나는 계집이 된거냐고?!"
갑자기 목을 혹사시킨 탓일까, 자꾸 기침이 나고 가래가 고인다.
그는, 아니, 그녀는 카악 퉤에, 하고 세면기에 가래침을 뱉어내고는 찬물로 세수를 한다.
다시 고개를 들어올려 거울을 바라**만 그래도 그곳에 처음 보는 까무잡잡한 여자애가 있다는 건 변함이 없다.
"...뭐야, 이건. 가상현실? 훈련프로그램인가?"
김기태는 정식요원으로써 대부분의 훈련프로그램들을 경험해보았다.
유니온의 훈련프로그램은 다른 정식요원들의 전투경험을 시뮬레이션에 이식하여 최대한 실전에 가까운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있다.
일반적으로 이 훈련프로그램들은 자신의 아바타를 이용해 과거의 전투를 수행하는 형태로 이루어져있을 터였다.
이론상으로는 다른 인물의 아바타에 접속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장미숙의 아바타로 접속하여, 장미숙의 신체를 가지고 시뮬레이션 체험을 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물론 시뮬레이션이라고 해서 장미숙의 위상능력까지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한 개인의 위상력은 그 개인의 뇌가 아니면 해석이 불가능해 시뮬레이션 속에서라도 흉내내는게 불가능하니 말이다.
"일단은 확인해봐야겠지."
김기태는, 아니, 아무리 봐도 김기태의 모습은 아닌 여자는 벽에 걸린 샤워기 아래에서 허리를 굽힌다.
온수가 나오는 밸브를 빙글빙글 돌린다. 적당히 기분좋을 정도로 따뜻한 줄기가 그녀의 몸 위로 쏟아지고 피부를 매끄럽고 촉촉하게 적신다.
그와 동시에 샤워 부스 안은 새하얀 증기로 가득 차 그녀의 육체가 가려진다.
"흠."
그녀는 작은 발을 들어올려 가볍게 바닥을 팟 찍었다.
바로 그 순간, 그녀가 발로 찍은 부분부터 시작된 바람이 그녀의 몸을 타고 올라가, 피부를 적신 물을 전부 쓸어올린다.
수증기가 걷혀나가고 전신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수증기 뿐만이 아니었다.
샤워기에서 쏟아져내리는 물줄기까지 그녀의 머리를 피해 마치 소용돌이치듯 그녀의 주위를 피해 떨어진다.
"내 능력이다..."
여자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잊고 싶은 생생한 기억이 떠오른다. 자신은 위상력 상실증에 걸려있었다.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정식요원, 코드네임 산들바람. 땅 위를 기어다니는 평범한 인간과는 격을 달리하는 천공을 지배하는 위상력의 소유자.
그렇게 자칭하고 있던 터였으나, 그 힘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거대한 차원종, 헤카톤케일의 손에 짓눌려서...
"큭!"
김기태의 온몸에 공포가 엄습한다.
온몸의 모공이 서는 듯한 오한이 밀려오고,
다리 사이에 힘이 풀려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감싸쥐고,
허벅지와 무릎의 근육이 공포로 저절로 경련해 안으로 모아져
바닥에 주저앉게 되고 만다.
쏴아아아.
그 순간, 그녀가 제어하고 있던 바람이 흩어진다.
허공에 체류하고 있던 대량의 온수들이 일순간에 폭포수처럼 그녀의 몸 위로 떨어진다.
김기태는 그 물을 전부 뒤집어쓰고 만다.
"어푸, 콜록, 콜록! 콜록!"
김기태는 연신 기침을 해대며 입 안에 들어간 물을 뱉어낸다.
뜨거운 온수를 잔뜩 뒤집어 썼는데도,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너무나 추워하는 사람처럼 애처롭게 떨고 있을 뿐이다.
"이거, 정말로 훈련 프로그램인가...?"
그녀는 혼란에 빠진다. 이것이 훈련프로그램이라면, 이것이 가상현실이라면 그 목적을 알 수가 없다.
정상적으로 자신의 위상력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굳이 타인의 모습을 취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김기태가 알기로 이런 훈련을 하는 요원은 유니온 안에서도 단 한사람... 언터쳐블이라 불리는 변신 능력자 뿐이다. 바람의 위상력을 지닌 김기태가 다른 사람의 아바타를 뒤집어써야 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훈련 프로그램이라면 이미 전투가 시작되었어야 한다.
김기태가 침대에서 일어난지 벌써 삼십분은 지났다.
그런데도 그녀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아무런 통보도 오지 않고, 적도 나타나지 않다니.
"아. 그건가. 그냥 여성 요원의 육체를 체험하기 위한 그렇고 그런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뭐야. 그쪽 체험으로 뽑힌건가?"
위상력을 잃었을 때, 주변이 자신을 보던 시선.
다른 클로저들을 전락시키기 위한 뒷공작, 처절한 실패
. 그리고 헤카톤케일에게 납작하게 짓뭉개졌을 때의 그 처절한 고통.
그래. 그건 전부 꿈이었으리라. 아주 오랜 옛날에 있던 일처럼 그 기억들이 아련한걸 보면 확실하다.
공포를 지워버리기 위해서일까.
김기태는 떨리는 다리로 몸을 간신히 일으켜세우고는 거울을 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인다.
"이것 참, 모든 여성에게 신사적인 김기태님으로써 이런 건방진 시뮬레이션은 용서하기 힘든데.
멋대로 다른 여자의 몸을 취하고 가지고 놀 수 있다니.
이건 그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정도의 하찮은 재미 밖에 없잖아."
자신의 가슴을 마치 사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꽈악 움켜쥔다.
그 순간, 김기태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가슴에서 손을 떼어낸다.
"뭐야, 제법 아프잖아. 이런쪽까지 수요가 있다는건가."
눈물까지 찔끔 한방울 흘리며 웃는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짓는 김기태.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묘한 흥분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는 터였다.
"엣!?"
그러나 김기태는 거울을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세면대에 양손을 짚고 거울 앞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뭐, 뭐야, 이거? 벌레잖아?"
샤워부스 벽에 작은 날벌레 한마리가 붙어있다.
"어, 어째서? 어째서 가상현실에 벌레 따위가 있는거야?
진지한 훈련프로그램이던, 음침한 목적의 체험프로그램이던 가상현실에서 날벌레 따윌 구현할 필요는 없을텐데...?"
인간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날벌레의 존재.
그것이 증명하는 것은 하나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세계가 아니다.
가상현실이 아니다.
이것은 현실이다.
철푸덕.
김기태가 바닥에 다시 주저앉는다.
오한이 밀려온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는, 틀림없이... 그때... 강남에서... 그 거대한 것에게 깔려...
아니,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뭐지?
이 계집의 몸은 대체 뭐고?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누가 좀 알려줘!"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의식을 회복한 모양이군."
그 남자는 샤워부스 밖, 회복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들어온걸 눈치채지 못할 법도 했다. 샤워부스 안에 가득 찬 물줄기 소리 때문에 남자가 회복실의 자동문을 해제하고 들어오는 소리가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새하얀 가운을 걸친 하얀 피부의 독일계 남자.
"내 이름은 허버트 웨스트 호프만.
너의 회복을 담당하게 된 주치의...라고 생각해주면 좋겠군.
진짜 주치의는 따로 있지만 그녀는 완치된 환자에게는 더 이상 관심이 없어서 말야."
"네 이름따윈 관심없고! 설명해! 내게 무슨 일을 저질렀지!"
김기태가 화난 표정을 하곤 물에 흠뻑 젖은 몸으로 샤워부스 밖으로 나간다.
바닥에 물이 떨어지건 말건 전혀 신경쓰지 않고 다가가 그 남자의 멱살을 쥐려 했다.
그러나 대리석을 흉내낸 강화유리타일로 덮힌 바닥은 그녀의 발바닥에 묻은 물로 인해 더욱 미끄러워지고 만다.
"엣!?"
미끌. 김기태의 발이 마치 비누라도 밟은 사람처럼 미끄러져 허공으로 떠오른다.
하반신이 위쪽으로 떠오른만큼 상반신도 아래로 기운다.
"바, 바람이여!"
허둥지둥 팔을 휘저으며 바람을 일으키려 했으나 어째서일까, 바람이 제대로 제어되지 않는다.
방금전만 해도 잘 되었는데. 떨어지는 몸을 바로잡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위험한 자세로, 머리부터 떨어질 것 같은 자세로 뒤집을 뿐이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을 감싼 바람이 사라진다.
"엣!"
떨어진다!
아픔 주의!
"어이쿠. 머리가 다치면 곤란하지."
그러나 김기태가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허버트가 너무나 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쥐고 엉덩이를 다른 손으로 받쳐들고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이, 이건...!?
공주님 안기다!
김기태, 남자인데 남자에게 공주님 안기를 당하고 만다.
구, 굴욕... 수치...!
그러나 허버트는 새빨갛게 물든 기태의 얼굴을 바라보며 방긋 미소를 짓는다.
"보아하니 위상력은 방출할 수 있는거 같지만 꽤 불안정한 상태야.
혼란스러운 것도 이해는 하지만 지금은 의사를 믿고 따라주길 바래."
"믿고 따르라니! 내가 왜 여자가 되었는지부터 설명해!"
"그 부분에 있어 설명은 필요가 없을거 같은데. 애초에 너는 바뀐게 없으니까."
"뭐라고? 바뀐게 없어? 어딜봐서!"
"물은 어디에 담겨 있더라도 물이다.
바람을 일으키는 위상력을 지닌 코드네임 산들바람 김기태.
너는 과거에도 김기태였고 지금도 김기태다.
그것도 아니라면 넌 지금 네 자신이 김기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건 꽤 흥미로운 연구 주제로군."
이, 이 남자.
대체 무슨 소릴 하는건지 모르겠다!
능숙하게 한국어로 말하고 있지만 전혀 한국어처럼 들리지 않아!
기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허버트와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입을 꾸욱 다물고 굴욕을 참는 표정을 짓는 그녀를,
여전히 허버트는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며 침대 가까이 다가간다.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내려둔다. 기태는 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그의 시선을 피한다.
"그럼 진찰을 해야겠군."
그러나 다음 순간, 기태의 아랫배 위에 허버트의 커다란 손이 얹혀진 순간,
기태는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지, 진찰이라니!? 뭘 하려는거야!?"
"흠, 최종학력이 낮나보군.
진찰이라는 단어를 모르다니."
"고등학교까진 나왔어!"
"고등학교까지 나왔는데도 진찰이라는 단어를 모르다니.
동아시아의 교육 수준은 너무 낮군. 설명해주지.
진찰이란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아 신체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행위다.
지금부터 나는 네 몸을 구석구석 살펴볼테니 긴장을 풀고 얌전히 몸을 맡기도록."
허버트의 손이 기태의 아랫배를 더듬는다.
기태가 경악으로 눈을 크게 뜨며 다리를 오무리고 허버트의 손을 떼어내려 한다.
하지만 허버트의 손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무, 무슨 힘이 이렇게 강해!
이건 여자와 남자의 힘 차이 정도가 아니잖아!
마치 인간과 곰의 차이 같아!
기태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이 힘에는 저항해봤자 소용없다.
결국 기태는 흐느끼며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다리를 벌렸다.
"가능하면 부드럽게... 해주세요...
아프지 않게..."
허버트는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기태의 배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다리를 벌릴 필요는 없었는데.
그리고 왜 갑자기 존댓말을 쓰는거지?
뇌의 기능에 문제가 생긴건가? 추가 검사가 필요하겠군."
5초 뒤, 정말로 허버트가 순수하게 진찰을 하려 했다는 것을 깨닫고,
김기태는 수치심과 굴욕감과 혼란과 자괴감에 빠져 비명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다 제압당한 것이었다.
-----------------------------------------------------------
이거 대체 뭐임
쓰고 있는 나도 이게 왜 이렇게 진행되는지 모르겠음
이 에피소드는 쓰다보니 저기에서 끊을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썼으면 꾸금으로 들어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