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 그레이스] 비숍 下
Forgetter 2021-03-05 3
※ 센텀시티 챕터1·2 스토리 스포일러 有 및 캐릭터 날조 有
※ 上편 : http://closers.nexon.com/Ucc/FanFic/View?n4ArticleSN=15705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갑작스러운 거 같아.”
“왜, 나랑 달려보는 건 한 두 번도 아니고...”
“아무리 그렇지만...!!”
피곤한 임무를 다녀왔을 텐데도 지나는 태평한 얼굴로 은근히 달릴 것을 강조하였다. 막내는 더 이상의 설득은 도통 효용이 좋을 것 같지 않은 걸 그제야 깨달았는지, 준비운동을 하는 지나의 바로 옆에 서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의외로 달리는 데에 있어서 지나는 약간의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일단 달리기 준비를 하는 지나의 몸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지나의 저 유연한 몸놀림은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단련한 결과라고 한다. 위상력에 각성하기 직전, 육상 종목에서 촉망받던 인재였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랬기에 이러나저러나 지나의 이러한 발언은 사뭇 충격적인 건 틀림없었다.
-달리는 거...나 사실 별로 안 좋아해.
현재 각성한 위상능력자 중에서 가장 빠른 장본인 겸 육성 선수 출신이었던 자가 이런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고 하면 과연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처음 달리기 내기를 제안했을 때, 막내의 ‘내가 누나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라는 투덜거림에 지나가 대답으로 내놓은 말이 저거였다.
막내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야...
-하지만 지나 누나 엄청 빠르잖아...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도 그렇게 빠를 수가 있는지. 이에 지나의 답은 대단히 통상적인 답변이었다.
-잘하는 거랑 좋아하는 거랑 다른 거란다, 막내야.
-...그런 거야?
-응. 그리고 세상에는 종종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같은 사람들도 있지.
그것은 정말 축복받은 일이란다. 지나는 그렇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저 말은, 지나 본인은 거기에 포함이 안 된다는 소리라는 뜻이었다. 좀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막내는 지나와 달리 그러한 부류의 사람이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물론 지나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거고, 막내의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지만. 게다가 이 숨겨진 의미를 막내는 지나만큼의 나이를 훨씬 더 먹고 나서 ‘아, 그랬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얼핏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저 당시에는 막내는 참 직관적인 의견만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넘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 더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후후...역시, 아직 어리구나.
-...누나까지 어린애 취급하는 거야?
-어린애 취급이 아니야. 그저 평범한 감상평일 뿐이지. 우리 막내는, 아직 순수하구나...싶은 거야.
지나가 막내에게서 지키고 싶어주던 건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했다. 아직은 좀 더 철이 없어도 된다고...아직은 좀 더 순수한 미소를 지어도 된다고...그게 지나 자신이 스스로 정한 얼마 없는 목표였다. 주변이 알아봐주는 자신의 재능에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 해 그것도 극한으로 끌어올리기는 했었지만...역시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목표로도 나아가는 것이 역시나 더 재미있다고 지나는 근래에 계속 느끼고 있었다.
지나가 막내에게 물었다.
“그럼 준비 되었니, 막내야?”
“규칙은 그대로인 거지?”
“응, 맞아.”
지나와 막내, 막내가 아니더라도 가끔씩 팀원들과 달리기를 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정한 룰이 딱 하나 있었다. 이것은 무척이나 빠른 스피드를 가진 지나에게 핸디캡을 주기 위한 규칙이었다. 거창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 출발신호보다 더 늦게 출발을 하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은 대략적으로 5초 내지 10초였다.
이번 경기 코스는 이 두 명이 있는 호수 주변을 3바퀴 정도 도는 것이므로 지나가 10초 더 늦게 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나와 막내의 승부에서 항상 추가적으로 더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만일 막내가 지나를 달리기에서 이겼을 때, 지나가 막내에게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는 것이었다. 그게 어떤 소원이든 간에 당사자가 원한다면 지나는 무조건 그 소원을 들어주어야 했다. 이에 서지수는 그 조항을 자신과 달릴 때도 추가해달라며 항의 아닌 항의도 했었더랬다.
이러한 주변의 반응에 대해 지나는 ‘무조건 지기만 하는 승부는 재미없잖아?’ 라며 무언가 걸려 있는 것이 좀 더 승부에 진지하게 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지나의 가속을 가장 옆에서 많이 지켜본 것은 다름 아닌 막내였으니까. 지나의 가속이 어느 정도 위력인지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평균 정도의 호승심을 가지게 하는 데에는 이만한 게 없다고 지나는 그러했다.
그리고 그 전적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막내의 완패는 아니었다는 소리였다. 한 번...딱 한 번, 막내는 지나와의 – 지나가 커다란 부상을 입은 직후, 지나의 고집에 의해 행해진 것이었다. 당연히도 지나는 제 컨디션이 아니었기에 막내에게는 이것만큼 어부지리의 승부는 없었다고 생각했다 - 달리기 승부에서 이겨본 적이 있었다. 그래서 지나에게 소원권도 하나 따놓은 상태였는데, 막내는 이걸 나중에 써도 되겠냐며 소원이 무엇인지는 미룬 상태였다. 이러한 것을 전해들은 서지수는 막내가 의외로 기다릴 줄도 안다며 막내를 한동안 놀려댔었다.
“그럼 시작하자.”
“응. 준비 됐어.”
“내 창이 지면에 꽂히는 순간이야.”
지나의 창이 지면에 꽂히는 게 출발 휘슬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막내가 출발하고서 정확히 10초가 지나면 지나가 비로소 출발을 한다는 것이고. 지나는 창을 손에 그러쥐었다. 그렇게 쥐어보고 싶었던 창을 이제는 원 없이 붙들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부족한 악력을 위상력이라고 하는 반칙패에 의해 보강 받아서 쥘 수 있었던 것이기에 그것만큼은 무척 아쉬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것으로라도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데에 미약한 도움이 된다면...아무래도 좋았다.
지나는 슬쩍- 창을 던졌다. 너무 멀리 던지면 시야에 잘 안 들어오기 때문에 힘 조절을 해야만 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창을 보며 지나는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창을 던질 때 힘 조절을 해야 한다는 생각 따위 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유유히 날아가던 창이 어느 새 고도를 낮추고 그대로 지면에 박혔다. 옆을 슬쩍 보니 막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나는 마음속으로 초 단위를 세기 시작했다. 정확한 초를 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심장 박동 소리를 잘 귀 기울여 들으면 섣불리 틀릴 리가 없었다.
심장이 정확히 10번을 뛰고 나자, 지나는 그제야 출발을 하였다.
* * *
그렇게 약 20여년이 지난 현재의 어느 도시의 어느 길목.
서지수와 막내, 아니 제이(J)는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 수 있었다. 서지수에게 내려진 은신령이 백지화가 된 덕분이었다. 서지수도 이런 계절, 이런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다는 말에 제이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둘은 두 사람이 만난 약속 장소 근처의 아무런 간판도 없는 바(Bar)에 들어갔다. 이제 그 막내가 성인이 된지 한참이나 지났다는 말에 서지수가 억지로 끌고 간 가게였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제이는 서지수의 완력을 도통 이기질 못하였다.
그렇게 어른들의 회포를 비어가는 유리병으로 풀어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취기도 좀 들었겠다...서지수는 문득 제이의 본명을 넌지시 불렀다. 그리고 제이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왜?’ 라고 대꾸했다.
“있잖아, 궁금한 게 있어.”
“누님이 그 정도로 진지하게 나한테 궁금한 게 있었어?”
“그걸 18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물어볼 수 있는지부터가 난 무척이나 조심스러워.”
원래라면 아예 입을 꾹 다물었을 테지만, 왕성한 날것의 호기심은 이제 더 이상 억누를 수가 없었다. 남들이 볼 때는 18년도 많이 참은 거 아닌가? 라며 그 이상으로 조심할 게 있나? 싶을 테지만 지금 이 두 사람에게는 그게 당연했다.
이제부터 서지수와 제이, 두 사람 입에서 올라갈 한 인물의 이름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의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때...지나에게 말하라고 했던 소원은 뭐였던 거야?”
“...”
서지수의 목소리는 약간 가라앉아 있었고, 제이는 그만 침묵했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잊고 있었던 것 같지만 절대 잊지 않고 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지만 절대 다시 만날 수 없다. 제이는 순간적으로 제대로 된 사고를 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제이의 요 요상하고 길어지는 침묵을 서지수는 아예 다르게 받아들인 듯 했다.
“혹시, 내가 짐작하고 있는 그건 아니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겨우 운을 떼는 제이에게 서지수는 서지수 본인의 억측을 말해주었다.
“아니, 난 네가 지나에게 고백하려고 그 소원권 남겨둔 줄 알았지.”
“그, 그게 그렇게 티 났어?!”
“그게 오히려 표가 안 나는 게 더 이상했단다, 막내야...”
오히려 이번에는 제이가 반대로 더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서지수가 무척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역시, 그 시절의 동생은 순수했다. 지나도 늘상 그런 말을 지수에게 했었지만 지수는 믿질 않았다. 그야 지수의 눈에는 그 당시 막내는 그냥 당돌하기만 한 막내 동생이었으니까.
지나의 안목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이제야 알아버린 기분에 서지수는 조금 착잡해졌다. 그냥...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린 기분이었다. 18년이 지난 지금이었으니까.
“만약 내가 지나 누나를 이긴 게 그 이전이었다면 아마 누님의 말처럼 되었을지도 모르지.”
제이는 서지수의 억측에 대해 절반은 인정하였다. 절반이 맞다면, 그 나머지 절반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서지수의 추측이 절반 정도 틀리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제이가 말했던 ‘그 이전.’ 저기서 말하는 ‘그 이전’은 지나의 심장이 멈추고,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던 서지수가 지나를 심폐소생술로 살려낸 사건 이전을 말한다. 그때 제이는 지나의 무모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어버렸고, 이렇게 온갖 감정들이 뒤엉켜버리는 전쟁에서는 일단 살아남는 것부터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후가 자신의 마음에 대해 진솔하게 지나에게 말하는 것이라고.
그랬기에 지나에게 미루고 미루었던 소원의 정체는 자신을 떠나버리지 말 것...구체적인 기술을 한다면 ‘파순(破盾)을 두 번 다시 사용하지 말 것’이어야만 했다. 두 번째로 멈춘 지나의 심장은 다시 돌아올 수 없었으니까.
막내의 설명을 잠자코 다 들은 서지수가 이번에는 이런 질문을 하였다.
“지나, 보고 싶지?”
“...어.”
그러나 제이는 곧 부정하였다.
“하지만 역시 보고 싶지는 않아.”
“...그렇지?”
“...마주볼 자신이 없어.”
“...역시 그렇지?”
이에 서지수는 쓸쓸히 웃으며 수긍했다. 어느 새 두 사람의 잔은 다 비어있었고, 주변에 주문한 술병 중에 마실만한 것도 거의 다 사라진 상태였다.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이야기를 슬슬 끝마칠 때가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지수가 중얼거렸다.
“18년이 지나서야 안 잊고 있었다는 걸 핑계 삼는 듯이 겨우 이름만 말하는 것 같아 미안하네.”
“...”
“그래도 이제 첫걸음은 떼었으니 만나보러 갈 순 있겠지?”
서지수가 말하는 건 울프팩 팀원들이 지나를 추모하며 조그맣게 세워둔 돌탑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 장소에서 전사한 클로저는 지나 딱 한 명뿐이었기에, 그 장소로 간다면 이유는 딱 한 가지. 오래 전에 잠든 동료를 만나러 가는 것뿐. 그리고 서지수나 제이나 여러 이유와 핑계로 그곳을 이때까지도 가보질 못하였다.
제이는 긍정하였다.
“...그렇겠지.”
“하지만 용기가 아주 많이 필요할 거야.”
어쩌면 차원전쟁 당시 전선에 뛰어들었을 때마다 가졌던 용기보다 훨씬 배로 더 많이 들지도...서지수의 너스레에 제이가 말했다.
“새삼스럽지만 우린 너무 느린 것 같아, 누님.”
“그러게. 지나는 그렇게 빨랐는데.”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빨랐지.”
둘의 대화는 여기서 일단락된 듯 하다.
가게에서 나오니 이미 어둑해진 밤이었다. 다음에 또 보자고, 꼭 다시 보자는 약속을 서너 번이나 확인한 서지수는 제이와 정말로 헤어지기 전, 이런 말을 꺼냈다.
“한 가지만 더 말할게.”
“...?”
“이건 감히 섣부른 추측일 수도 있지만, 막내 네가 지나에게 그런 부탁을 했었어도 지나는 그러지 않았을지도 몰라.”
자신의 어리광은 전부 다 받아주는 지나만을 생각했기에 제이는 서지수의 이 발언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이에 대한 서지수의 설명은 이러했다.
“지나가 네 어리광 같은 부탁을 다 들어주었던 건, 그게 지나의 입장에서는 들어줄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지. 쉽게 말해 지나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과 크게 적대하는 부분이 없었기에 너한테는 그렇게 보였다는 거야. 그러니까...”
“...누님의 말은 지나 누나가 마지막에 날 지키기 위해 두 번째 파순을 썼다는 것이 그러한 ‘신념’이라는 거야?”
“그래, 그 아이...말랑말랑해보여도, 꽤나 고집이 있는 아이였으니까.”
그래서 지나는 끝까지 널 지키고 싶어 했어, 막내야. 괜히 <울프팩>이 아니었다.
그 말을 끝으로 서지수는 자신의 아들이 기다리고 있을 집으로 가버렸다. 서지수와 이세하의 집과는 정반대 방향에서 사는 제이인지라 집으로 가기 위해 한 번 뒤돌면 서지수의 가는 모습을 볼 수 없었기에, 제이는 끈덕지게 그 자리에 서서 서지수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이것마저도 자신의 흔치 않은 고집이었을까?
사라진 서지수의 뒷모습을 보며 제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캔 맥주를 한 캔이라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 * *
부산 센텀시티 하수관거의 어느 쉘터.
신서울지부 소속 15명의 정예 클로저들이 의식을 잃은 채 철창 너머에 갇혀 있었다. 지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그 15명의 얼굴을 한 명 한 명 뜯어보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 지나는 자신이 찾던 인물을 찾아냈다. 비록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음에도 지나는 그 클로저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은 역시 그 아이를 지키려다가 죽었다는 사실과 자신도 그 아이도 원치 않았을 상황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못 볼 것 같던, 그야말로 상상에서나 가능했을 성장한 자신의 동생과 이렇게라도 마주보았을 때의 기분이란.
‘많이...컸네.’
...새삼스러운 감상평이다.
이것만 따지고 보면 그래도 살아있는 건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다시 살아난다, 라고 한다면 기뻐하는 것인 보통 사람의 심리일 텐데 지나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 자신은 그 때 죽을 거라는 강하게 직감을 했던 탓일까? 이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 노련한 전사에게 이러한 세속적인 욕망은 별 다른 감정의 변화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지나도 안다. 지금의 자신은 자연의 순리에 어긋나버린 배반자라는 걸.
지나는 계속해서 철창 너머로 제이의 얼굴을 응시했다. 언제 이렇게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의 자신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지나는 자신에게 다가온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막내 동생과 똑같은 소년을 뒤돌아보았다. 소년은 지나가 그 클로저에게 계속 관심을 갖는 것이 영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래서 지나는 소년이 다가왔다는 걸 인지한 시점에서 되도록 소년만을 바라보려 노력했다.
소년은 무표정한 얼굴에 은근한 어조로 말한다.
“가자, 누나.”
“...그래, 나이트.”
지나는 최대한 웃어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먼저 앞장서서 가는 나이트의 뒤를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갔다.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구나...하지만 그것은 지나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한 강압적인 명령이었다. 살아생전 창던지기 선수로 뛰고 싶어 했던 것을, 자신의 완력이 창을 들고 뛰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달리기 능력만은 뛰어나다는 이유로 그저 육상 선수로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을 거라는 주변의 권유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암담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는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진심어린 조언이었고, 지금은 자신들을 장기말처럼 소모할 뿐인 자의 억지스러운 명령일 뿐이니까.
아, 또 괜히 우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