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의 주인 2장 16화, 이곳에서 생生을 느끼노라.
AI미스틱 2021-02-10 0
망가진 연구실에, 발을 디딘다. 차갑게 물들어있는 세계가 버젓이 느껴지며, 피부를 통해 살아있다는 실감을 알 수 있었다.
─아, 살아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감각인가. 삶을 증명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이 감각이야말로 나를 살아있다고 이해해주는 유일한 동반자이리라.
“하아….”
콰과광! 단지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에 붕괴된 연구실이 다시금 뒤흔들리기 시작했으니, 그 금색의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던 소녀가 물었다.
“내가 직접 왔거늘, 인사 치레 하나 없는 것인가?”
그러자 저 멀리서 울려퍼지는 목소리가 있기를.
“그러면, 세상에 내려앉은 ‘법칙’ 따위에게 내가 굳이 인사를 해**단 말이야? 하지 않아도 인사를 ‘받았다’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잖아? 멀리 있지도 않은데.”
“나는 지금 여기, 존재한다. …눈에 보일 수 있도록, 가까이 와줄 수 있겠나? 그레모리….”
그러자 거부하겠다는 듯 흔들리는 연구소 안에 곰인형 몇이 내려앉더니.
“이런 조용한 인사는 필요없다.”
탁, 하며 치는 손바닥 소리에 순식간에 와해되어 사라졌다.
실밥이 끊기고, 솜이 터져나오며, 그것은 인형이 아닌 재료로 돌아갔으니, 어찌된 영문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총명하다기 보다는 어둡기 그지없는 금색의 눈동자로 아득히도 머나먼 우주같은 실험실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말했다.
“두려워 숨는 것이냐? 아니면 다시 만나는 것이 싫어서 숨는 것이냐?”
“당신의 그 눈에는 비칠텐데? 내가 무슨 감정을 가지고 있는건지.”
“아, 확실히 보이지. 온 몸을 휘감은 두려움과, 그 이상으로 거대한 싫어함. 그래, 두려워 할 법도 하지, 그레모리… 너도 결국 한 때는 그 이름없는 맹우의 일석을 차지했던 자니까.”
그녀는, 그는 알고 있다.
그레모리가 무엇이었고, 어째서 이런 외진 차원으로 쫓겨났는지. …하지만, 그건 이제 그에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모두 사해주마. 네가 가졌던 나에 대한 모든 ‘죄’를.”
“나는 죄를 지은 적이 없어!”
“그러니 너에게 권하마. …네 차원을 이용할 수 있는 통로를, 나의 차원으로 이어라.”
이견은 필요없다는 듯 계속해서 말하는 그 말에 답답하다는 듯 결국 커다란 모니터에 스스로의 모습을 보인 그레모리는 이빨을 바득거리며 말했다.
“지구도, 타차원의 지구도, 용의 영지로도 모자라 이제 내 연구소마저도 전쟁터로 바꿔버리겠다는거야?!”
“오오, 나왔구나. 이것이, 이것이 본다는 감각인가? 오오….”
일전과는 달랐다.
바란다면 모든 세계를 바라보고, 어디든지 볼 수 있었으며, 마음먹은대로 바라볼 수 있었던 일전과는 달리, ‘눈’이라는 기관을 가지고, ‘시각’이라는 감각을 가진 지금 이 존재의 몸으로는, 눈이 향하는 곳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것은 실로 유쾌하구나!!”
인간을 하등하다고 여기는 자들은 언제나 시끄러웠다.
같은 기관을 가지지 않았는가, 같은 ‘육신’이라는 물질을 가지지 않았는가! 단지 단단하고 덜 단단하고의 차이와, 단지 날개가 달리고 달리지 않았고의 차이와, 단지 이빨이 날카로운가 날카롭지 않은가! 그 외의 수많은 하찮은 차이점따위로 인간을 하등하다고 말하는가.
“아아… 살아있다는 것은 실로 좋은 감각이로구나….”
“끄응….”
살아있음에 감탄하는 자와, 그 감탄하는 자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그레모리 사이에 뭔가 어색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니, 어색한 공기라기 보다는, 공기 자체가 인위적으로 비틀어진다고 하는 것이 옳으리라.
“자, 잠시만!!”
“아하하하핫!!”
쥐어뜯어내듯 공간을 붙잡아 뜯어내리니, 비틀어진 세계가 그대로 일렁이더니 온 세계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차원 하나에 절대적인 힘을 일으키는 ‘법칙’ 그 자체의 존재인 ‘군주’가 한낱 인간 따위에게 내려앉았을 뿐이지만, 그 인간의 힘이 공간을 부러트릴 수준이라고는 차마 예상조차 못한 듯 당황한 그레모리의 화면이 으깨어지며 사라지고, 환희의 웃음만이 그 공간에 담겨 날아가는 가운데 지상에 내려앉은 군주─아자토스는, 자신이 지배하게 된 새로운 몸, 연하은의 몸에 대해 최고의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맛보는… 최고의 환희다….”
법칙으로 태어나, 법칙으로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 ‘군주’를 통칭하는 것.
그 중에서도 유독 힘이 강한 아자토스는 ‘별의 힘’을 끌어 쓰는 것에 민감해, 별의 힘을 사용하는 개체가 있다면 설령 군주가 있는 다른 차원이라 해도 강제적인 진입이 가능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어떤 군주조차도 그의 진입을 억압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기세가 강하다는 점에서, 그의 말도 안되는 힘의 크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너무 거대한 힘의 크기 때문에 ‘형체’를 가진 군주에게는 밀려나거나, 혹은 막히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법칙’이라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 따위가, 현실에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물리력’을 이기려 들다니.
법칙과 법칙이 맞부딪히면 그 힘의 크기에 따라 승패가 갈릴지언정, 법칙과 법칙이 가진 물리력이 맞붙는다면 형체를 가진 쪽이 당연히 이길 뿐이다.
그렇기에 아자토스는, 그런 거대한 힘을 가지고 싶어했기에 자신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찾고싶어했다.
“적합한 신체… 별의 힘을 쓰는 자이면서도 군주의 그늘에 가려지지 않았던 자!”
지구 차원의 법칙은 탄생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고작해봐야 수백억년 정도.
아직 자아를 갖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기 때문에 접근도 쉬웠고, 침식하는 것도 쉬웠다.
─하지만.
“…여전히 아쉽구나, 그 여자의 몸을 가졌더라면, 더 완전한 힘으로 부활했을텐데.”
그 몸에 만족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이전의 ‘그릇’은 아쉽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럴게, 이 몸은 그릇으로써는 가장 최적화되어있었지만, ‘배신’당했던 감정이 너무 강했던 탓인지, 자의식이 너무 강해 아직까지도 완전 소거가 되지 않고 있었다.
가둬둔 채 몇백년, 몇천년, 몇 억년이 지난다면 분명 완전히 소거되어 사라지겠지만, 자신이 총애하는 주인 중 하나를 살해하고 도망친 배신자 따위를 그 오랜 시간동안 살려두고 싶은 마음이 채 존재하지 않았다.
분노가 그 육체에 담겼는지, 채 받아내지 못하고 새어나오는 ‘흑색’이 세계의 법칙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단지 힘의 일부, 새어나온 물방울따위임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침식하고 법칙을 어긋내는 그 힘은 ‘정의되지 않은 법칙’이었으니, 그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없었다.
만약 그 ‘흑색’을 ‘한 발자국만에 3천km를 이동할 수 있는 법칙’이라고 정의하게 된다면, 실제로 그 흑색에 침식된 세계는 한 발자국만에 3천km나 이동하겠지….
정의되지 않은 흑색을 새어내보내며 복수의 이빨을 갈아내니, 그 뒤에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용, 아지다하카가 무릎을 꿇으며 예의를 표했다.
“현신하신 것을 감축드립니다.”
“그래, 아지다하카여. 네 일은 끝났던가?”
“용의 영지의 준비는 모두 되었습니다. …분부만 내려주신다면 얼마든지….”
“아니, 지금 서두를 필요는 없다.”
열 두 번째 주인의 재생에 성공했다. 그것을 어렴풋이 전해들었던지라, 지금은 그의 안전에 힘을 써야할 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내가 손을 내밀었는데 거부한 인류에겐 천벌이 필요하겠지.”
“…그렇습니다.”
그것은 아마 ‘신’이다.
인간들이 숭배하는 하느님, 같은… 전지전능한 존재로서 본래라면 존재해서는 안되는 존재일 터였다.
그래, 이제부터 인간들은 볼 수 있게 되겠지.
‘법칙’이라는게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 ‡ ‡
“아버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존재─연하은의 모습을 뒤집어쓴 아버지의 존재감에 피어가 일어나 예의를 갖추니, 자신보다 낮아질 정도로 고개와 허리를 푹 숙인 그 모습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자토스가 말했다.
“잘 해주었다, 딸아. 그러니 주눅들지 말아라.”
“하지만….”
“지금의 너는 내 딸이니, 그저 부녀간의 사이일 뿐이지 않더냐. 두려워하지 말도록.”
─아니, 그런게 아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게 아니다.
주눅들지 말라 해서 주눅들지 않을 수 있는게 아니다.
딸이니 부녀관계니, 그것을 아득히 넘어서.
‘법칙’이라는 것이 가지는 거대함에 강제로 짓눌려, 그저 공포만을 인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존재감은 필시 수천km는 더 떨어져있을 여섯 번째 주인인 ‘설화’에게도 이어졌을 터이니,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반응할까.
감축드린다며 찾아올까, 삼보일배를 할까. …어찌되었던 확실하게 알게된 것은, 그것이 가진 형태야 말로 ‘법칙’이 세상에 가라앉은 결과겠지.
바다가 가라앉고, 하늘이 뚫려 우주 너머가 보인다.
수억광년도 너머에 있을 별의 형태가 아주 선명히 보일 정도로 이 세계의 법칙이 일그러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법칙’이 ‘법칙’에 간섭하여, 법칙을 뒤집어씌어서 수정해버리는 한 가지 과정 중 하나였다.
“자, 그럼… 내 호의를 거부한 인간에게 천벌을 내리도록 하지.”
가벼운 선물로써 내릴터이니.
“앞으로 세 달분의 여유를 주마.”
“아버지, 세 달분의 여유라 하심은….”
“선물 봉투를 뜯을 시간이다.”
내가 주고자 하는 선물은 단 하나이니.
이 ‘태양계’에 존재하는 ‘금성’이라 불리는 별과 맞먹는 질량과 크기를 가진 항성 하나를, 저 하늘 너머에서 끌고올 것이다.
그 말에, 그런게 가능한 것인가 싶어 그저 눈만 커다랗게 뜬 채 서 있던 피어의 몸이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
이게 ‘아버지’라는 걸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법칙’이라는 걸까, 과연… 정말 그것이.
“마음껏 발버둥 쳐보거라… 음?”
선물을 내릴 동안 무언가를 하려고 했는지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던 아자토스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말하기를.
“아… 그렇군. 가면 쓴 기인… 그대도 남아있었지. 그래, 장막 너머에서 몰래 훔쳐보는 재미는 이제 다 됐나?”
구름의 형태가 바뀐다.
고작해봐야 물결치는 형상이었던 그것이, 갑작스레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기이한 가면의 형상으로 바뀌기 시작했으니, 그 당당한 가면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피어는 감히 예상치도 못할 정도였다.
“어리석은 기인 따위가….”
그리고 곧장 고개를 돌려 다른 쪽을 바라보니.
“저 너머에서는 ‘용’의 잔흔이 느껴지는구나. 필시 아지다하카가 말하였던 제 어미의 일이겠지.”
“…그 말씀대로.”
아자토스의 말에 레비아탄이 긍정하니, 이내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자토스는, 이내 기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극권의 군주여… 어째 자리를 오래 비웠다 했더니, 그대는 그대 나름대로 ‘물질체’를 찾았던 것인가? …허면, 그 물질체를 다루는 이는 어떤가?”
여러모로 많은 말을 중얼거린 아자토스는 이윽고 자신이 알아보아야할 것이 몇 있다고 말하더니, 비틀거렸다.
“아버─”
“…자의식이, 강한 아이로구나… 이토록 침식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저항한단 말이냐….”
본래라면 아직 현신될 때는 아니었다. 단지 조급해져서 억지로 힘을 통해 현신했을 뿐이다.
얼마 가지 않아 날아가 버릴지도 모르는 의식을 붙잡은 채 비틀거린 아자토스가 중얼거렸다.
“몸의 주인이 깨어나니 여간 짜증나는게 아니로군….”
이윽고 하늘로 날아가 사라졌으니, 사라지는 그 순간은 피어의 눈으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아니, 애초에 그것에 ‘속력’이 있는지가 의문이지만….
“아버지….”
피어가 그리 중얼거리자, 레비아탄이 그 작은 어깨에 손을 얹었다.
“…레비아탄….”
자신을 토닥이는 듯한 레비아탄에게 피어가 중얼거리니, 레비아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대가 생각하는 것이 뭔지는 안다.”
─두려운 것이로구나. 우리 모두.
‡ ‡ ‡
얼음성의 알현실.
옥좌 위에 앉아있던 설화─하니엘은 문이 열리는 기척에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어서오시지요, 인간 여러분….”
“…악취미적인 요소가 많던데.”
“공교롭게도 제가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모두 인간이기에.”
콰앙!
바닥에서 솟아오르던 가시가 그대로 분쇄되어 사라졌다.
이 현상만큼은 미처 예상 밖의 일이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하니엘에게 단아가 이빨을 바득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오래 끌고싶지는 않아서─”
─초월기…
“만룡섬멸!”
삐걱이며 온 천지를 향해 공간의 선이 뻗어나간다.
이 선에 담겨있는 것은 단지 위상력 뿐만이 아니다. 지금껏 받아온 모든 공격과 냉기. 그래, 이곳으로 오면서 받아낸 모든 것이 들어있는 그것은 데미지에 비례해 더 강하게 강화되는 특수기이기도 했다.
계속해서 공간 사이를 비틀어내며 그 힘의 크기는 비대해지며, 복사가 되니, 그 힘의 양은 방대하기 짝이 없으리라.
그러나.
“설마 내게 ‘검’을 들게 할 줄이야….”
후웅,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얼음성의 파편이 걷어졌으니, 그 너머에서 비치는 하니엘의 모습은 일전의 훈련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것과 사뭇 달랐다.
지팡이처럼 생긴 무기가 아닌 태도였으며, 인간미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살벌한 살의. 단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온 전신이 떨리며 죽음을 인지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내 본능이 ‘살아있기를 포기’하려고 하던 그 순간.
그녀로부터 새어나오던 ‘흑색’의 흔적이 걷어지며 시선이 돌아가는 덕에, 심장이 활동을 멈추는 최악의 상황은 면하게 되었다.
“하아… 하아….”
바닥에 엎드린 채, 살아남은 기적에 대해 감사하고 있는 두 인간따위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저 멀리서 느껴지는 ‘흑색’의 존재감에 자신의 위대한 ‘별’이 현신에 성공했음을 인지한 하니엘이 미소를 끌어올렸다.
아아, 강림하셨구나.
그 자그마한 소녀의 의식과 의지를 가차없이 짓밟고, 이곳에 내려앉으셨구나.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얼마 남지 않았겠지.
아마 남은 일이라고 해봐야 ‘적’을 쓸어내는 것 정도. 그리고 그 적의 범주에는 ‘인류’ 역시 포함되어 있었으니.
마지막 자비라는 듯 단아를 내려다본 하니엘이 물었다.
“선택지는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요, 작은 도련님? …살고 싶다면, 우리와 함께하는게 좋을거에요.”
“…몇 번이고 말하지만, 거절하지.”
그만한 살의를 직격으로 맞아서 죽기 직전까지 갔을텐데도 불구하고.
봉에 몸을 억지로 지탱하면서 비틀거림에도 일어난 단아는 흐릿해지는 시야에 하니엘을 담은 채 말했다.
“시간이 없으면… 더 빨리 널 죽여버리면 그만이야….”
“그런가요.”
공간을 다루는 아주 희귀한 소재.
가지고 싶었지만 다루기에는 너무 강한 그 의지는─
“역시 시체로 가져가는게 제일 편하겠어요.”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세이지와 단아가 ‘죽을’ 각오를 다졌다.
안쪽으로 가는 길이 완전히 봉쇄된 상황에서, 결국 얼음성 바깥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홍영 팀은 서로 나뉘어서 두 명의 클로저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으니, 자신을 지원하러 온 클로저 요원에게 유주가 다가가 말했다.
“…3분만 버텨줘.”
“…노력해볼게요.”
그 말과 함께, 유주가 사라졌다가 뒤로 두 건물 다음에야 착지했다.
그 속력을 따라잡은 듯, 순간적으로 좌측을 바라본 아즈라엘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떠넘기기인가요?”
“그럴 리가. …이쪽에 집중이나 하지!”
“쯧.”
상대하기 싫다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그와 같은 전기 위상능력자라면 최소한의 경계는 필요하다는 걸까.
내질러진 세검의 끝자락에서 피어오르는 전뇌에 대응해 손을 가볍게 위로 손짓하자, 땅에서부터 치솟아 오른 얼음장벽이 그 앞을 가로막아 번개를 훔쳤다.
“놀이는 싫습니다만.”
“싫어도 나와 놀아줘야겠어.”
─역시, 빠르려나.
경계에 경계를 거듭하며 다가가기를 꺼려하는 아즈라엘과,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안도하는 그녀는 덤앤더머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유주는.
─쿠르릉….
커다란 굉음과 함께, 뇌제가 강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보다 강하게, 일전에는 없었을 정도로 압축되고, 응축되어, 온 몸을 태울 정도로 강한 전뇌가 그 주변에 흐르고 있었다.
막대한 량의 위상력. 한때 공장 하나를 가동하는데 희생된 소녀 카밀라보다도 훨씬 많고, 이상할 정도로 대용량의 위상력을 가지고있는 그는, 여태껏 이런 짓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뇌제’란 결국 육체의 손실.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사용자를 죽이는 힘.
그리고 그 이유는 단지 ‘방대한 위상력’으로부터 오는 부작용.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위상력의 양은, 사용자마저 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제 없이는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여기서 자신이 정한 한계를 넘어야만 했다.
-유주 요원님, 그 이상은….
수신기 너머로 걱정이 담긴 리르의 목소리가 한껏 들려왔지만, 그런건 이제 상관이 없었다.
‘시종’을 뚫지 못한다면 프랑스와 함께 얼음덩이가 되어, 영원을 후회할 테니까.
당장 등 뒤에 있는 사람조차 구하지 못하고, 손 닿는 곳에 있는 사람조차 구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클로저로서 실격이 아니던가.
커다란 천둥소리가 점차 그 덩치를 키워나가고.
그를 계속해서 지켜보던 아즈라엘이 그 이상 안 된다는 듯 다가오려다 가로막히는 순간.
─콰드득.
“…딱히 별건 없었군요.”
지상으로부터 솟아오는 기나긴 얼음의 창이, 그녀의 몸을 꿰뚫고 올라갔다, 사라진다.
허공에서 그저 떨어지기만 하던 그 몸이 바닥에 닿는 순간 퍼지는 소리.
누군가가 ‘죽어’가는 소리에 무언가가 강하게 다가왔다.
그 죽음의 소리를, 언제 마지막으로 들어보았을까.
차원 전쟁일까, 그 이후의 어떤 작전에서일까.
─아니, 그 소리는….
아주 오래된 옛 친구를, 찾기를 그만두었을 때.
자신으로부터 났던 가볍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소리였다.
그래, 자신을 죽이는, 가여운 울음소리.
─콰과과광!
커다란 번개가 옥상의 난관을 뚫고 나아간다.
무식한 밀도의 위상력이 형태를 갖추고 여기저기로 뿌리를 뻗는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푸른 번개를 한 손으로 쳐낸 아즈라엘이 순간 눈을 크게 뜨더니, 저릿한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도대체 어디까지 나아가야, 성에 차는건가요.
자신을 얼마나 죽이면서까지 나아가면, 그곳에 닿을 수 있는걸까.
그건 유주조차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결전기, 뇌제-천축일단
파직거리는 번개의 열기에,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이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기화되어 사라진다.
그것은, 그가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였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커다란 뇌음이 소리를 지르던 순간.
거리의 등불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번개 줄기가 스치고 지나간 모든 것들이 이상을 일으키듯, 건물 내부에 갑자기 불이 켜졌다가 꺼졌다가를 반복하며, 몇몇 가로등은 깨져나가며 그 불빛을 잃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프랑스의 파리가, 갑작스레 활기를 되찾은 것처럼 노랗게 달아올랐다가 다시 숨죽이기를 반복하는 것은 사람의 숨쉬는 행동을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유주 요원님!”
빠르게 불이 꺼졌다 켜지는 것은 둥지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그야말로 ‘공장’이나 다름없는 모습. 마치 발전소 자체인 것마냥 도시 하나의 전기를 뒤죽박죽 섞어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유 주’라는 인물이, 그 커다란 위상력을 전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결국, 그에게 있어서 사망 선고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가 평소에 사용하는 위상력의 최대 선상은 카밀라의 약 2배~3배의 값.
테러리스트 중에서도, 전기 위상능력자 중에서도 최상위 위상능력자인 카밀라의 2~3배라는 점만 해도 이미 인간이 다룰 수 있는 위상능력자의 영역을 지나갔으나, 문제는 이게 ‘평소’라는 점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내재된 위상력을 모두 사용하게 되면.
단지 평소에 쓰는 양만 다 쓰는 거로도 비틀거리는 그에게, 어떤 작용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랐다.
공포, 그것은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고, 자신이 아는 사람의 ‘죽음’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퍼엉!
커다란 전자기파가 발생하는 순간, 커다란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런…일이….”
파리 내부에 존재하던 모든 전구가 터져나가고, 전자제품이 터져나갔다. 전기의 영향으로 인해 가스관이 폭발하고, 방대한 전력이나 다름없는 그의 존재로 인해 가까이 있는 수도관이 비틀어져 터져나간 것이다.
둥지도 별 다를바가 없다는 듯, 둥지 내부에서 펑펑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리르가 들고있던 통신기는 아예 스파크까지 내면서 망가졌다.
동시에 손에 쥐고있던 태블릿 PC의 액정이 터져나갔으니, 뻐꾸기가 위상력이나 전자기파에 강하다는 점이 이 순간에서는 정말 다행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그리고.
“리르 님,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 터인 마나가 허겁지겁 달려온다.
그녀도 어찌 되었건 한 명의 ‘위상능력자’일텐데,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보고도 믿지 못한다는 듯,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리르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오히려 되물었다.
“…전기 위상능력자는… 이런 것도 가능한 건가요…?”
그 질문에, 침을 살짝 삼킨 마나가 답했다.
“…이론상, 가능해요. 실제로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카밀라’라는 소녀는 이번에 ‘국제공항’에서 커다란 전파를 발생시켜, 공항 내부의 모든 전자제품을 터트렸다고도 하고요.”
“유주 요원님의 위상력이면… 이것도 가능한건가요…?”
“파리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는… 가능할거에요, 아마….”
그의 위상력이면 충분히 가능한 수준.
문제는 이게 의도된 점인지, 아니면 폭주한 것인지가 의문인데….
“…어느 쪽이라도, 멀쩡히 돌아오실지는 모르겠어요….”
어쩌면, 작전구역에서 돌아가실지도….
온몸이 불타오른다.
쩌억하고 갈라져있는 금 사이에서 푸확, 용암이 터지듯 자색 화염이 일어올랐다.
뜨거운 기분이 혈관을 태우고, 그 사이를 지나는 핏물을 녹이고, 눈앞마저 흐리게 만들 정도로 강하게 타오른다.
두근거리는 심장음이 더 뜨겁게 움직인다.
온 전신의 혈액이 모두 증발할 것만 같다.
하지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저물어가는 태양처럼.
불씨만 남아있는 몸을 태우며, 죽음에도 불구하고 일어선다.
이 몸이 설령 숯덩이가 되어 무너진다 해도, 설령 잿더미가 되어 바람에 흩어진다 해도.
여기서 끝맺지 못한다면, 더욱 커다란 불씨가 되어 찾아올 커다란 얼음이 두려웠다.
이곳에서 녹이지 않는다면 필시, 세계를 얼리리라.
철컥, 칼을 다시 쥐어잡는다.
걸어서 나아가지 못한다면 기어서라도 나아가라.
몸이 불타 움직이지 못한다면 불타버린 몸이라도 움직여라.
─마지막.
이 몸에 깃든 하찮은 영혼이라도 대가가 될 수 있다면 불태우고.
고작해봐야 일개 신체 위상능력자라도 좋다면 얼마든지 불에 내던지리.
“최후의 발악인가요, 인간들이란….”
마치 벌레보듯 바라보는 그 눈초리는 차갑기 그지없는 얼음.
그 목소리에 담긴 매혹은 달콤함 섞인 독.
눈과 귀를 멀게하는 목소리를 조심하라, 자신을 바라보는 얼음을 떨쳐내라.
이것조차 이겨내지 못한다면, 닿는다는 것따윈… 나아간다는 것따윈 하등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요, 결국 인간이라고는 하나 조금이라도 주인님의 재미를 북돋아드렸을테니, 저도 그에 대한 보상을 드려야겠죠.”
그리 말하며, 손을 살며시 움켜쥔다.
허공에 떠오른 눈꽃의 문양이 빛을 발한다.
‘눈꽃’의 문양은 ‘제 6주인’의 상징. 그녀가 다루는 절대적인 힘의 표식.
하찮은 광대에게는 죽음을.
허나, 최소한의 즐거움을 가져다준 회색 잿빛의 피에르에게는 포상을.
─초월기, 잔불殘火
하얀의 자색 불꽃이 일렁임과 동시에, 커다란 폭발이 일어난다.
처음 나아갈 때 터져나간 불꽃은 그야말로 폭염.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무자비한 불꽃이었으며, 그로부터 피어오르는 열기가 건물을 넘어, 서리처럼 번진다.
화염의 줄기를 주욱 이어나가며 몸이 나아간다. 그 불꽃이 부딪히게 된다면 아무리 천사의 시종이라고는 해도 필시 큰 피해를 입게되리라.
하지만, 그런 폭염이 닿는 일은 결코 없었다.
‘불길이….’
잦아든다.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그녀의 몸으로부터 피어오르는 불길이 잠잠해진다. 흉포하게 날뛰던 위상력이 천천히 멎는다.
안타까움. 그것은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고 남은 불길의 남은 잔해.
나무에 붙어있는 마지막 잎새처럼, 이 공격을 마지막으로 그녀 역시 불타고 남은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지겠지.
무의미하게.
허나, 그 잔불이. 타고 남은, 이제는 다 죽어가는 잔불이 얼마나 무서운지, 작은 시종은 모른다.
잔불이라 해도 불은 불.
타오를 것이 있다면 무한하게 타오를 불. ─눈으로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약하고, 바람 한 줌에 꺼질 정도로 약한 불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다가오는 하얀을 향해 시종이, 이즈라엘이 손을 펼치자, 그것으로부터 퍼져나온 듯한 눈꽃의 문양. 그것은 ‘주인’의 상징이자 그녀가 행할 수 있는 최고 경도의 방어.
불꽃은 결국 얼음에 가로막혀 사라진다.
격자로 얽어놓은 얼음은 쉬이 녹지도, 터지지도, 깨지지도 않는다.
이곳에서 쓰러져라, 인간.
그 말이 속삭여져 하얀의 귓가에 어른거리고, 쥐어잡은 칼날을 강하게 그어내린다.
─쩌엉.
‘…무슨….’
‘불’의 무서움을 모르기 때문에 과소평가해버린 것.
그녀의 패배는 그렇기에 주어진 필연적인 것이었을까. 유리 깨는 소리와 함께 허망하게 갈라진 눈꽃이 대기 중으로 사라지고, 다가온 하얀의 칼날은 다시금 시종을 노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 들어올린 손을 콱 움켜쥔 채 앞으로 내지르니, 커다랗게 새겨져나온 골렘의 팔이 하얀을 가격한다.
콰앙!
커다란 소리와 함게 옥상의 바닥이 깨져나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다.
더욱 빨라진 속력은 불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인지하기 어려웠고, 커다란 얼음이었기 때문에 빛의 왜곡이 심해 제대로 비치지 않아서 하얀의 위치를 놓친 것이 그녀의 패배 원인.
그림자에 숨어 그 뒷목을 노리는 하얀의 칼날이, 매서운 소리와 함께 날아가고.
─쿠웅!
중엄한 소리와 함께, 아즈라엘이.
“…마냥, 광대는 아니었군요….”
어째서인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한다.
분노가 깃든 그 목소리는 그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치고 온 몸이 울 정도였으며,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적에는, 칼날을 막고있는, 아주 얇은 얼음의 선 하나만이 보였다.
그러나 그 얼음의 선이, 그녀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방패인 ‘눈꽃’보다 강하다는건 거짓없는 사실.
칼날을 밀어내며 떨어진 하얀이 흐릿해진 시야를 억누르며 호흡을 다잡고, 칼자루를 다시금 거머쥔다.
욱신거리는 온 전신이 움직이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었지만, 이젠 돌아갈 수도 없었다.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간신히 소강상태에 들어섰을 때 즈음, 뒤로 또각 소리를 내며 돌아본 그녀의 눈동자에는 차가움 이전에 거대한 ‘살의’와 ‘분노’가 내비치고 있었다.
빠득! 하얀의 귀까지 들릴 정도로 강한 소리로 이빨을 갈아낸 그녀가 말한다.
“그분께 하사받은 신성한 무기를 제 손으로 들게 만드시다니…!!”
끓어오르는 듯한 분노가 그 검은 눈동자 너머에서 이글거리며 비치고 있었다.
하사받았다면 사용하는 것이 당연할 터인 무기를, 스스로 붙잡고 사용하는 것을 불경하다 여기는 그녀에게 있어서 이 이상의 치욕은 존재하지 않았다.
감히, 자신의 주인께서 내려주긴 신성하고 아름다운 검을, 이 더러운 시종의 손으로 만져야만 한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치밀어오르고 있었다.
주륵.
피가 새어 나온다. 피할 때 어깨가 베인 듯싶었다.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피에, 타오르는 듯한 격통이 느껴진다.
육체 연소를 중단해야 하는 시점이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힘을 뺀다면 반드시 살해당함이 틀림없었기에.
피를 타고 새어 나오는 커다란 열 덩어리를, 가만히 내버려둔다.
그 열을 식혀주는 것은 단지, 소녀로부터 피어오르는 차가운 냉기뿐.
착! 소리가 날 정도로 소녀가 곧게 손을 뻗어올린다.
그에 응하듯 바닥에서 솟아오른 기나긴 손잡이로부터 칼날이 살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것을 얼마나 길까. 재어본다면 소녀의 허리만큼이나 올 정도로 긴 손잡이에 눈꽃을 결정화한듯한 매듭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하물며 그 칼날은 또 얼마나 큰가.
소녀가, 이즈라엘이 손잡이를 붙잡아 천천히 들어올린다.
가벼운 진동음과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칼날의 폭은 소녀의 어깨 폭보다 넓었으며, 건너편이 모두 비칠 정도로 맑고 투명한 얼음 빛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이는.
들고있는 소녀의 키를 아득히도 넘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
그것은, 한때 그들의 주인이 자신의 ‘성’의 ‘중추’를 직접 깎아 만들어낸 아주 고귀하고도 신성한 무구.
태도, 아이올로스.
“그 죄의 값은… 당신의 목숨입니다.”
그 커다란 검을 휘두른다.
다루기조차 힘들어보이는 그 검을 한 손으로 아주 쉽게 휘두르는 그 모습은 괴물. ‘시종’이라던가 하는 수준이 아닌, ‘기사’ 그 이상의 위용.
그어 내려지는 선로를 칼날로 막는 순간 직감했다.
검 째로 베일거라는 것을.
닿는 순간 튕기듯 쳐내고, 몸을 최대한 숙인다. 둔해져버린 몸의 반응이었지만, 생존을 위한 반응은 어마어마한 속력을 자랑했다.
그리고.
─째앵!
그 한 번의 튕김조차 견뎌내지 못한 칼이 베여 허공을 날아다닌다.
아니, 베인게 아닌 ‘부서진’ 것이다. 날끼리 만나는 순간, 검의 접촉면이 얼려져, 쉽게 부서져버렸다.
그리고─
안녕하십니까, AI미스틱입니다.
최근 새로 배우고 있는 기술이라던가 여러 가지로 일이 있어서 글을 쓰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회의감’이 들어서, 라고 생각이 됩니다.
과연 이 글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걸까, 라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어비스의 주인은 애초부터 ‘군주급’ 개체의 등장을 기초에 두고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그 군주급에 대해 대항하겠느냐고 말씀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그것 나름대로 어떤 방식이 있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이 어비스의 주인이 올라오는 시기가 늦어진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저, 삶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아가야하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채, 방황하기 시작해버린 모양입니다.
고작해봐야 반오십도 되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런 회의감과 동시에 심리적, 정신적인 피로와 육체적 괴로움이 겹쳐져서 일어나는 현상일지도 모르겠네요.
최근 한 분께서 프렌즈 메시지로 위로를 해주셨었습니다. 무척이나 즐거운 대화였습다만, 역시 그 짧은 새벽시간의 대화로는, 제 몸은 치료되지 못하는 괴로움을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안경을 맞춘지 오래 되어서 눈이 흐려지는 건지, 아니면 피곤해서 흐려지는 건지. 혹은 이미 지쳐버려서 흐려지는 건지. 이제는 자기 몸상태도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있어 육체/정신적인 소모가 있는 것은 맞습니다만, 고작 하루에 명령어 수백개랑 마우스질 수백번 하는 것 정도로 그렇게 소모될거라고는 생각지도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의문이 들기 시작합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이 순간에 의문이 들 정도로, 나는 한가한 것인가.
그리고 그 한가함에 있어 나는 어째서 의문을 품고, 바빠지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가.
과거의 저는 분명 더 나태해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던대로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시간이 한참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다가오는 회의감과 공허함은 채울 수 없는 괴로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받아들이고 싶다는 충동을, 처음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한다면 시간을 잡아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울고 싶을 정도로 무언가를 강하게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무언가를 강하게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저는 겉으로 드러내고 싶어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족들 모두, 저보다 더 괴로울지도 모릅니다.
가정 내의 불화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지만, 불화가 일어나는 가장 큰 장본인들이 받는 회의감과 괴로움은 더 비교하기 어려우니까요.
욱신거립니다, 이젠 정말 지쳤다는걸 알게 됐습니다.
사람이라는게 지치고 피폐해지면 얼마나 지독하게 변할 수 있는건지… 알게 됐습니다.
…랄까, 최근에는 다른 이야기도 병행해서 쓰고 있기에 더 피로해지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노트북을 붙잡고 다섯시간, 여섯시간을 투자해가며 써내려간 이야기는 고작해봐야 7페이지 남짓할지도 모르고, 10페이지 남짓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알고 계실지는 모릅니다만, 이 어비스의 주인을 계속해서 써내려갈수록 한계라는걸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게, 어비스의 주인은 처음부터 뼈대만 있었던 작품이니까요.
그 뼈대에 살만 붙이면 되는 것 아니냐, 고 묻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사실 맞습니다. 그러나 그 살붙이기가 지금의 제겐 너무나도 힘들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번 화, 아자토스 편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스스로 이름을 밝히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자토스’라는 군주의 이름을 밝혔습니다. 필력에 급격한 저하가 왔다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단 말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스토리 전개가 너무 허술하지 않나요?
갑자기 예고도 없이 짜잔~ 등장해서는 짜잔~ 퇴장해버리다니.
사실 그렇게 튼튼한 소설은 아닙니다만, 아직 보고계신 여러분들의 기대에 최대한 충족할 수 있도록, 앞으로 계속해서 달려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