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의 주인 2장 14화, 부정과 부정
AI미스틱 2021-01-25 0
2장 14화
不正과 否定
세상에서 단절된 듯한 그 감각.
그것은, 이곳에 있는 수많은 시간 속에서도 단지 그에게만 느껴지는 단편적인 감각에 불과했건만.
그 단편적인 감각 따위가, 세상 모든 것을 뒤바꿔놓을 정도로 강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 어릴 적에 보았던 그 모습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그 모습은, 쇠약해지기 전에 보았던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어서….
“…거짓말, 이야….”
무심코 말이 새어나와버리고 말았다.
지금 느껴지고 있는 감정은 도대체 뭘까.
배신감? 아니면 절망감? …확실한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단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그런 강한 충동감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버려도 좋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거짓말, 이야….”
그늘이 진다.
자신을 구축하고 있던, 그리고 자신을 유지하고 있던 세계의 기둥 모든게 망가지고 있었다.
허망하게 변해버린 눈동자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건지, 암흑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 눈에 비쳤으며, 강한 충동에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감정은 그 흔들림을 감추지 못한 채 안색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었다.
“이런게….”
진실일 리가 없었다.
눈앞에서 떠나보낸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했다.
따뜻한 방 안에 모셔두었음에도 차갑게 식어, 손을 맞잡은 순간 이제 더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제서야 떠나보낼 수 있었던 현실이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 거짓이라고, 단순한 악몽이라고 여겨지고 있었다.
그래, 이런 악몽이… 현실일 리가 없었다.
차라리 꿈이라면, 여기서 죽어서 잠에서 깨어버리는 게….
“…꿈, 일리가 없겠지….”
녹아내리는 마음을 꽈악, 붙잡고.
고개를 들었다.
치밀어오르는 눈물샘의 방울들을 막지 못할지언정, 지금 여기서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눈에 담긴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사랑’이었을 터인 아름다운 사람이니.
이젠 없어야 할 사랑이 다시 눈앞에 있는 것이야말로, 단아에게 있어서는 가장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었다.
꽈악, 하고 쥐어지는 강한 힘에 무기가 비명을 지른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서 있으려니, 그 모습에 아즈라엘이 한 발자국 내밀며 말했다.
“이런 현실에도, 유니온과 함께하시겠다는 건가요.”
그 말에, 단아가 잠시 고개를 저었다.
유니온과 함께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언제부터인가 없어져있었으니까.
언제부터 없었을까? 아버지를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그들을 인지했을 때? 아니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서야 아버지를 돌려보내주었을 때?
어느 쪽이건 좋은 기억은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 유니온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은, 유니온을 위해서라던가, 유니온과 함께하는 것 따위가 아니다.
“사람들을 위해서지.”
“…그렇군요.”
아니, 어쩌면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핑계의 자기만족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기에, 힘을 가진 자로서 이곳에 서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제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아즈라엘이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으며 말했다.
“앞으로 주인님의 행보에 적이 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바─”
─이곳에서 배제하겠습니다.
서늘한 감촉이 털끝을 스치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온다.
비치는 것은 적.
협상의 결렬은 곧 적대를 의미했으니, 좁은 에펠탑보다야 넓은 마천루가 더 나았다.
문제가 있다면, 단아가 그들에게 닿을 수 있는가 없는가일 뿐.
콰드드득!
갑자기 뒤를 감싸는 그림자에 봉끝으로 허공을 치니, 물결처럼 파동이 일어나는 공간의 일그러짐이 고형화된 얼음을 짓이긴다.
허나, 그 크기가 크고 굵기도 예사롭지 않은 것인지, 본래라면 깨어져 사라질 터인 것이 깊은 금을 내며 쩌억!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움직임을 멈추었다.
동시에 아즈라엘의 손에 무언가가 붙잡힌다.
그것은 기다란 봉. 무기의 손잡이처럼 생긴 그것을 붙잡고 휘두르는 순간, 길게 늘어져오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은 채 단아가 봉을 휘저었다.
─까캉!
돔 형태의 방어막이 형성된 듯, 얼음의 잔흔이 남는다. 살짝 피어오르는 서리가 공기에 녹아었고, 동시에 발현되었던 얼음의 흔적은 무언가에 갈려나가듯이 으깨어졌다.
그 모습에 잠시 주춤하던 아즈라엘이 몇 번씩 다른 형태의 무기를 조형해나가며 여러 방법으로 공격을 가하고, 이즈라엘의 얼음조형 역시, 몇 번이고 단아를 위협했지만.
결과적으로, 단아가 부수지 못한 것들이 있을 뿐, 그 무형의 돔 안으로 침입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약 스무 번에 가까운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자, 어깨에 무기를 걸친 아즈라엘이 조금이나마 이해했다는 듯 말했다.
“…휘감겨서 회전하는 공간의 영역, 인가요….”
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코 꿰뚫고 들어갈 수 없는 절대 방어의 영역.
아즈라엘이 기억하기로는, 방어형 공간 능력자라 해도 이렇게 완벽할 정도의 차단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일종의 ‘차단막’을 설계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공간 사이의 어떤 지점을 절단해, 그 좌표를 소실시키는 것 뿐.
하지만 그들이 적대하는 소년은 전혀 틀렸다.
좌표를 비틀고, 회전시켜서, 폭풍처럼 뒤집어 쓴 상태. ─개념 자체를 다르게 인식해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형태나 가장 다루기 쉬운 상태로 변환시킨 것뿐이겠지만, 그 위력은 억지로 비틀어버리면 소실되어 존재하지 않는 좌표로 만들어진 차단막 자체를 갈라 비집어 넣을 수 있는 아즈라엘조차도 뚫기 힘들 영역.
‘천재…인가요.’
바람과 관련된 힘을 다룬다는 단편적인 정보와, 공간에 관련된 힘을 다룰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주인님께 듣기는 하였으나, 설마 방어형….
‘아니….’
방어형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이즈라엘의 형태 조형을 부술 수 있던걸까.
차라리 공격형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공격형이라면 단 한 획 그어내리는 것만으로는 아즈라엘의 공격을 모두 막아낼 수 없었을 터….
“…공간 능력자를 만나는 것은 이 세계에서 두 번째입니다만….”
그 능력의 범주의 크기는 서너배 이상, 혹은… 애초에 그 능력자의 상위 호환 이상이겠지.
어떻게 생각해보면, 현단아라는 적을 이곳에서 만난 것은 아즈라엘에게 있어서 천운일지도 모른다.
이해할 수 없는 힘, 그것은 아마… 주인님에게도 닿을지도 모르는 불길함.
단순한 직감에 불과한 것이지만, 아즈라엘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소년이 가지고있는 천부적 재능과, 영웅적 기량을.
여기서 꺾어놓지 않으면 필시 커다란 재해가 되어 주인님과 그 군단에게 돌아오리라.
단 한번뿐인 공간 능력자와의 싸움.
하지만, 그 공간 능력자와의 싸움에서 조금이나마 그 힘을 꿰뚫을 방도를 찾았으니.
─숫자로 찍어누른다.
쩌어엉!
허공에서 탄생하는 수십수백개의 얼음창. 그것이 사람의 몸뚱아리따윈 쉽게 꿰뚫을 정도의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 수 있을 정도의 한기를 내비치고 있었으며, 아즈라엘로부터 퍼져나오는 살의 역시, 더욱 깊고 진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적….”
단 한 마디의 짧은 소음.
붉은 눈동자에 깃들어있는 방대한 양의 적의가 비가 되어 쏟아져내린다.
‡ ‡ ‡
연구소의 조사가 모두 끝났을 때엔, 이미 시간이 몇 시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그나마 챙길 수 있는 자료라고 해봐야 인공 클로저 계획 뿐이었지만, 이게 그의 마음에 들기를 바랄 뿐인 마음으로 거점에 돌아온 유주는, 그저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왔어요, 유주 형?”
이제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지, 의식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는 단아의 모습과, 항상 그에게 칭찬받기를 원했음에도, 한참이나 떨어져서 몸을 떨고있는 아나의 모습은.
실로 이질적이기 그지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이 아저씨와 할 대화가 있으니… 조금만 자리를 비켜주실래요?”
“현단아!”
빠즈즈즉! 노한 유주의 번뇌煩惱가 형태를 가진 듯, 커다란 푸른 번개가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으나, 정작 단아에게 향했던 얄팍하기 그지없는 한 줄기는 그에게 닿지도 못한 채 허망하게 흩어져 사라졌다.
아니, 흩어진 것이 아닌, 마치 빨려들어간 것만 같은….
“유주 형.”
이유도 모를 정도로 차갑게 돌변한 단아의 태도는, 마치 금방이라도 적의를 드러낼 것만 같은 모습이었고, 유주에 눈에 비치는 것은 이미 이빨을 한껏 드러낸 커다란 호랑이… 아니, 용이나 다름이 없었다.
도대체 연구소에 있었던 시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유주의 입장에서는, 그가 이런 태도로 나오는 것에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해낼 수 없었기에 한 발자국 다가가며 말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을 위해서 지금은! …지금만큼은 그 녀석의 말에 순종해야만 해.”
“…순종? 그것은 누구를 위한 순종인거죠?”
“너도 알잖아!”
“나는 이렇게 찢어질것만 같은데, 누구를 위해 순종을 한다는 말이냐고요!”
콰드드득!
커져나가는 단아의 영역이 바닥의 타일과 바람을 으깨면서 처음으로 적의를 드러냈으니, 만색을 깃들였던 금빛의 눈동자에는 어둠이 들어차서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새어나오는 위상력에 담긴 살의는 예사롭지 않아, 프레이 아델 로와의 관계에서, 혹은 그 너머… 유니온과의 관계에서 무언가 확연히 틀어져버렸음을 당연시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어떤 때라도 다른 누군가를 걱정하고 우선시한 채, 미소를 내비쳤던 단아의 모습이 그토록 일그러져있는 모습은 처음 보았던 유주가 내밀려던 손에 주먹을 감싸쥐었다.
“단아, 너….”
“유주, 잠시만.”
앞으로 나서려는 유주를 하얀이 한 손으로 제지했다.
그 상황에서 도대체 뭘 더 참으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유주가 뭐라 따지려고 하니, 하얀이 뻐꾸기를 바라보며 말했다.
“접속이 되어있어.”
뻐꾸기에서 빛나는 그 빛은 틀림없이 연락 연결의 증거였다.
즉, 이 상황을 프레이 아델 로는 모두 보고있다는 것이었으니, 악취미도 아니고 이렇게 뜸을 들일 이유는 없었다.
아니, 뜸을 들인게 아니라… 이쪽이 대화 이전에 먼저 도착한걸까.
“…저쪽이 알아서 할거야.”
단아의 상태를 보면 어떤 협박이나 강요를 받은 것도 아니니, 아마 프레이 아델 로 역시 대화를 할 생각은 있는 듯 싶었다.
그렇다면 굳이 이쪽에서 간섭할 필요는 없겠지.
안쪽으로 들어가서 출격 데이터를 확인해보자며 유주를 억지로 끌고가니, 그제서야 둘, 아니… 아나와 세이지까지 합쳐서 넷만이 남은 곳에서, 단아가 세이지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어?”
“형….”
“아니, 알고 모르고는… 그다지 중요한게 아니지.”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당신이 한 건가요? 프레이 아델 로….”
-…현단아 군, 자네에는 정말… 안타까운 소식이로군.
“그건… 나에게 안타까운 소식이 아닌… 나는 물론, 아버지에게도… 돌아가신 어머니에게도 최대의 모욕이라고!”
숨겨놓고 내비치지 않는다.
감춰놓고 알리지 않는다.
차라리 처음부터 대놓고 당당하게 그런 짓을 했더라면, 적어도 단아 자신도 이렇게 분노하지는 않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꽁꽁 싸매어 감추고, 장막에 가려서 숨기고. 그렇게 해서 진실을 숨겨서 자신을 속이려 하고.
그의 인생에 크게 남을 상처를 지게하고.
아버지의 인생에 크게 새겨질 흉터를 다시 터지게 만들고.
행복했을 터인 어머니의 모든 인생을 모욕한 그 일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유니온이고 뭐고… 민간인을 방패로 내세우는 당신같은 사람들만 아니었으면 난 지금 이 자리에서 클로저를 그만뒀을 거라고!”
유니온의 관계자 앞에서, 아예 클로저를 관뒀을 거라며 강하게 외치는 단아의 목소리에 프레이 아델 로는 화면 너머에서 덤덤히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긍정의 의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네는 내 지시에 따라야만 하지.
“프레이 아델 로…!”
-내 시간이 조금 더 많았더라면, 어쩌면 자네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대화를 했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야.
“당신은 내 인생의 모든 걸 부정했어, 그런데도 내가 당신에게 협력하기를 바란다고?”
…웃기지 마.
핑핑 돌기 시작한다.
단아를 중심으로 극도로 회전하는 공간 그 자체가 일그러지며, 마치 블랙홀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빛이 일그러져 들어가는 현상이 공간이 찢어지고 구겨지며 그 형태를 드러내고, 금빛의 눈동자는 용의 어지러진 혜안처럼 강한 심연만을 품고 있었다.
-현단아 요…
“선풍.”
─퍼지는 꽃바람.
콰아…아…
콰과과광!!
단아를 중심으로 수십 방향으로 퍼져나가는 바람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간의 압축형.
공간이 지나간 흔적으로부터 압축되어 가두어진 공간이 순간적으로 해방됨으로써, 커다란 반발 작용이 일어난다.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은 ‘공간’이라는 개념.
공방 형태의 공간이 아닌, 개념의 총괄이자, 이 세계의 근간 그 자체.
말 그대로, 세계를 쥐고 흔드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비틀어지면서 꼬아서 선 형태로 이루어진 공간들은 선풍을 타고 온 방향으로 내지르고,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니, 본래 존재할 터인 좌표에 새로운 좌표가 덮어 씌어지며 일어나는 커다란 부작용은 ‘소멸’.
있어야 할 곳에 있어선 안될 공간이 덧씌어지며 일어나는 붕괴 현상.
그래, 그것은… 이론상 최강의 창이자, 최강의 방패이니.
유니온이 가진 최고의 병기였다.
그러나, 유니온은 지금, 이 순간 그 병기를 잃었다.
자존심, 긍지, 명예, 그리고… 가치관과 인생.
모든 것을 부정할 정도로 강한 자극을 가한 탓에 일어난 부작용의 일부에 불과한데도.
-…뻐꾸기가 무사한 게, 용하군….
단지 화풀이 대상을 찾지 못한 분노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내비친 힘은, 거점의 집합 장소 거의 8할을 붕괴시킨 다음에야 풍랑이 멎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힘을 무차별적으로 행할 수는 없겠지. 이쪽엔 인질이 있으니까.
혹은, 인질까지 신경쓰지 않을 정도로 눈이 돌아가버렸거나.
후자면 다루기가 상당히 난폭해진다. 그의 능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기입되어있지 않지만, 전투 데이터를 살펴보면 아마도 무상성에 가까울테니까.
한참동안이나 정적이 흐르고 있자니, 단아가 봉을 치켜들었다.
“…언젠가 반드시… 빚을 갚아주지.”
-…할 말은 다 했다고 판단하겠다. 조금의 휴식 시간을 가지도록.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뻐꾸기의 통신이 끊어졌다.
끊어진 뻐꾸기가 충전 모드로 들어가 있는 사이, 그나마 자리에 남아있던 세이지가 단아에게 말하기를.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적어도 지금은….”
“…무슨 방도라도 있는거야?”
“…네.”
세이지의 눈에는 늘 확신하지 못했던 전과는 달리,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방도나 수책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 일이 끝나면… 유니온이고 뭐고 다 부숴버리겠어.”
“…형이 죽을지도 몰라요.”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겠지.”
그 말을 끝으로 단아가 사라지니, 결코 숙소 안은 아니라는 것 쯤은 잘 알고 있는 세이지였지만, 굳이 쫓을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의지를 갖고있는 현단아인 이상, 적으로 돌아갈 일은 없다고… 지금은 막연히 그렇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파리의 거리….
홧김에 뛰쳐나온 것도 있었으며, 어쩐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뛰쳐나온 것이었으며.
어디까지나 강한 충동에 불과한 행동이, 어째서 단아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인지는 모른다.
튀르비고 천사상.
차원 전쟁 시절 무너져내렸지만, 다시금 재건한 이 천사상은 이번엔 또다른 외세에 의해 반쯤 얼어붙은 채, 그 형태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간 있었던 수많은 격전 속에서, 이렇게나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크게 많지 않았건만.
거리의 전등들도 모두 불을 잃고, 바람이 몰고오는 어둠만이 있는 그곳에서, 단아가 그 예술이나 다름없는 조각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애를 나타낸다고 알려져있는 천사상.
천사‘상’인 만큼, 말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단순한 돌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 세상에 천사가 존재한다면, 이라는 강한 감정을 담아, 물어보았다.
“…자애, 라는게 뭔가요….”
자애, 한국의 사전에서는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도타운 사랑을 의미하며.
어떤 감정적인 측면에서는 동정에 가까우며.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이 누군가를 찾을 때는, 그토록 괴롭기 때문에 찾는 것이리라.
아버지는 곁에 없으며, 어머니는 일찍이 떠나가신 분이니.
단아에게 있어서 자애라는 것은, 어머니가 떠나가시기 전에 남겨주는 애정이자 사랑이나 다름이 없었다.
괴로운 감정, 어디선가 욱신거리는 이 감정은 분노인가, 괴로움인가.
“괴로운 일이 있다면 한껏 소리쳐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죠.”
“…누구지?”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봉을 치켜들고 경계태세에 들어가니, 바람과 함께 어둠이 걷혀가며, 달빛이 스며들었다.
장막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현재 파리를 지배한 왕이자 군주였으니, 여섯 번째 주인 하니엘은 적대 의사가 없다는 듯 걸어와서는 천사상을 올려다보았다.
“튀르비고 천사상. 제 고향 지구에도 있었던 것이지만… 이제는 존재의 의미조차도 찾지 못하는 돌덩어리일 뿐이죠.”
“…여기엔 뭐하러 왔지?”
“설령 당신이 내 제안을 거절했다 하더라도, 조금은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 않았을까, 싶어서 조금 찾아와봤죠. 설득의 성패야 아무래도 좋지만….”
단아가 몇 발자국이고 멀어진 곳에서 경계를 하고 있으려니, 하니엘이 말했다.
“지금만큼은 적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조금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할까요.”
통, 하고 허공을 손가락 끝으로 스치니, 쩌억 하고 얼어붙은 튀르비고 천사상은 얼어붙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태를 유지했으니, 얼어붙은 다음에는 그것이 크리스탈이라고 착각될만큼이나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천사상을 가운데 둔 채, 하니엘이 입을 열었다.
“당신도 알겠지만… 난 본래 인간 출신이에요. 그것도 한국에서 태어난. …나이로 따지자면 지금쯤 40은 충분히 넘었겠군요.”
“인간에 한국 출신? 재미있는 농담인걸. 혈관까지 얼어붙은 냉혈한이 아니라?”
“믿건 말건 아무래도 좋지만… …중요한건, 내 인생이 되겠군요.”
하니엘… 인간일 시절의 이름은 어느샌가 버려버렸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은 악몽처럼 강하게 새겨져 있었다.
“고향에는 위상력이라는게 존재하지 않았죠. 하지만… 저는 어떤 돌연변이가 생겼는지, 초능력이라는 것을 아주 조금… 사용할 줄 알았죠.”
고작해봐야 얼음 몇 조각을 만들어내는게 전부일 뿐이었지만, 당시 세계는 새로운 ‘힘’을 얻기 위해 혈안이었다.
어줍잖은 흔적 지우기로는 도망치기도 어려운 세계에서, 그녀는 끝내 꼬리를 붙잡혔으니 그것이 몇 살일 적이더라.
“부모는 날 팔았고, 날 사들인 국가는 또 다른 국가에 날 팔아넘겼죠.”
부모에게 거액의 돈─그것도 수십 년은 놀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 돈을 쥐어주고, 그녀는 국가의 소유품이 되었다.
당연하지만, 당시의 한국에는 기술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며, 천연 자원은 역시 제로. 남은게 인력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설화라는 최고의 상품이 탄생했으니, 그녀를 사들인 것은 다름아닌 바로 바다 하나 너머의 나라인 일본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처음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고팔리는 그 어린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지.”
─빠직.
천사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니, 가련하다는 듯 천사상을 바라보고 있던 하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자애와는, 영 거리가 멀겠죠.”
─쿠궁, 궁….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천사상이 무너져내리니, 그 모습을 단지 바라보고만 있던 단아에게 하니엘이 말했다.
“나는 세상에서 인간이 가장 싫어요.”
“그렇다면 나를 앞에 둘 필요도 없지 않나?”
“인간에겐 살아가면서 필요성따윈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감정이라는게 존재하니까요.”
효율의 극한과, 약간의 동정.
그 둘이 섞이게 된다면, 극한까지 끌어낼 수 있는 효율은 떨어지게 되기 마련.
“단지 그런 차이일 뿐이죠,”
“동정인가? 수천 수억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피를 묻혀온 네가?”
“자신과 얼마나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이 살해당했다는 뉴스 하나만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인간일 뿐이죠.”
“죄 있는 수천만을 위해 죄 없는 수억명을 죽여놓고?”
“아무리 인간을 싫어한다 한들, 나도 결국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괴물이니.”
“너는!”
“그래서 나는 내가 싫어.”
콰득!
하니엘의 구두굽을 시작으로, 타일 전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피어오르는, 처음 보는 그녀의 ‘검은’ 힘은,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크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얼음성의 질량과 크기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고, 도시 하나가 가라앉을 정도의 위용을 떨치는데, 그런 그녀가 검은 힘까지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눈이 흔들리니, 하니엘이 그런 단아에게 말했다.
“지금 이렇게 네게 감정을 이입하고, 동정해버리는 내가 너무나도 싫어.”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유일한 감정.
그것은, 인간을 증오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불필요한 감정이나 다를바가 없으나, 인간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인 그녀는 그 감정을 모두 배제하지 못했기에, 결국 이런 꼴이었다.
끝내 단아로부터 시선을 돌린 하니엘이 펄 한쪽을 뻗어 말했다.
“다음에 만나게 된다면… 일말의 동정도 없이 얼려서, 내 성에 전시해주지.”
이 빌어먹을 인간성과 감정을 떠올리게 해준 그에 대한… 보복의 선언이었다.
퍼석.
그 말을 끝으로, 온 전신이 얼음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사라진 하니엘의 모습을 보던 단아는, 그저 봉을 강하게 쥐며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다음에 만날 때가… 마지막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허망하게 얼어붙어 전시당하는 조각상이 되지는 않으리라.
찌이이익!
강하게 뜯겨져나가는 공간의 소리와 함께, 끝내 천사상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네, AI미스틱입니다.
본편은 장소의 변환이 거의 없이, 오로지 하늘새 팀의 상황만으로 표현해드렸습니다.
단아의 감정을 이해 못할 수는 없죠. 사실상 검은양도 김유정이 아니었다면 세하의 일탈 위기이기도 했고요.
또한 그렇다고 단아를 말리려던 유주를 잘못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이번 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전부 유니온이 배후임’ 이라는 결말을 내고싶은 것이냐, 고 물으신다면.
큰 단체에는 그만큼 커다란 어둠이 있기 마련입니다.
유니온이 검은 위상력 프로젝트의 배후라는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자 진실이고.
기적이자 인류 최고의 힘인 검은 위상력을 얻기 위해 고인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려 했다는 것 역시, 진실의 일부일 뿐입니다.
하지만 과연 어떻게 변화할지는 모르겠군요.
연하은의 행보로 인해 유니온 상층부 관계자들은 대부분 사망, 총장은 도주중이며, 프로젝트의 관계자들은 사망 외엔 은거, 혹은 두 명만 활동 중일 뿐이니.
이번 사건을 빌미로, 어쩌면 유니온이 크게 달라질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고 이번 2장 14화를 기점으로, 단아와 하니엘이 완전 대립구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물론 힘은 완전 대립구도가 아니지만요.
한쪽은 검은 힘, 즉 은총 없이도 주인의 자리를 꿰찬 얼음성의 주인이고
한쪽은 인류가 가진 최강의 창이자 방패이다 보니
검은 힘의 개입이 없다는 가정 하에, 어떤 식으로 대결 구도가 그려질지 저도 궁금해집니다.
물론 이즈라엘 남매와 전투를 벌이고 그 사이에 하얀과 유주가 하니엘과 싸울지도 모르고요.
그리고 또한, 설정집의 어비스 세계관 시간대에서 말씀드렸던 하니엘의 과거가 조금 드러났습니다.
아무리 유사한 세계라 할지라도 세계 역사 자체에는 아주 미세한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발생한 일시적인 평화와 냉전체제는 결국 각국에게 더 큰 힘을 원하게끔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본은 우리가 살고있는 역사대로 패전국이 되어 핵이나 군사 보유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전력이 필요한 상황이었고요.
그런 상태인데 옆나라에서 군사 기술같은게 아닌 사람을 판매한다고 아주 광고를 때려버리니, 그걸 적절히 이용해먹기 위해 사들이는건 상당히 괜찮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거기에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과거로 인해 하니엘은 인간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결국 하니엘도 인간이었던 존재인지라, 아무리 주인으로 격상한다 해도 인간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죠.
감정과 인간성, 그것조차 없는 인간은 이제 인간이 아니니.
그런 괴물이 되기를 원했지만,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던 인간성을 ‘변화’로 배제하는건 불가능합니다.
위대한 별이 직접 가공한다면야 뭐 말이 달라지겠지만 말이죠.
그럼,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