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파이] 얼음에 잠긴 초신성 1화 - 리메이크
슈퍼갤럭시캬루단 2021-01-01 2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네."
여느 때와 같은 귀가. 6년이나 되는 긴 결혼 생활 임에도 아직도 이세하에게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인사다. 아내가 현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남편을 맞이하는 매우 구시대적인 문화지만 그녀에게는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오히려 배우자가 된 입장에서 응당 취해야 할 자세이다.
"외투, 제게 주시죠. 걸어두겠습니다."
"아니... 아니요! 이건 제가 할게요."
"하지만...."
"이런 것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 늦은 시간이라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쉬세요."
21세기에도 사극에서 나오는 장면처럼 상호존대를 하며 딱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집안.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존대는 상호존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아직도 체 좁혀지지 못한 거리감에서 나온다는 의미다. 짧지 않은 결혼 생활에도 이 둘의 간극은 여전히 멀기만 했다.
철컥.
이세하는 아이의 방에도 들리지 않고 곧바로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사실 이 둘은 신혼 초부터 각방을 써왔는데 파이가 강하게 반대한 것을 비굴할 정도로 낮은 자세로 부탁하여 얻은 결과다. 결국, 잠자리는 고사하고 식사조차 함께하지 않는 일이 잦았는데 이는 부부관계가 극도로 소원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대로면 안 되겠지만......`
자신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과거 그녀가 자신에게 행한 끔찍한 행위가 깊은 후유증으로 남아 정신약까지 복용하는 이세하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다. 의도적으로라도 거리를 둬야만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극도의 심신미약 상태에서 가정의 화목까지 챙기려 하는 것은 너무나도 큰 욕심이었다. 자신의 방에 딸려있는 욕실에 들어선다. 집에는 욕실과 화장실이 각각 2개가 있는데 하나는 거실, 하나는 세하 방에 붙어있다. 그렇기에 집안에서도 서로 마주칠 일이 잘 없이 생활하기가 용이했다. 당연히 청소도 자기 손으로 직접 했는데 세하가 바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3분 정도 따뜻한 물에 담갔다가 바로 헹구고 나왔다. 애초에 작전이 끝나고 나서도 샤워를 했기에 지금은 복잡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의식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이 안심되기는커녕 더욱 심란해지자 포기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아...하아...."
차마 잊을 수 없을 그 날의 강렬한 기억. 사자에게 목을 물린 사슴처럼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었어야 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뜻하지 않은 아이가 태어나야 했고 아무도 바라지 않은 결혼을 해야 했다. 차라리 없었던 일로 하고 새로운 삶을 찾으려는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파이의 뱃속에서 태어난 자신을 빼닮은 아이의 모습은 차마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족쇄가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에게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할 수는 없다는 마음에 묶여버린 것이다.
하지만 가정은커녕 자기 자신조차 컨트롤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어떠한 진전도 없이 시간만이 허무하게 지나고 말았다. 결국, 김재리가 가장 걱정했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세하는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른 다음 옷을 갈아입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려 했다. 복용하고 있던 항정신제 약은 사람을 쉽게 피로로 유도하기에 옛날에 즐기던 게임을 할 여력은 없었다. 그런데.
똑똑.
다소 정갈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당연히 이세하는 이 소리를 낸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다.
"누나?......"
"갑자기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
무의식에서 오는 두려움이 피부를 파고들었고 손은 수차례 떨기를 반복했다. 반면 파이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비장함이 묻어있었다. 강한 다짐을 하고 온 눈치라서 이세하는 마냥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얼굴만 보이도록 살짝 문을 연 뒤,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무슨 일이죠?"
"일단 제 방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하겠습니다."
"......"
드라마에서 나오는 장군처럼 똑 부러지는 기백. 이세하는 이것을 상대할 재간이 없었다. 분위기가 평소와는 확실히 달라졌다는 걸 감지했지만 거절할 수 있는 용기는 없다.
"여기에서... 말씀해주실 순 없나요?"
"안됩니다. 직접 와주시길 바랍니다."
파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 의사를 밝혔다. 상황이 이렇게 흐를 것을 본인도 미리 인지했다는 의미. 하지만 이세하는 그녀와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렇게 응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하고 시간만 흐르고 있었을 때.
"실례하겠습니다."
파이는 세하가 지탱하고 있던 문을 재낀 뒤,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방으로 인도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에 미처 손 쓸 여유조차 없었다. 방은 불이 **있었고 테이블 위에 작은 양초와 반쯤 줄어든 와인병이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 그녀의 행동이 짐작될만한 물건들이었다. 파이는 세하를 곧바로 침대로 눕혔다. 이어 그의 위에 올라타 자신의 잠옷을 풀어헤쳐 속옷이 보이도록 했다.
"누나?"
짙은 보라색의 브래지어와 골반의 형태을 부각하는 가터벨트. 물론 세하는 파이가 이런 식의 속옷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니, 그녀의 평소 행실로 보아 관심조차 가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부끄러운 기색이 없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세하를 내려다본다. 이세하는 그녀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어떤 경위로 지금에 다다랐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리고 도입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바로 던진 말은.
"절 안아주시겠습니까?"
"......"
꿀꺽. 침을 한 모금 삼킨 뒤, 파이의 행동에 의미를 살펴본다. 지금 그녀는 왜 이런 행동을 취하고 있는가. 무엇이 이런 행동을 하도록 유도했는가. 되돌아보면 결혼한 뒤에는 단 한 번도 그녀와 단둘이 잠자리에 든 적은 없다. 아이와 셋이서 나란히 잠든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소위 말하는 부부의 행위까지 도달하지는 않았다. 물론 파이가 이세하에게 이 부분에 있어 직접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주제였다.
"그건......"
파이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채 받아주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다. 제대로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알아서 포기하겠지라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오히려 역효과로 작용했다.
"왜... 제가 아이를 낳은 몸이라 그렇습니까?"
"에...?"
"그럼 제게 그리도 무심하십니까? 이슬비 요원님을 향한 감정의 반절이라도 제게 나누어주실 수 없으십니까?!"
이세하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평소에 의식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파이에게 찔렸다고 생각하니 주체할 수 없이 미안하고 또, 괴롭게 느껴졌다. 실제로 아내를 봤을 때보다 동료를 대할 때가 비교도 안될 정도로 평온했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머리를 자르라고 하면 자르겠습니다. 기르라고 하면 기르겠습니다. 바라신다면 원하시는 그 어떠한 모습으로라도 변하겠습니다. 그러니 더는 절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눈물이 파이의 볼타고 흘러들어 가 세하에게로 떨어진다. 단순한 눈물이 아닌 기나긴 영겁의 한이 맺혀진 터라 이세하에게는 더욱 따갑고 뜨겁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인지하지 못했다. 세하가 파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기피에서 오는 것이 아닌 무의식에 따른 두려움이라는 것을. 지금 이렇게 떠는 모습조차 그 여파라는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누나."
이세하는 가까스로 떨림을 억제하고 파이를 감싸 안았다. 오랫동안 그녀의 마음에 자리 잡은 한기가 조금은 누그러진다. 하지만 천장을 바라보는 세하의 시선은 공허했다. 마음만은 파이에게 자리 잡지 못하고 붕 뜬 상태로 남았다. 그의 눈이 비치는 세상은 주변이 차가운 얼음 서리로 가득 차 디딜 곳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 서리는 강한 사념을 가져 세하가 그녀에게 벗어나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있었다. 의식이라도 약간 놓지 않으면 도저히 맨정신으로 받아내지 못한다. 그가 파이에게서 거리를 두었던 궁극적인 이유, 그녀에게는 무엇보다도 강한 또 다른 인격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요... 제 몸이 무너질 정도로 더 강하게 안아주세요. 제게 더 사랑을 주세요."
이세하가 바라보는 시선으로는 지금 안고 있는 여성은 파이가 아니다. 파이로 둔갑한 무언가일 뿐. 그러나 구분은 무의미했다. 그녀는 이 세계에 있는 누구보다도 더 충실히 파이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알면서도 속을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포옹 이상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이세하는 수면제의 영향으로 바로 잠들고 말았으니까. 그것도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다.
"이런,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잠드셨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내일부터는 기력에 좋은 음식을 잔뜩 드셔줘야 할 테니까요. 각오해주세요♡"
허리를 감쌌던 팔의 힘이 풀리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대신 그의 볼, 입술, 목 등을 하나하나 음미하듯 어루만져가며 흡족한 미소를 보냈다. 짙은 심연의 눈동자가 무방비한 자신의 목표을 비추는 것에 환희하며 어쩔 줄을 모르고 요동치고 있다. 이때, 이세하의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의 액정에는 『이슬비』 라는 문자를 출력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에 응답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전에 작성했던 글을 재구성합니다. 사실 내용 자체는 80~90% 같아서 리메이크라고 부르기도 민망하긴 한데 실패하더라도 일단 해보려고 합니다. 이전 글은 타임 코스모스도 아니고 시간, 시점이 엄청 왔다 갔다 해서요;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