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의 주인 <2장 4화> : 하늘새의 리더 + 아나 스타피트 소개
AI미스틱 2020-12-11 0
몇 번의 공방. 고작 몇 번의 칼부림. 무의미한 칼부림에 불과하다.
허공을 가르고, 갈라진 허공을 찢으며 들어오는 흑색의 공격에 위협을 느낀다.
압도적인 힘. ‘복수’를 위해 얻었다고 하는 그 힘의 크기는, 이미 하얀의 예상을 뛰어넘은지 오래였다.
까가가가각!!
검을 갈아내며 뒤로 물러전 하얀이 숨을 돌린다.
분명 저 힘은 압도적이고,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얀이 물러서지 않는 이유는.
‘어디선가.’
위화감이 든다.
하은이 맞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런 의심이 들고 있었다.
의심에 의혹에. 어쩔 줄 모를 정도로 커다란 무언가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 안에 있는 것이, 정말로 하은이라는 인간이 맞느냐는 듯한 의구심이 들었다.
두 눈으로 직시한다. 검게 물들어, 이제는 심해보다도 깊은 흑빛을 띄고있어 빛조차 닿지 않은 그 눈동자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회한도, 재회의 감회도, 심지어는 후회마저도 들지 않은 그 눈동자는 겨울철의 고철덩이만큼이나 차가워, 바라보고있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단순히 쳐내기만 하는거라면 날 이기지는 못해.”
“….”
“친구라는 하찮은 이유로 해치는걸 두려워하는거라면, 그 하찮은 우정이 네 목숨을 빼앗을거야.”
우정 따위가 아니다.
그렇게 깊은 인연을, 하찮다고 말할 리가 없었다.
그제서야 인지하고, 올곧게 바라본다. ─그녀는 하은이 아니라고 단정짓고, 그제서야 불쾌한 허물을 훌훌 벗어던진다.
펜던트에 깃들어있는 단 하나의 엣 소망. 자그마하고 낡은 사진에 깃든 리미터에 손을 가져다댄다. 어비스와의 접촉이 많아진 현재,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특수 상황에 대비해 상부로부터 단 한번, 작전 도중 리미터를 풀 수 있는 허가를 받아내었다.
분명 그로 인해 펼쳐질 지옥은, 하얀의 몸마저도 불태울 정도로 뜨거운 겁화일 터이나.
─하지않으면 안되기에.
피잉, 하며 무언가 끊어지는 감촉과 함께,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마그마보다 뜨겁게, 화산보다 강렬하게.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위상력이, 약 기운으로 인해 정돈되지 않은 위상력이 그 마수를 뻗어 커다랗게 뻗어져나간다.
산만한 괴물의 입 속에 집어삼켜지는 듯한 뜨거움과 함께, 눈이 붉게 달아오르고, 그 가녀린 팔의 핏줄이 마치 금가듯 자홍색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위상력을 의도적으로 폭주시켜 순간적인 출력을 높인건가? …위험한 일이야, 죽을거라고.”
“그렇다 해도.”
눈 앞에 다가온, 힘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하은을 붙잡을 기회는 단 한번 뿐이다.
지금의 그녀는 자신의 위상력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 ─그 증거는, 지금 이렇게 두 발로 대지를 디디고 움직일 수 있는 하얀이 증명하고 있었다.
그 몸의 현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확실한 것은.
“너무 얕보고있어.”
신체 위상능력자의 가장 큰 장점은 폭발적인 신체 능력이다. 그 점을 간과하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통구이가 될텐데.
실로 눈 깜짝할 새에 다가선 하얀이 검을 휘두르니, 그 검에 위협을 느꼈는지 멀리 날아오른 하은은 손 안에 검은 위상력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일점집중. 단 하나를 꿰뚫기 위한 압축 탄환.
반면, 하얀의 검은 초 고열로 불타오르는 듯, 새하얀 빛을 내며 이글거리고 있었다. 얼핏 보면 위상력 때문에 자홍색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나고 있었지만, 분명한건 빛의 형태에 가까웠다.
둘 중 하나라도 움직인다면 그 즉시 시작될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하은 쪽은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 탄환 하나에 목숨이 걸렸다는 것을 인지한건지, 아니면… 단순한 준비인건지.
“….”
한참이나 대치하고 있던 중, 하은 쪽에서 무언가 눈치를 챘는지 손에 담긴 위상력을 거두어내고 다시금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큰 틈을 놓칠 하얀은 아니었지만, 마치 그 사이에 무언가 가로막고있다는 기분에, 그 불쾌함에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하고 있자니 2초가 채 가지도 않은 순간 흑색의 무언가가 강하게 내리쳤다.
콰아아앙!
커다란 굉음과 함께, 뉴스에서나 보던 초 대형 싱크홀보다 더 깊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의 구덩이가 생겨났다. 만약 그녀를 붙잡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면, 죽는 것은 하얀이 되었으리라.
저 멀리 사라지는 친구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파왔지만, 그럼에도 붙잡지 못했다.
지금 하은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자는, 비록 하은이라는 인간의 위상력에 대해서는 무지할지언정 그 ‘흑색’을 다루는 능력만큼은 그녀보다 뛰어났기에.
위상력을 압축하면서도, 이해 자체가 불가능한 흑색을 동시에 다룬다는 것은 아마도….
“주인….”
어비스의 주인.
그런 개체가, 또 있다는 말인가. 그것도… 정신 조작 계열의.
만약 그런 개체가 있다면, 인류는 여지껏 상대하지 못한 최악의 적을 상대하게 된걸지도 모른다.
위상 능력자마자 홀려버릴 정도로 강한 정신 조작을 가하는, 그런 개체가 있다면.
‡ ‡ ‡
“그래, 그래. 잘 잔다 우리 아가.”
욱신거리는 심장의 소음이 잦아든 세계.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되는 세계.
아─그것이야말로 천국이라 부르는걸까.
무언가가 가까이 다가와 건드리는 듯한 감촉, 그것은 소름끼치게도 편안하고 따뜻해서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만 같은 충격이었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달콤한 멜로디가, 하프같은 노랫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힐때마다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와, 모든 것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러한 편안함 속에서 끝내 온 정신을 놓아버리고, 모든 몸을 맡긴 채, 현실로부터 도망친다. 누군가는 비겁하다고 말할지는 몰라도, 비겁해지는것도 좋다. 단지… 더 좋은 꿈을 꿀 수 있다면.
“그래, 아가… 잔혹하고 눈물겨운 현실은 내가 모두 무너트릴테니, 너는 이 꿈속에서 영원히… 자고있으면 된단다….”
그녀의 기억이 흘러나온다.
물 속의 공깃방울처럼 새어나오는 그 기억들은, 그녀의 복사된 기억이면서, 앞으로 그녀가 될 존재가 가져야만 하는 기억들.
그 연구소에서의 가혹한 기억. 그 잔혹한 기억. 그 모든 것을 덮을 정도로 달콤한 향과, 꿈꾸지 못했던 행복으로 가득 찬 공간을 내리며, 그녀를 한없이, 한없이 이곳에 붙잡아둔다.
꼬옥, 하고 쥐는 자그마한 손에서는 끓는 듯한 온기가 느껴지고, 그 온기는 곧 편안한 따스함으로 변해, 침대 위에서 이불을 덮은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우리 아가… 우리 아가….”
‘그’의 부탁.
그가 부탁한 것이라면, 들어줄 수 밖에 없겠지.
이런 자그마한 소녀를, 이런 행복한 꿈 속에 둘 수 있다니.
그 아이는 정말로 ‘축복’ 받은 아이인걸까, 아니면… 그의 눈에 들었기에 불행한 아이인걸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끔, 이렇게 꿈을 내려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행복의 꿈을.
‡ ‡ ‡
하루가 꼬박 지나고 나서야 유주가 잠에서 깨어난다.
그만큼 약의 효과가 강할지언데, 그런 약으로부터 한나절도 채 되지 않고 깨어난 하얀은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걸까.
나름 가지고 있던 것들 중에서 가장 강한 약을 투여한 마나가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르가 물었다.
“웬 입맛을 다시나요? 마나 요원님.”
“아….”
거짓말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걸지, 약병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 머리를 긁으며 답했다.
“뭐랄까, 두 분의 모습을 보면… 뭔가 위태로워 보이고, 그런 두 분을 붙잡아놓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안되는 제가 너무… 무능해보여서일까요.”
그 말에 리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요. 두 분이 너무 열정적인거니, 마나는 지금껏 했던대로 해주세요.”
“…네.”
그녀는 결코 무능하지 않다.
애초에 그 둘을 몇 시간이고 재울 수 있는 약을 소지할 수 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평범한 위상능력자라면 분명 며칠은 재우고도 남았을텐데도.
아마 그들을 휩쓸고있는 ‘악몽’이, 그들이 자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걸지도 모른다.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은 리르는 작전 구역에서 일어난 한 소동에 대해 자료를 펼쳐보았다.
‘연하은’이라고 불리우는 특A급 차원종의 등장. 전투 이력만 살펴보면 특A급을 뛰어넘어, 이미 S급에 준하는 영역에 도달했으나 특이하게도 상층부에서는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전투에 참여했던 하늘새 2분대 대원 네 명은 중상을 입었고, 그 중 두명은 치명상으로, 넷 전원이 검은 위상력을 개방. 상층부에서 금지했던 조항 하나를 본인 판단에 의거해 깨트렸다.
이에 대해 어떤 조치가 취해질지, 스스로 생각해도 두려웠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생각한것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게, 실제로 아무런 제재도 내려오지 않았으니까.
이번 전투에 있어서는 불합리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인지한건지, 아니면 위에서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건지, 검은 위상력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층부에서는 연락 하나도 채 주지 않았다.
그 덕에,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지만.
“…어비스가 되면서 성격에 변화가 일어난걸까.”
영상으로 본 것 뿐이지만, 그녀의 전투 방식은 여태껏 그녀가 보여준 방식과는 많이 틀렸다.
압도적인 힘으로 ‘짓누르는’ 듯한 행동. 기술과 테크닉으로, 그 출력을 제어해가며 ‘통치’한다는 느낌으로 잡아먹는 그녀의 분위기와는 사뭇 틀렸다.
익숙하지 않아보이는 위화감에, 손톱을 씹었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변화한걸까. 어떤 일을 겪었기에 변화한걸까.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에 있는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인 가운데, 유주가 다시금 출격했다.
이번에는 상층부에서 내려지는 출격 명령으로, 관리요원인 리르가 막아설 수는 있었으나 ‘하루가 멀게 쉬었는데 더 쉬기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계속해서 출격했다.
몸이 버틸 리 없을 정도로 혹사하고있는 그 모습은 죽음을 바라는 새의 모습같았다.
반면, 한 차례 연하은과 교전한 하얀은 그 변화한 모습에 충격을 먹은건지, 아니면 약기운이 뒤늦게 돌아든건지. 한참동안이나 잠에 빠져있었다. 돌아온 이후, 하루가 새어갈 정도로.
그리고 그만큼 빈 공백을 유주 혼자서 메꾸고 있었다.
운인지, 유주는 연하은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으며, 이후에도 종종 재해 복구 본부에 나타난 연하은은 나타날 때마다 많은 희생을 내어가며 하늘새 2분대를 찾고 있었다.
“도대체 어째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하늘새의 아이들을 찾을만한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유라고 해봤자 검은 위상력의 사용자라는 것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떻게 해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검은 위상력의 사용자이기 때문에 죽이려 드는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과, 어느 정도 근접한 예상 속에서 무언가 감을 잡은 듯한 리르가 서둘러 자료를 **보기 시작했다.
‘검은 위상력’, 그리고 그 탄생의 비화.
그들은 어째서 탄생했으며, 어째서 만들어져야만 했는가.
그리고 그들을 만들어낸, 역사에 길이 남은 생명공학의 귀재는 도대체 어째서 그들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그가 원한다면, 연하은이라는 존재를 몇 번이고 만들어낼 수 있었을텐데.
어째서, 어째서.
몇 번의 의문과, 의문과, 또다시 의문을 겹치며, 자료를 거슬러 올라가던 리르는, 그 자료가 끊어진 다음에야 그 손을 멈추었다.
그녀가 이 실험을 시작한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이 실험 자료에 나와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느정도 유추가 가능해진다.
그들이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렇, 군요.”
여지껏 유니온이 행해온 행보대로라면 이해할 수 있던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행동의 근원은 리-르 앙골라라는 개인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은 다음이었다.
서로 다른 위상능력자를 하나로 묶어서 완벽에 가까운 클로저를 탄생시키려 한 과학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허나, 리-르 앙골라가 생각하기에.
아마 그도, 이런 식으로 단 하나의 ‘기적’을 만들어낼 수는 없지 않았을까.
지금 이 순간만큼 이 실험을 집도한 그 최고의 천재가 사망했다는 것에, 감사를 보낸다.
만약 그것이 아직까지도 있었더라면… 연구고 실험이고. 그까짓건 아무래도 상관없이, 이 세상은 유니온이 손에 쥔 채 온 세계의 인간을 그 아래 무릎꿇릴 수 있었을테니까.
그리고 그 ‘만약’이라는 것이, 리르만의 생각이 진짜 계획의 일환이었다면.
어쩌면, 연하은을 막은 것은 하늘새 팀의 실수가 아닐까.
부디, 실수가 아니길 빌며, 제발 그것이 목적했던 것이 아니기를 빌며.
그 다섯이 일어나기까지, 리르는 단지 기다리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 ‡ ‡
간신히, 라고 할까.
목숨을 부지한 듯 쿵쿵 뛰는 심장의 소리를 들으며 살며시 눈을 뜬다.
하얀 커튼 너머로 새어비치는 빛이 눈을 비추는 것에, 무심코 손으로 그 빛을 가렸다.
눕혀져 있는 몸을 일으키려다가, 격한 고통에 이내 그만두고 그대로 누웠다.
그제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다.
병원, 그것도 침대의 위.
물론 복구 구역이기 때문에 완전한 병원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이 근방에서 가장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곳이었다.
또다시 환자가 이송되어 온 것인지, 복도에서는 시끄러운 소음이 오갔으며 천천히, 아프지 않은 선에서 몸을 일으킨 아나 스타피트는, 병원 침대 옆에 세워져있는 검은 무기고를 보고 난 다음에야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갑작스레 막대한 공포가 몰려왔다.
그만한 힘.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검은 위상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크기.
어쩐지 알 수 없는 친숙함을 가지고 있는 그 검은 위상력은, 바라보고만 있어도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꿰뚫렸을 터인 자신의 상처부위를 매만졌다. 쓰라린 고통이, 온 몸을 타고 올라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나아있는 상처는 어느정도 견딜만해진 듯 싶었다.
물론 약한 진통제를 사용중이겠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자신이 했던 것이라고는 고작해봐야 탄환 몇 발과, 꿰뚫린 것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히끅거리면서 나오는 울음을 참지 않고 강박적으로 자기비판을 하던 찰나, 그 옆의 커튼을 치켜내면서 화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멍청아, 그만해!”
“…히아….”
울컥,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자신과는 다르게 온 전신에 붕대를 감고, 심지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히아의 모습은 고작해봐야 한쪽 팔만이 간신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든 커튼을 젖히기는 했으나, 그 외에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한 히아가 멱살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이빨을 부득 갈며 말했다.
“그렇게 자기만 괴롭히면 기분 좋아? 우리 싹다 이렇게 됐는데? 이 겁쟁이가. 넷이 덤벼도 하지 못한걸 너 혼자 아무것도 못했다고 말하지 말란말야!”
…결국, 이곳에 누워있을 넷 모두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닿지도 못했고, 역장을 깬 다음에도 스치지도 못했다.
그 단아가 올 때 까지, 한없이 두들겨맞다가, 죽기 일보직전까지 가고 나서야 간신히 구원받았다.
“우리는….”
거기서 더 이상 말을 이어내지 못한 히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홱 저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져 측은한 마음이 들었으며, 무심코 내뻗으려던 손을 다시금 회수했다.
아마, 동정받았다는 걸 안다면 히아의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될테니까.
한참동안이나 아무 소리도 일어나지 않던 병실에는, 단지 속쓰린 패배만 되새길 뿐이었으며, 그 적막함을 깨부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외부인이었다.
드륵, 하면서 열린 병실의 문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일시에 드르륵 젖혀진 커튼은 마치 사람 여럿이 동시에 움직인 듯한 기분이었다.
“다들 꼴이 말이 아닌걸.”
“…너….”
그게 누구인지, 이곳의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은 아이트였으며, 다른 두 명도 천천히 반응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특이하게도, 아직까지 눈을 뜨지 못한 상태였다.
“몸이 안좋은 거… 아니었어…?”
“움직여도 되는… 윽….”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듯한 아이트는 말을 하던 중 고통이 찾아온건지, 몸을 움츠리며 말을 끊어내었다.
아이트를 바라보던, 특이한 외형의 소년은 검은 머리카락을 흩어내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치 폭포처럼 길어져있는 그 머리카락은 남성인데도 불구하고 여성처럼 느껴질 정도로 길었으며, 왜소하고 약한 골격은 안그래도 여성처럼 보이던 몸을 더욱 그렇게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맑은 빛으로 빛나는 흑색 눈동자는 일전에 만났던 ‘적’과는 다르게 순수함을 내비치고 있었으며, 그 몸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새어나오는 검은 위상력은 바라만보아도 위협적이었다.
“…리더가 늦으면 어쩌자는거야….”
그 말에 살짝의 미소를 지어보인 소년은 자신도 아까 전에서야 소식을 들었다며, 그 뒤로 단아를 안내했다.
“뭐, 그런 사이에요. 제가 이 장난쟁이들의 전 리더였고, 이 하늘새 2분대를 이끌었었죠. 이제는… 단아 형이 이끌게 되었지만요.”
창백하고,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안색을 보였다.
서 있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여겨질 정도의 첫 인상. ─그만큼 그 소년은 위태로워 보였다.
불어닥치는 약한 갈대바람에도 꺾여버릴 것만 같이 연약한 나무.
그런 인상을 내비치고 있었다.
“전前 하늘새 2분대 리더이자 ‘A급 요원’ 세이지…라고 알아두시면 될 것 같네요.”
“…A급 요원?”
이렇게 작은 소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에, 그 역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 A급 요원이라는 지위도 결국 그들이 맘 편한대로 다루기 위한 지위에 불과하지만요.”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그의 언행은 아마 단아가 알만한 것은 아니겠지.
더 이상 알려줄 것은 없다는 듯, 천천히 히아에게 다가간 세이지가 그녀에게 물었다.
“꽤 심하게 다쳤는걸, 히아.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을까 걱정했다고.”
“빌어먹을 그 면상을 들이밀고 걱정했다는 말을 하는 것부터가 내 자존심의 스크래치야.”
“여전히 말하는건 험한걸.”
“그 얼굴 치워, 패기전에.”
맞고싶지는 않다는 듯, 두 손을 들며 물러난 세이지는 이내 아이트에게 다가가 물었다.
“기분은 어때? 네가 ‘검은 위상력’을 다루는건 처음 아닌가?”
“…모르겠어.”
아이트 벨라는, 탄생 이후 단 한번도 검은 위상력을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 힘은 자신의 몸을 깎아내고, 먹어치운다는 것을.
죽고싶지 않다는 본능이, 방어기재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며 검은 위상력의 사용을 기피해왔건만,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눈앞에 두고 계속해서 도망칠 수는 없었던 노릇이다.
그 결과, 끝내 검은 위상력을 내비쳤건만, 그마저도 상대가 여의치가 않아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보았다.
‘완전히 펼쳐진’ 파초를.
다섯 갈래로, 단풍처럼 펼쳐진 파초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폭풍을 동반하며 옥상을 쓸어담았고, 막대한 힘을 가진 그것은 아마 강철마저 휘게 만들 힘을 가졌으리라.
입을 꾹 다문 아이트를 내버려둔 채 자리에서 일어난 세이지는, 이내 마리아에게 다가가더니, 그 손을 들어 이마에 가져다대었다.
“아직 일렀어.”
검은 발키리.
본래라면 자신의 범위 내에서 발동될 검은 위상력을, 자신의 육신으로부터 분리하여 인형에 구속시켰다.
그만큼 연결이 강해지고 인형이 강해지지만, 그만큼 검은 위상력의 소모도 강해서, 아마 이 중에서 가장 위독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마리아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아나도 인지한 것을 세이지도 알고 있던 것인지, 이마를 쓰다듬던 손을 천천히 떼어내자 그녀의 몸으로부터 검은 덩이가 천천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위상력’이라는 것을 인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늘 사용하고 있는 위상력이기에. ─특수한 방식으로 싸우기에, 유일하게 검은 위상력의 상시 개방이 허락되고 있기에, 이곳의 누구보다도 검은 위상력에 대해 잘 알고 있기에, 알 수 있었다.
설마 타인의 검은 위상력마저 다룰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인지, 아나를 비롯한 모두가 깜짝 놀라고 있던 가운데, 세이지는 빠져나온 검은 위상력을 째로 잡아먹었다.
이윽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려 아나를 바라본 세이지는 천천히 다가와, 자그마한 딱밤을 이마에 선사했다.
“아야!”
깜짝 놀란 나머지, 두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몸을 움츠린 아나에게 세이지가 말했다.
“아나, 너는 분명히 내가 손댈 필요도 없을 정도로 검은 위상력을 잘 제어하고 있어.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막 사용했다가는 네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거야.”
“…응….”
돌격소총으로 때려박았던 점.
그 점을 지적하고있다는 것을 알았다.
확실히 그것은 무리였다. 그 빠른 속사에 맞추어 검은 위상력을 다룬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니까.
실제로 그 때 일어난 몸의 손상은 아직까지도 낫지 않아, 몸의 회복을 방해하고 있었다.
몸에 나 있는 구멍이 아직도 메꾸어지지 않은 것은 그 이유 때문이리라.
자리에서 일어난 세이지는, 아까 전까지 멀쩡했던 모습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그 자그마한 입으로부터 토해내지는 핏덩이는, 검은 기운을 가득 담고 있어 혹여 마리아로부터 빼낸 검은 위상력이 화근이 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걱정이 된 듯 다가온 단아에게 한 손을 내밀어 접근을 막은 세이지가, 반쯤 새어나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도…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인거에요….”
거짓말이다. 처음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막을 수 없어, 다시금 문을 열고 사라지는 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을 남겼다.
“…다 나으면, 놀러와…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 아나 스타피트 》
성별 :: 여성
나이 :: 12세(1장) -> 13세(2장)
키 :: 143cm
몸무게 :: 36kg
별칭 :: 중력화기
좋아하는 것 :: 푸딩, 달달한 것, 칭찬받는 것.
싫어하는 것 :: 쉽게 죽어버리는 것
위상력 :: 질량 압축/탄환변화
클래스 :: 스나이퍼
전前 소속팀 :: 유니온 유소년 관리부 산하 하늘새 팀 훈련생
현現 소속팀 : 유니온 국가차원관리부 징계위원회 산하 하늘새 팀 2분대 정식요원
훈련 결전기 :: 술래는 누구?
수습 결전기 :: 별을 떨어트린다.
정식 결전기 :: 달밤아래 그림자
특수 결전기 :: 헬게이트-초중력탄超重力彈
무기 :: 저격총
검은 위상력 개방 전 : 흑색 머리카락, 황금색 눈동자
검은 위상력 개방 후 : 백색 머리카락, 흑색 눈동자
묶어내린 머리카락, 하얀 요원복 위에 꽃 자수가 박힌 검은 가디건, 붉은 머플러.
청남색 반바지에 검은 롱삭스, 검은 반장갑에 붉은 리본모양 머리끈, 목에는 마름모꼴 펜던트.
총을 가지고다니는 위상능력자로, 본래 있어야할 총탄 대신 자신의 위상력을 압축시켜 ‘중력탄환’으로 사용한다.
흑색의 짙은 탄환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질량이 어마어마하기에 어지간한 차원종은 꿰뚫어버리며, 멀리서 저격하는 것을 주로 선호하는 타입.
허나 상황이 바뀔수록 다른 총기를 들고 전장으로 나서는 일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전장에 직접 서는 편을 선호하지는 않으나, 강한 적을 선호한다. 쉽게 죽어버리는 적에게는 그렇게 흥미가 없는 듯 싶다.
현재는 달라진 성격으로 인해 강자를 싫어하는 편.
다만, 과거에도 쉽게 죽어버리는 적을 상대하고 그로 인해 칭찬받는 일은 좋아했던 듯.
‘압축’에 재능이 있었기에, 놀만한 상대조차도 쉬이 발겨버리는 그녀는 어째서인지 지금에 이르러선 자신의 성격조차도 지운 채, 소극적이며 내성적으로 변해버렸다.
이상적인 남성상으로 현단아를 손에 꼽고 있으며, 그에게 칭찬받는 일을 하루의 낙으로 삼고 있다. 연심이 있는지 없는지는 불명.
하늘새 2분대의 전前 리더인 세이지에 대해서는 믿음직스러운 한 명의 동료로 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아이트 벨라의 ‘푸딩 훔쳐먹기’에 대해서는 엄청난 분노를 가지고 있다.
현 하늘새 시점에서는 유 주를 제외하고 가장 높은 차원종 처치수를 가지고 있다.
하늘새 2분대 중에서 유일하게 검은 위상력 개방 이후 백발을 가지게 된다.
안녕하세요, 저자 AI미스틱입니다.
하늘새 2분대의 전 리더이자, 5번째 실험체였던 세이지의 모습이 드러남으로 인해 하늘새 모든 인원이 공개되었습니다.
그리고 2장 4화부터 공개되기 시작하는 캐릭터의 설정은 괜히 넣은 것이 아닌, 아무래도 지금에 이르러서까지 캐릭터들에 대한 어떠한 설정도 내비치지 않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제 소견에 따른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점으로 한 가지 알려드립니다.
캐릭터 설정이 원래 시간을 고려하여 더 어렸었으나, 역시 특수 환경이나 여러 가지 부분을 고려하여 수정이 가해졌습니다.
어린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정신 연령에 비해 너무 어른스러운 나이 역시 어울리지 않다고 판단하였으니 아량을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이러한 캐릭터 소개가 불편하시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처음으로 아나 스타피트에 대한 소개입니다만, 13세에 등장하여 현재는 14세입니다. 그 1년간은 현단아가 교육을 맡았으며, 단아의 지극정성인지 딱히 모자람 없이 길러진 상태입니다.
또한 설명에도 나와있듯, 아나 스타피트는 누군가에게 칭찬받는 일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 탓에 차원종 처치에도 목을 메는 수준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러한 연유로 현재 하늘새 팀 내부에서는 유 주 외에 모든 요원 중에서 가장 높은 차원종 처치를 기록했습니다.
캐릭터 설명은 앞으로도 꾸준히 나오게 될 예정입니다.
만약 원하는 캐릭터에 대한 설정이 궁금하시다면 언제든지 요청해주십시오.
이상으로 2장 4화를 마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