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의 주인 <2장 3화> : 추락한 새와 검은 맹수
AI미스틱 2020-12-08 0
“정신이 많이 망가져 있어요.”
처음 그 진단을 들었을 때, 그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알고있었다. 애초부터… 처음 만났던 그 불타오르는 세상 속에 있을 때부터. 무려, 20년 가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출격을 계속해서 용인해주었던 것은, 버텨주리라고, 끝내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하은이라는 엣 친구의 존재는 점차 딱지가 앉은 상처를 다시금 벌려놓았고, 이제 하늘새는 그녀와 더 이상 떼어질 수 없는 연으로 묶여있었다.
“솔직히 위험해요. 이대로 가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요.”
위상능력자의 힘은 정신 감응에 따라 증폭이 결정되기도 한다. 분노하면 인간은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정신이 무너진다면 그건 이제 문제로 변화한다.
통제되지 않는 위상력이 멋대로 발산될 것이고, 그렇게 발산된 위상력은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에는, 폭사할지도 모른다.
“두 분 모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조금… 피곤하셨던 모양입니다.”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진실을 알게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그렇기에 오세린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은 채, 단지 피로때문이라며 책임을 회피한 리르는 잠시 약으로 재워둔 유주와 하얀을 바라보며 물었다.
“몇 시간이면 깨어나시게 되는거죠?”
“최소 여섯 시간이에요. …두 분 모두, 많은 일을 해주셨던 것 같아요. 재해 복구 본부에 있던 그 많은 클로저들이, 다급하게 뛰어다녔으니까요.”
말 그대로, 하얀은 몰라도 유주가 커버하는 범위는 상상 이상이다. 무엇보다 차원종이 있다는 정보가 들려오면 곧장 향하기 때문에 처리 능력도 높았다.
그렇기에 차원문이 최근에 들어서는 자주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런 그가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되자 숨어있던 차원종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 모두, 한계에요. 더 이상 클로저로서 활동하는게 무리라고 생각될 정도로요.”
이토록 찢어지고, 여러 가지 어두운 색으로 덧칠된 정신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뭔가를 찾으시는 것 같았어요. 두 분 모두.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소중한 것이겠죠.”
“…그렇겠죠.”
-…리르 언니….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한 리르는, 갑작스레 들어온 아나의 무전에 깜짝 놀라 태블릿 PC를 잡으며 답했다.
“무슨 일이니, 아나?”
그러자 아나는 무언가 두려운 것이라도 본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가 있어요….
새까만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크고, 거대했다.
표현으로밖에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한 리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두 분은 주무시고 계신데….”
억지로 깨운다 해도 약 기운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못할터다.
그렇기에 서둘러 아나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려던 리르의 손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무슨, 일이야…?”
“하, 하얀… 요원님….”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던 그녀가, 어떻게 일어나 있는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전쟁 이후, 평범하게 잠을 이루고, 평범하게 살아가는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밤이면 밤마자, 잠이면 잘 때마다 악몽을 꾸었던 그녀는, 천천히 약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악몽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약을 먹는 것을 선택한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약을 먹지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유주와 만난 이후부터였다.
그러나, 그 전까지 먹었던 약의 내성들은 없어지지 않아 한참이나 몸 속에서 잠들어있다가, 갑작스레 들어온 수면제의 반응에 화들짝 놀라 깨어난 것이다.
당황한 리르의 손과 어깨를 붙잡은채 하얀이 말했다.
“…어디야…? 거기가….”
“…마천루 쪽입니다.”
높게 솟아오른, 인간 고도 문명의 상징이자 발전을 알리는 그 거대한 고층 건물의 쉼터.
그곳에 나타난 ‘검은 무언가’.
하얀을 보내기 두려웠지만, 그녀를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갔다올게.”
‡ ‡ ‡
오랜만에 눈에 담는 고향, 지구.
내부 차원에 발을 디디는게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항상 고요하기만 하던 마음이 요동치고 있었다.
이 풍경을 두 번 다시 못 볼거라고 알았건만, 설마하니 차원전쟁으로부터 살아남은 옛 인연이 있을줄은 몰랐으니까.
물론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에서 환영받을 생각은 없었다.
이곳을 담당했던 팀, 검은양을 거의 붕괴시켰으며, 데이비드 리를 포함한, 사적인 감정을 담아 유니온 간부 몇 명을 살해했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괴롭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하고 편안한 감각이었다.
이게, 복수라는 걸까. 아니, 이제는 복수라는 감흥도 들지 않았다.
무감정한 폭력만이 존재할 뿐.
─콰드드득!!
“그래서, 언제까지 무의미한 저항을 계속할거지?”
몰아닥친 돌풍은 허망하게 흩어지고, 멀리서 떨어지는 흑색의 구슬탄은 보이지 않는 장막에 가로막힌 듯 중간에 멈춰 사라진다.
연구 자료를 어느정도 살펴보긴 했지만, 설마 정말로 이런걸 만들어냈다는건가?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는 힘이라면 없어지는게 맞을 정도로 한심한 힘을.
손을 횡으로 휘두르자 푸른 빛을 발하는 부채를 들고있던 아이트의 몸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날아가는걸 넘어 마치 뭔가에 강하게 얻어맞은 듯, 몸이 횡으로 휘어 옆 건물의 옥상까지 날아가고, 다음으로 날아오는 탄환이 중간에 멈춰선다.
역시 저격수의 견제를 막는데 힘을 써**다는 건 꽤 단점이긴 한가.
하지만 이번 저격을 통해 대강 위치는 파악했다. 꽤 멀리 있지만, 닿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붙잡아 끌고오면, 그 때부터는 하은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강한 충격이 몸을 흔들었다. 정확히는 몸을 둘러싼 역장이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었지만, 겨우 역장 하나에 막혔을 뿐. 데미지는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등 뒤에서 빈틈을 시시각각 노리고 있던 건틀릿 꼬맹이 하나가 눈에 비치었다.
발을 강하게 디디자, 울려퍼진 에너지를 그대로 모아 되튕겨내고 주먹을 내지른다.
뿌득, 하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히아가 날아가고, 동시에.
─끄가가가각!!
철을 철로 긁어내리는 기음이 울린다.
4명밖에 되지 않는데, 이 정도로 힘을 분산시키는 팀워크를 낼 수 있는건가.
인형술사의 ‘발키리’가, 검게 물든 칼날로 역장을 찢어내었다.
“마리아, 그건!”
“알아! 하지만…… 몸을 아껴서 상대할만한 녀석이 아니라고!”
이해했다.
역장을 깨부순건 푸른 위상력이 아닌 검은 위상력. 역장을 이루던 하은의 위상력과 같은 것.
허나, 선택받은 몸은 아니며, 하물며 본 주인도 아니다. 사용하면 할수록 별의 힘으로 인해 육체가 붕괴하고, 수명을 깎아낼게 분명했다.
여태껏 특수한 방법으로 막아두었을 리미터를 억지로 해제한 것일 터. 검은 위상력을 개방한 것이라면 하은과 같은 힘을 다룬다. ─즉, 이제부터는 출력과 기술 싸움으로 변화했다.
“적당히 부숴서는 죽지 않겠어.”
그들이 살아있는 이유, 만들어진 이유. 그걸 알아낸 이상, 하은에게는 해야할 일이 생겼다.
이곳에 있는 네 명의 검은 위상력 사용자들을 모두 죽이고, 그 시체마저 불태워 없애버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훗날 벌어질 두 번째 재앙을 막아낼 길로가 될테니.
질량으로 압축된 힘을 선사해, 우선 이 앞의 인형술사부터.
“불어라, 파초!”
그 순간, 모든 것을 날려보낼 폭풍이 휘몰아쳤다.
‡ ‡ ‡
아나는 그들의 싸움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백 미터 너머에서, 혹은 수 킬로미터 너머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
세 명의 동료들이 금기를 깨고 ‘검은 위상력’을 개방했다.
세 갈래로밖에 펼쳐지지 않던 아이트의 부채가 검게 물들며 단풍잎처럼 활짝 피어올랐고, 백색의 발키리였던 마리아의 인형이 검게 물들어 악마의 형상을 띄었다.
건틀렛으로 받아낼 수 있는 힘의 한계치를 뛰어넘은 히아의 위상력은 또다른 거대한 손이 되어 그 형태를 유지했으며, 그 모든 것을 상대하는 적은 마치.
─재앙과도 같았다.
휘몰아치는 돌풍. 흑색의 칼날바람을 한 손으로 무너트리고, 뻗어낸 손으로 몸을 붙들어 히아의 움직임을 봉쇄한 뒤, 인형의 몸을 향해 내친다. 동시에 쥐어내는 주먹에 몸의 살덩이가 움푹 패여들어간다. 같은 검은 위상력을 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검은 갑주에 쩌억, 하고 갈라지는 것이 스코프 너머로 비친다.
스코프에 비치는데도 불구하고, 이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빗나간다. 절대적으로 빗나간다.
뇌로 이해하고, 인지할 수 있었다. 이건, 닿지도 못하고 와해되어 사라진다.
두 눈에 비치는 괴물의 모습이, 아나의 손마저 얼려버린 채 공포로 그 얼굴을 물들인다.
한 명씩 허망하게 쓰러져가는 동료들의 모습은, 마치 가을 말의 나뭇잎처럼 힘 없이 흩어지고, 그 모습을 차마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아나가, 끝내 방아쇠를 당겼다.
─터어엉!!
굉음과 함께 나아가는 단 한발의 총탄. 압축된 흑색의 탄환은 질량을 담고 있었고, 그 질량만큼이나 무거움을 담아내고 있었건만, 오히려 그 총탄이 신호가 되어 스코프 너머의 괴물이 정확히, 아나를 인지했다.
“아─.”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무언가에 붙잡혔다.
온 전신이 보이지 않는 손에 감싸인 기분이었다. 목을 죄이는 그 힘은 예사롭지 않아, 의식을 집중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쭈욱, 그 팔을 당기는 순간 콘크리트로 된 난관을 쳐부수며 몸이 끌러간다. 온 몸을 휩싸는 기괴한 감각이 사라지는 순간, 등 뒤에 있던 돌격 소총을 들고 무식하게 난사한다. 다른 세 명이 조금씩 떨어져 있었기에, 사양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쏴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끌어당기는 속력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시야마저 가릴 정도로 새까맣게 그 앞에서 멈춰선 탄환들은 다시 한 곳으로 모여 되돌아왔다.
퍼억.
살점을 찢고 근육에 파고드는 소리. 그 소리가 나는 순간, 오른 손으로 칼을 들어올리고, 격전의 장소에 도착한다.
“겁쟁이인줄 알았는데, 칼을 빼어들었군.”
“커흑….”
뜨겁다. ─배가 뜨거웠다.
시선을 내릴 수는 없지만, 분명히 그 탄환은 아나 스타피트라는 인간의 몸을 파고들었으리라. 그 위치가 바로 지금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리는 곳이겠지.
불타는 것만 같았다. 너무 뜨거워 견딜 수 없는 격통에 말을 잇지 못했건만, 적일 터인 그녀는 정확히 목을 붙잡아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바닥에 쳐박고선, 그 자그마한 발로 총탄이 지나간 부위를 강하게 짓밟았다.
“─!!!”
말로 형용하지 못할 괴로움. 고통이 강하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일평생 이런 격통을 느껴본 적 없던 아나에게 있어서 이것은 견딜 수 없는 통증이었다. 감기라던가, 몸살이라던가, 근육통이라던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흔한 고통만을 맞이했던 아나에게 총알이 박혔던 곳을 짓밟힌다는 경험은 처음이었으니까.
“너어…!”
히아가 주먹을 들어올린 채 간신히 일어서지만, 가볍게 허공을 퉁 친 것만으로도 공중을 날아 저 멀리 처박힌다.
압도적인 격의 차이. 같은 검은 위상력을 사용하면서도, 그 수준의 차원이 틀렸다.
완벽한 상위호환이다.
감히 다가설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대였으며,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네 명을 모두 견제하고 있었다.
그 손에서 흑색의 덩어리가 웅웅거리며 울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고, 거대한 하나의 ‘힘’ 덩어리. 떨어지는 순간 많은 것을 앗아가버릴, 그런 힘이었다.
“이것도, 결국 운명이라는거겠지. …불쌍한 녀석들.”
그런데, 어째서 그런 막중한 힘을 손에 담고서는.
그런 씁쓸한 표정을 지어버리는건지.
─큐웅.
손에서 구체가 떨어지는 그 순간, 아음牙音이 울려퍼지며 움직이지 않던 그녀가 살짝 멀어졌다. 동시에, 존재하던 구체가 마치 원래부터 없었다는 듯 비틀려 사라진다.
처음으로 물러난 것. 그것은 무언가 위협을 느낀건지, 아니면 배려인건지.
멀리 건너뛰어 두 건물이나 떨어진 곳에 다시금 자리를 잡았고, 쓰러진 채 몸을 간신히 꼬면서 몸을 들어올린 아나의 앞에,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착지했다.
“…오, 빠….”
─현단아.
위상 능력만 따진다면 차후 S급 클로저가 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지만, 경험과 성과 부족으로 인해 A급에도 아직 닿지 않은 그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허공을 훑어내는 흑남색의 머리카락 너머에 있을 황금색 눈동자를 생각하면, 속이 아릴 정도로 눈물이 새어나왔다.
또, 구해졌다는 생각에.
“잘 버텼어.”
적이라고 여겨지는 이가 손을 뻗는다. 그와 동시에 단아의 봉이 허공을 갈랐다.
삐걱이며 움직이는 공간 속에서 그 궤도를 비튼 검은 위상력은 일그러지며 중간에서 붕괴되었고, 동시에 그가 자세를 잡는다.
“하늘새 팀 2분대 리더 현단아. 전투에 들어갑니다.”
“…네가 리더?”
청아한 목소리.
맑은 물을 연상시키며, 마치 하프를 연주하는 것만 같은 그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이것이, ‘적’의 목소리인가 싶을 정도였다.
고개를 들며, 그 아득히도 어두운 흑색의 눈동자를 내비친 그녀는 싸움에는 내비치지 않았던 기괴한, ‘흑색’의 무언가를 등에 여섯 개씩이나 짊어지었다.
무엇인지 몰라도, 바라보기만 했을 뿐인데 속이 울렁거리며 내용물이 쏟아져나올 것만 같았다.
두근대는 내장의 울림은, 그것을 바라봐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거짓말. 다섯 번째 아이는 어디에 있지?”
“알고있다고 하면, 그리고 여기 없다고 하면 어쩔 생각인가요.”
“찾아가서 죽일거야. 그 육편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말하면 더더욱 알려줄 수 없는데요.”
대기가 끌려들어간다.
‘힘’을 가지고 있는 적도, 같은 검은 색을 가진 자신들에게도 아닌, 오롯이 인간일 뿐인 단아에게 지배당하듯 대기가 이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가공할만한 힘. 바람을 다루는 것 이외에도 무언가가 더 있다는 듯, 자신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진짜’ 능력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그걸 상대쪽에서도 인지했는지, 둘 사이에 쓰러져있던 히아를 들어올리고선 말했다.
“쏘면 얘는 죽어.”
“그거야 모르죠. ─이래봬도 전 생각정도는 하고 사는 사람이라.”
서로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먼저 웃음을 지어보인 것은 단아였다.
힘의 격차가 압도적으로 느껴지고 있을텐데도 불구하고 그 웃음을 지어보인 것에 하은이 무심코 고개를 기울이니, 동시에 무언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열기가 불타오른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다가온 불꽃이, 그 팔을 베어내기 위해 작렬한다.
─콰과과광!!
폭음과 함게 옥상에서 커다란 불꽃이 일었다.
저 너머에서 날아온 불길, 새의 형상을 한 그것은 분명.
“하얀, 언니….”
분명, 리르가 약으로 잠재웠다고 했는데.
올 것을 기대하지도, 구해줄 것을 바라지도 않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폭염을 휩쓴 채 나타난 그녀를 바라본 아나의 눈에는 마치, 태양빛을 쬐며 내려온 구원자와도 같았다.
“애들 데리고 돌아가, 단아.”
“맡기겠습니다.”
그 사이 2분대 대원들을 모두 모은 단아는 다들 위상능력자라는 것에 희망을 걸며, 봉을 휘두른다.
찌익, 하고 찢어져나간 공간은 서로 다른 공간 좌표끼리의 벽을 뜯어내어, 마치 공간이동과도 같은 현상을 일으킨다.
가장 중상인 아이트와 히아를 먼저 밀어넣고, 마리아와 아나를 각각 한 손에 든 채 마지막으로 하얀에게 말했다.
“…무리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말라는 듯 흔드는 손길에, 불안감을 내려놓고 단아가 공간 사이로 몸을 던졌다.
그 뒤로는, 안정제를 투여받은 탓에 기억조차 몽롱해지면서 잠에 빠졌다.
‡ ‡ ‡
네 명을 놓쳤다.
이곳에서 숨통을 끊어, 후환을 없애려던 그녀의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그것을 인지하기까지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하은은, 눈 앞에 내려선 옛 친우─하얀을 바라봤다.
과거에 비해서는 많은 곳이 달라졌지만, 그녀가 하얀이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 눈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올곧고, 결코 흐트러짐이 없으며. 적일텐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적의와 살의. ─차원종을 앞에 둔 클로저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은.”
“오랜만이야, 하얀.”
설마 살아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 시절에는, 둘 모두 어렸기에.
분명 어디선가 죽었으리라 믿었던 친구의 귀환에, 차마 할 말을 잃은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건지. 한동안 말을 하지 않던 하은이 그 불길한 흑색 눈동자에 하얀을 담으며 물었다.
“다른 애들은….”
“유주를 빼곤, 다 죽었어.”
끝나지 않은 질문에, 사납게 돌아오는 대답을 들은 하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럼, 너랑 유주만 남은게 확실한거지?”
어쩐지 그 미소에 서늘함이 묻어나오고 있어, 하얀은 도리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건 모르지. 적어도 내가 확인한 바로는 그렇다는것일 뿐. …혹시 몰라, 살아있을지.”
“…그래…?”
그런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웃음기는 사라질 줄을 몰랐으며, 끝내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하은이 먼저 반응하고야 말았다.
“…보기도 괴로운 과거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그 손에 담긴 것이 절망이라는 이름의 흑색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다가오는 거대한 힘을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저자입니다.
2장 3화를 봐주신 분들께 감사인사를 전해드리면 먼저 한 가지 알려드리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2장 4화부터는 어느 정도 밝혀진 캐릭터에 한해서 천천히 캐릭터의 설정을 비치고자 합니다. 외형을 포함해서요.
다만 스포일러라 생각되는 부분은 모두 제거한채 올릴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