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의 주인 <2장 2화> : 새가 나는 하늘길
AI미스틱 2020-12-04 0
이젠 모두 끝났다.
녹색의 광채마저 물들이며 걷어낸 흑색이, 창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여기저기에 금이 쩌억 가 있는 모습은 이미 무기로써의 기능을 잃은 상태였다.
창을 내던진 채,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해할 수 없는 힘이 부유의 개념으로 뒤덮혀, 몸을 띄워올린다.
허공을 짓밟고 하늘로 날아오르며 손을 내뻗으니, 그에 호응하듯 ‘흑색’이 커다란 손의 형태로 재구성된다.
날카로운 것인지, 아니면 육중한 것인지.
형태조차 뚜렷하지 않지만, 눈에 비치는 그것은 하은의 등 뒤에 있는 공간을 잡아 벌리기 시작한다.
찌이익─테이프를 찢는 듯한 기음과 함께 공간이 찢어지니, 공간으로 덮어두었던 차원 세계의 좌표가 일그러지면서 익숙한 모습의 ‘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안녕.”
차원문의 너머로 사라지면서 남긴 말은, 그것이 끝이었다.
모든 것이 끝난 옥상 위에, 천천히 문이 열리며 한 명이 비틀거리면서 올라왔으니.
근육이 망가지고, 골격이 무너졌을텐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몸을 이끌어서 올라온 제이였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차원문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엉망일 뿐인 몸을 가진 채 숨을 내쉰다.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됐던걸까.
무언가 다른게 스며들어있는걸까? 우리가 모르는 다른 것이 있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그녀는 현재 변화하였고, 변화한 몸은 차원 압력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심지어는 적으로 돌아선 상태라는 점이었다.
그 힘의 밀도와 크기를 미루어 보았을 때, 어쩌면 인류에게 있어 재앙일지도 모른다.
‡ ‡ ‡
힘으로 공간을 찢어 차원문 너머로 넘어간 하은을 반기고 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주인’ 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더니 이윽고 말했다.
“실로 대단한 힘이로다. 이토록 이 몸이 전율했던 적이 또 있던가.”
첫 마디가 그것이었다.
열정적인 싸움광에, 강자에만 집착하여 약자에는 어떤 신경도 가하지 않는 존재.
그렇기에, 약자인 인간들에게 있어 가장 자료가 적게 남고, 가장 자비로운 존재라 일컬어진 주인.
괴물이며, 흥건한 피냄새를 진득하게 묻힌 채, 외부 차원의 강자들만을 썰어넘기던 귀신.
“…공작….”
“여건이 된다면 그대와 한 합을 겨뤄보고 싶을 정도다.”
손에 진홍빛의 기운이 피어오르더니, 그대로 쫙 몸을 뻗친다.
그것은 곧 검신이 되었으며, 검신으로부터 새어나오는 핏줄기가 천천히 형체를 갖추어가며 검의 모습을 취한다.
바라보기만 해도 이질적이기 그지없는 그것은, 한없이 많은 생물들의 피를 섞어놓아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입에 피어오른 광기의 미소는 금방이라도 달려들것만 같은 암시를 주고 있었다.
허나.
“그 분의 몸에 상처라도 나게 된다면… 아버지의 진노를 사게 되실겁니다.”
그 기세를 중간이 끊어내어 가로챈 이가 있었으니.
기척도, 예고도 없이 그 자리에 나타난 ‘피어’는 ‘공작’을 향해 경고했다.
“그리된다면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싸움이 일어날수도 있겠지요.”
대가로 죽어버리겠지만.
그 살기가 진득하게 피어오르는 한 마디에 혀를 찬 ‘공작’은 검을 거두어들였다.
안타깝다는 듯한 쯧 소리가 울려퍼진 다음에야 긴장을 푼 하은에게 피어가 다가오면서 말했다.
“기분은 어떠신가요?”
“…잘, 모르겠어.”
“그렇습니까.”
처음에는 그럴 수 있다며 위안을 건넨 피어가 말하기를.
“어째서 그 남자에게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는건가요.”
─몸의 대부분이 망가진 인간, 제이.
위상력도 제대로 나오지 않으며, 하물며 약으로 간신히 버텨나가는. 한낱 인간일 뿐인데 그 정도로 심각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듯한 질문에 하은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 남자는, 뭔가 달라.”
경험은 적지만, 사선을 넘나든 경력만큼은 많았다.
그렇기에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알 수 있었다.
가장 약한 인간이지만, 그렇기에 가장 강한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고. 그 등에 감춰둔 것이 자그마한 돌멩이일지, 아니면 날카로운 칼일지, 총일지. 종잡을 수 없는 상대를 가장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그 남자 역시 듣기로는 차원전쟁에 있었다고 했기에 실전 경험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영웅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그렇군요. 딱히 신경쓸 요소는 없다고 판단했는데….”
“인간에 대해서 모르는거겠지.”
“…그럴지도 모르죠.”
먼저 앞장서서 나아가던 피어가 문득 멈추어 서서 묻기를.
“당신은, 정말 그걸로 되는건가요?”
“…그 말의 뜻은?”
“그걸로… 만족하시는 건가요.”
이별이라는게 갑작스레 찾아올수록, 인간의 정신에는 큰 영향을 **다.
그런 의도를 두고 물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응.”
현재의 연은 모두 끊어냈다. 이제 다시 만났을 때엔, 완벽한 적이 되어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인식명도 붙을 것이며, 위상 파장에 따른 개체 인식도 일어날 것이다.
결국, 차원종이나 다름없는 신세일 뿐이다.
하지만, 어쩌면 아직 있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연이… 하은을 강하게 붙잡아놓고 있었다.
그 날 헤어진 하얀도, 마지막으로 보았던 고아원의 친구들도.
어쩌면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연을, 마지막으로 끊어내기 위해서.
다시금 돌아가야만 하겠지.
‡ ‡ ‡
뉴욕에서의 사건 이후, 그 사건에 대해 자료를 전달받은 리르는 참으로 암담했다.
김유정 임시 지부장으로부터 받은 자료에는 ‘연하은’이라는 임시 요원의 존재가 위협이라고 판단되었던건지 중요 부분이 은폐되어있었으며, 공식 기록상으로는 ‘실종’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따져볼 예정이엇지만, 현재 신서울 지부측 간부의 커다란 사건 몇 개에 겹쳤기 때문에, 이에 더한 혼란을 막고자 하는 의도인 것 같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직 ‘검은양’ 팀의 팀원들의 회복이 끝나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해들은 리르는, 위험할지는 모르나 아직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아주 약간의 가능성을 위해 단독으로 뉴욕에 도착했다.
이미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뉴욕시는, 유니온 총본부가 있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을 정도였다. 전투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들은 하나같이 건물 단위로 일어난 것이었고, 심한 부분은 마천루가 째로 지면에 파묻힌 것도 있었다.
검은양 팀의 치료실을 찾아가자, 그곳에서는 간신히 숨을 쉬고 있는, 20대 후반에 가까울법한 남성 한 명과, 그 옆에서 기록을 살펴보고있는 여성─김유정이 비치었다.
여기저기에 깁스를 하고, 붕대를 감고, 의식조차 잃어서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상태인 제이가 상당히 걱정스러웠던걸까, 바로 옆에서 근무하고 있는 모습을 오히려 안쓰럽기까지 했다.
잠시동안 문의 창문으로 너머를 바라보던 리르는 지금 들어가면 실례일까 싶어 시간을 기다리니, 비틀거리면서도 똑바로 된 걸음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유니온의 관계자이신가요?”
“…당신은….”
“저는 검은양 팀의 리더, 이슬비입니다. …어떤 용무로 찾아오셨죠?”
그녀가 리더라는 것을 쉽게 믿을 수는 없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또 다른 기분이 들었다. 기록에 적혀있는 ‘과거’와는 다르게, 과거의 분노에 얽매여있지 않은 그 눈동자는 어디론가 멀리 향하고 있었으며 날카롭게 뻗어오른 그 감각은 정예 클로저라 하기에 충분한 수준이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리르는 자신이 소개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제서야 떠올리고서는 예의를 갖춘 채 말했다.
“저는 ‘하늘새’ 팀의 관리요원, 리-르 앙골라입니다. 김유정 임시 지부장님과 직접적으로 면담하고싶어 찾아왔지만… 아무래도, 시기가 나쁜 듯 싶군요.”
“…무슨 일이죠?”
다른 팀의 관리요원이 찾아오는 것은 처음인건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질문하는 그 모습에 리르는 씁쓸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답했다.
“‘연하은’ 요원님에 대한 건입니다.”
“그건….”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올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은 이슬비 요원은 잠시 입을 꾹 다물더니, 이윽고 바깥에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싶다며 자리를 바꾸기를 청했다.
딱히 거절할 필요도 없었기에 가볍게 응하자니, 그녀는 가볍게 대할 일은 아니었는지 통신기로 현재 입원한 요원을 제외한 다른 요원들을 모두 호출한 것 같았다.
─비록 그 중 하나는 게임을 한다는 이유로 오지 않아서 직접 끌고온 듯 싶었지만.
마침 다들 점심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듯 싶었기에, 식사를 대접하고싶다는 뜻을 전했고, 그 결과 대화를 나누는 장소는 애석하게도 밥을 먹고 난 다음의… 카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카페에서도 역시, 또 먹고싶은 것이 있었는지 서유리라는 학생은 혈기왕성한 나이답게 먹고싶은 것을 한가득 시켰다. 단지, 그 중에서도 가장 반응하지 않은 것은 미스틸테인이라는, 중학생 남짓 되어보이는 어린 요원 뿐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신 이유는 뭔가요, 리-르 앙골라 관리요원님.”
차를 한 모금 홀짝인 다음에야 본론을 꺼낸 이슬비의 질문에 리르는 자신의 태블릿 PC를 내밀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알고계실지도 모르지만, 연하은 요원님과 과거 같은 고아원에서 자라셨던 두 분이 현재 ‘하늘새’ 팀의 1분대 요원으로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고아…원이요?”
“네. 그리고… …말씀드려도 될지는 모르지만, 우선 여러분들도 알아야할 사항이기에, 저도 직접적으로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차원 전쟁에서 활동한, 연하은이라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연하은 요원님은 약 6살 시기, 차원 전쟁에 참가하셨습니다.”
“차원, 전쟁…?”
“이후 클로저로 활동하면서….”
“자, 잠시만요!”
리르의 이야기를 끊으며, 이슬비가 강하게 반발했다.
“하은은 고작해봐야 고등학생도 채 되지 않은 나이라고요. 차원 전쟁이라니, 그게 가당키나….”
“…우선 말씀드려야할 것이 있겠군요.”
잠시 태블릿 PC를 조작하더니, 이윽고 어떤 연구의 실험 자료를 띄어올린 리르는 다시금 그녀에게 해당 자료를 내비쳐주면서 말했다.
“해당 자료는 한때 ‘검은’ 위상력에 대해 흥미를 가진 유니온 소속의 과학자들의 자료입니다. 당시에는 살아있는 클로저라는 표본은 매우 드물었기에, 유니온에서도 극비리로 취급된 자료입니다. 또한 당시 이 실험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망, 살아있는 나머지 과학자들은 심각한 환각증상 및 정신병 증상을 앓으면서 여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고요.”
“자료를 보시면 연하은 요원님은 연구실로 이송되었을 당시에도 심장이 반쯤 짓뭉개져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미 생물학적으로는 사망으로 등록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의식이 존재함과 뇌파의 발생 등으로, 연하은 요원님의 신체 비밀에 대해 보다 자세히 근접하고자 한 과학자들에 의해 약 2310일, 6년 이상의 기간을 살아있는 상태로 실험 대상이 되었으며, 멀쩡했던 팔다리는 모두 분해, 차원종과의 비교를 위해 추출되었고, 실험 말기, 장기 등은 위상력의 분출 기관 확인을 위해 뇌와 안구기관 등을 제외하고 모두 적출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죽었어야만 했을 연하은 요원님께서 뇌파가 발생, 과학자들은 끝내 그 뇌를 적출하기로 결심했고, 그 이후 어떤 외부 요소에 의해 연하은 요원님의 뇌와 시신이 사라졌습니다. ─이 모든 행적이 외부 요소에 의한 개입이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이건… …이건, 말… 말도 안되잖아요….”
당황한 듯, 말이 엉킨 이슬비의 말에 리르가 답했다.
“물론 말이 되지 않습니다. 죽어야할 사람이 살아있는것도,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것도요. 하지만, 그 이후 ‘연하은’이라는 ‘검은’ 위상력 사용자에 대한 자료는 유니온 데이터베이스에 갱신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뭐가 또… 있는건가요?”
“…연하은 요원님의 시신이 소실됨으로 인해, 당시 진행되던 ‘검은 위상력 복제’는 완전히 실패, 수많은 실패를 남겼으며, 그로 인해 살아남은 인원은 총 ‘다섯’.”
─그 다섯이, 현재 ‘하늘새’ 팀 2분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한 명은 사정이 있어 병원에서만 지내고 있었지만.
“살아남은 다섯 명은 한때 연하은 요원님을 찾기 위해 상부의 명령에 불복종하던 유주 요원님에 대한 징계 차원에서, 하늘새 팀에서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이걸 전부… 알고 있던건가요?”
“전부는 알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유니온 상층부와 어느정도 접점이 있었던 리르는, 현 유니온 방침에 못마땅한 그 사람의 연줄을 통해 사건에 대한 내용을 입수할 수 있었다.
처음 자료를 마주했을 때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투성이었다.
인공 클로저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인공 클로저를 만드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건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장기가 적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있었다는 것 역시… 그녀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차원종이나 어비스같은, 단순한 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밀려들어오는 밀물이 될 수도 있고, 빠져서 나오지 못할 늪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하늘새’ 팀은 쫓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이 어떤 함정을 파고있는지 모른다. 어떤 전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미지수라 해도, 하늘새 팀은 그래도 쫓아갈 수 밖에 없었다.
엮여있는 실은 거미줄처럼 천천히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고, 비단 연하은 뿐만이 아니라 박용태마저 연관되었던 지금 상황에서, 그들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김유정 임시 지부장님이 가지고 계신 자료도 필요하고요.”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있을거에요.”
“그렇지 않기에, 제가 여기에 찾아왔고요. …임시 지부장님을 만나뵐 수 있을까요.”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내비치자, 한참을 망설이던 팀장 이슬비는 주먹을 약하게 쥐더니 이내 말했다.
“…유정 언니… 아니, 임시 지부장님께, 말씀드려볼게요.”
“기다리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 천천히 카페를 나서는 그 모습은 쓸쓸해보였다.
하지만, 이쪽 입장에서는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2분대를 임시로 박용태에게 맡기고 온 것인지라, 최대한 빨리 돌아갈 필요가 있었으니까. ─애초에 관리요원이 담당 팀으로부터 벗어난 것 자체가 징계 사유였다.
그런 징계조차 감수해야할 정도로, 큰 문제였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카페 안으로 세 명이 다시금 들어왔다.
이슬비와, 병실에서 보았던 김유정 임시 지부장,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금발의 외국인처럼 보이는 여성이었다. 어디선가 만났던 것 같은 익숙함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떠오르지 않아 금방 고개를 저었다.
따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테이블을 옮겨, 삼자 대면을 하고 있자니 김유정 임시 지부장이 먼저 물어왔다.
“연하은 요원님에 대해… 자료가 필요하시다고요.”
“…네.”
아마 그간 있었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미 검토를 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겠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김유정은 자신의 자료파일을 내려놓고선 말했다.
“이제와서 말하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하늘새 팀에서는 이 일에 대해서 손을 떼어주셨으면 해요.”
“무슨….”
“하늘새 1분대가 그녀와 많은 연이 있다는건 알았지만, 그건 결국 18년을 넘어선 옛날 일. 지금의 그녀는 여러분이 아는 그 연하은이 아니에요.”
괴물. 김유정은 그녀를 그렇게 표현했다.
일그러진 검은 무언가를 등에 지고, 마치 신이라도 된 양 하늘을 발로 짓밟아 선 채 지상을 내려다본다. 뉴욕을 뒤덮을 정도로 방대한 위상력을 가지고, 자비라도 베풀 듯 사라졌다.
일개 팀이 감당해낼만한 영역을 넘어, 이제는 토벌단을 꾸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아직 특A급인 이유는, 그 ‘위협’이 확정될 가능성이 낮다고 상부에서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작 개인, 거기에 전직 클로저인 그녀가 유니온과 이 세계에 가할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하지만….”
말끝을 흐린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싶은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덜컹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리르는, 잠시 짐을 챙기더니 김유정에게 고개를 숙여 말했다.
“그렇군요. 김유정 임시 지부장님이 더 이상 도와주기 힘드시다는건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겁니다. 이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하늘새 팀이 해야만 하니까요.”
“리르 관리요원님….”
“당신이 검은양 팀을 생각하는 만큼, 우리 하늘새 팀은… 연하은 요원님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것 같으니까요.”
고작해봐야 과거의 인연 따위가 아니었다.
이제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친구. 그것도, 유니온에 의해 억지로 헤어져야만 했던 불운아들.
그렇기에 다시금 만나고자 하는 강한 갈망이, 이런 식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건 당연지사였다.
“그럼.”
“아….”
차마 그 떠나는 뒷 모습을 잡을 수 없었는지, 내밀던 손을 멈춘 김유정은, 허탈한 듯 책상에 팔을 내렸다.
그 모습에 옆자리에 앉은 여성, 캐롤리엘이 물었다.
“연하은 양의 자료에 대해 저도 방금 읽어봤지만… 정말, 유니온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짓을 하고있었군요. 이럴수가….”
“맞아요, 유니온은… 우리에게 많은 걸 숨긴거에요.”
정말, 배신감이 들었다.
그토록 믿었던 집단이, 이토록 타락하고, 어두운 일면을 감춘 채 백지로 뒤덮어 깨끗한 척 포장하려 들었다는 것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점차 더 심한 죄책감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데이비드가 말했던 ‘지위에 따른 책임’이라는 것을. 임시 지부장에 앉은 다음에야, 연하은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았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한낱 유니온의 인간인 자신이 해소해주지 못할 정도로, 강하고 깊은 것이라는 것 조차도.
‡ ‡ ‡
결국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리르는 길었던 비행시간의 피로를 풀고싶었지만, 그런 시간을 가질 틈은 채 없었다. 이번에 리버스 휠이 재정비를 가지게 되면서 그에 대한 탈 것을 따로 마련해야했으며, 또한 이번에 오세린 요원에 의해 새로 오게된 미등록 위상능력자로 이루어진 팀과 조우도 있었다고 정보가 들어왔으니까.
위상능력자간의 전투는 시내에선 완전히 금지다. 굳이 할 필요가 있다는 필요성을 입증하고, 충분한 장소를 갖추어야했지만 저쪽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우선 찔러봤다는 모양이다. 거기에 반응한 이쪽 팀의 그 장난꾸러기가 있었고.
한숨을 내쉰 채 전달받은 좌표에 거의 도착하니, 그곳에는 장비를 꺼내려고 하는, 아마 싸웠다는 그 위상능력자와, 눈을 쭉 찢은 채 혀를 낼름거리는 꼬마가 하나 있었다.
“아-이-트-!”
“리, 리, 리, 리르 누님?!”
“사고 치지 말라고 했을텐데요!”
“히이이익!!”
한참이나 설교를 한 다음에야, 임시로 팀의 지휘를 맡게된 오세린에게 미안하다는 의사를 전했다.
“아이트가 아직 애라서…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호,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아, 아뇨… 저희 측에서도 먼저 칼을 들이댔던 모양이라….”
각자가 미안하다고 하는 기괴한 모습이 끝난 다음에야 아이트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저는 잘못한거 없단 말이에요!”
“아이트….”
“맞아요, 제가 먼저 칼을 들이댔죠. 하지만 딱히 위협을 가하려던건 아니었어요.”
“당신은…?”
아이트의 진술을 인정하며 한 손은 주머니에, 한 손을 들어올린 채 남색 머리의 여성이 다가왔다. 고등학생일까. 짙은 빛을 띄는 녹안으로 리르를 비춘 그녀는 머플러로 입을 가렸다.
“단지, 믿을만한가 아닌가의 여부였죠.”
“은하 씨. 아주 일시적이긴 해도 여기서 행동을 같이하게 될 사람들인데….”
“그런데 저런 꼬마가 같이 동행하게 된다면, 누구라도 의심할 수 밖에 없지 않아요?”
“그건….”
정곡을 찌르는 말에 차마 할 말을 잃은 듯, 오세린이 입을 다물었다.
말마따나, 아이트를 비롯한 하늘새의 2분대는 태어난지 고작해봐야 13년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중학생도 되지 않은 애를 위상능력자로 들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불가능하다. 보통 아카데미에서 배우고 고등학생이 된 다음에야 첫 행동을 개시하게 되니까.
하지만 아이트 벨라를 비롯한 하늘새의 2분대는 사정이 달랐다.
특이한 환경 속에 태어나 특수한 위상력을 가지게 된 그들은 그 수명이 극단적으로 짧았다.
특수한 위상력은 점차 아이들의 몸을 갉아먹어갈거고, 그렇게 되면 고등학생이 채 되기 전에 죽어버린다. 그 이전에 써먹을대로 써먹어야만 했다.
그 결과, 그들의 특수 위상력을 봉인하는 리미트를 각각 하나씩 지니고 다나게 되었으며, 유주에 대한 징계로 하늘새 팀이 맡게 된 것이다.
원래는 다섯이었지만 한 명이 급한 상황이 되어 입원했기에 인원이 넷으로 줄어들어 본래 1분대가 되어야했던 현단아가 그 자리를 메우고 있을 뿐이다.
“아, 앞으로 은하 씨는 같은 편에게 무기를 겨눈다거나 하지 말하주세요.”
“날이 없는데요, 보스.”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발을 동동 구르며 반응하는 그 사이를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길좀.”
“아, 네….”
“유주 요원님.”
강한 존재감과 함께 피곤함을 내비치며 모습을 드러낸 유주는, 우선 할 말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하루만 쉬게 해주라.”
“네…?”
솔직히 말해서 유주 입장에서는 곤란했다. 차원종이 하루이틀 튀어나오는 것도 아니고. 잔여 차원종에 튀어나오는 것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케어하는 그가 가장 많이 굴러다니는건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만큼 피로가 쌓이는 것도 빠를 수 밖에 없었기에, 유주가 하는 요청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당연한 요청이었다. 그것을 이해한 리르가 말했다.
“쉬게 해드리고는 싶지만… 제 마음대로 해드릴 수 있는건 아니라서요.”
“…사람을 힘들게 부려먹는데.”
며칠도 아니고 몇 주, 몇 달을 이렇게 굴린다. 솔직히 너무했다.
많이 처치할수록 월급이 늘어나는건 아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렇게 귀신들린 망나니마냥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리를 강행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피폐해질 때까지 반복했다가, 쉬고싶다는 말을 한번 툭 내뱉고는 며칠간 출격에 시간 간격을 두며 휴식을 취하고, 시간이 됐다 싶으면 갑작스레 광범위한 활동을 시작한다.
바라보고 있을 때마다 자신의 몸을 혹사하는 듯한 행위에, 솔직히 안타까울 정도였으며 이런 강행군에 의료 요원인 마나가 출격을 자제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마나가 오히려 울먹거리며 오세린에게 말했다.
“유주 요원님이 매일 저러는데, 어떻게 방도가 없을까요?”
“아, 저기… 저, 저는 심리 치료사가 아니라서….”
“인기 많네요, 보스. 와아….”
“그, 그러지 마세요….”
사람에게 능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아하는 오세린은 연속해서 그 요청을 거절했으나, 계속된 요청과 부탁 끝에, 결국 유주를 데리고 정신 치료라는 명목으로, 그를 강제로 하루동안 쉬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하얀 역시 그런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