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의 주인 < 2장 1화 > : 신을 업은 자
AI미스틱 2020-11-29 0
거점구역에 발을 디디는 순간, 그곳에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네 명의 아이들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중에서도 곧장 달려오던 아나는, 바로 옆에 있던 마리아의 뒤에 숨어 머리만 내민 채 바라볼 뿐이었다.
그도 그럴게,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단아와 함께 있는데다가 오히려 바라보기까지 했으니 아나의 입장에서야 오죽할까.
그런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던 박용태가 말을 이었다.
“얘들이 네가 데리고 다니는 그 아이들인가?”
“네. 일단 리르와 말씀부터 나누시는게….”
“아, 그랬었지.”
무언가 중요한 용건이 있어 전화를 받았던 것이 떠오른 박용태는, 나중에 천천히 소개시켜달라는 말과 함께 리르에게 갔으며, 이윽고 단아만 남자 아이들이 다가왔다.
“저 아저씨 누구에요?”
“엄청… 엄청 괴물같았어요.”
그리고.
“흐에엥….”
“에구.”
울면서 그 옆에 달라붙은 아나는, 어지간히도 박용태가 무서웠던 것인지 한참동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열받은 것인지, 글러브를 낀 아이─히아는 그녀를 어떻게든 떼내려고 이런저런 갖은 노력 끝에.
“이… 이 독한 녀석!”
그만두었다.
고작 20초만에 일어난 일일 뿐이지만, 그 20초만으로도 아이들이 박용태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던 단아는 우선 아나부터 진정시킨 뒤, 편의점 벤치에 앉고 이야기하자며 대화의 물씨를 띄었다.
그제서야 천천히 떨어진 아나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으며, 거기서 가장 먼저 물은 것은 호기심이 강하고, 무엇보다 장난기가 심한 남자아이, 아이트 벨라였다.
손을 번쩍 치켜들며 묻기를.
“그 아저씨는 누구야?”
“내 아버지.”
그러자, 일순 조용해졌다.
질문을 한 아이트는 아예 굳어버렸으며, 두 번째로 관심을 보이던 마리아도, 아나에게 눈치를 주던 히아도, 심지어는 울고 있던 아나조차도 울음을 멈추었다.
한참이나 불편한 공기가 흐르던 와중, 단아가 말했다.
“그렇게 무서워하진 말아줘. 저래보여도… 의외로 자상한 분이니까.”
“저, 정말요…?”
믿기 힘들다는 눈초리로 마리아가 되물었다.
확실히 믿기 힘들수도 있다. 온 몸에서 위압감을 내뿜는 그의 존재감은, 어린 아이들에게 있어서 위협이 틀림없으니까.
그러나, 그런 위협이라고 해서 무턱대로 적이라고 하기엔 어려운 것이, 애들을 대할 줄 모르기 때문인지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단아가 어릴 적에도 자주 놀아주지 않았던 박용태라,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딱히 자상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한참이나 자신의 아버지가 위험하지 않고, 단지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할 뿐이라는 것을 전달한 단아는 긴장감을 푸는 그 모습들을 보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단아야!”
“오셨어요, 아버지.”
마침 이야기가 끝났는지, 저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박용태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창고에 잔고가 남았던 것인지, 유니온의 요원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커다란 둔기보다는 날카로운 칼날같은 형태의 인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 쪽이건 위험했지만, 오히려 위협성이라면 아까 전보다 덜했으며, 겉으로 풍기던 분위기가 싹 바뀌었던지라 어느 면에서 보면 자상함도 비쳤다.
“씻으셨네요?”
“너머에 꽤 있었으니까.”
물 한방울 찾는것도 힘들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확실히, 차원 너머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인데 마실 수 있는 물을 찾는건….
“어쩌다보니 비가 내려서 살긴 했지만.”
“…그걸 마셔요?”
“별 이상 없더만.”
…이해에서 벗어난 그의 말에, 단아는 할 말을 잃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이제는 생각조차 관둔 단아는 아버지의 몸 여기저기를 만져보며 물었다.
“아픈 곳 없죠?”
“물론. 이 아버지를 뭐라고 생각하는거니?”
“알콜 중독자급의 의존증 환자.”
“…너무 직설적이구나.”
의존증까지는 아니었지만, 슬픔과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술을 가까이 둔 것은 맞았다.
결국 의존증이나 다름없는 현실에 머리를 긁적인 박용태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보니, 네 팀이 ‘하늘새’라면서? 그 두 녀석이랑 같은 팀인가?”
“하얀 누나랑 유주 형과는 분대가 틀려요. 이쪽이 2분대죠.”
“분대를 나눴다라. 오퍼레이터… 아니, 관리요원인 리르도 힘들겠네.”
두 개의 분대를 동시에 관리하기 위해서는 뻐꾸기의 조작 능력도 꽤나 좋아야하기에, 그 고난이 얼마나 심한지 어느정도 심히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저은 박용태에게 단아가 말했다.
“이 아이들은 2분대 소속의 요원들이고요.”
“─2분대 소속의 요원이라.”
그 순간,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맹수. 그것도 사냥감을 조용히 지켜보는… 포식자의 눈.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만 같은 기세에 아이트가 살짝 몸을 사리고, 마리아가 긴장 상태에 들어갔으며, 히아는 두 손에 주먹을 쥐었고, 아나는 단아의 옆에 붙어서 팔을 떨었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여유를 가지고 있던 단아가 그만하라며 만류했다.
“애들이 겁먹잖아요.”
“클로저라면.”
오싹.
이번에는 단아마저 반응할 정도의 한기가, 그로부터 피어올랐다.
얼음이 등골을 타고 그어내리는 감각, 세포로부터 전해지는 그 암묵적인 ‘공포’가 뇌에 도착하고, 사고를 정지시킨다.
‘적의’라고 해야할 것이 옳은 그것이 피어오르고, 숨쉬는 것이 버거워지며, 침을 삼키는 것조차 불길해질 정도의 영역에 이르러서야, 박용태가 말을 이었다.
“이 정도의 각오를 가져야만 하는거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 눈을 마주보았다.
오래 전에 색을 잃고 바래버렸던 눈동자는 어느샌가 단아보다 아름다운 금빛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커다란 몸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거대한 압박감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 파도에 한 차례 부딪힌 순간, 온 전신이 저리고 욱신거려온다.
이것이 ‘영웅’이라 불렸던 사람이 비치는, ‘클로저’의 각오.
그렇게 생각하자니, 자신이 살아왔던 ‘클로저’로서의 짧은 시간이 너무나 터무니없이 얕은 물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클로저라는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당장 내일, 차원종에게 찢길 수도 있으며.
승급을 해서 좋아했는데, 사고가 나서 죽을 수도 있고.
고위급 차원종에게 걸릴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요인으로, 클로저는 지금도 시시각각 죽어간다.
“그런 세상에, 너희가 발을 들였다면… 그만한 각오를 되새기는게 좋을거다.”
그 말과 함께 위압을 거둔다.
박용태로부터 피어오른 열기에, 퍼져나간 바람이 천천히 잦아들자 허공을 흔들거리던 흑남색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그제서야 몸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단아가 두 손을 맞잡았다.
부들거리는 것이 멈추기까지 한참. 그 시간동안 기다리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
쿵쿵거리는 심장의 소음이 귓가로부터 멀어지고, 징하게 멈추었던 뇌가 활동을 개시하자, 그제서야 간신히 머리를 들고, 아버지를 다시 쳐다본다.
그곳에 있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미소를 짓고있는 아버지.
“뭐, 그런 일이지.”
“…그런, 일인가요.”
웃음으로도 넘어가지 못할 정도의 장난기였다.
받아들이기 힘든 템포의 변화에 일그러진 미소로 대응한 단아에게, 박용태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잠시 걷자꾸나.”
“그러죠….”
한참을 나아가, 인적이 드문 도로가에 들어서자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우선, 네가 알아야할 것이 몇 개 있다.”
“아이들은….”
“그 아이들이 알기에는 너무… 적이 크다.”
‘크다’라는 표현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강하다’, ‘꽤’ 라는 표현으로 적을 평가한 그 답지 않게, ‘크다’라는 표현으로 적을 일축한 그 말에 단아가 고개를 살짝 낮추었다.
평범하게 볼만한 사건은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일전에 박용태가 사라진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에 맞이할 적은… 어쩌면, 인류가 감당해내지 못할 정도일지도 모른다.”
“…아버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발전해왔고, 클로저를 교육한 것이다.
허나.
“이번에는 누군가 막아준다는 생각따위 하지 않는게 좋아.”
많고, 거대하며.
무엇보다 간섭받지 않는다.
“‘어비스’. 자신들을 그렇게 부르더군.”
“‘어비스’….”
1분대가 쫓고있는, 그것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도 맞이해본 적 있는 적이다보니,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것들이 만약 건너오게 된다면, 그만큼 커다란 차원문이 열리게 된다면.
그 때는 정말로, 인간 세상에 종말이 올지도 모른다고.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네, 어느정도….”
유니온 상부에서는 이미 이 ‘어비스’라는 개체를 차원종 등급에 맞추어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어느정도 자료가 갖추어진 차원종들과는 달리, 어비스라는 개체는 대부분 처음보는 것들인지라, 교전 기록만으로는 얼마나 커다란 위협 요소인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큰 사례로는 얼마 전에 특S급으로 격상한 ‘슬라임’…, 아니 인식명 ‘카마엘’이 있었다.
현재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나 ‘어비스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개체들의 정보를 입수한 상층부에 의해서, 현재 ‘주인’이라 정리된 것들 중 모습을 드러내고, 실제로 피해를 입힌 개체들이나 그 힘을 보인 개체들은 대부분 특S급에 분류되어 있었다.
“나를 데려간 것도, 그 중 하나다.”
“‘주인’인가요….”
“그래.”
특이한 힘을 사용하는 괴물.
‘붉은 무언가’를 통해 공격을 흘리거나 받아내며, 동시에 무기를 만들어내고, 힘을 발휘한다.
“그 냄새는─피였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피…?”
“그래. 그것도 한 사람의 것이 아닌, 꽤 많은 사람의.”
한 명의 피냄새라기에는 뭔가 많은 것이 섞여있어 석연찮았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다루는게 ‘피’라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그 ‘피’를, 다른 곳에서 조달해올 방법이 있다면.
“하지만 차원종들의 피 색은….”
“붉은 색이 거의 없지.”
외부 차원에 있는 것들 중 붉은 피를 가진 차원종은 거의 극소수라 보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붉은 피를 다룬다면, 그건 아마도.
“다른 차원의 생명체일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차원종이 가진 위상력의 ‘색’이 입혀졌거나.
거기에.
“두 녀석을 더 만났지. 한 놈은 유추일 뿐이다만.”
“둘….”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검은 색으로 둘러싼, 특이한 존재.
‘용’이라고 불렸으며, 그런 자신을 아직 ‘용’이 아니라고 소개했다.
‘그 분’이라고 불리우는 존재의 의사를 모든 ‘주인’들에게 전하는 대리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들었던 생각은.
“…커다랗다, 였지.”
그 부피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 거대함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하늘을 덮을지도 모르고, 땅을 파고들어 지구 너머까지 꿰뚫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거대한 존재였기에, 강함을 예측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크면 클수록, 그 강함이 넓게 퍼져서 엷어져버리기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오염 위상의 존재들이 두려워하는 것.”
“오염 위상…이라면….”
“너는 모르겠지만, 위상 차원 중에는 ‘오염 위상’이라 하는 곳이 있다. 그곳은… 그래, 병들어 죽어가는 세상이겠지.”
그 세계에 있는 모든 생명은, 적응한 몇몇 개체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죽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병을 퍼트리며, 그 확장 속도는 이례적일 정도.
그 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것은 거인의 형상을 한, 속이 다 비치는 기이한 생물체.
“그들에게 있어 ‘죽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 그런 녀석이라면, 아마 주인급에 들지 않을까 싶구나.”
“…정말로, 몸에 이상이 없으신건 맞죠…?”
“그래. 내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본능적으로 위상력이 피어올랐다.
의식한 것은 그 다음. 즉, 박용태라는 인간의 커트라인을 뛰어넘은 하나의 ‘위협’으로, 스스로의 본성이 인정한 것이다.
“리르에게서 들었다. 현재 ‘주인’들의 정보가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었다고. …그걸 참고하고, 만약 만나게 된다면…”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하는거죠…?”
입을 다문 박용태는, 이윽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전력으로 도망쳐라.”
─그것조차 안되면 죽어라.
“…아버지….”
“네가 감당할 적이 아니다. …물론, 마지막 말은 최악의 상황에서나 해야만 한다. 다행히도 녀석들은 우리들을 등지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것 같으니… …어쩌면 살려줄지도 모르지.”
몸이 떨렸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할 정도의 괴물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강한 것인지.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 주먹을 강하게 쥔 단아와 박용태는, 그저 한없이…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 ‡ ‡
의식이 느껴진다.
‘그 분’께서 자신을 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몸에 새겨진 은총이, 그 분께서 내려주시는 과분한 총애가. 그 시선에 반응하여 꿈틀대고 있었다.
눈 앞에서 스러져갔던 데이비드따위, 이제는 알 바가 아니었다.
이 힘을 업고, 이제는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복수를.
발을 내딛을수록 퍼져나가는 위상력이, 뉴욕을 뒤덮는다.
아아, 이토록 상쾌한 기분이던가. ─힘이 있다는 것은, 그 힘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하은!”
“…왔어?”
허공을 울리는 강한 울림에, 그제서야 고개를 꺾어 뒤를 쳐다본다.
자신을 따라온 몇 명의 인간. 이제는… 바닥을 기어다니는 개미만큼이나 의미가 없는 하찮은 자들.
아직 익숙하지 않은 힘을 다루기에는, 꽤 괜찮은 상대들이 아닌가.
등 뒤에 여섯 개의 흑색이 날개처럼 그 끝을 뻗는다.
이해할 수 없는 흑색에 세계를 담아내고, 이해를 벗삼아 눈에 깃들인다.
아주 맑게 보이는 세상이, 통쾌할 정도로 빛을 내뿜는 것이 보인다. 그들 너머에서 지켜지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주 자세히 보인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야하는거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기에.”
제이의 선글라스를 고쳐쓰면서 하는 질문에, 답한다.
결국 유니온과는 적대할 수 밖에 없기에.
“우리는 팀이었어. …이렇게, 쉽게 저버릴 수 있는 인연이었던건가?”
“팀과는 별개로, 유니온과 나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지.”
“데이비드 형이 마지막 유언으로, 네게 사과를 했는데도?”
“아직도 그 위선자의 말을 귀기울여 듣다니, 하찮을 뿐.”
“우리는 너를… 동료라 여겼는데….”
아주 잠시동안, 눈 앞을 스쳐 지나간다.
흑까마귀를 타고, 말렉의 배에 구멍을 내며 그와 만났던 일을.
강남에서 그들과 천천히 친해지며, 말렉의 토벌을 나섰던 일을.
하늘길에서, 차원종에게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칼을 내려꽂던, 이슬비와의 대화를.
과거를 회상하듯이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유지하던 하은은, 이내 그 흑색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답했다.
“…글쎄.”
이젠, 다 지나간 일일 뿐.
하염없는 과거의 일따위, 그녀에게 있어서 이젠 하등 쓸모없는 일이었다.
길게 뻗은 흑색과 별개로, 등에 진 창을 들어올린다.
그들과의 추억이 담긴 이 창을.
“이제 대화는 끝─막을 내릴 시간이야.”
“연하은─!!”
“이름 부르지 마, 괜히 정들겠네.”
검은 위상력이 담긴 흑색의 창을, 강하게 그어내린다.
그들과의 인연을 끊어내기 위해, 이 창을─
─버린다.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테니, 이제 마지막인가.”
인연을 스스로의 손으로 끊어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도 괴로워서, 눈뜨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붙잡으려는 그 손을 바라보고만 있자면.
“역겨워서 토가 나올 지경이다.”
이 하찮은 인생에 ‘덧칠’된 소꿉놀이같은 장난. 그에 비유될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
세하는 지하 어딘가에 깊숙이 처박아놓았고, 슬비는 건물 몇 겹을 뚫고 날아가 의식이 날아갔다. 둘 다 어딘가 부러졌음은 틀림없으리라.
유리는 날카롭게 다가서는 것이 가장 성가셔서 무기 째로 뭉개, 내장 하나를 짓이겨놓고 도롯가에 던져버렸으며, 제이는 가늠하지도 못할 경험과 노력으로 둘둘 감싸여있는 인물이었기에 가장 예의를 다해.
─흑색으로 찍어눌렀다.
살아있더라도 한동안 제대로 활동하지 못할 정도의 충격일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라는 요원은 변수나 다름없었기에, 충격을 주었음에도 지금 이 순간마저도, 위상력을 가해 그를 대지에 붙잡아두고 있었다.
남은 것은 미스틸테인 뿐. 다리 끝자락을 베인 것과 어깨 한 쪽이 베인 상태로 흘린 출혈량 치고는 꽤 오래 버텼지만.
“계속 그러면 죽어.”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위상능력자의 자체 회복 능력으로 회복하기에는 상처가 너무 깊었다. 지금이라도 싸움을 그만두고 돌아가는 것이 옳은데도 불구하고 미스틸테인은 창을 들어올렸다.
“보낼 수… 없어요.”
“어째서?”
“누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요….”
차원종들을 적대시한다. 그들을 원망한다.
유니온보다도, 차원종을 더 싫어하며,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어떤 방식이든 애를 쓴다.
그녀를 잘 알고 있었기에, 현 상황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한 사람이, 이제는 사람을 죽이는 적이 된다니.
“그런게 어딨어요….”
차라리 처음부터, 적이었더라면 더 편했을텐데.
정을 주고, 시간을 두고, 마음을 나누고.
그렇게 동료가 되었다고 믿었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다니.
“갈거라면… **지 베어넘기고 가세요.”
창에 위상력을 담기 시작한다.
위상력에 반응해 창이 웅웅거리며 울기 시작하고, 울분을 토하는 심정으로 외친다.
“그럴 각오조차 없다면! 차라리 돌아오란 말이에요!”
─미스틸테인, 극의極意
─가장 약하고 어린 창, 미스틸테인.
미스틸테인의 창이 녹색 광채를 내뿜으며, 그 모습을 확산시켜나간다.
그 모습을 보며, 하은이 창을 돌린다.
“각오가 없다─멋대로 지껄이지 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이래서 정말 싫었다.
그 사람이 받는 고통이라던가, 괴로움이라던가… 그 모든걸 모른다는 핑계로 넘겨버리고, 그 사람에게 무리한 것을 강요해버리니까.
이정도 했으면 충분하다, 라던가, 이만큼이면 괜찮다, 라던가. 너는 할 수 있어, 라던가.
“전부, 전부, 전부… 전부!”
─전부 다, 괴로운 말이라는 것도 모르는 주제에.
흑색의 창이 날까지 물들이기 시작한다.
이 빌어먹을 인연을 잘라낼 흑색이, 그 날을 비추어내며,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뻗어져나가기 시작한다.
막대한 질량, 그리고 질량에 따른 무게.
한 차례 휘두른다면 건물마저 짓뭉갤 그 창을, 단 한 손으로 붙잡는다.
“아아아아─!!”
괴로운 울부짖음과 함께 다가오는 어린 창을 바라보며, 자신도 괴로움을 토로하는 심정으로, 창을 휘두른다.
‘인간’으로서 남은, 마지막 ‘기술’.
─초월기, 아자토스의 심판
흑색의 선과 녹색의 창이 만나는 순간.
그녀를 붙잡고 있던 인연이 후두둑 땅에 떨어져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