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큐브 ver.J - 3부

브로유리 2015-02-23 3


 "…뭐?"


 예상치도 못한 대답에 제이는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해졌다. 정신적인 충격이 컸기 때문일까. 제이의 자세가 한순간 흐트러지고 말았다.


 "힘 좀 빼. 비록 내가 차원종이라지만 아직 너와 싸울 생각은 없다고."


 그 말에 제이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그리고 남자를 다시 한 번 관찰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시종일관 능글맞게 여유를 부릴 뿐, 딱히 어떤 적의나 투지 같은 것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아직'은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문제가 생긴다면 녀석과도 싸우게 되겠지. 제이는 경계를 늦추지는 않은 채 자세를 풀고 그에게 물었다.


 "차원종이… 된… 나라고?"

 "그래, 잘못 들은 게 아냐. 난 차원종이 된 너다."


 아까는 너무 충격적이라 뭔가를 느낄 틈도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다시 들어보니 제이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했다.


 차원종 때문에 전장에 서게 된 내가,


 차원종 때문에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내가,


 차원종 때문에 평범한 삶을 잃어버리게 된 내가,



 …차원종이… 되었다고…?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게 된다. 끓어오르는 분노는 온몸을 아무리 치달려도 식을 줄을 몰라, 몸을 떠는 것으로 밖으로 표출된다. 으드득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악문 이. 아까보다도 더욱 깊게 패인 미간의 주름. 전에 없이 격양하는 제이를 앞두고도, 남자는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여전히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난 너니까. 하지만, 너무 그렇게만 **는 말라고. 나 역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서 이렇게 된 몸이니까. 내게도 이유라는 것이 있다고."


 문답무용. 차원종이 되기를 선택한 이유라니. 그런 건 생각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당장에 달려가서 저 녀석의 얼굴을 뭉개놓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영 곤란하단 말이지….'


 머리를 냉정히 식히고 생각을 해본다. 지금 본인의 몸은 입체영상과의 계속된 전투로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다. 그리고 저 녀석의 힘은 나와 동등, 또는 차원종화로 인해 얻은 힘으로 나보다 우위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이 상태로 놈에게 달려들어서 이길 가능성은 없다.


 좋다, 이야기를 해라. 그 입을 나불거려서 내 분노를 돋우어 봐라. 그렇게 내 분노가 극에 달했을 때야말로 네 녀석의 얼굴을 뭉개버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제이는 가까스로 격양된 기색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물었다.


 "좋아. 내가 차원종이 된 이유…. 그 이유가 뭔지나 한 번 들어보자고."

 "…의외인데? 이렇게 순순히 이야기를 들어줄 줄은 몰랐어. 고마워서 눈물이 나는군그래."


 남자는 제이의 반응에 상당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제이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확히 말해주자면, 나는 너의 여러 가지 가능성 속에서 태어난 존재야. 너의 어떤 강력한 동기에 의해서 네가 차원종이 될 가능성. 그 가능성이 나라는 존재로 구현된 것이지."


 거기까지 말하던 남자는 갑자기 제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네가 차원종이 되게 만든 하나의 동기…. 그게 뭐라고 생각하나?"

 "……"


 남자의 물음에 침묵으로 일관하는 제이. 짚이는 바가 전혀 없어서일까. 아니면 짚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기가 싫어서일까. 도통 입을 열지 않는 제이를 보고 남자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이거 재미없게 말이야. 그렇게 입 꾹 다물고 있으면 물어본 나는 뭐가 되지? 아무튼 더 기다려본들 입을 열 것 같지는 않으니 말해주도록 하지."


 남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혹시 이렇게 하면 제이가 입을 열지 않을까라고 기대하듯, 남자는 선글라스 사이로 그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제이는 요지부동. 남자는 또다시 한숨을 옅게 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건 바로…. '평화에 대한 갈망'이야."



 '…뭐…라고?'


 평화에 대한 갈망. 그것은 분명, 제이의 마음 속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언제였던가, 제이는 유니온의 과학자 정도연의 일을 돕다가 그녀에게 그를 모방한 전투형 안드로이드를 만들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제이는 이를 허락하여 자신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었고 정도연은 이를 프로그래밍 했다.



 그랬더니 안드로이드는 프로그래밍을 거부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는군."


 무겁게 닫혀있던 제이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난 싸움을 싫어해. 그리고 전쟁이 미칠 정도로 증오스럽지. 전쟁을 겪고 볼 것 못 볼 것 다 봤기 때문인지, 나는 평화를 평범하게 원하는 수준을 넘어서 갈구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이 내가 차원종이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지?"

 "아니, 아니. 내가 얘기하는 평화는 그런 평화가 아니야."


 남자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평화가 그 이외에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가 말하는 평화는, 너 자신에 대한 평화를 얘기하는 거지."


 나 자신에 대한 평화…. 단 한 번도 생각해** 않았다라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싸웠다. 모두의 평화를 위해, 자신의 고통을 감수해가면서 전장에 섰다. 그런 그에게 자신에 대한 평화는 너무나도 낯설고 어색한 것이었다. 남자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차원전쟁이 끝나고 인류에게는 잠깐의 평화가 찾아왔어. 하지만 그동안 너는 어땠지? 힘은 유니온에게 빼앗겨버리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어. 매일 밤 꿈에서 나오는 광경은 참혹한 전장과 눈앞에서 죽어나가는 전우들이지.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채로 약과 실없는 농담으로 버티면서 억지로 살아가는 게 너란 말이야. 참으로 비참하지 않나?"


 내 삶이 비참한 건 말 안 해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차원종이 되면 정말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어…. 차원종의 압도적인 힘으로 모두를 굴복시키고 싸움을 멈출 수가 있다고. '역전의 용사'라는 네 칭호를 생각했을 때, 네가 차원종의 편에 서면 사람들은 큰 혼란에 빠질 거야. 그런 사람들을 설득한다면 그들은 차원종의 편으로 돌아설 거야. 그러면 네가 인간들과 싸울 이유도 없어지지."


 그렇게 쉽게 사람들이 항복할 것이었다면 이렇게 고생하지도 않았겠지.


 "그뿐이야? 너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위상력을 빼앗아간 유니온에게도 복수할 수가 있어. 더구나 차원종이 되면 폐급이 되어버린 지금의 몸 대신 예전처럼 강한, 아니 예전보다 더욱 강력한 신체를 얻을 수가 있다고."


 유니온은 몰라도, 전쟁을 끝낼 수만 있다면 이까짓 몸뚱이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고.


 "애초에 너도 잘 알잖아? 사람은 말로는 평화를 부르짖지만, 그 속으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쉽게 전쟁을 일으키는 족속이라는 것을….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인간들 속에서는 평화를 얻을 수 없어. 자…. 모두에게도, 너에게도 좋은 길이라고…."


 사람이 그런 족속이라는 걸 몰라서 싸우는 것이 아니야.


 "물론 차원종과 싸우다 죽어간 전우들이 생각나겠지. 영문도 모른 채 희생당한 사람들도 생각날 거야. 하지만… 이 괴로움을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겨낸다면, 넌 그토록 원하던 평화를 손에 넣을 수 있어."


 …개소리를….


 "여차하면 검은 양 팀의 녀석들과 같이 차원종이 되는 건 어때? 그 녀석들 그래도 제법 재능이 있어 보이던데 말이야. 너희들이 각자 하나씩 차원종의 군단장이 되어서…."

 "…**."


 작고 나지막한 목소리. 하지만 그 말에 깃들어 있는 강한 분노, 혐오감, 그리고 경멸감. 그리고 그 안에 은밀히 숨겨져 있는 살기. 그를 모를 남자가 아니었지만, 그는 더욱 능청을 떨었다.


 "갑자기 입이 험악해지는데, 친구? …아~, 혹시 그 관리 요원이 마음에 걸리는 건가? 뭐, 싸우는 데에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여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법 유능하니 참모 정도로는 사용할 수 있을지도…."

 "…그 입 닥치라고 했잖아…!"


 마침내 제이가 폭발했다. 몸은 예전만 못해도, 그 투지만큼은 가히 전**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으리라. 남자는 그 모습에 살짝 당황하는가 싶더니,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워우, 내가 설마 말을 잘못 꺼냈던 건가?"

 "잘못 꺼낸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이지…."


 그나마 남자의 말을 들어줄 만큼은 희미하게 남아있던 여유마저 제이에게서 사라지고 없었다. 곧바로 약물을 몇 개 꺼내서 들이키는 제이. 그 모습에 남자의 얼굴에서도 여유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진심이야? 나와 싸우려고?"

 "협상 결렬이야. 다른 말은 하지 않겠어."

 "정말 그런 상태로 나와 싸우려는 건가? 약물에 의존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몸으로, 위상력도 사라져서 호흡법으로 겨우 위력을 발휘하는 상태로 나와 싸우겠다고?"

 "…한 마디만 더 하도록 하지. 남자는 때로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제이는 싸울 태세를 다시 갖췄다.


 "…반드시 싸우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거든."

 "…유감이야. 그 싸우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지금이라는 게 말이지. 그렇다면…."


 남자는 체념하듯 말하며 선글라스를 한 번 고쳐 썼다. 그리고….


 "…하아앗!"


 남자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위상력. 주체하지 못하고 넘치는 위상력은 붉은 빛의 오라가 되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굉장한 크기의 오라. 적어도 검은 양 팀에 합류한 이래, 제이에게 이 정도의 기운을 본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제이에게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그리운 느낌. 다시는 나에게 돌아오지 않을 그것.


 "…이래도 나와 싸울 생각인가?"


 틀림없다. 저것은 나의 전** 때의 모습과 판박이다. …아니, 오랜 세월을 거쳐 더욱 단련된 몸과 축적된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강해진 '위상력을 잃지 않은 나의 모습'이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야. 몸도 멀쩡하고 차원종의 힘을 얻어 더욱 강해진, 위상력을 잃지 않은 너의 모습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아까도 말했듯이, 난 '평화에 대한 갈망'에 의해 태어난 존재야. 웬만해서는 싸움을 피하고 싶다고."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건가. 분명 저 녀석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녀석과 자신의 차이는 너무나도 극명한 것. ‘아차’하는 순간에.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녀석과 맞붙는 그 순간에 승패가 갈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마지막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남아있는 모든 힘을 온몸에 집어넣는다.


 "…하아앗!"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제이는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2024-10-24 22:23:4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