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의 주인 <14화> : 일그러진 어제, 망가져버린 오늘. 영원히 후회할…
AI미스틱 2020-11-19 0
일그러진 어제, 망가져버린 오늘. 영원히 후회할… 내일, 下
어떠한 방법을 사용했는지, 갑작스레 나타난 용, ‘헤카톤케일’.
차원 전쟁 시절, 가장 안전했던 서유럽을 단 사흘만에 불태운 역사상 최악의 ‘재해’인 ‘용’의 출현은, 세계를 한 차례 뒤흔들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한 차례 중단된 정상 회의였고,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운 유니온 상층부에서는 이 최악의 사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애쉬와 더스트 녀석들이….”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해준 이들이 있었다.
적이라면 적이겠지만, 적의 적이었기에 어떻게 보면 아군일지도 모르는.
변덕이 심한 ‘유령’이라 말해야할까. ‘애쉬와 더스트’라 이름붙은 그들은 ‘위상변환엔진’이라는 것을 사용해 ‘헤카톤케일’을 침묵시킬 작전을 제안했고, 현재로선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애쉬와 더스트… 너와 만났을 때, 무슨 짓을 했었어?”
“…글쎄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았는데요.”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게 맞았다.
단지 자신의 정신이 너무나도 연약해서,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그들은 뭐라고 했지?”
“저보고 ‘별의 주인’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어요.”
“…뭐? 무슨 영향이라고?”
갑자기 말을 끊은 김유정의 눈에서 당혹감이 엿보였다.
이쪽도 당황했지만, 아무래도 잘 듣지 못한 것이라 생각한 채 다시금 말했다.
“‘별의 주…’.”
“자, 잠시만. 하은아… 이렇게 말해서 미안한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
“네?”
“뭐랄까… 인간과 동물끼리의 대화라고 해야할까? 네가 말하는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뭔가 큰 트럭이 들이받은 듯 싶었다.
인간과 동물끼리의 대화. 다르게 말하면 음파의 주파수가 맞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초음파인데, 그것이 하은의 입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너무나도 쉬웠다.
─‘별의 주인’이라는 말은,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단어.
언어체계가 다르다는 의미이며, 다르게 말하자면… ‘차원종의 언어’로 이루어져있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언어를 지금, 하은이 입으로 내뱉었다는 것은.
“하은아… 애쉬와 더스트에게서 무슨 말을 들은거니…?”
순간 믿을 수 없었기에, 고개를 저었다.
말이 헛나오려는 것을 막고싶었기에 ‘아니’라는 말만 반복하게 되었고, 사고 회로가 멈춘 것처럼, 고장나버린 인형처럼. 같은 말만이 맴돌았다.
두 팔이 진동기마냥 떨리기 시작했고, 몸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두 손으로 머리를 붙잡고, 어지럽게 흔들리는 온 세상 속에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대기 시작한다.
“아니, 아…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이윽고 무언가 툭 끊어지는 감각과 함께, 위상력이 터져나왔다.
위협적으로 터져버린 위상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옥상의 일부를 무너트렸으며, 떨어지는 파편에 김유정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인지하고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감당도, 제어도 되지 않는 위상력은 오히려 등을 떠밀 듯 잔해들을 밀쳐내, 보다 가속시킬 뿐이었다.
G타워의 옥상은 실로 수십미터 이상. 자신이 한 행동과, 힘을 제어하지 못해 누군가를 죽였다는 것이 쓸데없이 기억으로 입력되고, 동시에 자신의 모든 것이 망가져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하은…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푸른 눈동자로 자신을 직시하는 이슬비가 서 있었다.
“무슨….”
“아… 아아….”
그 푸른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담기는 것이, 왜 그렇게 싫었을까.
왠지 모를 공포감에 두 팔을 끌어안고 소리를 내지르자, 커다란 역장이 퍼져나가며 균열을 크게 일으켰다.
동시에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우려한걸까. 본능적 보호기재가 작동되어 빠른 기세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구름을 뚫고 올라간 하은이, G타워 옥상이라는 작은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유정 언니!”
그리고 그 자리에는, 김유정을 부르는 이슬비의 목소리만이 울려퍼졌다.
‡ ‡ ‡
몇 시간이 지나, 간신히 마음을 간추리고 있을 때, 폐허가 된 건물 잔해를 옆으로 차버리며 누군가가 발을 들였다.
“휘유, 제대로 저질렀는걸? 설마 자기 관리요원을 떨어트릴줄이야.”
“…당신….”
A급 요원 김기태.
마치 비웃기라도 하는 말투는 여전히 짜증이 났지만, 그런 도발에 응할 정도의 기력이 없었던 하은은 그저 고개를 젓는 선에서 그만두었다.
그러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야, 대꾸도 안하잖아?”
“…시비를 걸러 온 거라면… 시기를 잘못 찾았어요.”
“오우, 이제야 말을 하네. …뭐, 그래. 자기 관리요원을 제 힘으로 떨어트렸는게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해야할 일이 있으니 돌아오는게 좋을거야.”
“당신이 그걸─”
“네 관리요원이 이 몸에게 ‘부탁’했기 때문에 ‘특별히’ 와준 거라고. 착각하지마라.”
마치 자신이 선심이라도 쓴 양, ‘특별히’ 라는 말을 강조한 그의 말에 잠시 고개를 들었다.
“…유정… 언니는.”
“멀쩡해. 뭐가 뭔지는 몰라도, 지금 일어난 일이 네 탓은 아니라는 상상을 하고있지. 옆에서 봤을때는 그게 그거지만.”
“당신은…!”
“어쨋튼 다 됐으면 돌아오라고. 이 김기태님의 활약은 최대한 많은 사람이 봐야만 하니까.”
그 말을 툭 던져놓고서는 곧장 발길을 돌려 돌아가는 그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제멋대로에, 다른 사람은 고려도 하지 않는 듯한 행동. 거기에 자신만을 생각하는 그 모습까지.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최소한 김유정이 살아있다는 소식만으로도 기분이 상당히 나아진 듯 싶었다.
하지만, 하늘 너머에서 다가오는 푸른 나비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비가 잔뜩 오는데도 불구하고 날개가 젖지 않는다는 듯 풀풀 날아 바로 앞에 내려온 푸른 나비가 말을 걸어왔다.
“이미 한 번 실망시켰는데, 또 가려고?”
“…그건….”
“상처를 주고, 제멋대로에… 돌아갈 자신이 있다니. 뻔뻔한게 좋아보이네.”
“…어째서, 이제와서 이런 말을.”
“나는 여태껏 너를 지탱하기 위한 말을 해왔어. 하지만… 지금만큼은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걸?”
“…그 입… 입이 없어서 유감이군.”
“그래. 뭐… 돌아가는건 네 마음이니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아. 단지 나는… ‘그’의 뜻을 지켜보며 네 주변을 맴돌 뿐.”
“그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완전히 사라져버린 푸른 나비에게 약간의 욕설을 내뱉었다.
고개를 저은 채 다시금 하늘로 날아오르니, 저 멀리 헤카톤케일이 보였으며, 동시에.
“헬기?”
하나의 헬기가 날아오다가─격추당했다.
‘어떤 멍청이가 헬기를…!’
옥상쪽에는 차원종이 드글대는 곳이 많았다. 그런 와중에 헬기를 타고 오다니. 한심해 미칠 지경이었다.
아래에 추락해 폭발을 일으켰지만, 어느정도 사람이 살 수 있을만한 사건이었기에 최소한 사람이라도 살려보고자 허공에 몸을 맡기며 날아올랐다.
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거의 늦은 것 같았지만.
─퍼엉, 펑...
연쇄적인 폭음을 내며 망가지는 헬기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금 늦은 자신을, 후회하고 책망할 뿐이었다.
‡ ‡ ‡
“여어, 오랜만이야. 유정 씨.”
“데이비드, 국장님….”
삐딱한 말투로, 김유정이 데이비드를 맞이했다.
아무리 유연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상관과 이런 식으로 대면하는 것은 그야말로 부담 그 자체였으니까.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대면이건, 뭐건.
중요한건.
“나중에 식사라도 하지 않겠어?”
“…지금 그런 말씀은, 조금 아닌 것 같은데요.”
이 남자는, 정말 철저히 작업을 건다는 점이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어도 꼭 첫 마디는 ‘식사 권유’로 시작되어, 그것이 지금까지 약 8번이 지속되었다. 아, 아까껄로 9번째인가.
“애들 앞인데, 조금이라도 체면을 세우시는게.”
“아아, 그렇군. 저 아이들이 검은양…. 확실히 유능한 아이들이야. 그래서, 유정 씨. 다음에 식사….”
“거절합니다.”
완고한 태도로 거절하자, 고개를 저은 데이비드가 말했다.
“이걸로 결국 10번째 차인 기념일이로군. 기념으로….”
“네, 거절하겠습니다.”
“이런. …그래, 몇 시간 전에 큰 일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오세린 요원에게서 들었네만,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그건….”
사실, 이런 때에만 가장 유능해지는 것이 그의 가장 곤란한 점이었다.
자료를 강하게 붇잡은 상태에서, 그에게 보고할 이야기들을 정리하자니 차마 뭐라 말할 단어들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자 데이비드가 말했다.
“혹시 ‘연하은’이라는 임시로 맡게된 아이에 대한 일인가?”
“…그렇죠.”
“그러고보니, 그 아이가 보이지 않는군. 은발에 흑안, 검은 십자의 창이라 들어서 눈에 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여기에 없습니다.”
결국 긴장과 함께 침을 삼킨 김유정이, 천천히 말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신강고부터 시작된 ‘연하은’의 불안정한 점, 비이상적인 몸 상태와 G타워 옥상에서 일어난 일까지.
그 모든 일을 들은 데이비드는 관련된 자료를 읽은 뒤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군. 그래서 유정 씨가 그런 위험한 조사를….”
“…국장님께서 직접 중단시키셨죠. 도대체 어째서….”
“안그래도 그 건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려고 했었네. 아무래도 유정 씨의 능력으로는 유니온의 걸림돌만 될 뿐이니.”
“윽….”
확실히 김유정 본인의 능력보다 데이비드 리라는 사람의 능력이 월등히 높았다.
출생부터가 범상치않으며, 초 엘리트의 교육을 받은 채 자라온 데이비드 리와, 평범한 관리요원인 그녀가 같은 선상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신강고 사건 이후, 그녀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려다가 ‘감찰부’의 존재를 우려한 데이비드 리로부터 조사 중단 선언을 받은 이후, 쭉 미루어왔었던 것을, 천천히 데이비드 리가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말해두겠지만, 이 일에 대해서 연하은 요원 앞에서의 직접적인 언급은 피하게.”
“어째…서죠…?”
“그녀에게 사과해야하는건, 유정 씨가 아니라… 유니온이니까.”
“…?”
그리고, 그가 모아온 자료들이 천천히 김유정에게 비치기 시작했다.
이내 극심한 후회가, 순간적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던 것은, 김유정이라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처의 크기가 아니었기 때문이고─또 다른 이유는, 그런 슬픈 과거를 보듬어주지도 못한 채, 가만히 내버려둬버린 자신에 관한 분노였다.
“이런, 일을….”
“그래, 용서할 수 없는 일이지. 유니온 상부는… 이런 일을 진행해왔다는거니까. 하지만, 지금은 분노할 때가 아니야. 우선은 눈 앞의 일을 끝내고, 나는… 그녀에게 사과해야만 하겠지.”
“어째서 국장님이!”
“내가 국장이기 때문이지.”
─그는 꽤 오래 전부터 유니온의 관계자였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그도 오랜 시간동안 이러한 일을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보다 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따위의 하찮은 대의를 위해… 한 명의 인간을 권리 채로 짓밟는 일을.
“나는… 이러한 일을 시도한 유니온을 용서하지 못하네. 하지만, 동시에 나도 그 유니온의 일부이기도 했지.”
“국장님이 그러신 건….”
“유정 씨. 방관자도 결국, 가해자라는 것을 알고 있지않나. 나는… 그 모든 일을 몰랐다는 핑계로 도망치고 싶지 않아. 이 사과는, 내게 있어서 평생의 업으로 남게 될거야.”
“…그…러시다면….”
“그럼, 우선 저 헤카톤케일부터 멈추고 생각하는게 좋을 것 같군. 그 다음에 연하은 요원을 찾던 해야겠지.”
우선 순위를 정리한 데이비드는 자신이 가져온 ‘위상변환엔진’을 통해 헤카톤케일을 멈추게 만들고자 검은양 팀원들에게 유인을 요청했고, 그들은 그 요청에 기꺼이 따르기 시작했다.
‡ ‡ ‡
처음 그 ‘용’을 보았을 때 든 감정은 무엇일까.
공포, 절망. 그런 것과는 한없이 머나먼 감정.
‘동정’.
죽어서까지 이용되어, 그 시체마저 조종당하여, 자신의 뜻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의 처지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었다.
하나의 도구. 그 정도의 가치.
문을 여는 ‘열쇠’ 정도에 불과한 하은과, 어떤 목적을 가진건지 모를 헤카톤케일.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그런 소모품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기부턴 이제 일방통행이라, 더 가게 두지는 못하겠는데.”
그 앞을 막아선다.
똑같은 처지에 놓인 도구라 할지언정, 의식의 유무와 판단의 자유로움이 틀리다.
실을 놓으면 허무하게 쓰러질 꼭두각시와, 운명이라는 사슬에 묶여서 발버둥치는 인형을 동일시 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허나 그 경고가 헤카톤케일에게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하은이 멋대로 정해버린 선을 넘어선다.
이미 커다란 질량, 안에 담고있는 것은 재해에 가까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상력.
그런걸 더 이상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기에, 하은이 손을 들어올린다.
─삐걱.
공간이 이질적이게 기울기 시작한다.
마치 누군가 장난이라도 쳐놓은 듯, 일그러지고 망가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착시현상의 선들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그 웅장한 거구가 천천히, 느려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강한 힘과, 위상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존재’한다는 개념이 있다면 분명히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광범위한 지역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상력을 흩뿌려, 온 지상을 짓누른다. 공간마저 비틀어버릴 정도로 강하게 일그러트렸음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가라앉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웠다.
“…아직인가.”
아직 제어가 되지 않는 위상력이었지만, 이정도로 상대가 거대하다면 그다지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이 도시이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헤카톤케일은 분명히 느려졌지만, 그 움직임을 영구히 멈출 수는 없었다.
부디 준비가 되었기를 바랄 뿐.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헤카톤케일이 천천히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것이 검은양 팀의 유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천천히 위상력을 풀기 시작했다. 어차피 유인이라면, 이렇게 느린게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모른다.
멀어지는 헤카톤케일을 보며, 합류를 시도하려고 하는 순간, 무언가가 발을 붙잡는 감촉이 들었다.
갑작스러운 무게에 고개를 내려 쳐다보았지만, 이런 옥상에 무언가 있을 리가 없었다. 금조차 가지 않았으며, 얼마 전까지 사용되던 건물에 나무 뿌리같은게 있을 리는 만무.
─하지만.
「 받아들이고, 맞이하라. 」
심장을 짓뭉개는 듯한 격통.
의식을 그림자 속으로 빨아들이는 듯한 감각과,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힘이 온 몸에, 혈관을 타고 휩쓸기 시작했다.
멈추었을 혈액이 뜨겁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차갑게 식은 시체에 활기가 돌기 시작하고, 몸이 달구어지기 시작한다.
달군 쇠마저 뜨겁게 데이게 만들 열기로 불타오르는 감각이, 뇌의 회로를 불태우며 거슬러 올라가 정신에 닿는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라 한다면, 아마 뇌가 녹아버리고, 정신이 박살나겠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려 들어서는 안된다, 그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그저 받아들이는 것만이 가능했다.
시야가 까맣게 물들어가기 시작하고, 눈 앞에 보이던 용의 형상마저 장막에 가로막혀 사라졌을 때에야, 그것이 눈 앞에 내려앉았다.
“…도대체.”
숨이 멎는다. 숨쉬는 법, 그 자체가 뇌의 기억으로부터 삭제되어 사라진다.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이자, 죽음이며, 이해와 이치의 너머에 있으며, 진리의 바깥에 있는 것.
별이면서도 항성이며, 행성이면서도 아닌 것이며, 또한 표현이면서도 표현이 아닌 것.
그래, 이해의 너머에 있다는 것부터가, 애초에 인지하려고 들어서도, 표현하려고 들어서도 안되는 것이었다.
거기서 뇌의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본능에 내재된 자기 방어기재가 더 이상 사고회로를 작동시키지 못하게 막아버리고, 정신이 파열되는 것을 억지로 붙잡는다.
물 속에 가라앉는 감정으로부터 빠져나온다.
바라보는 순간, 뇌의 쓰레기통에 처박혀 삭제되었던 숨쉬는 법이 간신히 되살아나고, 완전히 정지했던 의식이 다시금 제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벅찬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져있는 하은은, 무의식적으로 인지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렇기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신의 앞에 존재했다.
무엇인가. 그것은─
「 경건하게, 숭상하여 」
검은 세계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계란이 천천히 깨어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추상적인 이미지였지만, 조금씩 무언가가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 강림을, 맞이하라. 」
이내 산산히 깨어져 사라져버린 흑색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온 하은은, 마치 어리숙한 인형술사가 다루듯이 꿈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연히 틀려진 눈동자에는 색바랜 어둠이 아닌, 아득히도 깊은 나락이 숨어들었으며, 그 몸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위상력은 자신의 주제를 이해했다는 듯, 몸을 감추었다.
단지 그 등 뒤에, 커다란 여섯 개의─실선도, 곡선도 아니며, 면도, 점도…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러한 것인 ‘흑색’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그것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뇌가 녹아버리겠지.
시각적으로 보이는 그것은, 아마도… ‘직선’….
사용법조차 모르는 여섯 개의 ‘흑색’을, 날개처럼 등에 지고, 천천히 날아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언정,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리고, 영원히 후회할 시간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