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의 주인 <13화> : 일그러진 어제, 망가져버린 오늘. 영원히 후회할…

AI미스틱 2020-11-15 0

 일그러진 어제, 망가져버린 오늘. 영원히 후회할… 내일, 上



 어비스와의 격전이 일어난지 한 달 남짓 되었을까, 작전 구역이 이괄되었다.

 “계속해서 정말이지, 많이도 바뀌는군.”
 “아무래도 신서울 쪽의 상태가 안좋으니까요.”

 최근 무언가 일이 여러개 터졌다고 들렸지만, 설마하니 ‘용’이라는 특S급 개체의 사건이 터졌을줄은.

 “우리는 자리를 비운 검은양 대신인가?”
 “그렇게 되는 것 같네요.”

 신서울로 올라가게된 이유가 고작해봐야 대신 자리를 채우기 위한 용도라니.
 웃지도 못할 일이었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도착한 신서울은, 예상 외로 엉망이 되어있었다는게 문제지만.

 “왜 이렇게 개판이지?”
 “거기에 관해서 말씀드리고자 했습니다.”

 유주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뻐꾸기가 아닌, 정장을 입은 여성─리-르 앙골라가 서 있었다.
 그녀는 잠시 태블릿을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용이라는 군단장 개체의 출현, 그리고 강남의 붕괴. …더 설명할 것이 있나요?”
 “말씀드리고자 했습니다. 라고 해놓고 하는 말이 거기서 끝인가?”
 “딱히 더 드릴 말씀은 없으니까요. …아니, 한 가지 더 있을까요.”
 “뭔데.”

 잠시 입을 다물자, 그들 외엔 아무도 없는 재해복구지역에 정적이 흘렀다.
 대부분의 클로저들은 현장으로 출동한 상황, 관리요원들 역시 제각기 할 일을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마침 말하기 적당한 시점이라고 생각한 리르가, 두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연하은’ 요원님의… …실종입니다.”
 “…뭐.”

 그리고 그 사건은, 약 2주라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    ‡    ‡



 검은양 팀이 신강고에서의 사건이 마무리된 이후, G타워라고 불리우는 곳으로 가게 되는건 금방이었다.
 그곳에서 발생한 수많은 차원문, 꾸역꾸역 튀어나오는 밀물같은 차원종들.
 그리고 또다른 문제가 있다면.

 “여기까지 따라와서, 도대체 내게 뭘 권유하고 싶은건데.”

 마천루 옥상, 흑색 십자의 창을 어깨에 걸친 채 앉아서 지상을 바라보는 하은이 물었다.
 저 아래에서는 아직까지도 차원종들의 시체가 처리되지 않은 채 피비린내가 진동하겠지만, 특이하게도 이 옥상까지는 그 악취가 닿지 않아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질문에 답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일전까지도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냈던 존재였다.

 “계속 말씀드렸을텐데요. 우리와 함께하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계속 말해줬을텐데. …그 아버지가 누군진 몰라도, 함께할 생각은 없다고.”
 “이쯤 되면 1초 정도는 고민해주셔야하는 것 아닌가요?”
 “공교롭게도 ‘매너’라는걸 배우기도 전에 죽어버려서.”

 농담같은 것을 주고받고있으니, 뭔가 조금이라도 친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은 빛의 영향을 받지 않는, 길게 뻗어진 그림자.
 초고도에 떠서 지상을 비추고 있는 원격 조명 덕에 그림자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그 그림자는 기이할 정도로 길었다.
 그 끝자락에, 상대는 서 있을 뿐, 더 이상 다가가려고 하지 않았다.
 여유롭게, 마치 창 끝에 서 있듯 서서 뒷짐을 지고있는 그것이 물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거부한다고 해도, 바뀌는건 아무것도 없어요.”
 “…확신할 수 있나?”
 “네.”

 그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절대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확신이 가득 찬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킨 하은이 창끝을 겨누머 물었다.

 “이래도?”
 “물론.”

 서늘하게 식은 공기, 가라앉은 목소리.
 두 개의 이상적인 조합이라고 해야하나. 죽음이 금방이라도 **올 것만 같은 마천루의 옥상이 추위에 몸을 떨었다.
 옥상의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자세에 흐트러짐 없는 두 존재.
 한 쪽은 ‘검은’ 위상력을 가지고 이해할 수 없는 힘을 다루는 위상능력자였으며.
 한 쪽은 ‘아버지의 뜻’을 논하며 위상능력자를 회유하고자 하는 이.
 서로를 이해할 수 없기에 창칼을 겨누며 살의를 내비치고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거짓된 살의였다.
 끝내 창을 내린 하은이 고개를 저었다.

 “…오지 않으시는건가요?”
 “가도 의미가 없으니까.”

 싸워서 얻는 이득따위는 없었다.
 지면에 처박혀 목숨을 구걸하게 될 미래따위는 예측하고싶지도 않았지만, 눈을 마주하고 창을 겨누는 순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득히도 머나먼 차이. 경험, 능력, 힘의 농도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뒤떨어진다.
 심지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은 자신을 죽일 힘이 있었다.
 단지 바라보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가요? …이제야 당신의 눈에도 보이는 모양이네요.”
 “짐작은 했지만.”

 신강고에서의 첫 만남.
 그 그로테스크한 광경과, 새까맣기 그지없는 깊이의 어둠.
 두 개의 분위기가 섞인 채로 등장했을 때와는 틀렸다.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편안한 여유를 가지고, 마치 제 집 거실의 소파에 앉은 것처럼 평온한 목소리와 행동. 집 앞 도보를 걷는 것 같은 경쾌한 걸음까지.
 온 몸의 털이 곤두설정도로, 익숙해보였다.
 이런 상황에 놓인 것이 즐겁다는 듯, 고조된 목소리이기까지 했다.

 “아쉽군요. 아버지의 총애 속에 ‘주인’이 되기 전의… 당신의 기량을 보고싶었는데.”
 “…테인이를 한 번 해친걸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건가?”
 “그건 인간이 아니죠. …단순한 병기, 무기. 모조품더러 진품이라 말한다면, 과연 뭐가 가짜고, 뭐가 진짜가 되는건가요?”
 “그럼 사람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사람처럼 행동하는 존재를 가짜라 말하는게 정당한건가?”
 “적어도 제게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기 의사를 표명한 그것은 잠시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당신을 위한 자리도 준비되어있는데, 정말 오지 않을 건가요?”
 “몇 번이고 거절해주지.”
 “…아쉽네요.”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물어보고, 계속 되물어보는 질문에 이제는 신경질까지 날 지경이었다.
 그 상황에서 입맛을 다신 그것은 모처럼의 기회라며 입을 열었다.

 “이름이라도 서로 밝혀볼까요?”
 “언어 체계가 다를텐데.”
 “지금의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닐텐데요.”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웃음이 뭘 의미하는걸까. 그걸 이해하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제 이름은 ‘피어’.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공포’의 이름입니다.”
 “…어째서.”

 그래. 들어서는 안되는 이름이다.
 그것은 들려서는 안되며, 이해해서도 안되며, 하물며 인지해서도 안되는 발음.
 언어체계가 다르다─그것들과는 다르다.
 그것으로 자신을 구분해온 하은의 선이 살짝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렇게 당황하신거죠? 설마, 아버지가 뜻을 이루시는데 당신에게 어떠한 손도 대지 않았을거라 생각하셨나요?”
 “…내 세포의 대부분이 차원종으로 이루어진, 이유가….”
 “뭐, 그렇죠. 그쪽과 우리의 언어체계는 어느정도 비슷하니까요. 거기에 아버지의 권능이 직접적으로 스며들어있는 당신이라면… 분명히 우리와 같아질거라고 믿었어요.”
 “거…짓말….”
 “신뢰의 여부는… 자유죠.”

 그리고 그제서야 어둡기만 했던 그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에 한없이 가까운 얼굴. 그것은… 그래, 인간을 빚은 것만 같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무언가를 깎고, 빚어서 만들어낸 듯한 인간.
 새하얀 머리카락에 공포가 담겨있었으며, 붉은 눈동자에 핏물이 가득했다.
 미소에는 악의가 넘처 흘렀으며, 한 번의 고개짓에는 수많은 의사가 담겨있는 것 같았다.
 공기마저 침범해 가라앉힐 정도로 방대한 무언가─그것은 분명 그녀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이제 당신도 우리와 비슷해졌으니, 잠시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나눌 이야기같은건… 없어.”
 “…오, 이럴수가. 아직도 아버지의 의사에 반하겠다는 건가요?”
 “…물론.”

 그 말에 한숨을 푹 내쉰 ‘피어’가 말했다.

 “운명에 따라서, 당신은 결국 이곳으로 올 수 밖에 없어요.”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야.”
 “아버지께서 결정하신 사안. 당신은 거부할 수 없어요.”

 입꼬리를 양 끝까지 올리며 웃는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공포스럽다면 공포스러운 광경으로부터 고개를 돌려버린 하은은 이제 돌아갈 시간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동이 트기 시작했고, 또 다시 싸움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었기에.

 “다시 봐요. 그 때는… 그래요, 하나의 어엿한 ‘주인’으로.”

 새벽의 닭이 울며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 마치 먼지처럼 사라져버린 피어의 모습에 창을 강하게 붙잡았다.
 이제는 빛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새까만 창은, 더 이상 긴 그림자를 유지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났을까.
 처음으로 A급 요원 김기태라는 인간을 보게되었다.
 본래 출동하기로 되어있던 요원인지라 한 차례쯤은 얼굴을 마주쳐야했기에 일부러 발걸음을 옮겼지만 그다지 신경쓸 필요가 없는 남자, 정도의 평가가 자동으로 내려졌다.
 그 눈동자 속에 담겨있는 것─사람도, 정의도, 복수도 아닌… 단 하나의 감정.
 ‘욕망’.
 연구소에서 수도없이 보았던 불쾌한 감정이, 언제까지고 떠나지 않고 있었다.

 “뭘 봐? 할 말 다 했으면 가라 꼬마야.”
 “…그러죠.”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가 말하는 ‘클로저를 위한 일’이 도대체 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이 지금 당장의 일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라는건 자명한 일이었다.
 A급 요원이라 섣불리 대들기도 어려웠지만, 막상 싸우라 한다면 그다지 무섭지는 않을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렇게 행동하는, 마치 고독을 자처하는 듯한 그 행동은 무언가에 대한 불길함을 비치고 있었으니까.

 “괜찮니?”

 마침 그 장면을 멀리서 보고있던 김유정이 다가와 물었다.

 “김기태 요원이 너에게 해코지하지는 않았지?”
 “…네, 뭐.”
 “다행이구나. …어째서 출격을 거부한건진 몰라도, 그의 행동이 수상하니 유의하렴.”
 “알았어요.”
 “그래. 아까 전 대로변에서 강한 위상반응이 일어났으니 출격해줘. 만약 적이… 애쉬와 더스트라면, 웬만해서는 후퇴하고.”
 “…애쉬와, 더스트?”

 들어본 적이야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가지고, 검은색 옷으로 깔맞춤한 남매, 라고만 알고있을 뿐 실제로 그들에 대해 알고있는 것은 적었다.
 세하는 ‘기분나쁜 녀석들’이라고 했으며, 슬비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차원종’, 유리는 ‘꺼림찍한 느낌’, 미스틸테인은 ‘불쾌함’, 그리고 제이는.

 ‘두려움과, 사명감…이었나.“

 단지 ‘기분’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니, 알기쉬운 쪽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복잡할까. 기분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만큼, 어떤 존재인지 더 알기가 어려웠으니.
 요청대로 대로변에 도착하자, 이상기후라고 느껴질 정도로 올라가있는 온도에 무심코 놀랐다.
 불타오르는 대로변이기에 당연히 더울 수 밖에 없겠지만, 자연 현상은 아니었으며 하물며 엔진이나 가스 따위가 터진 것도 아니었다.
 불을 뿜는 차원종도 없었다. 하지만, 공간에 아지랑이가 생겨날 정도로 강하게 타오르는 그 불길 속에서 여유롭게 서 있는 두 인체가 있었다.
 대비되는 듯한 색채를 맞춘 옷, 틀에 잘못 끼워넣은 ‘보석’이라고 해야할까….
 그들은 자신있게 각자 허리춤에 손을 하나씩 얹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먼저 입을 연 것은 여성의 쪽이었다.

 “아름다운 불길, 도시가 불타운 세상 한가운데에 있는 기분은 어때?”
 “잿빛으로 물든 하늘과, 모든게 불타오르는 회색 연기의 모습은 언제봐도 아름답지.”

 자기들 멋대로 불타오르는 도시를 평가하더니, 이윽고 말했다.

 “하지만 이 모든게… 배신자의 작품이라는게 불쾌해.”
 “맞아. 예술이 담기지 않은 단순한 파괴행위… 불길이 안타까울 정도야.”

 그 가운데, 잔해를 짓밟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자, 그제서야 인지한 듯 고개를 돌려 하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것은, 여성 쪽이었다.

 “와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연하은, 언제 만날까 매일 세어봤는데… 아무래도 오늘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애쉬와, 더스트….”

 ─확실히.
 왜 그들이 그런 평가를 내렸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불쾌함, 꺼림찍함… 여태껏 들은 평가와 많이 틀렸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유사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불쾌함’에 가깝겠지.
 말투와 음색으로부터 새어나오는 그 목소리가 짜증이 날 정도였다.

 “알고 있었네. 하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는 잘 듣지 못했겠지. 나는 애쉬. 그리고 이쪽은 누나인 더스트.”
 “…그런건 아무래도 좋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래,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별의 주인’의 영향을 확실히 받은 것 같군.”
 “그러게. 하필이면 ‘별의 주인’에게 걸리다니. 운도 없지.”

 별의 주인…?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차원종의 개체중에 그런 개체명이 붙은 존재는 아무것도 없다.
 고개를 기울이자, 이해하지 못했냐며 더스트가 비웃었다.

 “역시 아직 모르는 모양이야.”
 “그래, 하지만 슬슬 알게될거야. 그 힘을 받아들인 대가를 말이지.”

 그 쯤 되자 이제는 아예 무시하고있다는 분위기가 팍팍 났기에, 우선 창을 들고 말했다.

 “너희들끼리만 아는 얘기는 집어치우지.”
 “그래, 그러지. 우리 역시 폼으로 너를 기다린게 아니니까.”
 “맞아~ 좋은 정보를 주려고 했는데.”
 “좋은… 정보…?”
 “그래. 너만 알고있어야만 하는… 그런 정보.”

 그리고 몇 분간의 이야기 사이에, 도저히 들어서는 안되는 이야기를 들은 것만 같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건지.

 “…거짓, 말….”
 “꺄핫, 그 표정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정말로 몰랐었나봐?”
 “그 녀석들이 알려줄 리가 없지.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건 자명한 일이니까. 무엇보다 그들이 계속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테니.”

 믿을 수 없는 진실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막대한 질량을 가진 창이 허망하게 지면을 가르며 박히고, 그 모습을 보던 더스트가 말했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도 곤란하지. 배신자에게 죽음은 당연한거지만… 그 죽음이 적의 힘으로 흡수되는건 원하지 않는 일이니까.”
 “그래서 지금 네게 그 정보를 알려주고 있는거야. …뭐, 네가 다른 인간들에게 이 이야기를 할 일은 없겠지만.”

 입을 꾹 다문 하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렇게 될거라는걸 녀석들이 확신할 리가 없어….”
 “확신했을거야. 인간의 의지로… 위대한 별의 의사를 거스르는게 가능할 리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실제로도 몇 번씩이나 살육의 쾌감에 넘어가기도 했고.”

 말문을 틀어막는 그 한마디에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 남은 것.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까지 ‘운명’이라는 순리에 망가질 것이라는 말.
 그 말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가보겠어.”
 “그래, 하찮은 인간의 몸으로… 한껏 괴로워해봐.”

 하이톤으로 이루어져있는 더스트의 목소리를 끝으로, 그들은 사라졌다.
 불길이 자욱해, 언제 화마에 불타오를지도 모르는 대로에… 풀석 주저앉은 하은은 가슴을 끌어안았다.
 모르고 있었던 것이 차오른다. 모르는게 더 좋았을 것이 느껴진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그것이,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두려움’에 지배당해, 뇌─애초에 활동을 하지 않지만─가 활동을 멈추고, 의식이 제 기능을 멈춘 듯 시야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욱신거리는 온 몸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치─마취 없이 몸을 잘라내는 그 시절이 떠오르는 듯한 악몽 속에 갇혀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시간이, 흘렀다.
 다시금 일어났을 땐, ‘초대형 차원종’… ‘서유럽의 재앙’이 부활한 채로.
2024-10-24 23:35:57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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