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비스의 주인 <6화> : 클로저라는 것

AI미스틱 2020-10-1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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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봐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심야의 거리.

사람마저 한산할 정도로 어두운 시간에, 거리를 걷는 남자가 있었다.

츄리닝 바지에 반팔 티, 그리고 삼선 슬리퍼까지.

아저씨 패션이라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옷을 입고있는 남자는 입에 담배─아니, 사탕을 물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산 과자와 도시락, 맥주가 든 봉투를 늘인 손에 붙잡고, 남은 한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걷고있던 그 남자는, 문득 걸려온 한 전화에 휴대폰을 들었다.

안에 띄어져있는 번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이번엔?”

자신은 이미 은퇴한 클로저에 불과했다.

이따금 나타나는 불량배들을 혼내는 것 외에는 하나도 특이할 것 없는 아저씨. 그게 전부였다.

그런 그에게 이따금 들려오는 전화가 있었으니, 대개가 유니온에서 오는 경고, 혹은 그 외의 개인적인 부탁─주로 불법적인 일이었다.

알파퀸, 서지수라던가 다른 동료들 때문에 대부분의 수익이 배상금으로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연금을 빼면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아저씨였다.

그저 그럴뿐인 아저씨에게 뭔 부탁이 그리도 많은지.

“…리르?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냐?”

하지만 의외로 들려온 목소리와 대상에 순간적으로 기분이 밝아졌다.

요즘은 주변을 둘러싼 채 감시하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편의점 가는 것마저도 맘편히 갈 수가 없었다.

뒤통수를 노리는 시선을 느낄 때면 얼마나 부담스럽던지.

그런 탓에 오랜만에 걸려온 지인의 전화는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유니온에 직장을 얻었다며? 출세했네!”

유니온의 관리요원이 됐다는 소식은 꽤 오래전에 들었다.

물론 축하한다는 말을 보내고 싶었지만, 그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게 지금의 안타까운 처지겠지.

“나한테 부탁할 일? 뭔데?”

막상 하는 말은 옛날 이야기도, 자기 이야기도, 일 이야기도 아닌 부탁할 일이었다.

그쪽에서는 꽤 많은 일이 터지고 있었는지, ‘새로운 차원종’ 어비스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특S급 차원종’으로 등재될 위험요소마저 있다는 소식에 그는 살짝 망설였다.

“내 상황은 잘 알잖아.”

유니온에 감시당하는 몸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지금 편의점에 갔다오는 것마저도 A급으로 추정되는 클로저 하나가 몰래 미행하고 있는 상태였던지라 더 귀찮은 상황에 속했다.

“그리고 내일 아들이 클로저 팀에 들어가서, 조금 그렇네.”

심지어 그에게는 17살 된 아들이 하나 있었다.

살짝 유예되긴 했지만 팀이 정해진 탓에 내일은 정말로 집을 떠나야할 상황에 이르렀다. 최근 들려오는 차원종 소식을 봐서는 아마 집에 돌아올 시간조차 많이 없겠지.

“어… 뭐, 학교에서도 차원종이 최근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서 말이지.”

탓에 최근에는 대부분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따금 밥상 차려준다면서 외출하는 것 외에는 딱히 외출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고, 같이 놀던 친구 둘 중 하나는 연락이 최근 잘 안되고 있다는 듯 싶었다.

“응? 다 끝나고 가도 좋다고? …뭐, 그건 상황을 봐서.”

마침 구두 소리가 나고 있었다.

야밤에 이렇게 구두를 울리며, 자기가 여기있다는 것을 굳이 알리는 행위는 하나의 경고였다.

“끊는다.”

삐익─하는 소리와 함께 꺼진 휴대폰을 손과 함게 주머니에 넣으니, 그제서야 가로등 불빛 사이로 모습을 비쳤다.

상당히 장신의 그는 점잖아보이는 안경을 쓴 채 장갑을 끼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다는데?”

“감시관인지라, 상부 명령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감시관을 자처한 그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고지식하고, 상식이 먹혀들지 않는다.

“특S급 차원종일지도 모른다잖냐. 위쪽에는 자네가 좀 잘 말해주지.”

“특S급 차원종이건 뭐건─그건 제 임무와 어떤 관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로등 불빛으로 발을 내딛으니, 그제서야 서로의 모습을 드러낸 채 마주볼 수 있었다.

한 쪽은 손을 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한 손은 봉투를 잡고 있는 여유로운 모습.

나머지 한 쪽은 언제라도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

불빛에 비치는 먼지 사이로 긴장감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감시관 쪽이 입을 열었다.

“전 울프팩 팀의 선두, ‘드래곤’ 박용태. 당신의 일탈 행위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내 아들내미도 끌고가려는 개X끼들이 말이 많아. 꼬우면 니가 나보다 강하던가.”

스윽, 하고 주머니에서 손이 빠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감시관의 몸이 움직였다.

초신속의 스트레이트, 오른 손의 주먹이 바람을 돌파하며 나아가고, 그 정면에 일격을 먹이려던 순간─

─빠악!

뒷목 아래서 커다란 충격이 일었다.

순간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지자, 그의 등을 밑창 닳은 슬리퍼로 짓밟은 박용태가 입을 열었다.

“특S급 차원종, 말로만 듣고 니들은 경험해본 적 없겠지.”

“큭…”

단 1초도 되지않아 발생한 일.

A급 클로저일텐데도 불구하고, 전 영웅, 심지어는 은퇴한지 오래된 괴물에게는 채 닿지 않았다.

이 근방을 둘러싸고 있는 저격수 몇에게 신호를 보낸다 한들, 그의 행동이 더 빠르겠지.

“그건 재앙이야. 세상을 불태우는… 지금 처리하지 않으면 안될 사악이다.”

“그렇다고 해서… 갑작스레 규율을 바꾸버릴 수는 없잖습니까.”

“그래. 하지만 규율 하나에 수백만명의 목숨을 걸 수는 없잖아.”

그리 말하자, 감시관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우려한다면 지금 존재하는 규율의, 도대체 몇 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겁니까.”

“최소한 절반 이상은 변해야겠지.”

하지만, 변화한 규율은 하나도 없었다.

필시 징계를 먹게될 일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도 당신은 가겠다는 겁니까…”

그 질문에, 박용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인간을 위한 길이라면. ─따라올거라면 따라오던가. 난 뭐가 됐건 갈테니.”

발을 내린 채, 발걸음을 돌리자 그 모습을 보던 감시관이 물었다.

“제가… 상부에 보고해서, 당신을 가지 못하게 할 지도 모르는데…?”

“그만한 힘이 있다면 끌고와, 얼마든지 상대해줄테니까.”

손을 흔들며, 자리를 유유히 떠났다.

솔직히 말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도 한 명의 어엿한 클로저였고, 단지 상부의 명령을 받았을 뿐이니까.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대며 규율을 만들고, 그 규율에 자신을 가두었다는게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치, 가둬놓고 사육하는 애완동물같은 입장이 아닌가.

한숨을 푹 내쉬며, 처지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싶어 착잡한 마음에 발길을 서둘렀다.

“…그래, 뭐… 여기에 사람이 없고, 건물 불이 다 꺼졌다는 건 맞지만…”

문득 보이는 풍경에,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런 일이 갑작스레 찾아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들이닥치는 큰 일은 하나면 충분한데.

“‘드래곤’ 박용태… 맞나?”

“댁은 누군데?”

“…어비스의 11번째 주인… …인간의 언어체계로는 할 수 없는 말이라, 유감이군.”

“어어, 유감이다 그래. 미안한데 잠시 거기 길좀 비켜주겠어? 집에 좀 가려고.”

“집에 갈 필요는 없다. 여기서 그대는─”

쩌어엉!

커다란 굉음이, 조용한 시가지에 울려퍼졌다.



“충성, 오셨습니까 요원님.”

“…이게, 전투의 흔적인가요?”

“예.”

─이게, 단일 개체끼리의 싸움이라고.

바닥에 떨어진 간판, 박살나있는 도로는 물론이요, 건물을 타고 오른 금, 하나같이 모조리 깨져있는 창문.

몇몇개의 건물은 완전히 가라앉았고,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라고는 믿기지 못할 정도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마치, 차원종 대군이 급습해온 것마냥. …아니, 그것보다 심한 모습이었다.

투둑, 떨어지는 돌덩이 소리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추락한 콘크리트.

주거지가 아닌, 이런 외곽에서 전투가 일어난 것은 나름대로의 배려일까?

“그래서, 직접 이 광경을 본 기분은 어때?”

“…잘, 모르겠어요. 이런 모습을 보여주시진 않으셔서…”

“…나도 몰랐어. 이런 사람일줄은.”

뒤에 따라온 한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며 그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일개 개인이 해낸 모습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풍경.

시선이 닿은 곳마다 무너져내리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째로 날아가 사라져있는 곳도 존재했다.

뻥 뚫려 바람구멍이 숭숭 나 있는 건물과, 반으로 갈라져있는 건물.

지면에 처박혀있는 고층의 빌딩과, 안에서 무언가 터졌는지 불타 그을려진 흔적.

이건─재앙에 가까웠다.

“아버지께선…”

“아직 확인이 되지 않았다. 정 걱정된다면 직접 찾아봐도 되고.”

“…아뇨, 워낙 튼튼하신 분이라…”

─걱정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목 끝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아버지라 해도, 결국 현역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지낸 한 명의 일반인.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패배해 목숨을 잃거나, 승리했거나. …아니면, 도망쳤거나.

처음도, 마지막도. 떠오르지 않는 이미지였다.

태산보다도 무겁고 하늘보다도 넓은 등을 비친 아버지가─신체 위상능력자의 정점이라 불린 박용태가, 패배한다는 이미지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요원님, 이런게…”

“슬리퍼?”

특경대가 마침 안쪽에서 슬리퍼 비스무리한 것을 들고나오니, 그것의 상태를 보던 유주가 의심되는 눈빛으로 새겨보았다.

“칼로 난도질한것만 같은 모습이군.”

너덜너덜, 확실히 그랬다.

언제 찢어질지 의심될 정도로 닳고, 망가져있는 그 슬리퍼는 이윽고 툭, 뜯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신고 나가셨던 슬리퍼에요.”

“…확신하나?”

“예. …거기에 아버지가 얘기하셨거든요. 한 번 제대로 싸우면 신발은 못쓰니까 싼 슬리퍼를 신는다고.”

“그럼 거의 정확하겠군. …혈흔같은건 발견되지 않았나요?”

“혈흔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다행이군요.”

─쩌적…

한 건물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들어가있지 않은 그 건물은, 하나의 파편을 흘려버리곤.

쿠구구궁…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대로 가라앉기 시작하는 건물로부터 튀어나오는 수많은 파편들.

위상능력자인 그들은 몰라도, 특경대들에게는 상처를 낼 수 있으리라.

혹은 잘못 맞아 병원에 실려갈지도 모르고.

 ─빠지직…

“…이건…”

그 순간, 전기로 된 망이 그 주변을 뒤덮으니, 파편은 물론이요 먼지까지 안에 가둔 채 한참을 있다가 붕괴가 멈춘 다음에야 사라졌다.

파직거리는 번개를 회수한 유주가 신재영 경감에게 물었다.

“다친 사람은 없겠지요?”

“예. 덕분에…”

“빨리 끝내야겠네요. 건물들이 하나같이 불안불안하니…”

이게 정말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일까.

유주 역시 리미터가 모두 해제되면 비슷한 풍경이야 연출할 수 있겠지만─이런 전투를 늘 전개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었다.

출력과 화력으로 쏟아붓는 타입인 포격수라 그런걸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위상력 변곡기에 이상은 있었던가요?”

“기록에 따르면 작은 차원문이 열렸던 적이 있습니다. 다만…”

“…다만?”

“그 횟수가 한 개인이 쓰기에는 조금 횟수가 맞지 않더군요. 총 세 번 열렸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윽고 하늘에서 날아온 뻐꾸기에서 리르의 모습이 비쳤다.

“요원님, 다음 작전구역으로 이동하실 준비는 되셨습니까?”

“나는 상관없어. 하얀은?”

“하얀 요원님 역시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두 분은 리버스 휠에 탑승해주세요.”

“알았어. 잠시 얘기좀 나누고.”

“그럼.”

그대로 선회해 날아가는 뻐꾸기를 바라보던 소년에게 유주가 물었다.

“단아, 너는… 네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했었니.”

“제 아버지… 말씀이신가요?”

단아라 불린 소년은 잠시 고개를 내린 채 고민하더니 답했다.

“자상하고, 따뜻하고… …가끔씩 가다가 집에서 사라졌을 때에는 정말 걱정되긴 하지만, 세상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운 사람…일까요.”

“그래?”

“…네.”

그리 말한 단아는 고개를 돌려 망가진 거리를 바라봤다.

그곳은 여전히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투입되었던 특경대들 역시 대부분 교통 상황을 정리하거나 보고를 위해 자리를 떴고, 남아있는 것은 유주와 단아 뿐.

기울어서 바닥에 박혀있는 신호등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그에게 다가가 유주가 재차 물었다.

“너는… 어떤 클로저가 되고싶지?”

그 질문에, 다시금 거리를 바라보던 단아는 입을 열었다.

“…아버지처럼, 모두를 구하는… 그런 클로저가 되고싶어요.”

“그러냐.”

하지만, 될 수 있을까?

처참하게 무너진 거리의 풍경. 자신에게 이런 말도안되는 현상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을까?

당장 바로 옆에 서 있는, 전쟁 시절의 클로저마저도 말이 안된다고 하는 와중에, 고작해봐야 훈련생일 뿐인 자신이…

“뭘 그리 고민하는건진 모르겠지만.”

꾸욱 누르는 중압감에 목을 잠시 숙인 단아는,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아버지보다는 조금 작지만, 따뜻함과는 약간 다른 온기를 가진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는 유주가 있었다.

“넌─아마 나보다 강해질거다. 지금은 단순히 경험이 없기에 한없이 멀게 느껴지겠지만.”

“…그럴, 까요…?”

“그럼. 난 이제부터 다른 구역으로 향하겠지만… 이곳에 남을 2분대 중에서는 네가 가장 선배니까, 애들 잘 돌봐줘**다?”

미소를 지으며 말한 유주는, 푸른 빛으로 맑게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말했다.

“나중에, 또 보자꾸나.”

“…네.”

그대로 하늘에 날아오르는 유주를 바라보는 단아의 눈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결심이 서고 있었다.



“그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손님?”

“괜찮으냐는 것은…?”

“무기가 손님의 위상력에 버티지 못한다는 것 쯤은 이미 전해들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심한 방출은 학교 자체에 위협이 될 수 있어요. 조심해달라는 의미입니다.”

십자의 창이, 형태를 갖춘다.

양 옆으로 검은 기운이 뻗어져 낫을 이루고, 정면으로 탄환을 발사하는, 일종의 흉기가 되었다.

하지만, 양날의 검과도 같은 무기.

방출량을 억지로 늘려 무기의 수명을 늘리는 건 좋지만, 그만큼 위협이 거대해졌다.

일전에 했던 김시환의 개조가 일시적인 수명 연장이라면, 지금 하는 것은 보다 거대한 힘을 휘두르기 위한 ‘조치’에 가까웠다.

“부디 학교만큼은 부수지 말아주세요, 하하!”

“…노력해보죠.”

차갑기 그지없는 손으로 창을 거머쥐고, 심장이 뛰지 않는 몸으로 적을 베어낸다.

무기의 형태도, 위협도 상관없는 행위일 뿐이다.

단지, 그곳에 ‘피해 없이’ 라는 조건이 붙는 것이지.

“그러고보니, 우정미 선배님과는 이야기를 해보셨습니까?”

“…이번에 구출한… 학생인가요…?”

“예, 미스틸테인이라는 분께서 구해오신 분인데, 시간이 난다면 한 번 가서 말을 걸어보는것도 나중에 좋은 일이 될 수 있겠죠.”

“…말은 걸어보죠.”

관심은 없었지만, 나중에 또다른 형태로 다가올지 모르는 인연에 대비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에 우정미를 찾아가니, 그녀는 고개를 돌린 채 이쪽을 외면하고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니,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다가오지 마. 나는…”

그 다음의 말은 잘 듣지 못했다.

보다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 알고싶었기에 천천히 다가가 물었다.

“…저기요?”

“다가오지… …너는…?”

앳된 목소리에 놀랐는지 고개를 돌린 그녀는 하은을 본 채 물었다.

“너도… 클로저야…?”

“놀랄 것까진 없죠.”

애초에 미스틸테인도 클로저인 와중에, 하은이 클로저인걸 못믿을 이유따윈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그녀가 물었다.

“너 같이 어린 애도… 클로저가 되는거야?”

“─어린 애라… 글쎄요,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저는 적어도 그랬었네요.”

애매하게 답한 하은의 말을 의식한건지 소리나게 침을 삼킨 우정미가 말했다.

“저리 가 줘… 나는…”

“…옛날에 클로저와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는 몰라요.”

“알아! 하지만… 하지만!”

“그리고, 알 수도 없었죠. 내게는… 그럴 힘도, 능력도…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무슨…”

우정미가 고개를 돌렸을 적에는, 이미 하은은 등을 돌린 채 떠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어두운 뒷모습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하나도 모르는지, 하은은 그저 멀어질 뿐이었다.

창을 고쳐잡은 하은은, 동시에 교내에 출현한 차원종의 처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함께 가기로 정해진 미스틸테인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잘 해봐요, 누나.”

“…그래.”

미스틸테인이 손을 내밀었지만, 맞잡지 않았다.

이 차갑기 그지없는 시체로, 다른 사람의 온기를 빼앗는게 거부감이 들었다.

오히려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질 정도로.

상층 복도에 발을 들이자, 그곳에는 혐오 이상으로 피가 질척하게 묻어있는 복도가 있었다.

“…어?”

그 말을 한 것은 미스틸테인일까, 하은일까.

거의 동시에 울려퍼진걸지도 모르는 음색이 겉을 맴돌며 핏방울에 흔들리는 물결을 일으켰다.

하나같이 날카로운 칼로 베어낸 듯한 흔적을 가지고, 몇몇개는 몸이 분리되어 양 옆에 흩어져 고어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찰박거리는 핏물바다의 복도를 지나치고 있으니, 어째서인지 앞이 새까맣게 변하는 것 같았다.

환각인가 싶었지만, 기이할 정도로 가시적인 형태를 띈 그 색은 낼름, 혀를 내미는 듯 싶었다. 어쩐지 익숙한 기운에 떨리는 손에, 창이 덜덜거리기 시작했다.

“누나?”

“…돌아, 가는게… 좋을 것 같아…”

목을 억죄어오는 감각, 아니, 그런게 아니었다.

전신이 얼어붙는 감각… 그것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머릿속의 사고가 하나씩 정지하며, 온 세포가 돌로 굳어들어간다는 그런 감각이었다.

입이 제대로 열리지 않았고, 말이 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간신히 한 문장을 내뱉자, 그 이상함을 느꼈는지 미스틸테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애초에 이상한 풍경이었다.

그런 곳 안으로 들어온 이상, 차원종을 사냥하기 위해 만들어진 미스틸테인 본인과는 다르게, 평범한 클로저인 하은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그런게 아니었다.

본능적인 거부감? 공포? …그런게 아니었다.

본능보다 아득히 멀리 있는 것. 생명체로서 당연시되게 느끼는 어떠한 무언가가 강하게 몸에 부딪혀오고, 그 충격이 뇌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이 돌아가기도 전에.

“성대하게 맞이할 준비를 해두었는데, 오지 않는건가요?”

온 몸을 사로잡는 음색이었다.

미혹, 그런 것과는 사뭇 다른 감각. 뇌에 직접 틀어박혀, 벗어나지 않는 목소리였다.

잊지 못할 것만 목소리에 망가진 기계처럼 삐걱이며 몸을 돌리니, 그곳에는 어둠의 너머에서 빛이 드리우는 창문께로 다가오는 한 인간이 보였다.

검은 바탕에 금색 자수를 박은 후드─아니, 로브라고 부르는게 맞을까.

외투였지만 소매가 없는 그것은 모자가 달린 망토에 더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잊어버렸을까요, 제 목소리를?”

완전히 볕이 드는 곳으로 발을 내딛는 그 순간,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보였다.

일전에도 비슷한 옷을 입은 누군가를 보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

피 한방울 묻지 않은 듯한 외투는 이 상황을 만들었다기엔 너무나도 깨끗했다.

“상관없겠죠.”

“…누군데?”

혼잣말만 하는 것 같은 그것에게 묻자, 그것은 잠시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행위인가요?”

“알아줄거란 기대도 안했는데.”

─전력으로 도망친다.

저것이 잠시 생각을 하던 순간에, 그렇게 합의를 했었다.

연막을 만들 생각으로 창을 휘두르려던 찰나.

“인간들의 말에는 이런게 있더군요.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가지고 있다고.”

─쩌억.

“쳐맞기 전까진.”

“…어?”

무언가 허전해진 감각이었다.

뭔가가 왔다가 갔음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옆을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

눈을 떼게 된다면, 시선을 벗어나게 된다면 그 다음 타겟이 될 것이라고, 순간적으로 본능이 인정했다.

하지만, 저쪽에서는 마치 배려라도 하듯이 말했다.

“아버지의 뜻으로 이곳에 왔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이 사태 역시, 당신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을 뿐.”

“…테인…아?”

그것의 말은 귀에 채 닿지 않았다.

빈 공간을 휘젓는 무의미한 목소리가 둘.

그제서야 간신히 옆을 돌아보고─뒤를 쳐다보았다.

“부딪힌 곳이 창문이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안타깝게 되었군요.”

쩌억, 하는 소리는 건물에 금이 가는 소리였을까, 아니면… 충격을 의미하는 소리였을까.

벽에 정확히 박혀있는 인간의 형체는, 손에서 붙잡았던 창조차 놓아버린 채, 축 늘어져있었다.

“하지만 도망치게 놔두기에는 아버지께서 전달하시고자 한 뜻이 있기에…”

“…그 뜻이라는게 도대체 뭐라고…”

“제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지요. ─들어보실 의향이… …없으신 모양이군요.”

그것의 앞에 들이대진 검은 칼날.

십자의 창에서 뻗어져나온 날카로운 기운은,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목이 베여나갈 수 있는 조마조마한 상황에서, 그것은 여유롭게 물었다.

“저런 장난감이, 소중한건가요?”

“장난감이라고 부르지 마.”

“…실례, 만난 이후의 제 태도가 문제였다면, 이곳에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닌 듯 하니, 나중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첫 만남은 너무나도 시시하게 끝이 났다.

아니, 시시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큰 충격을 받은 미스틸테인은 몸을 가누기는 커녕 의식조차 돌아오지 않았고, 서둘러 캐롤리엘에게 데려가니, 그녀는 내상이 상당히 심각하기에─어쩌면 최악의 사태마저 대비해야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소리를 입에 담았으니까.

“도대체… 무엇과 마주했는지는 몰라도, 그 적이 위험한 자라면 최대한 빨리 달아나주세요.”

“…예…”

바닥에 떨어졌던 미스틸테인의 창은, 허망하게도 부러져 있었다.

적을 찌르고, 죽이기 위한 창이 되려 부러져 죽음을 당했다.

치료실에 누워있는 테인의 손을 꾹 붙잡으니,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공포에서 비롯되어 떨림이 멎지 않은 채 전해졌다.

분명, 먼저 알았을 터였다.

아니, 들어가기 전에 입을 열었으면 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 하지 않았다는건, 결국 자신의 잘못이었다.

“아직까지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역시 위상능력자는 굉장하네요. 아마 이대로 간다면 며칠 내에 완쾌할 것 같아요.”

“…정말, 인가요?”

“물론이죠, 유니온의 기술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해요.”

─그 유니온의 기술력이 믿을만 한걸까.

유니온의 기술력을 신뢰하는 것 같았지만, 만약 자신이 치료받아야할 때가 온다면 적극적으로 유니온의 장비만큼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저나 연하은 씨, 당신의 진료기록을 조회해봤어요. 조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진료기록을… 말인가요…?”

“네, 지금 유정 언니에게는 이미 말씀드려놓았으니, 자리만 조금 바꾸도록 하죠.”

“…예…”

캐롤리엘의 요청에 따라 자리를 바꾸어, 아무도 없는 교내에 창문과 앞뒷문을 닫은 채, 바깥쪽 창문께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 마주보듯이 앉은 상황에서, 캐롤리엘이 먼저 물었다.

“여태까지의 진료기록이에요. 고작해봐야 한 번이지만, 그 한번만으로도 이렇게나 많은 이상점이 발견되었죠.”

세포부터 시작해 혈액의 상태, 체온 등. 여러군데에서 엉망이었다.

무엇보다 인간에게 있어 당연한 것인 심장 박동은 아예 일직선을 긋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몸은 완전히 죽은 상태였다.

그 자료를 한 차례 훑어본 하은이 입을 열었다.

“이 모든 자료의 의문을… 제게 물어보려고 하시는건가요?”

“그럴리가요. 하은 씨 본인도 모르는 일을, 굳이 물어보고싶지는 않았어요. 그렇기에 제 딴에는 열심히 노력해서 하은 씨의 비밀을 알고자 했었죠.”

“그런가요.”

“하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죠. 제 권한으로는요.”

당연지사였다.

그런 일이 외부로 유출된다면 유니온의 평판은 바닥을 칠 것이며, 인권 단체나 언론 등에서도 여러 가지로 말이 나올테니까.

아마 지금쯤이라면 있던 연구소는 폐기되었고, 자료조차 삭제시켜버렸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저는 유정 언니에게 부탁했죠. 연하은 씨의 과거에 있는 그늘을 파헤치기 위해서.”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있는건가요?”

“유니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걸 바로잡아야만 하는 것이죠. 연하은 씨도, 협력해주지 않겠나요?”

그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죠?”

“알아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요.”

“모른 채 지낸다면, 당신같은 사람이 늘어날 수 밖에 없어요.”

“늘어나지 않아요.”

단적으로 잘라 말한 하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문으로 나아가더니, 문을 열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요.”

쾅!

큰 소리와 함게 닫힌 문, 그 안쪽에 남은 것은 이젠 무의미해져버린 종이 몇 장과, 캐롤리엘 뿐.

진료기록지를 정리한 캐롤리엘은, 서류를 꾹 붙잡았다.

“…연하은 씨…”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건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 무지가 너무나도 뼈아프게 다가와… 몸을 시리게 만들었다.

공간에 적막함이 일어나던 도중, 일렁임이 하나 일어났다.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떤 한 사람이 들어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캐롤리엘 씨.”

“…정도연 씨.”

“연하은 양과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는데, 혹시 그녀의 몸에 제가 모르는 이상이라도 있는 건가요?”

진료기록지에는 하도 이상 투성이었던지라, 그 이유에 대해 본인에게 자문을 묻고자 왔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따로 그녀가 모르는 이상이 있을 리는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이해했다는 듯 정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녀는… 연하은 양은 협력을 거부한건가요?”

“그렇게 되었어요.”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유니온에게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아니면, 다른 외부 세력에 의해 그런 변화를 가졌는지.

“제가, 이야기를 해볼까요?”

“아뇨,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녀는… 말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달라진다해서 이야기를 해줄 것 같았다면 애초에 이야기를 했을테니까.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마지막 남은 밧줄이라고는 김유정 뿐이었다.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쪽은 어땠나요? ───님.”

“터무니없이 강한 이였다. 그런 인간이, 이런 세계에는 몇이나 있는건가.”

도시 속의 폐허.

가장 높은 타워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두 인간이 있었다.

“손이 떨리더군. 흥분이 될 정도로…”

“…그렇군요. 그래서 그런 자그마한 소란을 피웠던건가요?”

“어지간하면 이야기로 끝낼 법 했지만, 적당히 끝날 일은 아니었다. 설마하니 인간에게 검을 뽑게 될 줄은.”

“그렇군요. ─유감스럽게도, 그만큼 강한 인간은 이젠 거의 없는걸로 알아요.”

“…그 의미는?”

“인간이라는건… 너무 큰 힘을 두려워하는 법이거든요.”

“호오.”

“그렇기에 제어하기엔 너무나도 컸던 그들을 와해시키고, 없애버리기로 결정했죠. 그 끝에 남은 것은 고작해봐야 몇 안되는 인물 뿐.”

“허면, ‘알파퀸’이라는 자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건가?”

“그녀에 대한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는… 이곳 인류의 정점이라는 것 같으니.”

“호오, 일전에 만난 그보다 강하다는건가. 그건… 기대가 되는군.”

“저도 기대가 됩니다.”

“…헌데, 그대는 금일 ‘열쇠’를 만나고자 하였던 것이 아닌가.”

“‘열쇠’라… 제가 초면에 너무 실례를 저질렀던지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다시 찾아갈 듯 싶네요.”

“멋모르고 장난감을 부숴버린 모양이군.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쓸데없는 장난감이나 인형따위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정을 가져버린다고.”

“그랬었죠. 제 실책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보다 늦게 전하게 되다니… …───님께서는 얘기는 어떻게 잘 전하셨나요?”

“얘기하기도 전에 전투가 벌어졌던지라, 뒷일은 맡기기로 했지.”

“그렇군요. ─이대로 간다면 충분히 가능하겠어요. 저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건 물론… 용의 영지를 비우는 정도는.”

“그래, 신생 용이 선대 용의 유해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 들었는데, 그 쪽은 어떻게 되었는가?”

“어떻게 되긴요. 아마 몇 달 내에 일이 터질 성 싶은걸요. 되도록 용과 마주하지 않게 빼내고싶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용을 만나는건 불가항력일지도 모르겠어요.”

“슬라임을 이용하면 금세 끝날 일 아닌가? 어째서 미루고 있는거지.”

“슬라임 님을 모시고 가게된다면 확실히 빠르게 끝나겠지만, 자의로 오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심지어 옛 일은 잊어버린 모양이고요.”

“그거 아쉽군.”

“그러니까요.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도 못하면서, 바로 옆에 망가진 장난감을 걱정하는 모습이란…”

“…아까부터 계속 생각하던 것인데, 그대가 ‘무례’라 칭했음에도 ‘장난감’이라 말한다는 것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인형에 가까웠죠. 사명감에 붙들린… …그래요, 주인의 손을 떠난 장난감이죠.”

“흐음…”

잠시간의 공백이 있었다.

“…내 여지껏 ‘그 분’의 직계라 하여 주인의 자리에 오른 것이 헛된 것이라 생각했거늘, 이제보니 그 또한 잘못된 판단이었던 듯 싶구나.”

“…───님께서는 아직도 저를 의심하셨던건가요.”

“뭐, 한때의 질투라고 해두지. 과인은 이제부터 ‘알파퀸’이라는 자를 만나러 갈 성 싶은데,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기대는 좋지만, 부디 아버지의 뜻에 거스르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건 ‘검을 뽑는 정도’니까요.”

“내 그분의 뜻을 거스를 의사는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말게.”

그 말과 함께 허공을 거슬러 가라졌으니, 핏기가 자욱하게 남은 곳에 홀로 남은 나머지 하나는, 품 속에서 꾸물대는 슬라임을 꺼냈다.

“…역시, 잡아먹어버리는게 더 편할까요?”

찐득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슬라임은 아무런 의사도 표시하지 않았다.

말도 못하는 존재지만, 지성이 있는 생명체인 이상 뜻을 표현하는 방법은 많았지만, 이토록 무심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이리라.

조금만 더, 두고보자는.

“그래요, 결국 힘을 쓸수록, 아버지의 뜻에서 벗어날 수 없을테니까요. 제 입장에선 조금 더 막 사용해줬으면 좋겠는걸요.”

꾸물거리던 슬라임은 그제서야 몸을 둥글게 말더니 O를 나타내었다.

“…가죠, 슬라임 님. 아버지의 뜻을 전하려면 빨리 움직여야하니까요.”

꾸물대며 둥글게 변한 슬라임을 들어올린 그것은, 차원문을 열며 사라졌다.
2024-10-24 23:35:53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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