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 은하에게 아버지란 사람은 03(完)
Forgetter 2020-10-09 3
※ 은하 검은손 스토리 스포일러 有
종국에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을 은하는 드디어 해냈다. 쉽게 말하자면 판국 뒤집어엎기에 성공했다는 소리였다. 앞선 짤막한 문장이 입으로 내뱉는 것은 쉽다하더라도, 직접적인 행동에게까지 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다.
마음먹기는 동전 뒤집기를 하는데, 앞면이 나오든 뒷면이 나오든 결국 어떤 면이 나오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자신의 다짐 같은 것이었다. 이론은 언제나 그럴 듯 하지. 그 이론이 항상 모든 것에 잘 맞아떨어지리라는 법은 없더라고. 결국 틀린 이론도 나오는 거고, 다른 이론도 나오는 거다.
거창하게 말해 신념을 바꾸는 데에는 셀 수 없는 시행착오 및 약간의 좌절이 잦다는 소리였다. 본질은 어떻게 해서든 바꿀 순 있겠지. 하지만 그걸 단숨에 뒤집어엎는 것도 가능은 하지만 실제로 성공한 경험은 거의 없었다. 빠른 시간 안에 바뀌어가고 안착되어가는 것 같은 걸 ‘혁명’ 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괜히 무엇이겠나. 180도로 바뀌기가 참 말만 쉽지, 실제로 살아갈 때에는 많이 힘이 든다는 것이었다.
서론이 좀 길었지만 은하는 어쨌든 간에 결국 해내었다. 악당이 되기를 선택하였다. 본래 천성이 순수하고 곧은 미래와, 보기와는 다르게 멍청할 정도로 우직한 철수 – 물론 은하의 입장이다 - 를 대신하여 한 번쯤은 정당한 것과는 거리가 먼 길을 택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흑지수의 말을 빌리면 그것이 은하에게 더욱 적합한 길이라고까지 했다. 너무 한쪽에 치우쳐져 있으면 급박한 상황 변화에 대응할 개체가 단 하나도 없을지도 모른다. 생명과학 시간 같은 곳에서 들었을 법한 자연의 섭리와 같은 거였다.
그럼에도 은하는 그 직후에는 별로 자신이 하는 일이 그득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쿠르마가 조종하는 로봇 같은 걸 무찔렀을 때에도 생각 이상으로 무덤덤했다.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무척이나 동경했던 과거의 자신을 배반하는 일까지 했는데도 후련함은 거의 없었다. 후련함보다는 얼떨떨하였다. 생각 외로 잘 맞아떨어지고 오래 전부터 해왔던 일처럼 잘 해내어서 당혹감도 조금 들었다.
그런데 뭐, 어쩌겠어요, 익숙해질 수밖에. 은하는 그렇게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꼴에 알맞은 적성이었다고, 익숙해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많이 안 걸릴 것으로 보였다.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다는 표현이 있다. 그런 표현을 써서라도 만나고 싶은 대상자는 그렇게 토로하는 사람에게 어떤 존재일까?
하나, 직접 만나고 싶을 정도로 그리움은 사무치나 지금 여건 상 ‘직접’ 만날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또 다른 하나, 앞선 경우와는 다른 경우인데 현재에서도 만날 수는 있으나 ‘직접’ 만나는 것이 그저 꺼려지는 사람일 때.
은하의 경우는 위에 두 가지 전부, 해당이 된다. 아버지 혜성의 경우에는 전자 쪽이 조금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는 있었다. 그야 그 사건 이후로 아버지와는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어영부영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으니까.
그랬기에 자신을 D백작이라고 자칭하는 자의 꿈속 세계라는 것은 참 달콤하였다. 은하는 그 이후로 몇 번이고 꿈을 꾸었지만, 어째서인지 아버지인 혜성과의 재회는 꿈을 꿀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슬비와의 재회를 꿈꾸는 미래 – 그 과정이 달콤하지는 않았지만 – 는 손가락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꾼 것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수치였다.
꿈은 모든 것을 보여준다. 과거든, 현재든,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래든. 그리고 그야 말로 모든 것들을 보여준다. 잊고 싶은 과거든, 지금 당장 부정하고 싶은 현재든, 일어나서는 절대 안 되는 미래든. 그 소용돌이 틈에서 은하는 조금 많은 것들을 알아버린 기분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은하는 그러한 사실들을 알았을 때의 반응이 참 뭐랄까...의외로 담담했다는 것이다. 마치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새삼스레 다시 꺼내는 이야기인 듯한 투로. 그래서 당사자인 혜성과 그런 이야기를 언젠가 한 번쯤은 꼭 나누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런 비슷한 경험이 전에 있었지만, 이제까지 미처 지우고 싶었던 과거의 이야기를 한 조각 한 조각 떠올리는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처럼 되어버렸다.
어차피 여기서 하는 일들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꿈이니까. 깨고 나면 자연스럽게 잊고 마는 그런 거니까. 그랬기에 은하는 축음기 앞에서는 아주 조금...현실에서의 은하보다 솔직해지는 것도 같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나한테 나름대로의 어떤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은혜성의 딸 은하. 본인의 이름에 투덜거리는 은하에게 이리 말하면 참 멋지지 않으냐고 했던 기억이 생경하다. 왜 하필 은하였을까. 다른 별과 관련된 이름도 많았는데 왜 하필 은하였을까. 일단 본인부터 별과 관련된 이름이기는 했으나, 자신은 혜성에 비해 근본적으로 지칭하고 있는 자체의 스케일이 무척이나 컸다.
‘은하’ 라는 건 별들의 집합체와 같은 곳. 일단 단어에서는 강 혹은 물을 지칭하고 있지만 그것이 ‘바다’ 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건 조금만 생각을 하다보면 알아차릴 건덕지였다.
그리고 그 커다란 차이를, 단순한 크기 비교에서부터 나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면 그 이름을 붙였을 당시에 가졌던 기대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어렴풋하게’ 라는 수식어다. 은하도 이 점을 지적했다.
“그 기대가 어떤 종류의 기대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클로저로서 평범한 재능을 가진 자신보다 더 뛰어난 딸에 대한 일명 대리만족과 같은 기대였을까. 그게 아니면 단순히 아버지로서 딸의 미래가 자신보다는 더 창창하길 바램과 같은 기대였을까.
...더 말해 무엇하리. 이에 대한 답도 은하는 간접적이지만 알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갑작스러운 –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 작별은 은하에게 하여금 혜성의 결전기를 더욱 집착하는 결과를 나았다.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그 기술을 은하는 나름 성공적으로 손에 넣었다. 이런 충분히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버지에 대한 회상을 담담히 토로하는 은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퍼포먼스용으로 화려하기만 한 거...네 몸에 맞지도 않으니 그리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했겠죠. 그래도 습득한 건 축하해준다는 말은 했을 거예요. 그리고 나 몰래 기뻐하기도 했겠지요.”
앞선 비약은 재미없는 우스갯소리이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당장 현실적인 것들부터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이 아이에게는 좋은 일들만 가득하길, 하며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나는 하나의 별에 불과했지만, 너는 무수한 별을 품는 아이가 되길...
“...”
...그랬다. 혜성에게 은하는 한 줄기의 희망이었다. 희망을 노래하며 그에 걸맞은 이름을, 별을 좋아했던 혜성 나름대로 정성들여 지어준 본인의 이름이었다. 결코 장난스럽게만 여기고 넘길 일은 아니었다.
은하는 한숨을 쉬었다. 무겁지는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딱 적당한 중간 지점의 밭은 숨이다.
“이제 좀 후련하기도 하네요.”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유일한 것, 이라는 이름의 족쇄에서 풀려난 기분이다. 이제는 그 발에 찼었던 쇠공이 가볍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 산뜻한 가벼움이 좋았는지 은하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을 잊고 가야 한다는 게 아쉽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그래도 걱정할 것 없다네.”
D백작이 격려를 해주었다.
“이 꿈을 구성하고 있는 전부는, 모두 자네를 토대로 만들어졌네. 난 거기에 숟가락 하나를 얹었을 뿐이지.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현실의 자네도 명확하게 깨닫게 될 만한 그러한 사실들이라는 거네.”
“그거, 참 다행이네요.”
은하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마차를 타고 떠날 생각이었거든요.”
현실에서 지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소중한 이들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옴을 은하는 직감적으로 눈치 챘다. D백작은 그다운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런가? 그럼 언제라도 또 들려주시게. 이 몽환세계는 언제든지 자네를 위해 열려있으니 말이야.”
“...그건 한 번 생각해봐서요.”
은하의 목소리가 다시금 차가워졌다. 아마 현실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서인 듯 했다.
은하는 어쩐지 알 수 없는 바람 하나가 자신의 마음을 훑고 지나간 것 같았다. 이 몽환세계에서가 아니라, 조만간 꿈속에서 혜성과 만나 못 다한 회포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바람대로, 오늘밤은 조금 푹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의 말]
이걸로 은하 단편은 하나 일단락 된 듯 합니다. 같은 주제로 3탄까지 만들었네요. 이렇게까지 길게 이어 쓸 생각은 없었는데, 은하에게 있어 은혜성이란 존재가 참 많은 지분을 차지하더라고요.
첫 번째 단락은 사냥꾼의 밤 직후(부산은 안 열린 때, 2,5화), 두 번째 단락은 검은손 전직 직후 시점(3화)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부산에서 갑자기 은하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도 안 해가지고 무슨 심정의 변화인가 생각했는데 검은손에서 다 매듭을 지었기 때문이더군요.(검은손은 사냥꾼의 밤과 부산 사이쯤의 위치한 스토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