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고하는 진혼곡 (프롤로그)

PlaylMaker 2020-09-05 0

정의.
공정.

이것들을 부르짖는 자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이상을 매우 감미롭고 희망차게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대중들은 자극적인 구호에 현혹되어 그들에게 자아를 의탁한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 그들이 하는 행동, 그들이 하는 연출.
마치 동화 속 하멜의 피리처럼 사람들을 주관 없이 그저 구호에 맞춰가는 존재로 전락시켜버린다.

사람은 자신이 위선적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 사회에 진정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
단지, 정의를 이용하는 자와 그에 이용당하는 자만이 있을 뿐이다.

이미 뭐가 옳은지 그른지 같은 논쟁은 불필요하다.
자신이 믿고 있는, 소중히 하는 것만이 진정한 정의다.
고전적인 선과 악의 구분은 파벌만을 위한 선민의식을 양산한다.

나는 정의에 기생하여 그것을 악용하는 위선자를 심판한다.
다시 태어난 뒤로 그 일을 목표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군가가 나 또한 위선자라고 반박한다면 굳이 설득할 생각은 없다.
나는 내가 지나온 길이 진정한 정의라고 생각하니까.

심판자 에이스.
나를 지칭하는 오직 단 하나의 이름이다.


***


2022년의 홍콩.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중국에 할양된 특별행정구역.

아시아의 주요 무역 도시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그 위용을 잃고 이제는 주점과 유흥 업소만이 남은 향락의 지역이 되었다.
거리 곳곳에 색이 강렬한 네온사인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비추고 외설적인 복장을 한 여성들이 그들을 향해 호객을 하고 있다.

이때,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쓴 남자가 도시 한복판을 유유히 걸어나가고 있다.

우측 위부터 좌측 아래까지 검은색 초승달 모양이 비스듬히 그려져 있고 왼쪽 윗부분에는 "스페이드" 모양의 표식이 새겨져 있다.
언뜻 보면 코스프레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나 이곳은 그다지 서브컬쳐와 어울리는 장소는 아니었다.

그런 이유인지 호객하는 여성들도 이 남자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 않았다. 행**이라는 것이 사실상 미치지 않는 곳이다 보니 마약에 절은 사람들도 많고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가 시비로 오인받아 폭행을 당할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등에는 허름한 천에 대충 둘둘 말려져 있는 거대한 검이 보는 이로 하여금 무언의 위압감을 주고 있다.

남자는 1번가를 지나쳐 도심으로부터 외곽으로 향했다. 가뜩이나 어두운데 인기척조차 희미해지니 스산한 분위기가 공간을 지배한다.
골목을 한참 돌고 돌다가 어느 가게 앞에서 멈췄는데 장사 중이라고 하기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들어선다. 발걸음에는 누군가가 맞이해 줄 것이라는 확신이 담긴듯했다.

반쯤 깨져있는 유리문을 뒤로하고 금방이라도 꺼질듯한 나무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끼익 끼익 하며 울리는 소리가 환경에 녹아들어 분위기를 더 어둡게 만든다.
계단의 마지막을 건널 때, 팔짱을 낀 어떤 소녀가 그 앞에 섰다.

남색의 경단 머리, 어두운 녹안을 가지고 있는 여성.
어찌 보면 몰락해가고 있는 홍콩을 의인화라도 한듯한 모습이었는데 화류계에서 일한다고 보기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였다.

"조금 늦으셨네요? 뭐, 상관없나. 8번 방으로 가시면 돼요."

"......"

무뚝뚝하고 다소 여유 있는 말에 특별히 대꾸를 않은 채 순순히 응했다.
그러나 무관심해 보이는 것과 다르게 그의 눈은 노랗게 빛나고 있었는데 무언가의 위화감을 느낀듯했다.
8번 방은 가장 구석에서 2번째에 있다. 철이 벗겨진 문고리를 열어 곧장 방안으로 들어선다.

철컥.

들어선 방에는 50대의 중년 남성이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다. 만날 예정이었던 바로크 솔리드웍스 사의 부장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밖에 있던 소녀의 소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탄산이 남아있는 맥주잔, 아직 연기를 내뿜고 있는 담배를 토대로 사건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겉으로 보기엔 평안해 보였지만 실은 정반대였다. 덜덜 떨리는 손을 감당하지 못해 간신히 부여잡고 있다.
어떻게 저 소녀가 알게 되었는지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만,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렇다. 유니온에서 냄새를 맡은 것이다.
통신이 도청되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설상가상으로 중년남성은 살아있는 듯 했다. 그 의미는 앞으로의 그와 조직의 행보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는 등에 찬 검을 아직 풀지 않았다. 대의를 위해 조력자를 벤다는 선택지는 신념에 반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렇게 무의미한 시간이 하염없이 지나고 난 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특별한 대꾸를 하지 않자, 문이 슬며시 열렸다.

옆이 파인 파란색 홀터넥 드레스로 갈아입은 그 소녀가 과일과 맥주를 든 채 남자에게 접근했다.
옅은 화장을 했지만 덤덤한 표정으로 보건대 남자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생각은 없어 보였다.

탁.

테이블에 술과 과일을 내려놓고 멋대로 남성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천 사이에 검날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지만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침묵의 균형을 깬 쪽은 의외로 남자 쪽이었다.

"너는 누구지?"

"은하라고 해요. 아, 술집 예명 같은 건 아니니까 착각은 마시길."

손으로 포도알을 따서 입으로 넣는다. 모습을 보아하니 주려고 한 건 아니고 자신이 먹으려고 가져온 모양이다.
방금 씻었는지 포도 표면에 수분이 가득했다.

"그래서, 나 하나 잡기 위해 이곳까지 온 건가?"

"글쎄요... 그건 그렇고. 잠깐 스마트폰 좀 봐줄래요?"

"...스마트폰?"

그녀의 뜬금없는 발언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해 일단 따랐다.
과연 앞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니 스마트 톡 앱에 메시지가 하나 와있었다.

「아들, 잘 먹고 다니지? 엄마는 세하가 굶고 다닐까 봐 걱정이야. 돌아와 달라는 부탁은 안 할 테니까 목소리만이라도 잠깐 들을 수 있을까?」

매일매일 이 시각에 주기적으로 오는 메시지.
하지만 이세하는 그 사건 이후로 한 번도 답변을 준 적이 없다.

"그래서? 오랜만에 부모님의 문자를 본 소감이 어때요?"

"그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야."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알파퀸에 대해 훈수를 들은 까닭일까.
그의 심기는 상당히 불쾌해진 기색이다.
결국, 이 자리를 파하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

은하가 낌새를 눈치채고 세하의 어깨에 손을 올렸지만, 그와 동시에 건블레이드에 손을 가져다 댄다.
그가 내뿜고 있는 건 분명 강한 살기와 적의였다.

"듣던 모습이랑 많이 다르네. 희망의 여명 작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죠?"

"...네 알바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

"싫은데요. 의뢰인들이 그동안 쌓인 마음의 빚이 아직 많이 남은 것 같으니까. 착실히 갚아 나가기 전까진 매일 제 얼굴을 봐야 할 거예요. 빚쟁이 씨."

은하는 위상능력자를 대하는 게 익숙한 듯 전혀 주눅이 든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황한 쪽은 이세하였다.
그녀가 어떻게 자신을 찾아왔는지,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뒤를 잡혔다는 건 동료에게도 비슷한 상황에 부**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
마냥 강경하게 나올 수는 없다.

"나에게 원하는 게 뭐지?"

"이제야 상황을 대략적으로라도 파악한 거 같네요. 친절하게 대해줄 때 순순히 응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비겁해지는 걸 보기 싫다면"

"......"

얼굴이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순간적으로 욱했다는 걸 은하는 인지했다.
이세하의 예상과는 달리 은하는 세하가 속한 조직에 대한 정보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허세가 충분히 통하고 있었다.
평소의 위압적이고 강한 어투가 효과를 보는 순간이다.

"제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 형씨가 희망의 여명 작전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 모조리 하나도 빼지 말고 다 말하세요. 하나씩 빠뜨릴 때마다 동료가 위험해질 확률이 한 단계씩 올라갈 테니까 그런 줄 아시고요."

"... 그전에 하나만 묻지. 누구의 사주로 온거지?"

"이런, 아직 자신의 입장을 잘 모르는 모양인데. 뭐 좋아요. 지인과 아는 사이니까 특별히 알려드리죠. 김유정 부국장, 설마 모른다고 하시진 않겠죠?"

"......큭!"

드디어 감정의 동요가 밖으로 표출되었다. 언젠가 맞닥뜨릴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 이세하로선 상상도 못 한 전개였으니까 어찌 보면 당연했다.
루나와 이세하가 종적을 감춘 뒤, 김유정은 꾸준히 행적을 쫓았고 지금에야 도달했다.
아무리 숨어다닌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세하는 혹시 유니온에서 온 클로저인가 생각했지만, 은하가 경계의 시선을 보내는 걸 보고 혹시 자신이 아는 그녀가 아닐까하고 이세하는 예상했다.

쾅!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안으로 진입한다. 동시에 연기가 어깨 위까지 가득 들어차 시야가 흐려졌다.
은하가 뒤로 도약하며 뒤늦게 전투태세를 갖추었지만 이미 목표 대상과 함께 사라진 이후였다.
이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건 위상능력자뿐이라는걸 감안하면 당장 예상 가능한 사람은 한명뿐이었다.

"...후우. 이런 고전적인 방법에 당하다니 저도 아직 무르군요."

은하는 외투를 걸쳐 입으며 천천히 나온다. 나오면서 수면 상태의 중년 남자를 슬쩍 흩어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스마트폰을 꺼내 어느 앱을 실행시키는데 지도상의 특정 좌표가 움직이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이미 위치 추적기를 달아놓은 것이다.

"그럼... 짖궂은 수금업자에게 도망치려 한 빚쟁이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 유감없이 느끼게 해드려야겠네요."


2024-10-24 23:35:4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