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nter-7화. 너의 이름은 프레이
pixi 2020-07-24 2
눈을 뜨자 내 방 한가운데였다. 손에 차있던 수갑은 사라져 있었다. 아마 순간이동을 통해서 이 방으로 오면서 풀어준 것 같은데, 대체 언제 내 방에 마커를 새긴 거지?.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좀 들어볼까?”
레이 형이 소파에 앉으며 옆자리를 툭툭 쳤다. 나는 스케빈저를 잠시 다른 방에 둔 뒤 레이형의 옆자리에 앉아 이때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안전지역이었던 강남에서의 갑작스러운 차원종 출현, 그리고 그 차원종은 ‘전사’ 차원종이 아닌 평범한 차원종이었던 것, 그리고….
“차원종들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그래서 이렇게 된거야. 형”
“뭐…..대충 예상은 했었어. 그래서 안전지대에 널 맡기고 절대 나오는 일이 없도록 세나에게 부탁했던 건데…..안전지대에 차원종이 나오다니.”
레이 형은 골치아프다는 듯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관계없는 차원종을 살해하는 것이 싫어서, 학살당하는 광경을 보고 싶지 않아서 카운터를 그만둔 것이라는 것은 레이 형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차원종과 더 이상 엮이지 않도록 안전지대에 날 맡긴 것이었고, 나도 그래서 안전지대 밖으로 나가지 않으며 평범한 삶을 살려고 했었다. 하지만 결국 차원종은 내 눈앞에 나타났고, 나는 평범한 차원종이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도망친 차원종들도…..평범한 차원종들이겠지?”
“응….”
“어떻게 할거니?”
“나는…..”
레이 형의 말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치를 보고 있는 나를 보며 레이 형은 한숨을 쉬며 내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이건 뭐야?”
“네 검”
“뭐???????”
나는 깜짝 놀라며 포장을 뜯어보았다. 하지만 거기 있는 것은 본래 내 검이 아닌, 내 검의 레플리카형 보급용 검이었다.
“내 검은 아니네….”
“당연하지. 그건 몰래 가져왔다가 걸리면 진짜 뼈도 못 추릴걸? 이것만을 감사해”
“그래도 고마워 형.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야”
나는 레이 형에게 감사를 표하며 보급용 검을 살펴보았다. 충전식 레플리카형 검. 최대출력으로 본래 내 검의 성능에 근접할 수는 있지만, 대신 사용시간이 1시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10% 정도의 출력으로 사용한다면 꽤 오랬동안 사용할 수 있었기에, 검은양팀의 클로저들을 상대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이정도면 충분하지?”
“당연하지! 고마워 형, 이 검이면 아까 그 클로저들에게 밀릴 일은 없으니까”
“풋. 애초에 네가 재대로 싸우기만 했으면 밀릴 일도 없었겠지.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야”
레이 형은 스케빈저가 있는 방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스케빈저……네 힘을 받은 거 맞지?”
“….아직은 아니야.”
“네 힘을 어떻게 쓰던지는 난 신경 안 써. 하지만 다른 카운터들은, 특히 ‘지크프리트’는 다를거야. 그러니까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그들이 오기 전에 네가 먼저 처리해야 되. 그러라고 그 검을 준거니까”
레이 형은 방금 전과는 달리 진지한 어투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이 형의 진지한 모습에 나는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면 됬어. 그럼 형은 이만 가본다.”
“벌써?”
“얼굴 봤으면 됬지 뭐. 앞으로 볼 일이 자주 없었으면 좋겠다. 사고 치지 말라는 뜻이야. 그럼 진짜 안녕!”
레이 형은 싱긋 웃으며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제서야 나는 몸에서 힘을 빼며 축 늘어진 채 소파에 몸을 맡겼다.
“레이 형의 진지한 모습….오랜만에 보네”
항상 장난스러운 레이 형이었지만, 진지할 때는 정말 진지해서 무섭다. 그리고 레이 형이 말하는 일이 잘못된 다는 건……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위험을 무릎쓰고도 이 검을 내게 준 것이겠지. 보급용 검이라 해도, 초기 대응이라면 이 검을 충분할 테니까
-키이이…..그 인간은 간거냐?-
레이 형이 사라지자 스케빈저가 방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무서운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스케빈저는 아직도 레이 형에게 겁을 잔뜩 먹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이미 갔어. 그러니까 이제 나와도 돼”
-그 인간 무섭다. 까불다가는 죽을 것 같다.-
“그럼 나는 안 무섭고?”
-너는 안 무섭다! 유한성은 착하다!-
껙껙거리는 스케빈저의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방에서 나와 껙껙거리는 스케빈저를 자리에 앉힌 뒤, 나는 물었다.
“너는……아까 그 차원종들을 구하고 싶어?”
-구하고 싶다! 유한성이 구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구하려면 너가 해야 돼. 할 수 있겠어?”
이 검 하나만으로 검은양 팀과 차원종 둘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버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검은 붕대의 남자, 그 남자가 싸우는 도중 개입해버린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검은양 팀을 막아서는 것과 검은 붕대의 남자를 견제하는 것, 차원종을 구하는 것은 내가 아닌 스케빈저가 해내야 했다.
-나는…..나는 약하다. 나는 나보다 강한 차원종을 이길 수 없다. 거기에 강한 차원종, 둘이나 있다…-
스케빈저는 내 말에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맞는 말이다. 겨우 D급 차원종 스케빈저는 A급 차원종인 말렉에게 다가가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고, B급 차원종인 트룹과 맞서 싸우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너에게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준다면, 넌 싸울거야?”
-키익?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 너에게 차원종들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준다면, 싸울 수 있겠어?”
-키이이…..나는 싸우는 거 무섭다. 싸우는 거 싫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동포들이 죽는 건 더 싫다. 그 동포들 나와 같다. 싸우기 싫어하는 착한 차원종들이다. 그런 동포들을 싸우게 하려는 강한 차원종은 더 싫다. 그러니까……-
스케빈저는 굳게 결심한 듯 주먹을 쥐며 날 바라봤다.
-나는 싸운다! 싸울 수 있다!-
“그럴 거라 생각했어. 넌 착하면서도, 강한 녀석이니까”
나는 빙긋 웃으며 스케빈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검은 붕대의 남자 앞을 막아섰던 그 모습을 나는 믿고 있었다. 비록 쓸모없는 행동이었어도, 겁에 질린 채 눈을 질끈 감고 있었어도,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나를 구하려 했던 그 행동을 믿고 있었다.
“스케빈저. 너 이름은 있어?”
-케엑? 나 같은 하급 차원종에게 이름은 없다.-
“그럼 내가 하나 지어줘도 괜찮아?”
-께에엑!! 이름! 좋다! 나한테 이름을 주는 거냐???-
스케빈저가 기분이 좋은 듯 방방 뛰었다. 이름을 받는 것이 그렇게 좋은지, 나는 방방 뛰는 스케빈저를 자리에 앉힌 뒤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의 이름은……프레이”
-프레이?-
“프레이. 기도라는 뜻이야”
나는 프레이에게 얹은 손에 정신을 집중했다. 몸 안의 힘이 활성화되며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클리포트 인자 활성화. 채내 클리포트 인자 잔여율 100%. 인계 가능. 인계 대상을 설정해주십시오.]
“인계대상은 프레이. 차원종 프레이다.”
[인계 대상 차원종 타입 스케빈저 프레이. 대상에게 클리포트 인자를 인계합니다. 인계 시퀸스 시작]
손 끝이 마치 프레이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내 힘이 프레이에게 흘러들어가기 시작했다. 손 끝에서 작은 빛이 반짝이는 것에 프레이가 당황한 듯 움찔했지만, 이내 눈을 감고 천천히 내 힘을 받아들였다.
[…..인계 시퀸스 종료. 클리포트 인자의 인계가 완료되었습니다. 클리포트 인자 비활성화. 클리포트 인자 잔여율 60%. 클리포트 인자의 잔여율이 완전히 회복될 때 까지 인계를 자제해주십시오.]
“후우….됬다.”
-한성…..이게 대체 뭐냐??-
프레이의 머리에서 손을 때자, 프레이가 몸을 움직이며 내게 물었다.
-뭔가 이상하다. 이 힘은….-
강해졌다는 표현보다는, 아예 바뀌었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이질적인 힘, 단순히 차원종 스케빈저가 강해진 것이 아니라, 차원종 스케빈저가 아닌 다른 존재로 바뀐 것 같았다.
“괜찮아. 아직은 그 힘은 너의 몸 속에 잠들어 있는 것 뿐이니까.”
-잠들어 있다?-
“응. 하지만 지금 그 힘만으로 B급 차원종을 쓰러트리는 건 문제 없을거야. 그렇지?”
프레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몸에 이질적인 기운이 감돌기는 해도, 몸이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태라면 B급 차원종인 트룹 정도는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만약…..그 힘만으로 부족하다면, 기도하면 돼”
-기도…? 어디에 말이냐?-
“너 자신에게. 너가 뭘 원하는 지, 뭐 때문에 그 힘을 쓰고 싶은지. 그러면 잠들어 있던 그 힘이 네가 원하는 힘을 줄거야. 그러니까…..”
부디 잘못된 소망을 기도하지 않기를….
-키이익….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알겠다!-
프레이는 껙껙 거리면서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스마트폰이 웅웅거리며 차원종 출현 경보를 알렸다. A급 차원종 출현의 경보였다.
“장소는 신논현역인가. 아마 검은양팀도 바로 출발했겠지. 우리도 출발하자”
-께엑! 알겠다!-
나는 레이 형이 주었던 검을 들어 문 밖으로 나섰다. 이번에야 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