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파이] 얼음에 잠긴 초신성[下 Part 5]

PlaylMaker 2020-07-14 6

죄송합니다. 원래 하나로 완결하려고 했는데 늘어져서 두 파트로 나누겠습니다.
→ (완결 Part 1에서 下 Part 5 로 수정)



"돌아가는 건.... 이젠 무리야."

이세하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서 중얼거린다.
루나와 소마에게서 연락이 없자 그의 마음도 점점 초조해졌다.

각오했다고 생각한 일이었지만 막상 닥치고 나니 감당하기 어려웠다.
특히 자신의 딸인 이세별에게 정면으로 마주할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자녀에게 금실이 좋은 모습만을 보여야 할 부부가 실제로는 위태로운 관계였다면 누구라도 불안해할 것이다.

저 멀리서 검은양 팀이 다가온다. 무의식적으로 건블레이드에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건 전의를 불태우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이 만든 반사작용에 가까웠다.

애초에 그 많은 인원을 상대로 대응할 만한 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게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고 어느새 동료들이 자신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다.
리더인 이슬비가 가장 앞에 나섰다.

"미안해. 내가 가장 먼저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이래서는... 리더 실격이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지?"

"......"

"이제.... 그만하자. 넌 가정을 지키기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해왔어." 

이슬비는 세하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위로해줬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의 옛 연인이어서가 아니다. 소중한 자신의 팀원이기에 따스하게 감싸주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가짜라고 해도 지킬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붙들고 있을 뿐이야."

"....그러니까 넌 돌아가야만 해. 누군가의 희생을 대가로 만들어진 세상에 살아가는 걸 유정 언니는 바라고 있지 않아."

검은양 팀에 있을 때도 자주 부딪히던 둘, 그 둘의 가치관은 기본적으로 너무나도 달랐다.
그렇기에 서로 이끌렸던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맺어지지 못하고 헤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니. 이미 이 세상은 나만의 것이 아니야. 아버지란 존재는 가정을 위해 있는 것이니까. 딸을 저버리고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아."

"너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가치겠지만 결국 거짓이야. 환상이라고. 그리고 파이 요원님을 구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희생할 수밖에 없어."

예전에 싸웠던 모습처럼 두 사람은 한마디도 지려고 하지 않았다.
다만 그때와 차이점이 있다면 이렇게까지 진지한 주제로 대립한 적은 없었다는 점이다.

"누나... 아내는 나의 의견을 존중했어. 초월의 반작용으로 생긴 어둠의 광휘 인자를 무리하게 받아내면서까지... 그런데도 원망 같은 건 하지 않았지. 내가 자초한 일인데도 말이야."

도저히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정도의 깊은 슬픔이 만들어낸 불안정한 능력초월은 대가가 값비쌌다.
암흑의 광휘라는 기이한 힘이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파이에게 옮겨지기까지 했다.
그마저도 얻은 능력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암흑의 광휘 인자는 자신을 만들어낸 주인에게 극도로 집착했다. 세하의 마음에서 나온 상실감, 슬픔은 그것의 힘을 더욱 강하게 하는 양분이 되었다.

"미안해. 하지만 나로서는 너의 가족보다 너 스스로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이기적이라고 해도 상관없어. 사람은 원래 자신의 입장을 앞세우는 존재니까. 리더로서 팀원의 안위를 더 중요시하는 게 당연한 거야."

"그럼... 결렬이네. 이길 거라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냥 보내 줄 생각은 없어. 게다가 여기를 넘어선다 하더라도 누나 역시 초월자야. 이 세계를 유지하느라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나와는 다르지.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건블레이드의 날을 동료들에게 겨눈다. 그런 이세하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서글프게 빛났다.

뚜벅뚜벅.

제이는 말없이 이슬비 앞으로 나온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모습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꾸준한 자기 관리와 운동을 통해 얻어낸 결실이었다.
제이는 세하가 흔들릴 때마다 멘토 역할을 하곤 했다. 번번이 마음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든든한 형이 되어 주었다.
이번에도 그가 세하를 위해 앞에 선다.

"동생, 맨날 게임에서 오른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제법 어른이 됐어. 그런데 말이야....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는 걸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이 세상에 부모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저씨......"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그보다 너도 아저씨면서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아무튼, 제수씨와 상의해도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있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바라는 것도 용기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야."

"......"

오랜 기간 혼자서 끙끙 앓아왔다. 파이 앞에서도 고민을 털어놓거나 도움을 요청한 적도 없다.
가장 의지해야 할 관계인 부부이지만 쉽사리 이야기를 꺼낼 주제는 아닌 만큼 일부 사람들에게만 의존하고 정작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들키지 않으려 쉬쉬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긴 거리감이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멀어졌고, 과거의 유대감도 먼 옛날 일처럼 흐릿해져 간다.
주변을 둘러볼 여력도 없이 시간만 애석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소중한 자신의 동료들은 서운해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도와주지 못한 데에 미안해하고, 또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실 거예요. 그런 일이 있어도 막상 용기가 내기 어렵다는 걸"

어른, 특히 부모들은 타인에게 집안의 고충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는걸 꺼린다.
특히 성 문제와 관련이 있다면 더욱더.

"이 일에 대해서 제수씨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그건......"

"때에 따라 제수씨가 어딘가에 수용되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세별이에게도 악영향이 갈 수 있겠지. 하지만...."

평소에 다소 가벼운 이미지였던 제이도 이 순간만큼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동생이 진정으로 가족을 생각한다면 이 상황을 절대 그대로 둬선 안 돼."

"......"

건블레이드를 잡은 세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동안 차마 털어내지 못하고 쌓여 있던 무언가가 한순간에 노출되는 기분이었다.
외면하고 있었던 진실이 막상 들춰지니 견뎌내기가 어려웠다.
모든 사람에게 노출된 듯한 불쾌함과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무기력함이 혼재되어 전의를 상실케 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그래도... 저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어요. 얼마나 더 노력을 해야-"

"아! 왜 어려운 이야기만 하니까 모르겠네! 게임 바보가 언제부터 그렇게 꼼꼼하게 따졌다고."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서유리가 대화의 진척이 더디자 답답한 듯 세하에게 핀잔을 준다.
그동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에 제대로 나서지 않았지만 이제 단편적이라도 파악한 시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개입에 이목이 쏠렸다.

"서유리......"

"세하야... 언제 우리가 가능한지 불가능한 일인지 따졌었어? 이럴 때, 검은양 팀이라면 해야 할 일은 항상 정해져 있었잖아?"

양손을 허리에 올려놓고 당당하고 활기차게 이야기하는 그녀.
서유리는 5~6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인상이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앞에 어떤 위기가 있어도 힘을 합쳐 이겨낸다. 그게 검은양이니까."

사회의 때를 묻지 않은 순박한 마음은 소년 만화의 주인공처럼 밝게 빛났다.
이세하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았음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서유리를 바라보고 있던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너무나도 올곧은 탓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된 것 같군요."

"헤헤... 저희가 낄만한 타이밍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루나와 소마는 누군가를 데려오기 위해 잠시 검은양과 떨어져 있었다.
이에 김유정은 다소 회의적인 반응이었지만 이세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녀가 꼭 필요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기에 철저한 신변보호를 전제로 대면하는 걸 허락받게 되었다.

이 자리에 온 사람은 어린 소녀였고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세하보다는 파이를 더 닮았다.
비록 거짓된 세계일지라도 이세하가 누구보다도 소중히 생각하고 끔찍이 여기는 사람이다.

"아빠...."

수줍게 루나의 뒤로 숨은 아이는 아직도 세하를 어려워했다. 이세하는 이걸로 서운해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파이는 아버지 앞에서 적절하지 못한 태도라며 나무라곤 했다.
그랬던 그녀가 루나의 인도에 따라 이세하에게 다가가고 있다.
자신의 딸을 멍하게 바라보던 그는 적의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한발짝.

다소 미약하고 느린 걸음이지만 거리는 분명 좁혀지고 있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검은양 팀의 입가엔 자그마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10m, 5m, 3m......

그리고 코앞까지 도달했을 때,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었지만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긍정의 신호를 보낸다.
부녀 사이의 키의 간격이 지금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고 이세하도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작은 아이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그러자,

깡....깡깡...

쥐고 있던 건블레이드가 퉁명스러운 울림소리를 내며 바닥에 안착한다. 철옹성같이 닫혀있던 마음이 모두의 힘으로 서서히 열리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무기력함이...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만들어진 심연의 닻이 해수면 밖을 향해 끌어올려지는 순간이다.

"......"

이세하는 딸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는 부모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담겨있었다.
이에 감정이 복받친 이세별은 작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빠가 미안해...엄마를 낫게 해주지 못해서..."

"우우.... 훌쩍..."

"계속 참아내는 것만이 너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상처를 줘 버렸어."

밤에 부부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모습들을 어린 소녀가 맨눈으로 지켜보기엔 너무나도 큰 상처로 다가왔다.
다소 고지식하고 엄격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정했던 어머니가 매우 낯선 모습을 하고선 아버지를 학대하는 장면을 보았으니 견디기가 어려운 건 당연했다.

"엄마를.... 구해줘."

매우 직접적이고 간결한 신호.
이세별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짧지만 마음까지 닿을 정도로 강렬했다.

"그건...."

하지만 그 의미는 이세하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지켜온 것들을 송두리째 되돌린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괴롭더라도, 고통스럽더라도 지금까지 쌓아올린 인생을 뒤로하고 과거로 회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그렇기에 진작부터 돌아가는 방법을 알았음에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되면... 더는 엄마, 아빠랑 만날 수 없는데... 그래도 세별이는 괜찮아?"

"우...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근데... 엄마, 아빠가 아픈 건 더 싫어."

"......"

이세하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의 품속에 다 들어갈 정도로 작은 소녀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 놀랐으니까.
자기표현을 이렇게 잘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도.. 세별이랑 헤어지고 싶지 않은데... 조금만 기다려줄 수 있을까?"

"....언제까지?"

"그건.... 그러니까...."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매우 오랫동안 가장 간절하게 기다려온 사람은 이세하 본인이었으니까. 스스로가 이미 반쯤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딸에게 확신을 가져다주는 일 따윈 불가능했다.

"세별이에게 거짓말하지 마세요."

"어......?"

"사실은.... 자신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일단 시간을 벌려고 하는 거잖아요. 저는 부모라는 존재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이 순간에는 자식에게 떳떳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루나......"

"소중한 사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지 마세요.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 힘들어하는 건 가족일 테니까요."

"......"

루나의 단호한 일침에 이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이전 세계에서도 그를 끝까지 걱정해 준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까. 더욱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오랜 기간 동안 진솔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해서 옆에 있는 소중한 동료들이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 못지않게 걱정해주고 또, 생각해주고 있었다.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킨 건 파이 안에 있던 이상한 인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 그 방법밖에는 없어.`

파이 윈체스터가 지키고 있는 문을 넘는다. 그렇지만 가능성은 크지 않다. 시간을 정지하는 능력은 초월 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하다.

이렇게 사기적인 능력을 사용함에도 부작용이 없는 이유는 여기는 그녀가 자신의 힘을 이용해 만든 몽환 세계이기 때문이다.
실제 같으면서 현실이 아니기에 리스크가 없다.
하지만 희망이라면 있다. 파이의 능력에 유일하게 간섭을 받지 않는 그가 있는 한,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구멍 정도는 만들 수 있다.

"루나......"

"네?"

"고마워. 덕분에 세별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 거 같아."

"뭐... 뭘요! 이제 아셨으면 빨리 선생님을 구하러 가자고요."

"헤헤... 루나 부끄러워하긴...."

"아니... 아니거든!"

홍조를 띠고 있는 루나와 옆에서 그녀를 놀리고 있는 소마.
예전부터 친자매처럼 지냈던 둘, 아니 어쩌면 웬만한 가족보다 우애가 깊을지도 모른다.
이슬비, 제이, 서유리, 루나, 그리고 겉으로 이야기는 꺼내지 않더라도 마음속 깊이 걱정해주는 동료들.
그들로부터 세하는 일어설 힘을 받았다.

미래를 향한 각오를 다지자, 세하의 건블레이드에서 푸른 용오름이 나타남과 동시에 눈 부신 빛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그 빛은 너무나도 따뜻해서 깊은 심연의 얼음조차 녹이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건?"

"....드디어 결정한 건가."

하얀색으로 탈색된 머리, 파이와 마찬가지로 짙은 검보라색의 눈동자를 하는 소년이 걸어 나왔다.
겉으로 봐서는 암흑의 광휘가 주는 인상과 유사했지만, 그는 제대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세하이면서 이세하는 아닌, 그러나 이세하로부터 만들어진 몽환 세계의 분신은 인제야 모든 이 앞에 섰다.

"당신은.....?"

"아, 시간이 없으니까 자기소개는 생략하지. 보아하니 이야기는 끝난 거 같은데 각오는 된 거겠지?"

".....그래."

이세하는 그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잠깐 멈칫하더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눈가에는 깊은 감사함의 뜻이 비쳐 보였다.

"모두들... 이런 저를... 걱정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아내에게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요?"

"세하야?.."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되면……. 여기에서의 저를 잊어주세요."

갑작스러운 발언에 모두가 당황했지만 해석해보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적어도 자신은 온전하게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의미.
그리고 이미 돌아갈 방법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라?... 이건 설마... 사망플래그? 아니죠?"

"아니. 그건 아니야. 하지만,,,

"연옥의 문을 넘게 되면.... 너희와는 달리 이세하는 이 세계에 있었던 모든 기억을 잃는다. 물론 파이 윈체스터나 아이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뭐?....."

또 하나의 이세하가 선언한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사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은 세계가 재구성되면서 기억 역시 모든 사람이 잃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각오하고 있던 대가, 과거로 돌아간 동료들이 미래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며 괴로워할 것을 염두에 둔 발언이다.

"그래. 동생을 위해 그 정도는 들어줘야겠지."

"제이 아저씨!"

"리더. 그쪽에 가서까지 세하 동생과의 기억을 추억하고 그리워한다면 가장 괴로워할 사람은 본인일 거야. 그러니... 덮어주자."

이슬비는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로 이 사실에 대해 분해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과의 관계까지 뒤로하고 여기까지 왔음에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한 채 살아갈 것이 탐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슬비는 세하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코앞에서

"다음엔 너를 파이 요원님에게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테니까. 각오해!"

" 이런 .... 애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군... 우리 팀 리더는..."

"슬비야... 하하..."

보통 또래의 아이라면 맥락도 못 잡을법한 이야기지만 이세별은 이슬비가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듯이 볼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기 아버지의 다리를 부여잡으며 그녀를 쏘아붙인다.

"흥! 우리 아빠는 엄마를 더 좋아하거든요! 아줌마가 아무리 접근해도 넘어갈 리는 없으니까 포기하세요!"

"아....아.... 아줌마? 적어도 언니라고 불러주겠니? 이래 봬도 너희 엄마보다도 더 어리단다."

"싫어요! 엄마는 아줌마보다 더 예쁘고, 더 강하고, 멋지니까요. 그러니까... 아빠는 또 엄마랑 결혼해서 저랑 만날 거예요. 그렇죠?"

"어? 어..... 그게..."

이세하는 난데없는 질문에 당황한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딸의 당돌한 모습을 보고선 조금 더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은 눈빛으로 인제 그만 나아갈 때임을 재촉하고 있다.

이별의 시기가 다가왔다. 사뭇 진지해진 분위기에 모두가 의식하고 있었다.
시간이 더 지체된다면 그땐 정말로 그녀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을 조여오고 있다.

"그럼.... 아빠 가볼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렇지만 여기서 대화를 더 이어간다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예상과는 달리 순순히 잡고 있는 다리를 푼다. 오히려 투정을 부리지 않는 배려하는 마음이 세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꼭.... 다시 만나... 다른 언니에게 마음 뺏기지 말고...."

"하하.... 내가 엄마에게 말고 누구에게 가겠어?"

"아빠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으니까.... 한순간도 안심할 수 없어."

"으음.....그렇진 않은데..."

이세하는 딸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일 가능성이 크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첫인상 자체도 별로 좋지 못했고 기억이 없는 자신이 파이를 좋아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었다.

사람이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서 앞으로 있을 일들을 다시 밟아나갈 수 있을까.
같은 사람과 교제하고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같은 아이를 낳는다.
산술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기적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영화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부정하지 않는 단 한 가지의 이유는 자신이 아버지라는 처지에 있으니까. 자식의 염원을 한마디의 말로 깨뜨리기는 싫었다.

"그럼.... 또 보자."

"응......"

눈물을 짓는 이세별을 뒤로하고 또 다른 자신이 인도하는 차원의 틈을 향해 나아간다.
그곳에 자신의 아내가 있다.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사람이 있다.

이세하가 차원의 틈을 넘고 나서 루나가 이어서 진입하려 한다.
하지만.
치직.. 치지직.

"어...라?"

강한 스파크와 함께 무언가의 힘이 그녀를 거부한다. 마치 다량의 전기가 물속에 녹아있는 느낌.
위상력, 그 자체를 밀어내는듯한 공간의 의지가 너무나도 굳건했다.

"이... 이세하 요원님!"

그가 들어간 곳을 향해 큰소리로 외쳐**만 돌아보는 기색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가야 할 길을 묵묵히 나아가고 있을 뿐

"어째서...... 혼자..."

들어가는 건 무리라는 걸 깨닫고선 그대로 주저앉는다.
이 상황에 대해 뒤에 있는 검은양에게 호소하려 했으나.

"......"

덤덤했다. 딱히 조급해하지 않은 채, 이세하가 가는 길을 그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될 걸 이미 알고 계셨었나요?"

"제수씨만큼은 아니겠지만, 동생도 나름 한 고집하거든."

이슬비는 평소에 하지 않던 기도를 보내고 있다. 딱히 신을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보다는 기적을 바라고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이세하가 무사하길 바라는 그녀의 애틋한 마음이 절절하게 녹아 분위기를 보다 엄숙하게 만든다.

우주를 연상케 하는 짙은 어둠.
곳곳에 잔여물 같은 부유체만이 남은 장소.

돌과 돌이 부딪히는 자연의 소음만이 한적하게 울리고 있다.
1시간 전과 몰라볼 정도로 이질적이고 몽환적으로 변한 이곳에서 두 명의 남성이 어딘가를 향해 걸어나가고 있다.

"이걸로 만족하나?"

"그래......"

"후회는 없는거겠지.... 뭐 이미 늦었지만."

하얗게 탈색된 머리, 반쯤 잠식된 눈동자.
광휘 인자의 증상이라고 볼 수 있는 특징들이 이세하의 몸에 발현되었다.
파이의 증상을 늦추기 위해 김재리와 이세하는 특정한 방법을 고안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의 능력을 통해 클론을 만들어 거기에 일부 이식을 하는 것.
이식이라는 것이 세포를 떼어내듯 단순히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체에 감염될 수 있도록 유도를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많은 위상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다른 자신은 바로 그 결과물, 의식과 현실을 넘나들어 파이의 폭주를 최대한 억제하기 위해 형상화된 존재이다.
그런 그를 이제 자신의 안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아....하아....."

"네가 이 힘을 견딜 수 있는 시간은 많아 봐야 1시간. 그 안에 승부를 ** 못한다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겠군."

가까스로 도달한 연옥의 문, 그 최상단에 있는 테두리에서 다리를 꼬며 은은한 미소로 기다리고 있는 파이.
칠흑 같은 어둠에 녹아들어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지만 이세하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자신이 만들었지만, 필사적으로 이 세계에 구속하려는 그녀를 이제 그의 손으로 몰아내야 한다.

방황하고 있던 그를 다잡아준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암흑에 사로잡혀 괴로워 하는 아내를 위해.
그리고 과거에 묶여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위해.

"어서 오세요. 저의 그대여"

"......"

"죄송해요... 저를 보고 싶으셔서 직접 찾아오신 건가요? 그렇다면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그러려고 온 게 아니니까."

"네?... 그게 무슨.."

이세하는 건블레이드를 치켜들었다. 짙은 청색의 빛이 어둠을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 압도한다.
오랜 세월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눌려왔던 위상력이 지금 와서야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파이를 바라보는 짙은 보랏빛의 눈동자는 분명 적대감을 품고 있다.

"나는 거짓된 세계를 부수고 과거로 나아갈 거야. 그 앞을 막는 존재가 설령 소중한 사람일지라도."

"....으음~"

파이는 순간 놀란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살벌한 웃음을 지었다.
마치 약자를 가소롭다는 것처럼 내려다보는 포식자의 여유, 그 자체.

사검 역시 그녀의 미소와 마찬가지로 스산한 기운을 띄고 있다.
이때, 준비 동작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로 아득히 높아 보이는 문의 최상단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떨어지는 속도는 매우 빨랐으나 착지하는 모습은 깃털이 안착하는 장면처럼 안정감이 느껴졌다.
무협에나 나올듯한, 기존의 상식과 대치되는 몸놀림이다.

"지금 같이 계속 저만을 바라보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텐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으셨던 건가요?"

"딸이 바란 길이니까. 아빠가 들어주지 않으면 누가 들어주겠어?"

"우리... 사랑의 결과물이..." 

"그러니까 이번엔 엄마도 양보해줘야 하지 않을까? 누구보다도 누나를 걱정해주고 있으니까."

이세하의 이야기가 통했는지 일단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내 웃음을 지었다.

"도구면 도구답게 떠나지 못하도록 구속해 놓을 것이지.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선..."

"뭐....뭐라고?"

"딸의 존재 의미는 그대의 마음을 저에게서 돌리지 않도록 하는 수단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랍니다." 

건블레이드의 검신에 적지 않는 떨림이 느껴졌다. 물론 파이의 진심은 아니었지만 다른 인격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어떤 과정에서 태어났던 자녀는 자녀라고 생각한 세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리고 꼭 물리쳐야 하는 대상이라고 재확인하는 계기임을 알려주는 발단이 되었다.

"설마... 그런 말로 저를 설득할 생각을 하신 건 아니겠죠? 순순히 보내드릴 리가 없잖아요? 그대는 이 세계에서 저와 함께 사랑을 나누어야만 하는데, 영원토록 저라는 공간 안에서 갇혀있어야만 하는데...마음대로 벗어나려고 하다니... 너무 제멋대로인 거 아닌가요?"

이세하는 특별한 대꾸를 않은 채 정색한다. 그리고 먹이를 찾으러 활공하고 있는 매처럼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걸 인지했는지 잠깐 대치하다가 바로 박차고 나아간다.

챙!... 끼이이이이...익...

건블레이드와 사검이 불협화음을 내며 전력으로 부딪혀온다. 힘으로 찍어누르려는 세하와 이를 받아쳐 오는 파이.
검을 분쇄할 기세로 칼날 중앙에 위력을 가했지만 파이는 여유롭게 방어해낸다.

"어머~ 무서우셔라... 밤에도 이렇게 과격하게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큭!..."

철옹성의 벽처럼 끄떡도 하지 않는 검 앞에서 손목에 점점 무리가 간다. 일그러지는 세하의 표정과 대조적으로 파이의 얼굴은 시종일관 편안했다.
결국, 힘싸움으로는 어렵다는 걸 깨달은 이세하는 파이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어쩌지? 어차피 거리 싸움도, 지구전도 불리해. 광휘의 힘을 흡수해도 이 정도의 차이라니....`

이세하는 서지수의 주선으로 파이와 대련을 여러 차례 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거리를 좀처럼 좁히지 못해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녀는 항상 20~30m 정도 거리를 두면서 속도를 활용한 견제를 하면서 공파탄이나 영거리 포격같은 공격을 지속해서 의식을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단조롭고 직선적인 공격 유형은 경험이 많은 파이에게 쉽게 파훼가 되었고 그 탓에 6번 중 5번을 일방적으로 패배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게 위상력도 압도적으로 강해졌다는 사실은 이세하를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다.

팟-

파이는 세하에게 고민할 틈을 주지 않고 빠른 속도로 접근한다. 하지만 이를 역으로 이용해 제로 거리에서 카운터를 노려봤지만 바로 눈치채고 위쪽으로 도약했다.

"왜 얼음 쐐기라든지... 분열된 사검으로도... 견제를 전혀 하지 않는 거지?"

"그거야 당연하죠. 그대가 다치는 걸 바라지 않으니까요. 소중한 물건에 흔집을 내는 걸 좋아하는 주인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 그거 영광이네. 하지만 팔다리를 잘라내지 않는 한 나를 막을 순 없어."
 




아마 기다려주신 분이 안 계실거라고 생각하지만 계시다면 죄송합니다. 시험을 핑계로 안 쓰고 있었습니다. 제가 전투 서술을 많이 못해서 다음 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하하.. 여러모로 대책이 없네요.
 





 




  
 
  

 

 
 



2024-10-24 23:35:3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