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파이] 얼음에 잠긴 초신성[下 Part 3] *앞에 있는 편 안 보셔도 됩니다.

PlaylMaker 2020-05-18 3

간단한 배경 설명: 이 편은 닥터 호프만에 의해 김유정이 살해당한 IF 스토리입니다. 전편부터 보신 분들은 지금 세계가 만들어진 이유를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야! 이세하! 무슨 말이라도 해봐."

"이세하 요원님...."

검은양팀의 사무실 앞에 사표를 아무렇게나 던져둔 뒤, 3개월간 이세하는 오피스텔을 옮겨 다니며 전국 이곳저곳을 방황했다. 연락조차 제대로 받지 않아 참다못한 이슬비가 수소문 끝에 위치를 파악하게 되어 루나와 파이와 함께 쳐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만난 이세하의 몰골은 말도 아니었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아 상당히 여윈 몸에 집안 곳곳엔 알코올 냄새만이 가득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천장만을 향하고 있었고 팔은 수전증 걸린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오히려 지금은 약물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이 위안이 될 정도로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아.... 하아... 저리가.... 저리가라고!"

"뭐가 저리 가인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이야기해!"

이슬비는 매우 화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눈매에는 약간의 눈물이 맺혀있었다. 자신의 동료가 이렇게 되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과 리더로서 보살펴주지 못했다는 후회가 담겼다.

이러한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설켜 오히려 분노의 감정으로 표출되고 있다. 뒤에서 이 광경을 잠자코 보고 있던 파이는 슬며시 나왔다.

"선생님?"

"이슬비 요원님... 여긴 제게 맡겨주시겠습니까?"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이슬비는 순간적으로 흠칫했지만, 자신의 볼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뒤, 눈물을 헹구기 위해 화장실로 향한다.
그렇게 세하와 마주한 파이. 그 날과 마찬가지로 세하의 손을 쥐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상냥하게 어루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죄송합니다... 요원님이 무슨 심정인지도 모르고 제가 결례를 저질렀었군요."

"아....아....!"

누군가가 자신을 만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공포에 질려있다. 이전에 맹렬한 기세로 차원종에게 달려들던 사람의 모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이질감이 컸다.
무엇이 그를 이 지경으로 몰았을까 비탄으로 잠긴 마음의 골은 빛이 밝히지 못할 않을 정도로 깊게 조성이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알파퀸 서지수 님께서는 그자를 잡기 위해 백방으로 동분서주하고 계십니다. 돌아오시기 전까지 제가 책임지고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비록 어머님에게는 발끝에도 못 미치겠습니다만..."

"선생님?! 그런 걸 유니온 측의 허가 없이 함부로 정해도 되는 건가요?"

"어떻게든... 받아야겠지요.."

"에?..."

파이는 감정에 쉽게 휩쓸리긴 해도 독단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벼랑 끝에 몰린 세하가 그녀의 마음을 이렇게까지 움직일 정도로 위태롭게 보였다는 의미.

구제할 길 없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동생과 다르게 그래도 의식이라도 있는 상태라면 어떻게 되지 않겠냐는 막연한 기대를 할 정도로 깊은 동정심을 느낀듯했다.

"제가 앨리스씨에게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학교엔 병가 요청을 드려야겠군요."

"으.....아.... 저리가!.. 으... 으흑.."

심연처럼 죽은 눈에서 눈물이 새어 나온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모습은 사냥터지기 팀에서 보아왔던 인상과 다르게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테스크포스였던 루나에게는 더욱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더는 차원종 앞에서도 앞뒤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돌진했던 그는 여기에 없다. 단지 자연 한복판에 남겨진 초식 동물의 **가 언제 먹힐지 모르는 미래를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다.

그로부터 2주 뒤, 파이는 세하의 집에서 함께 숙식하며 그의 손발이 되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람을 돌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점차 손에 익기 시작했다.

"자, 아~ 하세요."

"......"

"아, 뜨거워서 그래요? 잠시만요~ 제가 식힐게요."

파이는 기력이 약해진 세하를 위해 전복죽을 끓였다. 요리를 썩 잘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먹을만한 정도로 맛을 올린 결과물이다.
처음에는 직접 먹게 하려고 했으나 당최 수저를 들지 않아 5살 아이를 대하듯 달래가며 먹여야 했다. 이 광경을 보고 검은양과 사냥터지기 팀은 기겁할 정도였으니 평소 때의 파이의 모습과 얼마나 이미지가 다른지 알려주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후~후~ 이젠 뜨겁지 않아요~"

웃는 얼굴로 수저를 들이밀자, 세하는 말없이 입을 조그마하게 열었다. 그러나 눈의 초점은 아직도 풀린 상태였는데 시각보다는 소리에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죽이 입안으로 들어오는 걸 순순히 받아들였고 매우 느린 속도로 우물우물 내용물을 씹고 있다.

"착하네요. 앞으로 여섯 숟가락만 더 먹으면 누나는 정말 기쁠 것 같은데 그렇게 해줄 수 있죠?"

"......"

파이와 함께 지내면서 상태가 다소 안정화 됨과 동시에 혼잣말이 눈에 띄게 적어졌다. 세하가 이렇게 된 원인을 유니온 측에서 검사하고 있는데 자의식이 무언가에 의해 방해되고 있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처음에는 연구실에서 지내게 하려고 했지만, 보안상의 문제와 경직된 환경이 정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원래 살던 집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이제 식사는 마쳤으니... 씻으러 가볼까요?"

파이는 세하가 입고 있던 검은색 티셔츠를 벗겨냈다. 그러자 운동선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튼튼하고 마른 근육이 보인다. 곳곳에는 전투 중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상흔이 보였는데 그가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음을 알려주는 증거였다.
하나하나 벗기고 나서 하체에 수건 하나만을 걸치고 욕실로 향한다.

처음엔 파이가 세하를 돌본다고 했을 때, 검은양, 사냥터지기팀을 비롯한 유니온 측에서는 상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두 명의 남녀를 한 공간에 살게 하는 것도, 사람을 간호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클로저에게 이런 일을 맡긴다는 건 윤리적, 사회 정서적으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유니온 내부나 위탁 업체의 전문 간호 및 간병 인력을 동원할 예정이었지만 총장의 치부가 드러난 유례없는 상황, 아직 유니온에 남아있는 그의 잔재세력이 얼마나 있는지 가늠조차 못 하는 상황에서 신원이 확실하게 보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함부로 이세하를 맡길 수 없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가 없고, 또 유사시에는 이세하를 무력으로부터 지켜야 하기에 전투 능력이 있는 클로저 중에서 지원자를 받기로 했다.

신청자 중에선 이슬비와 파이가 가장 적극적이었으나 김유정이 없는 상황에서 이슬비는 검은양팀의 리더를 맡고 있으므로 공백이 생겨선 안 된다고 판단, 결국 파이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서지수에게는 집안에 cctv를 설치한다는 조건으로 승낙을 받았다. 서지수가 파이를 못 미더워한다는 의미보다는 그래도 절차상의 안전장치는 해둔 셈이다. 그리고 cctv는 파이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후우...."

세하를 다 씻기고 옷을 입히고 있는 파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아무리 힘이 받쳐준다 하더라도 체격이 건장한 남성을 돌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녀 나름대로 이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화장실, 간단한 수학 연산부터 시작해서 세하의 병세는 분명히 호전되고 있었으며 약간의 의사 표현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역할을 대신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로군요. 그래도... 점차 나아지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네요."

".... 누....나"

아직 발음이 정확하지는 않아도 분명 자의식을 가지고 파이를 불렀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 반응이 없었으나 지금의 세하에게는 그녀의 존재는 어미 새처럼 절대적인 것이다.

"네. 누나 여기 있어요."

"대....."

파이는 세하를 확 껴안았다. 절대로 놓치지 않도록, 자신의 온기가 제대로 전해지도록 감싸 안는다. 이슬비는 하루에 몇 번씩 이런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너무 과하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시했지만
불안정한 정서에 포옹 등의 스킨십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묵인되었다.

"대...체..."

"오늘도 저에게 응석 부려줘서 기뻐요.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나요~?"

"무...슨....일...으...을"

"참! 오늘은 의사 선생님을 만나 뵈어야 해요... 지난번처럼 선생님 앞에서 시끄럽게 이야기하면 안 돼요~."

이세하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전하려고 했지만 파이는 대꾸하지 않고 자신이 할 말만을 전했다.
그러나 듣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세하가 말하는 걸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꾸....미...고 있는...거야."

"......!"

파이의 표정이 일순간 차갑게 굳어졌다. 주먹 두 개가 들어갈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얼굴을 들이댄다.
그리고 세하의 가슴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면서 그의 고동 소리를 느낀다.

"어라? 무슨 말을 하는 걸까요~? 저에게 부끄러운 말은 하게 하지 말아주세요. 실례니까요."

"아...아..."

세하는 숨을 힘겹게 토해낸다. 더는 말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희망이 아닌 cctv에 잡히지 않는 무뚝뚝한 차가운 미소일 뿐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혹시 그거 아시나요? 여왕벌은 말이죠... 어느 정도 자라고 나면 성장하고 있는 다른 여왕벌들을 전부~ 침으로 쏴서 죽여버린대요. 자기 혼자만이 남을 때까지."

"......"

"만약... 자신의 둥지를 위협할 수 있는 또 다른 존재가 나타나면... 여왕벌은 가만히 있지 않겠죠?"

"하...아..."

내려다보는 듯한 비정한 눈빛에 세하는 무력하게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주변 인물들이 그녀에게 위협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선 그녀가 만든 룰 안에서 놀아나는 방안 말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 때, 선의로 받은 그것을 먹지 않았어야 했다고 뒤늦게 후회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저는 다른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오직 그대의 사랑을 독점하는 것만이 제가 살아가는 목적이니까요."

"그...건..."

"마음만 같으면 당장에라도 그대를 제 안에서 영원히 가둬놓고 싶지만... 지금은 조금만 참을께요... 진정한 우리만의 세계가 만들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

만약 누군가가 이 말을 듣는다면 소름 끼치게 놀랄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다. 그렇다. 사실 파이는 세하를 돌보는 일에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함께 있을 수 있는 기간이 더 길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또, 자신에게 신체적, 정신적으로 더 의지하고 종속되는 걸 의도하고 있었고 이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파이는 세하의 입술에 검지를 들이댄다. 그의 말랑말랑하고 촉촉한 감각을 느껴가며 황홀한 웃음을 짓고 있다. 자신의 공간에 얼어있는 왜곡된 사랑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


"쳇, 그 녀석이 빠지는 바람에 괜히 나까지 더 굴리는군. 좋아, 돌아오면 본때를 보여주지."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나타. 지금 누구보다도 힘들어하고 있을 테니까요."

임무를 끝내고 돌아온 나타와 바이올렛.
세하와 파이가 부재중인 여파로 늑대개 팀의 임무 역시 과중해졌다.
앨리스가 새로이 부국장 대리를 맡게 되면서 검은양, 늑대개, 사냥터지기 팀을 유연하게 운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그 멍청한 녀석은 대체 뭘 잘못 먹었길래 빌빌대고 있는 거지?"

"글...쎄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위상력을 과도하게 다루는 바람에 뇌에 무리가 왔다는 이야기는 들은 거 같네요."

"뭐? 나도 위상력을 하도 많이 써서 진이 빠지니까 인제 그만 쉬게 해 달라고."

나타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어도 은근히 세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관계라도 막상 안 보이면 허전한 느낌은 지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머... 언제는 그렇게 싸우고 싶어 안달이더니... 원 없이 싸웠으니 만족하지 않나요?"

"하!... 아니다. 송충이 눈썹한테 이야기한 내가 잘못이지."

"소...송충이..."

바이올렛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질색한다. 나타에게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콤플렉스라고 생각한 부분이기도 하다.
옆에 있는 하이드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걸 간신히 막고 보고를 위해 늑대개 팀의 사무실로 가던 중,
파이가 부축하고 있는 세하의 모습이 보인다. 한발짝 한발짝 위태롭게 내딛는 모습이 마치 막 태어난 초식동물 같았다.

그런데도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세하의 얼굴을 수시로 확인하는 등의 여유까지 보여 이미 이 일에는 익숙한듯하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온다더니...."

"엇? 바이올렛 대원 님이시군요! 오랜만입니다."

"네......"

바이올렛의 눈으로 본 파이의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씩씩하고 당당했다. 보통 간병을 하는 사람은 육체와 정신이 피폐해져 있는 경우가 많았던 걸 보면 파이는 바이올렛의 예상보다 훨씬 강인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파이와는 대조적으로 무엇이 무서운지 덜덜 떨고 있는 세하의 모습은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시선 자체는 이쪽을 향하고 있어 보였지만 몸은 파이에게 전적으로 매달리고 있었다.
진정하라는 듯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는 장면은 필사 모**간을 연상케 했다.

"이세하... 요원님의 병세는 괜찮으신가요?"

"네! 다행히 순조롭게 호전되고 있습니다. 재리가 밤낮으로 힘써준 덕이죠."

"x랄을 해라 x랄을 해. 니가 5살 먹은 꼬맹이냐? 고개 빳빳하게 안 세워?"

"나타!"

나타는 세하에게 욕설을 하면서 은근슬쩍 바이올렛에게 눈 신호를 보냈다. 그의 동물적인 감각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것이다.
그것이 뭔지에 대해 바이올렛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일단 나타의 감을 믿어보기로 한다.

파이는 그런 말을 한 나타를 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언뜻 보면 차분하고 절제를 잘하는 유형처럼 보이나 실제론 불의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득달같이 달려와 이야기하는 불같은 성격이다.
같은 테스크포스 소속인 바이올렛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타 대원님은 참으로 무례하시군요! 환자에게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당장 사과하시기 바랍니다."

"이봐, 잘 몰라서 그런 거 같은데 우린 원래 이런 식으로 인사한다고."

"과거에 어떻게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언행을 달리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덕목, 이를 지키지 않으면 짐승과 다를 게 없습니다. 나타씨는 짐승이라도 되는 겁니까?"

"......"

불의에 분노하고 있는 파이는 누구라도 막기 어렵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이유로 관리요원과 여러 번 마찰을 보여왔다.
자기 주관과 신념이 강한 클로저는 상명하복 중심의 경직된 문화에선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 빈번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세하는 팔을 부들부들 떨면서 힘겹게 들어 올린다.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타이밍을 봤을 때, 둘 사이의 갈등을 만류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동시에 눈가에 가는 눈물이 맺혔다.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것조차 그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애처로운 모습에 기가 세기로 유명한 두 사람조차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마음이 여린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보인다. 파이는 손과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고 있다.

"겨우... 어렵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는데... 누나가 무섭게 해서 미안해요..."

"......"

바이올렛은 둘 사이를 유심히 관찰했지만, 파이가 의외로 다정한 면이 많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타가 바라본 수상한 점은 무엇이었을까? 기우였길 내심 바라**만 그는 평소에 짓궂긴 해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신호를 보낼 사람은 아니다.

도저히 보이지 않는 단서에 바이올렛은 혼란스러워하다가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세하의 팔을 향해 손을 가까이 댄다.
특별한 확신은 없다. 단지 그에게 접촉해보면 무언가를 알 수 있지는 않겠냐는 막연한 기대였다. 그런데

탁!

이세하에게 나아가고 있었던 손이 외력에 의해 제지당한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무엇보다도 차갑고, 냉정한 기운이었다.

이 기운을 내뿜고 있는 당사자를 바라보니
얼굴에 깊은 그늘이 져 있었다.
소마가 차원종을 멸시하는 눈빛보다도 훨씬 더 경멸하고, 증오하고, 살기를 품고 있는 그런 수라의 길을 걷고 있는 자의 시선이다.

"파이....요원님?"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잡아먹을 듯한 모습에 바이올렛은 위압감을 느끼고 있다. 도저히 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이질적인 모습이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영혼이 바뀌어 인격이 교체된 듯한 위화감은 바이올렛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옆에 있던 하이드와 나타는 말없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바로 싸울 수 있는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런 강렬한 살기는 클로저가 낼 만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치를 하다가 1초, 2초, 3초... 가 지나고 나서야 파이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변화에 필요한 시간을 인지할 새도 없이 빠르고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라? 아... 죄송합니다. 이세하 요원님이 제삼자의 접촉을 두려워하실 우려가 있어 부득이하게 막게 되었습니다. 양해 부탁하겠습니다."

"네... 알겠어요."

"......"

"......"

다소 어색함이 흐르는 정적. 바이올렛은 의문에 가득 차 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내기 위해 머릿속은 엉킨 실처럼 복잡했다.

정말 이세하가 바이올렛의 접촉을 두려워해서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없어...`

누군가가 이세하에게 접촉하는 걸 파이가 허락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고민할 틈도 주지 않고

"이제 가봐야 겠습니다... 다시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군요."

"잠깐-"

무엇을 말하려던 순간, 나타는 바이올렛 앞에 팔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그는 파이의 반응에 흡족한 듯 회심의 미소를 띄고 있었다.
파이와 세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다음, 참아왔던 입을 열었다.

"... 그래서? 어떤 걸 알아차리셨는지 이제 설명해주시겠어요?"

"그 녀석의 눈... 분명히 저 여자의 시선을 계속 피하고 있었어."

"네?!"

"너도 방금 전에 봤으면 알 거 아니야. 그 미쳐버린 눈동자에 겁을 먹고 있었다고."

그렇다. 줄곧 나타가 바라본 것은 이세하의 눈이었다. 처음에는 고개를 부자연스럽게 돌리고 있어서 목 부근이 불편한 게 아닌지 의심했지만, 파이의 시선을 지속적으로 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냄새를 맡은 이상, 나타가 다음에 할 일은 정해졌다.

"저 녀석... 집에 cctv가 있지?"

"아마도... 그럴거예요. 유니온의 특별 보호 대상으로 지정된 상태니까요....나타?"

트레이너에게 보고하러 가던 나타는 경로를 바꿔 앨리스가 있는 부국장실로 향한다.
사냥감의 냄새를 맡은 늑대는 그 어느 때보다 신이 나 있었다.


***



야심한 새벽.
다가가기만 해도 시릴 만큼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는 여성이 사진 속의 나타를 죽일 것처럼 째려보고 있다.
이미 구겨진 사진은 파르르 떨리고 있는 사검에 의해 거울에 박히고 만다.

순식간에 반으로 금이 간 거울 틈새에서 기분 나쁠 정도로 어두운 심연의 얼음이 슬금슬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밖에 모르는 천박한 X** 주제에...... 좋아요. 감히 주제도 모르고 저를 시험한 대가를 치르게 해드리죠."

파이는 놀라울 정도로 창백하고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얼마나 검을 세게 잡았는지 그녀의 손이 쓸려 피가 나올 정도였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그걸 핥으며 응징의 각오를 내비치고 있었다.
창밖의 달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고 또 가늘게 대지를 비추고 있다.    

2024-10-24 23:35:3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