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파이] 얼음에 잠긴 초신성[下 Part 1]

PlaylMaker 2020-04-27 7

 "아이가... 생겼다고?"

몽환 세계 내의 비밀연구실.

원래대로라면 최보나의 관리하에 운영되는 장소지만 김재리의 승인으로 극비로 열리게 되었다.
3개월의 긴 실종 기간 후에 볼프강에 의해 발견된 세하와 파이.
생명의 지장은 없었으나 영양 상태는 많이 안 좋아진 상태였기에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네... DNA를 분석해보니 세하 군의 DNA와 일치했어요. 설마 해서 재검사를 2번 정도 더 했는데 그때도 같은 결과였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이 녀석... 어쩐지 상태가 이상해 보이더니..."

"우선 검은양 팀에 연락할까요?"

위기에서도 태연한 모습을 보이곤 했던 볼프강마저도 눈에 띄게 동요한 기색이었다. 

자신의 부재가 불러왔다고 느낀 죄책감 그리고 이로 인해 벌어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는 더할 나위 없이 괴롭게 느껴지게 하는 원인이다.

"아니... 기다려. 일단 앨리스에게도 말하지 말고."

"네?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런 중요한 사건을 관리요원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아무튼! 잠깐 생각할 시간을 줘."

둘 사이에 가득한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
난해한 상황을 타개할 수를 찾으려 하는 볼프강은 이마에 주먹을 대며 고뇌하고 있다.
냉정하고 결단력 있던 그조차 후배의 신변에 대해서는 더욱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딸깍딸깍.

초침이 물 흐르는 것처럼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넘어간다.
김재리는 답답한 마음에 엷은 신음을 내보내지만, 볼프강은 그 반응을 엿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렇게 10분여가량이 흐르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건넨 쪽은 볼프강이었다.

"재리, 혹시 수술을 집도한 경험 있어? 산부인과 쪽이면 더 좋고."

".... 설마... 그 생각을 하고 계신 거예요?"

"......그래."

"생명은 절대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더구나 실험을 위한 수술과 진료 목적의 수술은 목적 자체가 다르다고요."

"알아. 그래서 물어본 거야."

"?!."

볼프강은 구질구질하게 변해있는 수첩을 꺼낸다. 언뜻 보면 낙서만으로 가득해 보였지만 매일 매일마다 파이의 증상과 병에 대해 면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중에서 책갈피가 꽂혀있는 페이지, 7월 15일에 적혀있는 내용을 제시한다.

<< ...오늘은 D백작에게서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바로 파이 누나의 증상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PNA에 자리를 잡은 암흑의 광휘 인자가 잠식이 끝나간다는 통보였다.

  그걸 들은 나는 그와 거래를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증상은 점점 호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한 마지막 경고는 충격적이었다. 아이를 지우려고 한다면 목숨이 위험해질 거라는 이야기였다.

아이가 생겼다고?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누나는 시종일관 나에게 사랑을 증명하라고 했다. 그 강도는 시간이 갈수록 자극적이고 충동적으로 변했다. 나름의 형태로 보답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목을 졸랐다. 결국은 극단으로 치닫는걸 막지 못했다. 그리고 여기에... 약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


"......아..."

김재리는 파이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안 것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오랜 고통으로 견디지 못한 그들이 실수한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상은 아니었다.
파이를 알파퀸의 아들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도록 유도한 암흑의 광휘 인자, 그것이 이번 사건의 첫 단추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D백작은 그 인자에 대해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거나 만들어지는데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상대방의 PNA는 편의대로 타인에게 넣다 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암흑의 광휘 인자에 관해 연구할 필요가 있어. 그렇지 않으면 아이까지 위험해 질 테니까."


쾅! 쾅! 쾅!

실험실에서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그 소음의 원인은 놀랍게도 리미터를 착용하고 있는 파이였다.

"그대여.... 내가 사랑하는 그대는... 대체 어디 있나요?"

"쳇! 진정제를 놓았는데도 얼마 가지 못하는군. 재리! 더 강한 주사는 없어?"

"있긴... 하지만 임산부에게 놓을만한 건 절대 아니에요. 역시 유니온에 알리는 편이!"

이때, 문 앞에 서성이고 있던 클로저가 몸을 제대로 겨누지도 못한 채 연구실에 진입한다.
휘청휘청하는 그의 발길이 언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벚꽃처럼 위태로워 보였지만 강인한 정신력을 통해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저를.... 누나에게 보내주세요."

"안돼요. 그건 허락할 수 없어요. 파이는 아직도 많이 불안정해요. 세하군이... 또 다치게 되면 저는 서지수 씨와 김유정 부국장님을 뵐 면목이 없다고요."

"......"

볼프강은 이세하를 유심히 바라본다. 하지만 그건 동정이나 연민의 눈초리는 아니었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는지 가늠해보기 위한 눈이었다.
3개월 동안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이세하의 눈동자는 사냥터지기 성에서 처음 봤을 때와 거의 비슷한 인상이다.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는 의지. 잠깐이지만 그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재리. 보내주자."

"볼프? 진심이에요? 리미터를 착용시켰어도 여전히 위험한 상태라고요."

"그래. 만일을 대비해 나도 동행하지. 어차피 현시점에서 후배 녀석을 진정시킬 수 있는 건 이세하 밖에 없어."

김재리는 반신반의했지만 결국 의견을 수용하기로 한다. 파이가 벽을 치면서 손바닥이 다쳐가는 걸 더는 지켜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세하를 부축한 채로 파이를 격리한 방으로 향하면서 조용히 질문을 던진다.

"그동안 식사와 화장실은 어떻게 해결했지?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을 텐데..."

"식사는 ... 눈을 뜨면 제 앞에 어느샌가 있었어요... 아마 D백작의 소행이겠죠. 그리고 화장실은...." 

대답을 차마 끝마치지 못하고 말문이 막혔다. 아마도 이야기하기에 민망한 내용이 있기에 망설이는듯했다.
파이는 수면상태에서도 세하를 끝끝내 놓지 않았다. 그러한 그녀의 광기스러운 집착 속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했을 거라는 예상은 전망하기 어려웠다.

"대답하기 어려우면 됐어. 대신 한가지는 약속해줘야겠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일에 대해 함구할 것. 물론 우리 소대 아이들도 마찬가지야."

"안 그래도 그렇게 할 예정이었어요. 하지만... 누나가 아이를 가진 이상, 숨기는 일도 한계가 있어요. 만약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볼프강은 바로 앞에서 일기를 재도 남기지 않고 소각해버린다. 그리고 참아왔던 울분을 터뜨리듯이 이세하를 벽 쪽으로 밀어냈다. 좀처럼 흥분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던 사서였지만
유례없는 일에 그조차 냉정심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잘 들어. 이런 일이 생긴 건 클로저로서 자신의 몸조차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약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한 녀석은 어떤 불이익이 생겨도 토를 달 자격이 없지."

"그런...."

"하지만 여기서 제일 쓰레기는 그런 녀석의 보호자로 있었던 나야. 실제로 이런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볼프강의 얼굴엔 그늘이 져 있었다. 오랫동안 고생해온 세하만큼 그도 마음이 피폐해져 있었다.
어른이라는 무게조차도 억누르지 못했던 이유, 그건 바로 동료였다.
무엇하나 긍정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 지표를 반영하듯 그의 머릿결도 퍽퍽하게 변해있었다.

"네가 검은양을 우선시하는 것처럼 나는 사냥터지기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어. 어른이 되어서도 시답지 않는 정의론이나 펼치는 철부지 후배에게도 언젠가 무거운 현실을 체감할 날이 오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

"저 녀석이 너를 **해 아이를 가졌다고 소문이 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외부에서 이해해 줄 것 같아? 천만에. 인간의 눈은 염전보다도 수심이 얕고 입은 세상 어디 있는 생물보다도 간사하다. 영웅의 아들을 망가뜨린 여자라고 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겠지."

이세하는 이전부터 사람들이 클로저와 자신을 대해왔던 태도를 되돌아봤다. 자신의 어머니는 겉으로는 영웅이라고 칭송받았지만, 뒤로는 유니온의 우수한 대차원종 능력을 입증한 대표적인 사례라며 선전의 도구가 되었고
자신은 영웅의 아들 대접은 고사하고 그저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강남, G타워, 뉴욕에서는 어른들의 사정이라는 이유로 어린 클로저들을 제대로 된 지원도 없이 계속 격전지로 내몰았다.
얼마 하지 않은 클로저 생활이었지만 사회는 정말 냉혹했다.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는 어떻게 살아갈지 자기가 생각해도 막막하기만 했다.

자신은 피해자니까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결단을 내릴 만큼 이세하는 냉혹한 사람이 아니었다.

"너는 유니온에서 가장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클로저의 남자가 돼야 해. 하기 싫으면 억지로라도 하게 만들 거다. 억울하다고? 이혼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네가 바라본 사회는 어땠지?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을 감싸 안아줘서 위로할 정도로 상냥했나?"

사냥터지기 성에서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세하의 기억 속에는 볼프강이 이렇게 말이 많은 클로저는 아니었다.
한마디로 과묵하고 냉정한 이미지.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열변을 토해내고 있는 건 자신의 동료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려주는 지표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기적이다. 사냥터지기 밖에 모른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세하의 사정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네가 그 녀석을 위한 선택을 할 때까지 계속 강요하고 괴롭힐 거다. 그러니까 파이 윈체스터가 아닌 나를 원망해."

"제가... 누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 사실 그건 아닐지도 몰라요."

"...?!"

다소 맥락 없는 답변을 한 뒤, 이세하는 볼프강에게서 벗어나 파이를 가둔 격리 실험실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키카드를 인식시켜 그녀가 있는 방안으로 진입한다.
볼프강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강렬하고 또, 씁쓸했다.

"부부는 자식 앞에서 사랑하는 것만이 아닌 사랑해야만 사이니까요. 어쩌면 아빠의 사랑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일지도 모르겠네요."


***



"어서 와! 파이, 기다리고 있었어."

"어머님.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지. 아이를 가진 애를 두고 어떻게 오라고 하겠니. 내가 찾아가야지. 세하는 잘 있고?"


알파퀸 서지수와 파이 윈체스터와의 다소 부자연스러운 만남.
파이는 결혼식 이후에 세하의 주변 사람들을 만나서 인사를 하기 위해 검은양 팀이 상주하고 있는 부산 지부에 도착했다.
마침 그곳에는 서지수가 있었고 무안해 할 파이를 배려해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행방불명된 세하와 파이의 소식에 대해 가장 초조해 하고 충격을 받은 사람은 서지수임이 분명했지만, 예상외로 그녀는 파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었다.
상견례조차 치르지 않은 아들의 결혼 상대임에도 이미 대정화작전을 통해 파이의 됨됨이를 높게 사고 있던 것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네. 제 아비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요즘 들어 약간 기운이 없어 보여서 조금 걱정입니다."

"흠.... 신혼 때는 같이 있는 시간을 일부러라도 많이 내려고 해야 할 텐데... 알다시피 세하가 그런 방면으로는.. 좀 둔하잖니? 연상인 파이가 리드해줬으면 좋겠어."

"그렇군요...제가 부덕하여 그런 생각까지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더 정진하여 가정에 활력을 줄 수 있는 아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풋! 푸하하."

현관 데스크 앞에서 영웅의 폭소가 울린다. 흔치 않은 장면에 상주하고 있던 유니온 직원들은 순간 당황했지만, 모녀같이 사이가 좋아 보이는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띄웠다.
덩달아 어안이벙벙한 파이. 자기의 언행에 무언가 실수한 것은 없는지 되돌아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점은 찾아낼 수 없었다.
 
"제가... 무슨 실언이라도.."

"아니... 아니 그래도... 이런 애들 사이에서 어떻게 아이가 생겼나 해서. 서로 여유가 너무 없달까.. 그나저나 먼저 대쉬한 건 누구야? 세하? 파이?"

"그건...."

결혼 전에 받았어야 자연스러운 질문을 이제와서야 갑자기 던졌다. 이를 장난스러운 질문으로 인식했었던 파이는 사뭇 진지해진 서지수의 눈빛에 약간의 위압감이 들었다.
하지만 파이의 머릿속에 있는 건 몽환 세계에 의해 `조작된 기억`. 서지수가 수천 번 수만 번도 더 궁금했을 진상에 도달하기엔 무리였다.

"...제가 했습니다. 아드님이 너무 매력적이라 이대로라면 다른 여성에게 뺏길 거라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주변 분들에게 평판이 좋기도 했고요."

"아...."

파이의 직설적이고 솔직한 대답에 서지수는 말문이 막혔다.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며느리가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아마 단연코 없을 것이다.
방금 자신의 발언을 의식한 탓인지 파이의 볼에는 홍조가 띠었고 걸음걸이가 다소 부자연스러워졌다.
그 둘의 사이에 관해 떠보려던 서지수는 무안해진 분위기에 의미심장한 웃음만을 짓고 있었다.

"하하... 그럼 검은양 팀의 회의실이 3층이니까 여기서 만날 수 있겠네."

"네... 그렇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서 복도에 서 있는 이세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블루투스 헤드셋을 착용하면서 탄산음료인 마운X 듀를 음미하고 있었다.

"어? 세하야!"

"세하씨...."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불러**만, 전혀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매우 강한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탑재된 헤드셋인 모양이었다. 이세하의 시선은 방음유리가 된 회의실 쪽이었다.
밖에서 내부를 바라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어 안을 응시하고 있는 모양이다.
누구를 그렇게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진 둘은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기로 한다. 그리고 회의실에는...

`...이슬비 요원님?`

지도에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는 이슬비가 있었다. 이에 서지수는 곧장 세하에게 다가가 가벼운 초크를 걸어온다.

"이 녀석! 감히 엄마가 부르는데 무시해?"

"어? 엄마? 언제 오셨어요?. 그리고 누나도..."

"하하... 파이야. 나는 세하하고 이야기할 게 있어서... 잠깐 다녀올게."

"네....."

서지수는 자기 아들을 복도 끝까지 데려갔다. 파이의 입장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턱이 없었지만 그런 추측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심연의 감정이 이슬비를 본 것을 계기로 복받쳐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으셨던 걸까?`

이슬비를 바라보고 있던 세하의 눈빛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웠다. 그리움, 연민, 미안함 등이 교차한 얽혀버린 실 뭉텅이 같은 느낌.
몽환 세계에서 세하와 슬비가 나눴던 사랑의 속삭임이 연기처럼 슬금슬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그런 거였어. 그래서..."

파이의 손이 수전증이 걸린 것처럼 심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그 신호에 맞춰 눈의 움직임도 동요한다.
자그마한 눈물이 흐르고 손톱에 파인 살에 혈흔이 묻어나왔다.
혼란은 아픔이 되고 아픔으로 인해 난 상처 안에서 증오의 싹이 나오기 시작했다.

`너.... 방해야. 너만 없었으면.... 네가 없어지면....`

어떤 생물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살기의 기운.
수십 차례 생사를 오가는 위기를 겪어봤던 이슬비가 이를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 파이 요원님?"

툭.

"제수씨? 무슨 일이야? 혹시 우리 리더가 못살게 굴었나?"

마침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던 제이.
다행히도 폭주하기 전에 미리 발견해 제지하던 참이었다. 절묘한 타이밍에 파이는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고 실체화되고 있었던 광휘의 사검도 사그라지고 말았다.

"어라?.. 제이 요원님... 제가 무슨 일이라도.."

"아니... 슬비를 째려보고 있길래 서로 안 좋은 일이 있는 줄 알았지."

"제가... 이슬비 요원님을요?"

자각이 전혀 없는 파이의 모습에 제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리 클로저라도 평소에 노골적으로 살기를 띠면서 다니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살기를 감추는 건 감추어야 할 역량 중의 하나였을 터, 암살자 일족의 그녀라면 더더욱 그렇다.
서지수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이세하가 돌아온다. 어색한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여긴 그는 서둘러 파이 옆으로 자리했다.

"아저씨.. 혹시...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나요?"

"동생. 그게... 말이지. 아니... 아니다. 다음에 이야기하자. 제수씨가 많이 피곤해하는 것 같은데 인사는 다음에 하지."

제이는 도망치듯이 서둘러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이슬비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이의 턱 신호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런 이슬비를 의도적으로 외면한 세하는 파이의 손을 잡고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파이는 세하의 강경한 태도에 약간의 거부감이 들었지만 일단 수긍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세하는 모르고 있었다. 이미 광휘의 의식은 그녀의 마음을 좀먹고 있었다는 사실을
CCTV에 잡히지 않는 각도에 도착한 뒤, 억눌렀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누나... 제가 분명히 여기 오시기 전에는 미리 연락해달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왜? 그대가 그년에게 딴마음을 품고 있는 걸 제게 들킬까 봐요?"

"?!!"

조금 전과 같은 사람인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이의 표정을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평소와 같은 파이를 흉내 내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에 녹아드는 경계까지 이르렀음을 알게 된 세하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이 불러오는 두려움에 뒤로 성큼성큼 물러나고 있었지만 파이는 그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세하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어째서... 진짜 누나는 어디 있어?"

"그런 서운한 말씀을... 제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는 파이랍니다."

"뭐라고?"

"아무래도 그대는... 지금 누구의 것인지 헷갈리고 있는 모양이네요. 어쩔 수 없죠. 앞으로 철저하게 교육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네요."

파이는 세하의 두 팔을 벽에 밀착시킨다. 거대한 인력이 작용하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목 구석구석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마치 자신의 물건에 이름표를 구석구석 붙이는 어린아이처럼.
누군가가 도와줬으면 하는 가슴 한편의 기대도 이질적이고 광기스러운 힘 앞에 산산이 무너지고 있었다.

세하의 앞에 누군가가 떨어뜨린 검은양 인형만이 이 광경을 허무하게 바라보고 있다.
 
 
 

글쓴이의 말: 제가 생각했던 양보다 많이 길어졌네요. 결말은 정해놨는데 어떤 내용으로 결말까지 도달할지 걱정입니다. 필력이 너무 안 좋아서 못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올립니다. 개인적으로 꼼꼼하게 따지며 하고 싶은데 이러다 영영 마무리 못할 거 같아서요;
  
      
 
 
 
 
2024-10-24 23:35:28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