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맨 48화

검은코트의사내 2020-04-02 1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아가씨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날 과대 평가하는 건 그 사람들이 멋대로 착각한 거였다. 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자격증이나 박사 학위를 딴 대학생도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매일 최하위권 성적에 불과한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내 자신의 능력을 인정하는 건,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자신이었다. 난 지금 그 소녀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죄송해요. 아가씨.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당신이 말한 것도 일 리가 있어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군요. 저도 결국 사장의 딸이라는 지위에 의지하고만 있었어요. 만약 그 허물을 벗어버린다면, 저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한 거 같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최악이었다. 재벌가의 딸이면서도 클로저가 되기 이전에는 한 명의 여성인데 내가 아무래도 상처를 준 거 같았다. 내 생각대로 아직 그녀에게 다가가려면 한참 멀었다. 

"하이드! 관광은 취소해요. 곧바로 호텔로 가죠."
-네. 아가씨.

 당분간 쳐다** 못하겠다. 나는 할말을 잃은 채, 창밖을 보기만 했다.

*  *  *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바이올렛은 방에 들어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사장의 딸이라는 게 없으면 자신은 어떤 존재일까? 그 말은 생각해본 적 없었다. 재벌가도 하루 아침에 모든 걸 잃어버리고 서민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아가씨.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가씨는 아가씨의 본분을 잘 이행하고 있습니다. 한석봉은 재벌가의 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에요. 하이드. 한석봉 씨는 재벌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요. 하이드, 당신이 보기에는 저는 어떤가요? 사장의 딸이라는 지위가 없으면 어떤 존재죠?"

 그녀의 물음에 하이드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하이드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일이었다. 바이올렛은 클로저 일 외에는 하이드에게 심부름 시키거나, 다른 직원에게 지시하고, 차를 마시면서 소설을 읽은 게 다였다. 그를 위해 사용하는 돈도 결국 아버지의 돈으로 사용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가씨."
"하이드, 전 이걸로 완전히 마음을 굳혔어요. 그 사람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거에요. 저에게 이러한 충고를 날릴 수 있는 건 흔하지 않아요."

 벌쳐스 사장의 딸이라는 걸 알고도 한석봉은 자기가 생각한 발언을 했었다. 그 후에 보복이 어떻게 될지도 알고 있었지만, 이미 차원종을 두려워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는데 벌쳐스 사장을 두려워할 리가 없었다. 

"아가씨.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사장님께서 반대하실 겁니다."
"알고 있어요. 제 약혼자는 제가 결정할 거라고 이미 말씀드렸어요. 한석봉 씨는 지금 자신에 대해 부정적인 게 당연해요. 학교 성적이 저조하고, 그저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서 벌쳐스 요원이 된 건데 그곳에서 보여준 게 재능이라고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벌쳐스는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다. 그런 곳에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서 들어와 게임에서 배운 지식만으로 사건을 해결해나가고 있었다. 한석봉도 결국에는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강조하고 있었다. 부족한 부분은 채우면 되는 일이었다.

"오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분간은 그대로 두도록 하세요. 한석봉 씨가 불편한 점이 있는지 감시를...... 아니, 그건 제가 하도록 할게요. 생각해보니 저는 하이드에게만 맡기고, 제 스스로 그 사람의 상태를 확인한 적 없군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열고 나갔다. 하이드가 뒤따라가려했지만, 이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며 말렸다. 

*  *  *

 아가씨는 당분간 화를 풀지 않으실 테니까 하얀 종이를 꺼내 CKT부대가 어떻게 공격해올지 고민했다. UN 건물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는지 몰라서 녀석들이 어디로 침입할지 예상하지 못하겠다. 이런 건 다른 사람도 생각할 수 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대전쟁이 벌어진다면 어떤 시나리오로 흘러갈지 예상했다. 

 볼펜으로 CKT부대와 정예 클로저 군단을 다수로 전쟁 시나리오를 떠올렸다.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 능력치로 따지자면 정예 클로저들이 유리했다. 세계 각국 S급 클로저들이 모이는데 CKT부대가 UN을 공격한다고 가정한다면, 녀석들이 그들을 상대할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대인 살상병기다. S급 클로저도 상대할 수 없는 살상 병기를 만들어낸다면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다른 가능성은 수십만 군대다. 아무리 강한 클로저라도 인간인 이상,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CKT부대가 노다지 군단과 모스페어 차원종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게 확실해졌으니, 더 많은 군단을 보내 클로저들의 체력을 뺀 다음, CKT부대 모든 정예 요원들이 투입되어 UN을 총공격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휴우."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을까? 아니,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라서 내가 말하지 않아도 미리 알고 있을 게 뻔했다. 괜히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을 보낸 기분이었다. 이번 침공작전 때 미스터 블랙은 모습을 드러낼 지 의문이었다.

"한석봉 씨. 안에 있어요?"
"네? 네. 들어오세요."

 아가씨가 갑자기 왜 들어오셨지? 기분이 좀 풀리신 걸까? 아니면 뭔가 더 할 말이 있어서? 종이에 낙서 한 걸 올려보시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역시 대단하군요. 대인 살상 병기와 대규모 군단 침공의 가능성이라...... 마침 미국 총본부에서도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역시 한석봉 씨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그냥 우연이에요. 제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우연은 반복해서 일어나지 않아요. 한석봉 씨. 당신만의 능력이라는 게 있어요. 학교 성적이 저조한 게 무능력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학교 성적이라는 말에 나는 아가씨의 시선을 피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사회에서 알아야 할 기본 상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살아가면서 어디가서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게 생겼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 멀었다는 거다. 그래도 공부하기 싫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그 애가 공부 못하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말한다해도 나는 게임을 그만두지 않을 거다. 싫어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한석봉 씨. 학교 성적이 우수하는 게 다 좋은 건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성적이 좋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배운 걸 그대로 학습하고, 실생활에 바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게 중요해요. 한석봉 씨는 게임에서 배운 지식을 바로 활용하시잖아요.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높게 평가하는 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가씨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클로저 만큼 전투력이 없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받고 있다는 얘기였다. 아니, 남들이 뭐라해도 아직 멀었다는 건 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부족한 뭔가가 있다. 

"한석봉 씨는 자기 자신을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그런 마음으로 그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평생 뒤따라가지 못해요."

 답변하지 않았다. 아가씨 말대로 자기 자신을 너무 부정적으로 바라보면 귀여운 소녀에게 평생 다가갈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부족한 걸 스스로 찾아내야 했다. 클로저로서 전투력을 제외한 부족한 뭔가를 찾아야 했다.

"오늘은 이만 쉬세요. 내일 기분전환으로 관광가도록 해요."

 아가씨는 그렇게 말하고 나가셨다. 고개를 푹 숙이며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나에게 부족한 것, 살아오면서 선택했던 잘못된 길, 거기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난 정말로 잘하고 있을까?

-궁금한 것이냐? 네 자신의 정체를?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울렸다. 주변을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텔레파시라도 날리는 걸까?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하고 침대 위에 누웠다. 오늘은 복잡한 일이 있었으니 잠이나 푹 자야겠다.

*  *  *

 주변이 하얀 안개로 자욱했다. 왜 내가 이런 곳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 발걸음을 옮겼지만,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앞으로 와라.

 머릿속에 또 다시 목소리가 울렸다. 시키는 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조금씩 발을 내딛을 때마다 긴장되었다.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맞아. 여기는 꿈이다. 좀 전까지 침대에 잠들어 있었는데 이곳에 갑자기 끌려올 리가 없다. 

-맞아. 여기는 꿈이다. 현실의 너는 잠들어 있지.

 아니, 내 생각을 읽었어? 도대체 누구지?

"숨어 있지 말고 나와요!"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러자 내 앞에는 검은 그림자가 생겨나며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사람형태인 건 분명했다.

"무의 세계에서 너를 줄곧 지켜보았다. 동족은 너를 인정하는 데도 너는 자기 자신을 유일하게 부정하는 인간이다. 매우 드문 인간이기도 하지. 인간은 본래 자신의 내면안에 잠든 추악한 정체를 부정한다. 한석봉, 너는 그 추악한 정체를 마주하고도 부정하지 않을 자신 있나?"

 기계적인 음성이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말을 차마 못하겠다. 내가 궁금한 건 저 그림자의 정체다. 설마 녀석들이 말한 미스터 블랙?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저 녀석이 미스터 블랙이라면 내게 저런 말을 해줄 이유가 없었다.

"추악한 정체말입니까? 보여주십시오. 제 추악한 정체는 뭡니까?"

 그림자는 곧바로 내 앞으로 다가와 빛을 냈다. 황갈색 눈동자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의 모습이었다.

"클로저를 도운다는 명분으로 벌쳐스에 들어가서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직장노예 일이다. 실제로 너는 그들을 위해 해준 건 별로 없어. 늑대개 팀과 함께 임무 수행하면서 그들과 소통했지만, 다른 처리부대는 신경도 쓰지 않았어. 결국 너는, 처음에 마음 먹었던 거와는 달리, 다른 요원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지."

 오래 전에 잊고 있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말대로였다. 클로저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정작 내가 한 건 하나도 없었다. 조직 내에서 그저 충성스러운 개노릇한 거나 다름없었다. 나도 어쩌면 늑대개 팀과 같은 처지로 해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정의와 악, 두갈래 길에 서 있는 주변인, 그게 바로 네 정체다. 한석봉."

To Be Continued......
2024-10-24 23:35:25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