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그렇기에 부탁했다
Forgetter 2020-03-29 4
※ 시궁쥐 팀 부산 스토리 결말 이후의 if설정
※ 김철수 버전 : http://closers.nexon.com/board/16777337/15327/
몽롱한 기운에 홀려 있는 채로 눈을 떴다. 눈을 뜨고서 몇 분 동안은 멍한 상태로 있었다. 움직이고 싶지 않아 하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자, 누워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시계가 보여 겨우 시간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미래는 한참 후에야 자신이 일어나야 할 때가 이미 훨씬 지나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집합 장소로 향했다. 매일 의뢰가 새롭게 들어오는 심부름센터의 특성상 하루를 시작할 때, 모두가 모여 있는 집합 장소에서 의뢰를 체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미 거기에 익숙해져 있는 미래에게 일어나자마자 특정 장소로 향하는 건 이미 몸 깊숙이 익혀진 습관이었다.
그런데 항상 모두가 모여 있는 집합 장소에 가자 정작 맞이하는 사람은 민수현 한 명뿐이었다. 미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다들 어디 갔어?”
“아, 미래 씨. 지금 오셨군요.”
“아, 응...좀 늦잠을 자버렸는데...”
“괜찮아요. 오늘은 아무 일도 없다고 감찰관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미래 씨도 오늘은 좀 쉬시는 게 어떨까요?”
쉬는 거...미래는 잠깐 생각했다. 수현의 말처럼 오늘은 할 일이 없으니 쉬어도 되었다. 그런데 막상 쉬라고 하니...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무엇을 하며 휴식을 취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미래는 지인 찬스를 쓰기로 했다.
“...김철수는?”
“철수 형이라면 아침 일찍부터 나갔어요.”
“나갔다고...의뢰하러 간 거야?”
자신만 쉬는 특혜를 누리는 건가 싶어서 반사적으로 물어본 질문이었다. 그 말에 수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철수 형도 오늘 하루는 휴일이에요.”
사실 세린이 도저히 볼 수 없을 거 같아서 철수를 반강제적으로 떠밀려 내보낸 것도 있지만. 수현은 이 tmi만큼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1차 지인 찬스에 실패한 미래는 자신에게 있어서 철수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수현의 말도 들어보기로 했다.
“민수현은? 뭐 할 거야?”
“전 감찰관님이 작성을 부탁한 문서가 있어서 그걸 할 거 같아요.”
“...나도 도와줄까?”
이 말을 하고서 퍼뜩 후회를 잠깐 했다. 자신은 수현처럼 프로페셔널하게 공적인 문서 작성 같은 일을 할 수 없어서 도리어 짐만 될지도 모르는데. 이에 대해 수현은 특유의 넉살 좋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말했잖아요. 오늘 미래 씨 휴일이라고요. 휴일에는 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럼 심부름꾼 일 말고 무얼 하면 되는데. 나...이런 거, 정하는 거 처음이라서.”
심부름꾼 일을 하면서 휴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텐데. 그럼 그 때에는 어떻게 보내왔던 것일까. 물론 지금과 그 때는 다른 상황이다. 한 인물의 부재가 이렇게 커다랬는지도 몰랐다. 그 아이의 존재가 이렇게 크게, 자신의 안에 깊이 심어져 있었는지도 너무 늦어서야 깨달았다.
쉬어야 하는 날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라고 물어볼 사람이 더는 없는 걸 깨달아버린 미래는 살짝 시무룩해졌다.
“미래 씨가 하고 싶은 걸 하세요.”
“하고 싶은 거...”
그런 거 없는데. 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미래는 자기가 계속 조그매지는 것 같은 기분 탓에 차마 이 말만큼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였다. 그리고 수현은 미래가 초조하게 벽을 우악스럽게 긁고 있는 걸 발견했지만,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무얼 할까. 한참을 고민해 보아도 마땅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마저 잠을 잘까. 이미 시간은 정오를 지나 이른 오후에 이르고 있었다. 낮잠을 자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 잠에 빠져들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오늘은 조금 더 잠에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마침 주위에서 다독이는 사람도 없고.
아니, 그건 오히려 호된 핀잔에 가까웠을까.
-빨리 빨리, 그리고 부지런하게 일해야 한다고.
“...”
갑자기 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정말 순식간에 맺은 결심이었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해내지도 못하고, 결정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던 미래에게는 참 깜짝 놀랄만한 사항이었다.
이 작은 변화에 기세를 입어 미래는 자신에게 질문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라고.
이에 대한 답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묵묵부답이었다. 다시 미래의 기운이 조금 처지게 되었다.
-상자 안에 있던 거 같았단 말이야.
“...”
누군가가 상자 안에 만들어낸 모형 정원에서 살고 있었던 거 같다는 말이 떠올랐다. 미래는 그걸 누군가에게서 들은 이후에야 내가 살고 있었던 세계는 그렇게 작은 것이었구나, 를 깨달았다.
미래. 첫 번째로 소중하게 생각했던 사람이 지어준 자신의 이름.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가능성을 먼저 알아준 사람. 하지만 미래는 하늘이 살아 있는 동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저수지는 하늘 이후로 미래가 만난 소중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멈춰버린 시곗바늘을 억지로 오른쪽으로 끌어내린 원흉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래는 그런 저수지를 전혀 책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미래 자신에게 있어서 아주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중요한, 시계로 따지자면 일종의 건전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너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에 의해 보여진 세상은 참 넓었는데, 세상은 본래 그리 넓다고 한다. 또한 세상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고 한다.
세계는 계속해서 넓어지는데,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이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감상평은 그저 안타까움 밖에 없다.
미래는 침대에 너부러져 있다시피 누워 있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상자 안은 답답해서 싫었다, 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 탓에 이 좋은 날에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진 탓이었다.
아까의 집합 장소로 가니 이전과는 다르게 수현은 거기에 없었다. 아마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마저 할 일을 하고 있는 중인 모양이었다.
미래는 잠시 현관 앞에서 망설였다.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된다, 라는 금지 조항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니 숙소 안에서만 안 있어도 되었다. 모처럼 받은 자유 시간에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수현이 그러했으니, 미래가 잠깐 외출을 한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저수지는 그렇게 다짐을 확고히 다지는 미래를 보고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미래는 왜 현관에서 오도카니 서 있기만 하는 것일까. 저수지를 비롯한 섬의 다른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미래는...무엇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미래는 싸우는 것 빼고는 뭐든지 서툴러서 옆에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며 미래를 가르쳐줄 인물이 필수였다. 그게 바깥세상을 살아가는 가이드이건, 아니면 미래가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응원을 아끼지 않는 존재이건.
자신에게는 그런 존재가, 저수지라는 사람이 꼭 필요했단 말이야...!
그렇게 자신의 세계가 깨져버린 날, 미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국한될 뿐이구나, 를 뼈저리게 느낀 날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미래는 현재 지금 자신이 스스로 내리는 결정이 못미더웠다. 미래의 감정은 미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저수지 혼자만의 것도 아니었다. 둘 다였다. 언제나 함께였고, 앞으로도 그러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걸 잃었을 때의 무력감은 아무런 생각도 하기 싫어 잠으로 도피하는 현재의 미래의 삶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철수가 필요 이상으로 일에 빠져든 것과 반대로 미래는 최소한의 일만 제외한 시간에 잠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미래는 자신이 아무리 많은 것을 몰라도, 적어도 그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들뜬 마음과 달리 몸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 미래가 딱 그런 처지였다.
앵간 힘을 쓰던 미래는 현관문 손잡이에서 결국 손을 떼었다. 아직...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었다. 아직은 ‘나’ 가 아닌 ‘우리’ 인 것이 훨씬 좋은가 보다.
그러니까...
그렇기에 미래는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철수에게 먼저 부탁했다.
“...죽지 마.”
“...”
“죽으면 안 돼.”
왜인지는 모르지만, 철수는 이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침묵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