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맨 34화
검은코트의사내 2020-03-12 1
노다지 군단이 섬멸되고, 우리는 벌쳐스 본부로 복귀했다. 이걸로 토벌 임무가 끝났으니까. 십년 감수했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았으니까.
"호오, 무사히 잘 살아남으셨군요. 신민우 국장님께서 극찬하실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 걸요?"
감시관님이 보고서를 보면서 말씀하셨다. 작은 눈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부동자세를 유지하며 긴장했다. 보고서를 넘기신 뒤에 씩 웃으시면서 내게 말씀하셨다.
"수고하셨어요. 그럼 다음에도 잘 부탁드려요."
"네. 감사합니다."
복도로 나왔다. 오늘은 조용히 넘어갔다. 이대로 계속 평화로우면 좋겠지만 감시관 님의 시커먼 속을 읽기가 조금 힘들었다.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지만 벌쳐스 내부 기밀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다음에는 어떤 일을 할지 고민이었다. 노다지 군단은 또 나타나겠지.
운동을 제일 잘한 사람도 위상력 능력자를 따라가지 못한다. C급 차원종 신체능력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했다. 빠르기와 반사신경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만. 전에도 운좋게 위험한 공격을 피했지만 한손으로 잡혀서 목뼈가 부러질 수준으로 아팠으니까. 뒤에서 지시만 내리는 것도 좋지만 위험한 현장에 나서기도 하는 법이다. 기술부에서 발명한 장비도 유용하게 쓸 필요가 있었다.
"어머, 퇴근하시는 건가요?"
"하피 씨. 수고하셨습니다."
"하피 씨. 수고하셨습니다."
"잠깐 시간을 내주시면 안 될까요?"
"네? 아, 네."
조금 당황스럽다. 솔직히 이 분과 대화하기가 조금 긴장 되었다. 대학생 누나 몸매고, 목소리도 조금 섹시하게 들려서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될 때가 있었다. 이럴 때는 그녀를 생각하면 조금 진정되었다. 점장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간인이 클로저와 이어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들은 위상력을 가졌고, 나는 약해빠진 민간인일 뿐이라고 했으니까. 그 노력을 이루기 위해 나는 몸을 단련했었다. 힘도 다른 사람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위상력 능력자에게는 약하지만.
"어머, 왜 이렇게 멍하니 있어요? 안 오실 거에요?"
"아, 죄송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있었다. 하피 씨 같은 미인 앞에서 조금 긴장해버린 탓일까?
* * *
우리가 온 곳은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건물 구조도 나오는 음식 메뉴도 대부분 상위 계층이 좋아할 만한 곳이었다. 벌쳐스 봉급이 있으니 충분히 나도 방문할 수준이지만, 굳이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장소로 꼭 와야했을까? 하피 씨는 무슨 생각으로 이 레스토랑에 온 건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메뉴판을 읽고 계신 걸 보니 단지 식사하면서 이야기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한석봉 씨, 정하셨어요?"
"아, 네. 저는 뉴욕 스테이크로요."
"어머, 우연이네요. 저도 뉴욕 스테이크를 선호하거든요."
"어머, 우연이네요. 저도 뉴욕 스테이크를 선호하거든요."
정말인가? 일부로 내 기준에 맞춘 건 아니겠지? 그나저나 저 미소를 보니까 얼굴이 뜨겁다. 향수를 뿌렸는지 좋은 냄새도 나고 있었다.
"저, 하피 씨.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뭐에요?"
"흠, 당신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까요?"
"흠, 당신에 대해 조금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할까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에 대해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어떤 일을 해왔고, 뭘 좋아하는지도 아실텐데요."
나에 대해 모르는 벌쳐스 사람도 있을까? 그건 아니였다. 바이올렛 아가씨도 내 뒷조사를 꼼꼼히 하셨고, 지금도 어디서 나를 감시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데 왜 그런 말씀이 나오시는 걸까? 아니면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게임에는 이런 설정도 있었지. 여자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지금처럼 남자를 홀릴 듯한 얼굴을 보이는 게 겉모습이고, 속내는 무서운 계략을 숨기고 있다는 걸.
"어머나, 저는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묻고 싶은 건 감시 요원으로서 능력이에요. 감시 요원 중에 나타 요원을 잘 다루는 사람은 처음 봤거든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벌쳐스가 모르는 능력을 한석봉 씨가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거든요. 알려주시지 않겠다면 억지로 훔쳐내는 수밖에 없겠네요."
"너무 과대평가 하신 거 같아요. 전 그냥 평범한 사람이에요. 나타 씨는 그냥 만족한 일을 하시니까 그런 거에요."
나타가 기분 좋아할 만한 일을 짚어준 거 밖에 없었다. 그게 내 능력과 무슨 상관이지?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걸 가지고 대단한 사람처럼 추겨 세우시다니, 아무래도 나에게서 뭔가를 얻으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역시 여자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더니, 하피 씨가 실제 사례를 재현해주시는 거 같았다.
"겸손하시군요. 그러고 보니, 초커 리모컨을 한 번도 안 쓰셨군요."
"정말로 써야 할 때만 쓸 거에요. 그 때가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지만요."
"쓰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쓰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사람을 개로 취급해서 노예처럼 대할 생각은 없었다. 나타도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인데 굳이 리모컨을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민간인들과 어울리다가 싸움이 붙을 수도 있으니 필요할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능하면 충돌이 없게 만들어야겠지.
"당신은 너무 착해요. 이용당하기 쉬운 타입이라고 할까요?"
"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솔직히 제가 왜 과대평가받는 건지 모르겠어요. 클로저와 특경대가 다 했잖아요. 그 작전 지휘권도 신민우 국장님께서 가지셨던 거고요."
"운 좋게 성공했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저는 전술학 책을 읽어** 않았어요. 게임에서 나온 걸 운 좋게 응용했을 뿐이에요."
위상력에 대해서는 서재에서 찾아서 독학했으니 수준급이었다. 대체 뭘 말하고 싶으신 거지? 단순히 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아니야. 뭔가 다른 의미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하피 씨는 감시관 님과 친해보였었지. 시커먼 속을 가진 또 다른 인물인 거 같았다. 아무래도 감시관님께서 나를 감시하려고 보내주신 듯 했다.
"저, 죄송한데, 하고 싶은 말씀이 따로 있으신가요?"
"아뇨. 없어요. 전 그냥, 한석봉 씨와 같이 저녁을 즐기고 싶어서 부른 거 뿐이에요."
"에?"
눈을 깜빡였다. 단지 저녁을 같이 먹고 싶어서 부른 거라고? 뭔가 이상한데, 정말로 그거 뿐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석봉 씨는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군요. 전 당신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알고 있어요."
"네? 제가 무슨 능력을 가졌다는 거에요? 전 위상력이 없어요."
"위상력이 아니에요. 한석봉 씨는 그 분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네? 제가 무슨 능력을 가졌다는 거에요? 전 위상력이 없어요."
"위상력이 아니에요. 한석봉 씨는 그 분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분이라면?"
"당연히 그 사람이죠. 알파퀸 서지수를 사로잡았다는 유일한 남자, 이세진 박사님이시죠."
모르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다. 유니온 관계자들이라면 알고 있었겠지. 그런데 내가 세하 아버지와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그게 대체 뭐라는 거지? 어렸을 때 아저씨가 내게 한 말이 있긴 하지만 너무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난 지금 그녀의 의도를 잘 모르겠다.
"이세진 박사님 같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었어요.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차원종 학살자라 불리는 그 사람의 마음을 녹였던 유일한 사람."
"그런 사람을 꼭 찾았으면 좋겠어요. 세상은 넓으니까 언젠가는 만나실 수 있을 거에요."
세하 아버지와 나를 비교하면 나는 한참 멀었다. 난 그 분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으니까. 하피 씨도 인연이 있다면 분명히 만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멋진 남자야 나보다 훨씬 많겠지. 인천에서 봤던 정예 클로저 내에도 멋진 남성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혹시 이세진 박사님을 아세요?"
"조금은요."
"조금은요."
시선을 다른데로 돌리고 말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들을 생각 없었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여성이라 생각이 들었으니까. 바이올렛 아가씨와 레비아 씨는 의심이 안 갈정도로 좋은 사람 같았지만 눈앞에 있는 누나는 아니었다. 내게 뭔가를 숨가고 있는 흑막처럼 느껴졌으니까.
* * *
석봉과 헤어진 뒤에 하피는 건물 옥상에서 조용히 달을 바라보다가 버려진 신문을 주워서 펼쳐보았다. 벌써 3년도 지난 신문이었다.
-대부호의 보물을 훔치던 괴도 프롬퀸, 그녀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검은 두건으로 안면을 가리며 눈동자만 드러났고, 온갖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복장으로 보석들고 달아나는 사진이 실린 기사였다. 왜 옥상에 있었던 건지 의문이었지만 옛추억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다 지난 일, 지금 와서 생각해봤자 의미없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 유니온 아카데미 시절에 길을 가다가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하고 싶은 꿈이 있는 사람에게 자존심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현실은 아니었다. 그녀는 위상력 능력자가 되었고, 목에 초커가 달린 채로 벌쳐스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오랜만에 그 느낌을 경험하기 위해서였는지 옥상 사이를 뛰어다녔다.
"어? 저거 괴도 프롬퀸 아니야?"
"에이, 설마. 프롬퀸은 사라진 지 3년이 지났다고. 예고장도 없이 저렇게 나타나겠어?"
"에이, 설마. 프롬퀸은 사라진 지 3년이 지났다고. 예고장도 없이 저렇게 나타나겠어?"
지나가던 행인 두명이 옥상에 날아가는 그림자를 보고 한마디씩 나누다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