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맨 23화
검은코트의사내 2020-02-23 1
오늘도 나타는 가상 훈련으로 땀을 흘렸다. 자신의 적수가 될만한 상대를 만났으니 다음에 반드시 썰어버리겠다는 다짐 하나 때문이었다. 난이도가 높은 말렉이 모습을 드러내 그를 공격한다. 가볍게 위협하는 포효로 시작했지만 그런 거에 동요할 리가 없는 나타였다.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
"레비아. 괜찮아요? 레비아?"
"한석봉 님. 제게서 떨어지세요. 제 안에... 뭔가가 깨어나려고 해요."
"레비아 씨."
"흥, 울부짖을거면 좀 더 크게 짖으라고."
매일 이렇게 겪는 게 지겨웠는지 짜증을 부린다. 똑같은 난이도를 계속 하면 당연한 일이다. 오늘따라 분이 너무 안 풀렸는지 훈련이 재미없게 느껴졌다. 말렉의 공격은 매일 같은 패턴이었다. 앞발을 하나 머리 위로 올린 뒤에 곧바로 그가 있는 곳으로 내려 찍는 거다. 그걸 가볍게 피하고 난 뒤에 쿠크리로 머리를 내려찍으면 끝이다. 처음에는 여러 번 공격해야 소멸하지만 지금은 한 방으로 끝났다.
펑!
녀석이 조그마한 유리조각처럼 깨졌다. 만족하지 않았다. 이런 수준의 난이도는 더는 만족할 수 없었다. 나타는 분통을 터뜨리며 허공에 외친다.
"야! 난이도 좀 더 올려! 너무 시시하잖아!!"
잠시 후에 화면이 컴컴해졌다. 곧바로 너브기어를 벗은 뒤에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는 연구원에게 따지려고 했지만 그들의 뒤에는 바이올렛이 폼을 잡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너?"
"할 말이 있어요. 나타. 잠깐 시간 좀 내주실래요?"
"쳇. 무슨 소리 하려고?"
하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면서 나왔다. 시시하다면서 땀을 심하게 흘리는 모습을 본 그녀의 눈매가 실처럼 가늘었다. 나타의 얼굴이 붉어진 데다가 한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으니까.
"혹시 신경 쓰이시나요?"
"뭐가?"
"뭐가?"
"한석봉 씨 말이에요. 그 임무 이후로 당신이 이곳을 사용하는 시간이 늘었고, 매일같이 분통을 터뜨리셨다고 하더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이야기해보시겠어요?"
"그딴 걸 내가 왜 너에게 해줘야 하는데?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
나타는 상대가 누구든 간에 거칠게 대하는 편이었다. 심지어 자신보다 강한 자라 해도 막나가는 반항아였다. 하이드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나서려고 했지만 바이올렛이 팔을 들어 막았다. 최대한 자제하려는 모습을 보인 나타는 그녀의 반응이 재미없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뒤돌아 다시 너브기어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멈칫했다.
"야, 너 사장 딸이지? 그럼 이것도 가능하겠네."
"뭘 말이죠?"
"그 비실이 녀석, 당장 그만두라고 해. 험한 꼴 당하기 싫다면 말이야. 네 망할 권력으로 그 자식 쫓아내."
"그럴 수 없어요. 한석봉 씨는 우리 회사에 필요한 인재거든요."
"그 비실이 녀석, 당장 그만두라고 해. 험한 꼴 당하기 싫다면 말이야. 네 망할 권력으로 그 자식 쫓아내."
"그럴 수 없어요. 한석봉 씨는 우리 회사에 필요한 인재거든요."
"필요한 노예겠지."
곧바로 뼈를 때리는 직구발언에 바이올렛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자기가 그렇게 말하는 거처럼 말하니까 기분이 불쾌했다. 자신은 아버지와는 다르다. 한석봉을 노예로 쓸 거면 애초에 리무진을 태우는 호의같은 건 베풀지 않았다. 그저 일한 대가로 돈만 지급해주면 되니까.
"큭큭, 너같은 부잣집 아가씨는 모르겠지. 여기서 즐겁게 일하는 녀석들이 전부 다 기분 좋은 줄 알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일부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야. 나야 뭐, 강한 녀석들을 썰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기분 좋긴 하지. 그 비실이 녀석은 그런 한심한 녀석과는 달랐어."
나타는 그가 맘에 들기도 했다. 초커가 작동되는 줄 알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반항적인 모습을 항상 보여주지만 석봉은 자신이 힘으로 위협해도 할 말을 다하며 두려움을 떨쳐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비실이 녀석이 위상력 능력자였다면 아마 나와 같을 지도 모르겠군.
다시 너브기어를 쓴 뒤에 훈련에 들어간다. 바이올렛은 나타의 말을 볼 때 딱히 그를 위협할 거 같지 않았다. 사장이 나타와 함께 보낸 건 임무 중에 살해할 위험이 있어서였다. 혹시나 지금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말을 듣고 안도했다.
* * *
학교에 휴학을 낸 뒤에 곧바로 회사로 와서 레비아를 찾아갔다. 이번에 내가 맡게 될 임무였으니까. 레비아는 생체 연구실에 있다고 해서 급하게 달려갔는데 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는 곧바로 입을 벌린 채 굳어버렸다. 양팔과 다리에 쇠고랑을 찬 상태로 벽에 붙어있었고,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로 신음을 내고 있었다.
"뭐야? 이건?"
입 밖으로 나올 정도다. 누가 봐도 이건 포로를 잡아서 고문하는 현장이었다. 그리고 하얀 제복을 입은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면서 그녀의 몸에 관한 구조 데이터를 화면에 띄우고 있었다. 여기가 연구실이라고 했으니 이건 분명히 레비아를 상대로 생체실험을 한 거다."
"지금 뭐하시는 건가요?"
내가 말을 꺼내자 연구원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다수의 시선이 부담 되어서 조금 놀랐지만 한 사람이 다가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음? 아, 네가 한석봉이군. 오해하지 마라. 우리는 인체 실험한 게 아니야. 저 녀석은 위험한 차원종이거든. 언제 폭주할지 모르니 그걸 방지하기 위해 약물을 집중 투여하고 있지."
그녀가 차원종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위험한 차원종이라고 하지만 너무 심하게 다루는 거로 보였다. 처리부대를 죽인 일이 있다해도 저렇게 대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실험을 속행하려고 하자 나는 그 사람의 팔을 잡으며 따지듯이 말한다.
"폭주하는 원인을 알아내시려고 하는 건가요?"
"아아, 그렇다고 봐야지. 그 대장이라는 녀석이 왜 저런 괴물을 임시 대원으로 쓰는 건지 이해가 안 돼. 마음같아서는 당장 폐기하고 싶은데 말이야."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네가 보기에는 끔찍하게 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저 여자가 수많은 사람을 죽인 건 사실이야. 우리 입장에서는 이럴 수밖에 없지."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그저 들었을 뿐, 눈 앞에서 그 참상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모른다. 연구원들도 하나같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로 봐서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거로 보였다. 이런 연구를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거였다. 내 시선을 피한 채로 신경이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늘부터 24시간 감시한다고 했지? 감시관 님에게 들었다. 앞으로 15분 후면 끝나니 그 때까지 기다려라."
실험은 계속 되었다. 당장 멈추게하고 싶지만 이야기를 들으니 그렇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이라도 그녀가 폭주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죽을 수도 있으니까. 자신의 힘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채로 폭주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분명히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전에 봤을 때는 순진해보였는데 한 순간에 폭주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거다. 게임에서도 그랬다. 폭주하는 데에는 반드시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과거 기록을 조사해보면 그녀가 무엇 때문에 폭주했는지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정보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기밀이라 알 수 없었다.
15분이 지나 레비아를 묶던 쇠고랑이 해제되었고, 연구원들은 그대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뭐야? 그냥 가는 거야? 약물을 많이 투여받아서 많이 괴로울 텐데 그냥 간다고? 뭐라고 따지려다가 말았다. 연구원 발걸음이 빨라지면서 이곳에서 나가는 걸 보면 그녀가 두려워서 저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마나 끔찍했으면 저렇게 두려워했을까?
연구실에는 나와 레비아, 단 둘이 남았다. 나머지는 나더러 알아서 하라는 거였다. 조심스럽게 레비아에게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을 건다.
"레비아. 괜찮아요? 레비아?"
"학... 하아... 하... 한석봉 님."
"네.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매일 이렇게 당해오신 건가요?"
그녀는 대답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매우 슬퍼하는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려고 했다. 한 두번도 아니고 매일 이렇게 실험체 취급을 당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아무리 폭주때문이라하지만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없는 거 같아서 레비아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내게 말한다.
"한석봉 님. 제게서 떨어지세요. 제 안에... 뭔가가 깨어나려고 해요."
"레비아 씨."
"한석봉 님도 아실 거에요. 제가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걸요. 그것도 100만명을 죽였어요."
"네? 100만 명이나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설마 이 정도로 죽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확실히 그 사람들에게 따질 수준은 아니다. 그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면 격리조치하고 아무도 다가가고 싶지 않을 만큼 두려움이 큰 법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너무하잖아요. 이런 취급은."
"한석봉 님.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그 실험은 제가 원해서 한 거에요. 어떻게 해서든 제 안에 잠들어 있는 존재를 없애고 싶었어요."
100만명을 죽였다고 하지만 그녀가 의도한 게 아니라는 건 표정을 보고 알 수 있다. 그리고 폭주했다는 기록 자체가 고의적으로 저지른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만약 당신이 고의로 저지른 거라면 저도 그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했을 지도 몰라요. 레비아 씨. 말씀해주세요.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기억이... 잘 안 나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떠오르고 싶지 않는 기억을 억지로 끌어내리려고 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야 할 거 같다. 100만명을 죽였다고 했지만 그 과정을 나는 모른다. 폭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인을 파악해야 하니까. 천천히 해결하는 게 좋다. 어느 게임에서도 그랬다. 문제가 발생하면 조금씩 해결해가면서 끝내는 거라고.
"레비아 씨. 일어나실까요? 배고프시죠?"
손을 내밀어주었다. 레비아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잡고 일어난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그녀의 기분전환을 해주는 거다. 작전 중에는 그런 모습을 안 보였는데 최근에 그런 징후가 생기기라도 했나보다. 만약 이번에 폭주한다면 내가 사는 동네까지 피해가 올 지도 모르니 조심히 행동해야겠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