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별과 분홍 펭귄의 동화
firsteve 2020-01-16 13
누군가 그랬다.
익숙함에 익숙해져서 그 사람이 헤어질 때를 잊지 말라고.
그걸 잊었을 때 찾아오는 이별의 아픔은 너무나도 쓰라리고 아프다고.
그 말을 그녀는 거의 잊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에게는 이 말이 전혀 상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실전 투입한 그 날부터 계속해서 쭉 몇 년을 그와 같이 활동했으니까.
한 번도 그와 멀어진 적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은…..정말로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뭐….뭐라고?어….어딜 간다고?”
“캐나다 지부. 그 쪽에서 와 줄 수 있냐고 공문이 왔다고 하더라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그의 말에 유리가 한숨을 쉬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다 넘어 캐나다라니…..시차 얼마라고 했지?”
“토론토라서 13시간. 우리 나라 시간이랑 밤낮이 다르다고 생각하면 돼.”
“그러면 거의 주말 밖에 시간이 없는 거네…..”
유리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그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락해. 너, 나 잘 알잖아? 게임 안 하고 있으면 전화 받아줄 테니까.”
“안 받겠다는 거지, 그거….”
유리가 툴툴거리며 중얼거리자,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슬비가 입을 열었다.
“언제….가는데?”
“크리스마스 조금 지나서? 그래서 아무래도 새해는 거기서 보내게 될 것 같아.”
“…..그렇구나…..얼마나….있는데?”
“모르겠어. 공문으로 봤을 때는 내가 교관이니까 적어도 2,3년은 걸릴 것 같은데. 마음에 들면 오래 있을 수도 있고.”
2년에서 3년.
다른 사람이 들었을 때는 그렇게까지 긴 시간은 아닐 테지만, 따로 작전을 갈 때나 집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붙어 다니
던 그녀에게는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적어도 상의라도 하고 받아드리지…..
그녀의 마음 속에 작은 응어리가 맺혔다.
이런 일이 있으면 상담해줬으면 했다.
아무런 관계가 아니면서도 오랫동안 그의 곁에 있어 온 자신에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
그에게 그녀는 그저 친한 동료이자 동갑내기 친구라고.
보내온 시간 정도는 간단하게 버리고 갈 수 있을 만큼 쉬운 관계였다는 생각에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에 슬비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좋겠네. 내 잔소리도 안 듣고, 예쁘고 어린 애들한테 둘러 쌓여서 고백도 받으면서 살다 오겠네. 아, 사고도 치고 오려나?”
“그런 일 없어. 그리고 네 잔소리는 요즘 기본 옵션 아니었어? 내가 가도 너 원거리로 잔소리 할 것 같은데….”
“안 해. 절대 안 해. 우리한테 상담도 안 하고 제멋대로 결정하고 통보하는 너 같은 애한테 내 시간 뺏기기 싫어.”
마음과 달리 입은 거칠게 그를 몰아세웠다.
뭔지 모를 감정에 휩쓸려 죄도 없는 그를 몰아세웠다.
다급했다.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서.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영영 안 올 것만 같아서.
그럼에도 있어달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었다.
나오는 것은 오직 그를 원망하고 툴툴거리는 늘 해오던 정감 없는 잔소리뿐이었다.
“뭐…..역시 그렇게 느끼는구나….하긴…..상담도 안 하고 통보를 한 건 내 잘못이지. 시간 뺏어서 미안해. 그래도 가기 전에 얼
굴 봐서 다행이네. 못 보고 가면 어떻게 하지 했는데.”
세하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자, 유리가 다급히 그를 말렸다.
“가기 전에 얼굴 봐서 다행이라니….그게 무슨 말이야?”
“너 잊은 거 아니지? 며칠 뒤면 크리스마스잖아. 갈 준비는 해야지. 그 쪽으로 지부 옮기는 것에 관해서 서류도 작성해야 하고,
짐도 챙겨야 하고 이것저것 준비할 거 많아.”
“그….그래도 보…볼 시간은 있을 거잖아?아…아직 시간도 좀 남았고….그리고 준비하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잖
아?”
“최소 2,3년은 떠나 있을 건데 그렇게 쉽겠냐…..오늘이 마지막이었어. 시간 부담 없이 만날 수 있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왜 그리도 크게 들리는 지 그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정말 마지막으로 온 것이었다.
가기 전 바쁠 시간임에도, 자신에게 소중한 두 사람을 위해서, 없는 시간을 짜내서 온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깨달은 그녀가 다급하게 유리와 함께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미안하다며 가게를 나
가버렸다.
그가 가게를 빠져나가자, 그녀의 머리 속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해버렸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는 그의 말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녀의 머리에 맴돌았다.
내려앉은 심장은 고요했다.
뛰는 법을 잊은 것처럼 너무나도 고요했다.
온 몸의 피가 빠져나간 것처럼 차가웠다.
그가 앉아있던 자리만이 그녀가 느끼는 유일한 온기이자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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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숲.
괴상한 이름의 이 카페는 그녀가 가장 애용하는 카페였다.
하지만 그 카페를 처음으로 찾은 건 그녀가 아닌 세하였다.
이름처럼 펭귄인형이 잔뜩 있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유치해 보인다고 할 수 있는 이 카페를 어떻게 그가 찾은 건지 그건 지금
까지 그녀에게는 의문이었다.
펭귄을 좋아하는 그녀를 보며 어린애 같은 면도 있다며 놀리던 그가 이곳을 먼저 찾고, 몇 번이고 자신을 이곳에 불러 같이 커
피를 마셨다.
그럴 때마다 그의 미소가 너무나도 따뜻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부르는 그의 부름에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내심 그 미소를 보기 위해 그가 부를 때면 더 이상 손 볼 곳 없이
완벽하게 정돈된 옷차림임에도 가기 전에 몇 번이고 확인하고 그와 만나러 두근거림을 안고 달려갔었다.
펭귄에 둘러 쌓여 있는 자신의 감정을 모두 가져가버린 둔한 그 남자를 향해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카페로 향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나도 달랐다.
그 날, 조급해진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몰아세웠다.
그 날, 좋아한다는 말만 해도 됐었다.
그 날, 가기 전 마지막으로 일부러 시간을 내서 만나러 온 그에게 고백했어야 했다.
가지 말아달라고.
떠나지 말고 자기 옆에 있어달라고.
그 날, 그 말 한 마디를…..결국 못 한 채 그를 보내버렸다.
더 이상 시간이 없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는 빈말을 하지 않으니까.
정말로 만날 시간 같은 건 없을 것이다.
마지막 기회를 날렸다는 생각에 눈물이 울컥 올라왔다.
좋아했다.
그의 옆에 있는 여자들만으로도 잠 못 이룬 적도 많았다.
좋아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타일렀다.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으니까 자신은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다고.
그렇게 몇 번이고 자신을 타일러 보았지만 결국은 그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후회가 밀려왔다.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널뛰었다.
그를 다시 못 볼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슬펐다.
사과하지 못한 채 그를 보내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평생을 살아도 못 느낄 만큼 사람을 좋아하게 해줘서 고마웠다.
하루하루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미안해….미안해….미안해….
결국 하지 못한 사과가 입 밖으로 흘러 나왔다.
견디지 못하고 흐르는 눈물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적어도 이렇게 끝내면 안됐다.
적어도 그렇게 그를 보내면 안됐다.
적어도 그가 무거운 마음으로 가게 만들면 안 되는 거였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는 그가 내어줄 수 있는 시간에 바보 같이 그에게 짜증만 남겨주었다.
그렇게 쓸쓸한 얼굴로 떠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가슴 안쪽이 아파왔다.
너무 아파서 말조차 안 나왔다.
심장이 뜯어져 나가는 것도 이것보단 아프지 않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를 좋아했다.
너무 좋아했다.
사랑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게 그녀가 닿지 않는 그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그 때, 뒤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안 받고 어디 있나 했네……역시 여기 있었냐….이슬비.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쪼그려 앉은 채 울고 있는 그녀를 보는 그는 진짜였다.
그녀가 사랑하는 이세하였다.
“세….하야…?네가…..왜 여기에 있어?”
“그건 내가 할 말이야…..갑자기 전화도 안 받고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유리가 나한테 1분 간격으로 전화하더라.”
세하가 그녀에게 옆에 나란히 쪼그려 앉더니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뭘 그렇게 서럽게 울고 있냐…..보는 사람 마음 아프게……”
“……마음….아파?”
“그래. 정말이지…..사람 걱정하게 만들고 있어….”
“짐은….어쩌고….?”
“네가 전화도 안 받고 어디 갔는지 모른다는데, 그게 중요하겠냐….정말이지….여러모로 가기 힘들게 만들고 있어…..”
세하가 그녀의 볼을 쭉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너 때문에 스케줄 다 취소하고 뛰어왔더니 좋아하는 카페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혼자 청승맞게 울고나 있고. 전화는 안 받고.
무슨 드라마 찍냐….”
한참 볼을 잡아당기던 그가 이내 볼을 놔 주고 일어서더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슬비야. 만난 김에 데이트나 좀 하자.”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꿈에서는 몇 번이나 들었던 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또다시 울컥하고 감정이 솟아오르려고 했다.
자신을 보는 그의 눈이 너무 다정해서.
자신에게 내밀어진 그의 손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자신을 찾아와 준 그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나한테….이렇게 시간 내줘도 돼?”
“너 때문에 오늘 스케줄 다 취소하고 뛰어왔다고 했지? 걱정 하지 말고 따라와.”
그녀의 손을 잡고 걷던 그가 그녀를 돌아보더니 그녀에게 목도리를 감아주었다.
“손도 차갑고 목도리도 안 하고 너 답지 않게 뭐 이렇게 빈틈투성이로 나온 거야?”
“…..상관없잖아…..내가 어떻게 나오던….”
또 퉁명스럽게 말해버렸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입이 이리도 원망스러운 적이 또 있을까.
겨우, 간신히, 약간의 동정심으로 겨우 자신에게 시간을 내준 세하한테 또 이러는 자신이 미웠다.
그러는 자신을 빤히 보던 세하가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는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춥겠다. 일단 들어가서 몸 좀 녹이고 이야기 해.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걸어가는 그의 모습에, 그녀도 얼떨결에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잠시후, 백화점으로 들어온 그가 장갑을 파는 매장을 발견하고는 그녀를 이끌었다.
“얘가 낄 장갑을 찾는데요.”
“아, 여자친구 분 꺼 찾으세요? 으음…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이 장갑들과 슬비를 번갈아 보며 어울리는 장갑을 찾으려고 하자, 슬비가 중얼거렸다.
여자친구 아닌데….
짝사랑 중인데.
자기 마음도 고백 못 하는 바보인데.
나한테는 과분한 남자인데.
자기가 봐도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손 잡고 있는 게 행복해서 날아갈 것 같으면서.
이렇게 같이 있는 게 행복해서 날아갈 것 같으면서.
이렇게 연인 취급 받는 게 행복해서 소리치고 싶으면서.
그럼에도 이 모든 게 자신과 안 어울린다고.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고로 예쁜 걸로 주세요. 그리고 그거랑 같은 거 남자 사이즈도 하나 주시고요.
화들짝 놀라 올려다보니, 세하가 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놀래?”
“아니….그게…..왜 나랑 같은 걸 사나 해서…..너….장갑 있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너랑 같은 거.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는 그의 말에 슬비가 숨을 삼켰다.
안돼. 좋아하지 마. 이건 그냥 친구에게 하는 거야.
떨리지 마.
두근거리지 마.
놓아주란 말이야.
오늘 내게 주어진 기적을 영원히 이어질 기적이라고 생각하지 마.
이윽고, 매장에서 나온 세하가 손을 풀자, 슬비의 입에서 작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렇지….이게…맞는 거지…..응….내가 한 짓에 대가인걸….
좋아한다고 말 못 하고, 툴툴거리기만 한 바보 같은 여자의 말로인걸.
슬비가 스스로를 낮추며 중얼거리는 그 때,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는 손이 있었다.
“응. 역시 맞네.”
어느 새 폭신한 장갑이 끼워진 손을 멍하게 바라보던 슬비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장갑을 끼워준 세하를 바라보았다.
“세하…야…?”
“다행이다. 솔직히 네가 멍하게 있어서 내 기억 속에 있는 네 손 사이즈를 대충 생각해서 고른 건데 맞아서 다행이야.”
미소를 짓는 세하의 모습에, 슬비가 중얼거렸다.
미안해….
시끄러운 바깥 소리에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게 나온 말이었지만, 그런 그녀의 말에 세하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됐어. 그런 말 들으려고 데이트 하자고 한 거 아니야.
그 말에 고개를 들자, 세하가 미소를 지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너처럼 눈치도 안 빠르고, 똑똑하지도 못해. 그래서 말 안 해주면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잘 몰라.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서로에게 솔직하게 말하자. 크리스마스잖아.”
장갑 위로 그의 손이 포개졌다.
따뜻하다.
사람의 온기로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그 날 이후 이었던가.
아니면,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 이었던가.
너무 오래 되어서.
스스로 잘 해**다는 강박에 묶여, 스스로 온기에서 멀어져 버린, 자신의 모습과 반대되는 따뜻하고 큰 손.
그 손이 자신의 손 위에 포개져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건데.
뭐가 그렇게 행복해.
내가 너한테 얼마나 상처를 줬는데.
내가 얼마나 너한테 몹쓸 말들을 했는데.
내가 얼마나 너한테 차갑게 굴었는데.
대체 왜.
대체 왜 너는 웃을 수 있어?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눈 앞이 뿌옇게 변하며, 차가운 물줄기가 볼을 타고 흘렀다.
“미안해…미안해….세하야…”
뭐가 미안하지도 말 못 하고, 그저 미안하다며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게 다였다.
이러한 감정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사과 한 적은 처음이라서.
이렇게 무서운 감정은 처음이라서.
이렇게 두려운 감정은 처음이라서.
나오는 대로, 그 날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날 멋대로 말해서 미안해…..그 날 이후로 잠깐씩 만날 때도 피해서 미안해. 나한테 시간 쓰게 해서 미안해…..나 같은 애를
위해서 이렇게 귀한 시간 내어줘서 미안…”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사과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그러나 세하는 조용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까지 고작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어?”
“그런 거라니…..나는 얼마나 그것 때문에….!”
“그래. 고작 그런 거. 고작 그런 거 때문에 울고 그러고 있었던 거야?”
고작 그런 거 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 슬비가 결국 간신히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래! 고작 그런 거 때문에 그랬다, 왜!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내 자신이 싫었는지 알아? 겨우 시간을 내준 소중한 친구에게
그런 말이나 내뱉었다고, 바로잡을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고개를 돌리고 피해버려서, 그리고…..가기 전에 다른 사람들과 만나
야 하는데 나 때문에 스케줄을 전부 취소하고 오게 해서….다 미안해서….”
울먹거리면서 사과하면 어쩌자는 거야 이슬비.
가기 전에 좋은 모습만 보여줘도 모자란 시간에, 이런 모습 보여주면 어떻게 하자는 거야.
마음 속으로 외쳐도 제어가 안됐다.
좋아한다는 말을.
그 네 글자도 못 말하는 겁쟁이 주제에.
자기 감정도 주체 못해서 우는 울보 주제에.
그럼에도 자기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세하가 좋은 주제에.
울먹이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무릎을 굽히고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바보야. 울지 마. 예쁜 얼굴 망가져.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는 세하의 모습에, 슬비가 훌쩍거리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확실히 네가 그 말을 했을 때 속상했어. 나를 피할 때마다 힘이 빠졌어. 나는 너랑 이야기 하고 싶은데 너는 아직 나에게 화가
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전화도, 메시지도, 함부로 못했어.”
“세하…야…”
“그 날….네가 그렇게 후회하는 그 날, 만약 그대로 이야기가 이어졌다면….나는 네게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주지 않겠냐
고….그러려고 했어.”
멍한 기분이었다.
그 날 그가 말하고 싶었던 말이, 자신과 크리스마스를 보내자는 말이었다는 사실에.
그에 대한 감정을 자각했을 때부터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는 사실에.
“나, 참 못났다, 그렇지….? 그 말 한 마디 하자고 널 이렇게나 울렸네….”
자조적인 웃음을 짓는 그의 모습에, 슬비가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
울어서 쉰 목으로 그녀가 온 힘을 다 해 말했다.
나온 목소리는 작고 약했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해 그에게 닿기를 바라며.
고마워, 세하야.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세하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가자. 데이트 시작 전부터 이렇게 울어서 괜찮을 지 모르겠지만.
가벼우면서도 다정하게, 그가 그녀를 말하자, 슬비가 자신도 모르게 뾰로통하게 말했다.
“울린 장본인이 그렇게 말하기야?”
“그것도 그런가? 그럼 어디 갈까? 역시 정석으로 데이트를…”
“VR 게임장.”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세하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VR 게임장? 너 게임 그다지 안 좋아하잖아. AOS 계열 게임이라면 본다고 했지만….”
네가 좋아하잖아.
손을 잡은 채 빤히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아까 그 말 때문에 미안해서 그러는 거면….”
“아니야. 하고 싶었어. 둘이서.”
슬비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에게 맞추려는 마음은 단순한 미안함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취향을 알지만 그녀는 그의 취향을 모르니까.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있는 동안이라도, 그의 취향도, 그의 마음도, 모두 알고 싶었으니까.
하룻밤의 장난이 되더라도.
남은 인생에 있어서 단 한 페이지의 이어짐으로 끝나게 되더라도.
손 잡은 이세하에게 닿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를 챈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변덕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세하는 그녀를 데리고 VR 게임장이 있는 번화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연인이나, 친구들, 또는 혼자서 걸으며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사람이 많네….그러고 보니까 나….크리스마스에는 집에서 영화나 봤지…..이래서는 나도 이세하한테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
네…
실없이 웃음이 났다.
방금 전까지 울던 이슬비는 어디 갔냐고.
미안하다고 혼자서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울던 이슬비는 어디 가고, 이렇게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좋다며, 단 하루의
기적을 즐기고 있는 이슬비만 남았냐고.
스스로에게 되물어도 웃음만 났다.
그 때, 좁은 길인 탓인지, 사람들과 부딪히며 조금씩 발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하자, 슬비는 마음이 급해졌다.
손을 잡고 있는 탓에, 서둘러 가지 않으면 그의 발걸음에 맞추기가 힘드니까.
낑낑거리며 사람들을 헤치며 그의 곁에 겨우 도착하자, 세하가 그녀의 손을 풀고는 말없이 그녀를 자신의 왼쪽으로 보내고는
다시금 손을 잡았다.
“저기 두 사람 봐봐. 방금 엄청 자연스럽게 여자친구를 안쪽으로 보냈다?”
“저렇게 매너 좋은 남자친구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나저나 저 얼굴 어디서 많이 봤는데?”
의도치 않게 시선을 끌어버린 탓인지, 조금씩 사람들이 두 사람의 얼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시선에 익숙하지 않은 슬비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을 꼭 잡자, 세하가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겁 먹지 마. 내 손만 잘 잡고 따라 와.”
다정하지만 당당하게, 그녀를 달래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에, 그녀도 같이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는 소리도, 싸인해달라는 소리도, 질문 세례도, 분위기 파악 못하고 클로저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 소리도, 두 사람을
막지는 못했다.
세상에 둘만이 유일한 것처럼.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인파를 헤치며 걸어가던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야 겨우 긴장된 몸을 이완시켰다.
“….푸흡…하하…하하하하…”
갑자기 터져 나온 웃음에 슬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갑자기 왜 웃어?”
“아니….신기해서. 어제까지만 해도 너랑 데이트 하자고 말도 못 걸었는데, 지금은 연인처럼 손 잡고 인파를 헤치고 다닌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어.”
웃었어.
세하가 웃었어.
나랑 있으면 매번 표정이 안 좋았던 세하가.
다른 애들이랑 있을 때면 웃고 장난 잘 치던 세하가, 나랑만 있으면 딱딱해지고, 괜히 자리를 피했는데.
오늘은….연인처럼 다니고….웃어도 주네.
가슴이 벅차 올랐다.
고작 이런 일 가지고 가슴이 벅차 오르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너무나도 기뻤다.
자신에게 제일 소중한 사람이, 자신 때문에 웃을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기뻤다.
이윽고, VR게임방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의외의 멤버를 발견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세하?네가 왜 여기를….?”
“그건 이쪽이 할 말이야. 너야말로 왜 여기를….”
세하가 말을 하려다가 그의 머리에 씌워진 무언가를 보고는 무슨 일인가 이해했는지 웃기 시작했다.
“자의야, 타의야?”
“100퍼센트 타의야!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말하지 마. 특히, 주정뱅이 여자한테는!”
필사적으로 감추려는 그의 모습에, 세하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때마침, 특유의 여우 귀가 달린 비니를 눌러 쓴 소영이 나오다가 두 사람을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세하야, 슬비야, 오랜만이야~잘 지냈어?”
“언니야말로 잘 지내셨어요? 그런데 왜 나타랑 같이…?”
“데이트 하러 나왔지~ 요즘 데이트 못 했거든~”
소영이 팔짱을 끼며 웃자, 나타가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푸흡….푸하하하하하…”
“이….이익….웃지 마, 이 모범생 자식아! 누…누구는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어라….나타….나랑 데이트 하는 거…싫었어?”
소영의 물음에 나타가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며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 타의 100퍼센트라고 했던가~?”
“그…그렇구나….안 좋았구나….괜히 나만 신났나보네…..”
세하와 소영의 협공에 나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수습에 나섰다.
“나타가 재미없었다면 어쩔 수 없지….나타가 좋아하는 곳에서 데이트 하지, 뭐.”
소영이 배시시 웃으며 그의 볼에 뽀뽀를 하자, 나타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귀여워, 귀여워~이 맛에 연하를 사귄다는 거구나~”
“시…시끄러워! 확 잡아먹어버린다?”
“흐응~그 말 책임 질 수 있으려나?”
소영이 미소를 짓자, 나타가 움찔했다.
“늑대도 여우에게는 잡아 먹히는구나.”
“누…누가 잡아 먹힌다는 거야!나는 포식자야!”
“그렇다고 해두지 뭐~”
소영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슬비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언니가 이렇게 장난꾸러기였나….
예전에도 밝은 성격이긴 했다.
그러한 밝은 성격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그녀에게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감정을 눈치챈 것 일까.
소영이 빙그레 웃었다.
“슬비는 적응 안 된다는 표정이네. 뭐…..이해는 해. 너희한테 보여준 모습이랑은 차이가 좀 있으니까.”
“아하하…..”
“그래도 이것도 나야. 너희들에게 밝게 대해주는 연상으로서의 모습, 남자친구에게 장난 잘 치는 여우 같은 모습도, 가끔은 내
가 늑대를 넘어뜨리는 것도, 다 나의 모습인걸. 그걸 나타에게는 전부 보여주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나타도 나에게는 다 보여
주는 거고.”
“…..두렵진 않으세요?”
주어가 빠져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해를 했는지 미소를 지었다.
두려워. 그렇기에 더욱 강렬하게 좋아할 수 있는 거야.
미소와 함께 돌아온 대답에 슬비가 멍한 표정을 짓자, 소영이 입을 열었다.
“나타의 수명이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시한부의 삶이라도, 감정이라는 얇은 회로에 의지한 채 연인이라는 빛을 킨 것에 후회는
없어. 시간이 없다면 언제 끝나도 후회가 남지 않게, 적어도 나타와 보낸 시간을 돌이켜 볼 때, 나는 후회 하지 않을 만큼, 내
진심을 다해서 사랑했다고 자부할 수 있게, 그렇게 진심을 다해서 하는 거야.”
고요하면서도, 자신 있게.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슬비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흘러나온 물음에 소영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처럼은 될 수 없어. 이건 나의 사랑하는 방법이니까. 너에게는 너의 방법이 있을 거야, 슬비야. 그리고 그건….네 마음의 소
리랑 가장 깊게 연결 된 거야.”
소영이 다정하게 그녀를 쓰다듬어주고는, 아직도 굳어있는 나타의 팔짱을 낀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두 사람 사이에
는 묘한 정적이 흘렀다.
부럽네. 저런 관계.
정적을 깨고 나온 세하의 말에 슬비가 그를 보았다.
“난 늘 혼자였으니까. 친구라는 것도….고등학교 와서 석봉이가 처음 생긴 친구였고, 너희들을 만난 것도 고등학교 때 이었으
니까.”
그래서 가끔은 부러워. 누군가가 저렇게 나에게 마음을 쏟아준다면 하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쓸쓸함이 묻어났다.
자신이 모르는 시간 속, 자신이 모르는 과거 속, 그의 마음에 쌓인 것들에게서,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보는 그의 쓸쓸한 부분이어서.
처음 보는 그의 아파 보이는 부분이어서.
그게 너무나도 슬펐다.
그런 그에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꼭 안아서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런 걸로 쓸쓸함이 날아가버리거나, 그의 과거에서 느껴진 쓸쓸함과 슬픔의 향이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견딜 수 없었다.
그 향은 너무나도 자신과 닮아 있었으니까.
그 향에 취해서 마음을 닫아버린 기분을.
그 향에 취해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게 무서워 지는 기분을.
너무 절절하게 알고 있으니까.
내가 있어, 세하야. 너에게는 부족할 지도 모르겠지만….내가 있어. 마음을 쏟아줄 사람.
숨 막힐 만큼 그에게서 짙게 풍겨져 나오는 슬픔과 쓸쓸함을 몰아내듯이 그녀가 마음 속에서부터 끌어낸 말을 내려놓았다.
그런 그녀의 말에 세하가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에게 안겨있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잠깐만 이대로 있어줄래.
그녀의 몸을 감싸는 두 팔이 그녀의 등을 통해 느껴졌다.
작은 따뜻한 빗소리가 그녀의 귀를 통해 들려왔다.
괜찮아, 세하야. 괜찮아. 나는 네 옆에 있을 거야.
자장가처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리며 그를 두드렸다.
어째서일까.
생각해보면 이런 모습은 절대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했는데.
괴물이라고 불려도, 사람들에게 배신당해도, 유일한 가족을 모욕당해도, 세상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살아도
이제는 아프지 않으니까.
마음 속의 아픔 같은 건 이제는 밖으로 나오지 않게 되었으니까.
내가 운다고 해서 누구 하나 이해해주지 못하니까.
그래서 더 이상 내가 누군가의 앞에서 이럴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그런데 언제나 너는.
언제나 내가 만들어 놓은 선을 넘어와.
도망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선을 간단히 넘어와, 나를 붙잡고, 화내고, 울고, 웃고, 부끄러워하고, 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
더 이상 넘어오지 마.(더 다가와 줘)
더 이상 상처 받기 싫어.(이제는 나도 상처를 낫게 하고 싶어)
더 이상 아프기 싫어.(나도 누군가에게 위로 받기 싫어)
더 이상 누군가를 안에 담기 싫어.(계속해서 비어가는 내 안으로 들어와줘.)
그러니까 제발.(그러니까 제발)
부탁이야.(부탁이야)
들어오지 마(날 놓지 말아줘.)
말없이 작은 몸을 끌어안은 그의 모습에 슬비가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어렸을 적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따뜻함을 전하듯.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그의 이마에서 입술을 떼자, 세하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에게 어린애 마냥 안겨 있었다는 것도, 이마에 닿았던 조그맣고 따뜻한 감촉도, 타오르는 불 속에 장작을 넣듯이 얼굴이
타올랐다.
“너…너 말이야….함부로 남자애한테 그러지 마. 착각 잘하는 남자들은 자기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된다고.”
달아오른 얼굴에 연신 부채질을 하며 말하던 그의 모습에, 슬비가 조용히 대답했다.
아무에게나 안 해.
부끄러움이 묻어나는 말이면서도 동시에 진심을 담은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온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이렇게 그가 의지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오늘의 기적이 하룻밤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입이 제멋대로 열렸다.
“누구에게 이런 적 없었어. 그러니까…오늘 남은 시간 동안, 잘 부탁해.”
그런 그녀의 말에 세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VR게임방으로 들어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거대한 크기에 그녀가 놀람 반, 흥미 반으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어린아이 마냥 두리번거리자 세하가 자
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평소에는 담담하면서도 새로운 걸 볼 때마다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좋았다.
아닌 척하면서도 맞서야 할 때는 누구보다 용감하게 맞서는 그 모습이 좋았다.
작은 것에 감사하며 싱긋 웃는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 모든 게 그녀였기에 좋았다.
“세하야. 무슨 게임 할 거야? 둘이서 할 수 있는 게임 있어?”
“공포 장르까지 더하면 둘이서 할 수 있는 건 여러 가지 있는데….공포는 좀 아니지?”
“공포…? 많이….무서워?”
“무섭다기 보단 슈팅게임에 가까워. 좀비가 나오고 우리는 그걸 총으로 쏘는 거니까.”
“그 정도면 괜찮아. 생각보다 그 정도 공포에는 익숙해져 있거든.”
괜찮으려나….나야 뭐 이런 거에 익숙하니까 오히려 즐기겠는데 슬비는 이런 거 좀 약할 것 같은데….
걱정이 되면서도 슬비가 공포게임을 하면서 무서워하는 것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세하가 조용히 그녀를 데리고 공포게임을
하기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이윽고 게임에 대한 설명을 듣고 게임이 시작되자 슬비가 감탄을 했다.
“우와…..나, 지금까지 게임에 대해 생각한 걸 다시금 바로잡아야겠어. 이건 영화인데, 거의?”
“요즘 가상현실게임은 현실이랑 구분이 잘 안 가니까.”
때마침 게임 시작을 알리는 안내음과 동시에 사방에서 좀비가 쏟아지자, 슬비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생각보다 현실감 가득한 모습에 얼어붙어 좀비의 접근을 허용한 그 때, 앞에 있던 좀비가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괜찮아, 슬비야?
캐릭터의 모습을 한 세하가 서둘러 그녀를 챙기자, 그녀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만 할까? 다른 게임들도 많고, 꼭 이런 거 안 해도 돼.”
괜찮다는 듯이 자신에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나 배려 받고 있구나. 지금 이 순간….세하가 나한테 집중해주고 있어….
기분이 좋았다.
무서운 건 벌써 날아가버린 지 오래였다.
“괜찮아. 조금 놀랬을 뿐이야. 요즘 게임은 현실감이 되게 높네. 현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조금 놀랬어.”
“무리 할 필요는 없어. 다른 게임도 많으니까.”
그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하고 네가 추천하는 다른 게임들도 하자.
그녀의 말에 그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평소의 잔잔한 미소가 아니라,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향해 올곧게 날아온 그녀의 미소에 세하가 괜히 목이 탔다.
두근거리는 감정을 누른 채 다시금 게임을 시작한 두 사람이 맵을 다시금 확인하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전에 사거리에 들어가는 순간, 4방향에서 왔어. 그 말인 즉슨…..한 사람 당 2방향 정도는 맡아야 한다는 건데….슬
비는 게임을 거의 안 해서 이런 걸 잘 몰라. 그렇다면 내가 무리를 해서라도 3방향을…
“세하야. 이 게임….방금 전에 4방향에서 몰려왔지?”
“그렇지. 원래는 4인용이기도 하니까. 그래도 2인용으로 컨버트 해놓은 만큼 난이도나 숫자는 좀 줄어있을 거야.”
“그럼 내가 두 곳을 맡을게. 너는 다른 두 곳을 맡아줘.”
“할 수 있겠어?”
“걱정 마. 아, 그리고 나 지금 무기를 전부 연사 계열로 골랐거든? 혹시나 좀 단단한 거 나오면 샷건 같은 데미지 높은 걸로 이
쪽을 맡아줘. 그 때 생기는 공백은 내가 메울게.”
네, 네. 알겠습니다, 우리 리더님.
미소가 계속 생겨나는 얼굴로 장난기 있는 목소리를 내며 대답하자, 슬비도 덩달아 작게 웃으며 자세를 잡았다.
꾸어어어어
시작을 알리는 좀비들의 울음소리에 두 사람이 서로를 등진 채, 중얼거렸다.
“이슬비, 작전 시작합니다.”
“빨리빨리 덤벼, 우린 시간 없다고.”
귀를 먹먹하게 하는 총성과 동시에 좀비들이 몰려들며 생기는 소리에 무서워질 법도 하건만, 이상하리만큼 무섭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세하가 내 뒤에 있어. 그리고 세하의 뒤에는 내가 있어.
내 옆에는 슬비가 있어. 그리고 슬비 옆에는 내가 있어.
언제나 하던 거랑 다를 것 없어.
움직이는 손과 행동에 자신감이 배여 나왔다.
그 때, 슬비의 쪽에 거대한 좀비가 전선을 무너뜨릴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세하야! 정문 기준 8시 큰 거 등장! 날려버려!”
“오케이! 정문 기준 2시 빠른 적 다수 등장! 백업 부탁해!”
상대방의 지시와 동시에 자연스럽게 교차하듯 발사하며 자리를 교체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밖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손
님들이 놀라움을 표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보여준 모습은 초보자였다.
그러나 한 순간에 두 사람의 연계가 긴밀해지더니, 전선 붕괴를 벌이고도 남을 좀비들의 행렬을 문자 그대로 찢어가며 게임의
스코어를 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전문가에 가까웠다.
“세하야! 교체!그리고 앞으로 30마리!”
“끝까지 가보자고!”
한동안 폭풍 같은 사거리 방어전이 끝나자, 정문 쪽이 열리며 다시금 내려갈 수 있는 곳이 나타났다.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끝나네. 전형적인 게임의 구성이야.”
“후우 그러게….그래도 재미있네. 네가 빠지는 것도 이해가 가. 후훗…”
작게 웃으며 다음 스테이지에서 쓸 무기를 고르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도 작게 미소를 지으며 다음 무기를 고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경이로운 팀워크로 좀비 무리를 쓸어버리고 도착한 곳에는 게임의 타이틀을 가진 시리즈 보스 중에서 가장 무섭고 이
기기 힘들다고 알려진 보스인 인조인간, 통칭 폭군이 있었다.
“생화학사태 시리즈니까 비슷한 녀석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진짜 폭군이 나올 줄이야.”
“위험해보이네. 약점 같은 거 있어?”
“가슴에 노출된 심장. 하지만 조심해. 덩치와 다르게 엄청 빠르니까 너는 거리를 벌리면서 쏴. 가까이 다가오면 저지력 높은 무
기로 내가 밀어버릴 테니까.”
이야기를 나누며 무기를 겨누자, 폭군과의 전투가 시작되는지 폭군이 덩치에 걸맞지 않은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예상보다 너무 빠른 접근에 슬비가 황급히 심장 쪽을 겨냥해 쏘기 시작했지만, 멈추는 것은 불가능했는지 접근을 허용했다.
그런 그녀의 앞에 거대한 팔이 휘둘러지자, 세하가 황급히 폭군의 밑으로 파고 들어, 심장 쪽에 8연속으로 샷건을 연사해 그를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고마워. 예상보다 빠르네. 좀 더 대응수준을 상향 조정할게.”
냉정함이 돌아오자, 폭군의 움직임부터 분석하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공략사이트에서 보았던 팁들을 그녀에게 전
했다.
“한 명이 시선을 좀 끌어야 많이 맞출 수 있겠는데….슬비야, 저 녀석의 움직임, 따라갈 수 있겠어?”
“따라갈 순 있어. 다만 총들의 위력이 약해서 오래 맞춰야 해.”
그거면 충분해. 시선은 내가 끌게.
세하가 양 손에 샷건을 하나씩 들고는 씩 웃었다.
통칭 시계 게임에서 백금 등급까지 오직 사신으로 올라간 센스는 장식이 아니라고.
세하가 가볍게 달리며 그의 앞에서 샷건으로 그의 약점들을 향해 정확히 샷건들을 쏘며 그의 시선을 이끌었다.
공격이 빠르게 다가오지만 공격이 다 보인다는 듯이 세하가 최소한의 동작으로 회피를 하며 심장에 연이어 총을 쏘며 슬비가 쏠 수 있는 공간 확보를 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공격은 빠르고, 상대는 거대하기에 범위 또한 광범위였다.
그럼에도 세하와 슬비가 정확하게 노리며 피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팀을 이루어서 싸워온 경험과 그들이 싸워 온 상대에게서 이겨온 노하우였다.
거대하기는 무슨….우리가 싸워온 거대한 녀석들은 네 녀석의 최소 3배라고!
그렇게 세하가 앞에서 시선을 끄는 동안 뒤에서 약점을 노리고 있던 슬비가 자신의 공격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약해. 유효타는 들어가고 있지만 치명타는 아니야. 평소처럼 위상력을 사용해서 기동성을 살릴 수도 없어. 그렇다면….
슬비가 빠르게 자신의 무기 선택칸에서 마지막에 변덕으로 골랐던 무기를 선택하고는 폭군을 향해 겨누었다.
티나 씨의 흉내이긴 하지만…!
“세하야! 피해!”
슬비의 지시에 세하가 앞에 샷건으로 폭군을 비틀거리게 하고 거리를 크게 벌리자, 그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티나 씨는 이렇게 말하던가…오케이 락 앤 롤!”
기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무서운 기세로 그녀가 든 무기에서 총알의 비가 쏟아졌다.
하나 하나의 탄환이 약하다면 선택지는 두 개.
일격으로 강한 한 방을 먹이던가, 숫자로 밀어붙이거나 의 이지선택
그녀가 고른 것 중에서 빠르고 많은 총알을 쏟아낼 수 있는 건 오직 이것뿐이었으니까.
엄청난 속도로 발사되는 총알 세례에 폭군의 몸이 밀려나기 시작하자, 슬비가 더욱 자신감 있게 발사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떨어져어어!!”
그 순간,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의 세례가 뚝 하고 끊어졌다.
분명 장탄수는 남았는데…!
슬비가 당황하며 화면을 확인하자, 그녀의 무기에 대한 정보가 표시되었다.
무기가 과열되었습니다. 냉각될 때까지는 사용하지 못합니다.
한 순간의 빈틈.
그것을 폭군은 놓치지 않고 날아들었다.
그 순간, 세하가 그녀를 안고 공격범위에서 빠르게 이탈했다.
“어째 잘 풀린다 했어….”
“미…미안해…”
괜찮아. 덕분에 찾았거든.
세하가 씩 웃으며 무기 칸에서 무기를 고르고는 자신에게 공격하려는 폭군을 향해 중얼거렸다.
생화학사태 시리즈의 보스는 이걸로 잡아야 잡는 거라고 할 수 있지.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무기가 겨누어졌다.
Jackpot.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소리와 함께 그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던 무기가 발사되자, 그와 그녀의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후우….역시 마무리는 전통인 RPG라니까.”
세하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하자, 슬비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보았다.
“이…이걸로 끝이야? 이렇게 쉽게? 방금 전까지 그렇게 많이 쏴도 안 죽던 보스 몬스터가 이렇게 한 방에?”
“생화학사태 시리즈에서는 언제나 맨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거든. 안 죽던 게 이상하게 이거면 원킬 나니까. 네가 시선을 끄는
사이에 혹시나 싶어서 스테이지에 숨겨진 무기를 후다닥 주워왔어.”
“주웠으면 바로 쏘지. 왜 안 쏘고 있다가 이제 와서 쏜 거야? 극적인 연출이야?”
그런 그녀의 물음에 세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쏘면 네가 휘말리잖아?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그의 모습에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그런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지 말란 말이야.
계속 바라게 만들지 말아줘.
이 이상 내 마음을 흔들지 마.
그런 말을 계속 들으면 나도 사람이란 말이야.
네 옆에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어울려.
그러니까 더 이상 나를….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있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머리에 있는 게임기를 떼어내고는 그녀와 눈을 마주
했다.
또 내가 널 기분 나쁘게 했어?
그런 그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젓자, 세하가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몰라.
조용히 내뱉어진 그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가 말을 이어갔다.
“나는 눈치도 없고, 여자한테 잘 보이는 법도 잘 몰라.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걸 생각한 적이 없으니까….그렇기에 더더욱 나는
네가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어. 늘 하던 것처럼 내 곁에서 내가 틀린 걸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어.”
담담하면서도 진지하게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그의 모습에,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마음을 거절해야 하는데.
좋아하는 세하를 보내줘야 하는데.
더 이상 마음 아프기 싫은데.
자신을 두고 떠나려는 세하를 미워하고 싶은데.
마음이 격렬하게 날뛰었다.
그런 거 아니야.
입이 제멋대로 열렸다. 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 같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네가 잘못 한 거 하나도 없어. 그냥….너는 참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한다고 싶었어.”
“….싫었어?”
감정이 묻어나는 그의 물음에 슬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기분 좋았어. 고마워. 자, 다른 게임도 해볼까? 둘이서 할 수 있는 게 또 뭐가 있을까…”
슬비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자, 세하가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녀를 따라 게임을 찾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데이트를 마치고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그녀와 함께 그녀가 사는 곳으로 돌아온 세하가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그
녀를 배웅했다.
“잘 자, 슬비야. 오늘 데이트 해줘서 고마웠어.”
“내가 할 말이잖아. 나 때문에 네 시간을 다 써버렸는데….”
“가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괜찮아. 천하의 이슬비가 은근히 몸치라는 걸 안 것만으로도 큰 이익인 걸.”
“모…몸치라고 하지마! 그건 게임이 이상한 거야!”
그녀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씩씩거리자, 세하가 미소를 지었다.
버둥거리는 저 몸짓도, 조금 놀리며 빨갛게 물드는 저 순수함도, 자신을 안심시켜주는 저 눈동자도, 이제 곧 못 보게 되겠지.
자신이 선택했고,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지만, 마음 속 한 구석에 응어리가 생기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표정을 보던 슬비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갈래? 집에 맥주 정도는 있으니까.”
“….들어가도 되는 거야?”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들어와도 돼.”
집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의 성격마냥 깔끔한 색감의 가구들과 단정한 배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침대 한 구석에 놓여진 거대한 펭귄인형에 세하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뭐야…왜 웃어?”
“저 펭귄 아직도 가지고 있었구나. 놔둘 곳 없다고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사할 때 안고 왔어. 이건 절대 못 버려. 네가 준….소중한 선물이니까.”
볼을 빨갛게 물들인 채, 중얼거리는 슬비의 모습에, 세하가 헛기침을 했다.
황급히 마실 걸 가지러 가려는 그녀를 따라 세하가 들어가려고 하자, 슬비가 손사래를 치며 앉아있으라고 말하고는 토끼마냥
후다닥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나저나….의외네….이 펭귄….꽤 오래 전에 준 건데….비싼 것도 아니고.
침대에서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펭귄을 콕콕 찔러보던 세하가 펭귄에서 느껴지는 섬유유연제의 향기에 미소를 지었다.
사랑 받고 있구나, 펭귄아. 부럽다.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펭귄을 쓰다듬어주던 세하가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들
고 온 마실 걸 쏟은 슬비와 눈이 맞아버렸다.
그 모습에 자신도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시선을 돌렸다.
“빠…빨리 닦자….음료수 바닥에 쏟으면 금방 끈적해지니까…바닥 닦는 거 어디 있어?”
황급히 바닥을 닦을 것을 가져와 뒷수습을 한 두 사람이 어색한 기류를 풍기며 마주앉았다.
한참을 말없이 서로 마주앉아 있던 세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색하네. 너랑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 지 모르겠어.”
“그러게. 분명히 집에 오기 전까지는 이리저리 이야기 한 것 같은데.”
괜히 안고 있는 펭귄을 꼭 안으며 중얼거리는 슬비의 모습에 세하가 또 다시 한참을 입을 열지 못하다가 이내 결심을 했는지
그녀에게 말했다.
미안해, 슬비야.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슬비가 펭귄을 꼭 끌어안았다.
“….미안하긴 하나 보네. 이런 타이밍에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까.”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말해도 변명으로 밖에 안 들릴 테니까.
자신이 한 짓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만…물어봐도 돼?”
조용히 물어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자, 슬비가 조용히 물었다.
네가 고른 거지? 캐나다 지부로 간다는 거는.
그 말에 세하가 움찔하자, 슬비가 펭귄 인형을 더욱 꼭 안으며 중얼거렸다.
“….왜 그런 거야. 우리에게 상담 정도는 해 줄 수 있었잖아.”
목소리에서 물기가 묻어 나왔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따뜻함이 너무 좋아서.
오늘이 끝나며 사라질 이 따뜻한 마음이 좋아서.
울음부터 나왔다.
예쁜 모습만 보여줘야 하는데.
가버리면 오랫동안 못 보니까 좋은 기억만 줘야 하는데.
그런데….왜…..이렇게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야?
펭귄 위로 기어코 뜨거운 빗물이 쏟아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세하가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녀를 자신의 품에 꼭 안았다.
“….미안해. 내 고집 때문에 상처를 줘서….이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그러면 뭐 때문에 가려고 한 건데…고집이라고 뭉그러뜨려서 이야기 하지 말고 이유를 제대로 말해줘….”
그녀의 물음에도 그가 입을 열지 않자, 그녀가 그의 품으로 파고 들며 웅얼거렸다.
한동안 못 보잖아. 친구잖아. 그 정도는 말해줄 수 있잖아. 이런 식으로 이유도 모른 채 보내기 싫어.
어리광이었다.
무서움을 떨치기 위한 필사적인 행동이었다.
제발 놓지 말아줘.
네 옆에 서는 건 바라지도 않아.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나타날 거야.
하지만 바라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리에.
네가 살아가는 일상에.
내가 있었으면 해.
정리 되지 않은 마음이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품 안에서 훌쩍거리는 슬비의 모습에 세하가 그녀를 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
말해도 되는 걸까.
내가 너를 두고 가려는 이유를.
내 고집으로, 내 아집으로, 너를 울리기만 하는데.
너를 웃게 하는 것보다 슬프게 하는 일이, 힘들게 하는 일이 훨씬 많았는데.
이렇게 내 품에서 울고 있는 너를 보면.
욕심부리고 싶어지잖아.
한참 동안 울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달래던 세하가 이내 결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너에게 당당해지고 싶었어.
들려온 그의 말에 슬비가 품에서 몸을 떼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너는 내게 언제나 눈부셨으니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넘어져도, 힘들어해도, 일어서서 나아가려는 그 모습이 내게는 더할 나
위 없이 멋졌으니까. 그래서 당당해지고 싶었어. 네 옆자리에 서도, 자랑할 수 있는, 자랑할 수는 없어도 부끄럽지는 않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
좋아해, 슬비야.
꿈을 꾸는 걸까.
아니면 좋아하는 마음이 넘쳐서 이제는 귀마저 듣고 싶은 대로 환청을 듣는 걸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 지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도.
알 수 없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나고, 입은 바보처럼 열렸다.
감정을 막아두던 둑이 무너졌다.
품으로 파고 들어서 그를 때렸다.
마음고생 시킨 것에 대한 복수라는 듯이.
대답보다 먼저 울면서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바보, 멍청이, 둔탱이, 카사노바….”
때리던 손이 느려지더니 그의 품에 꼭 안기며 그녀가 웅얼거렸다.
마음 고생 시킨 만큼….많이 좋아해줘. 바보야.
조용한 방 안에 그녀의 목소리가 퍼져나가자, 세하가 멍한 표정을 짓다가 그녀를 꽉 껴안았다.
고마워서, 예뻐서, 행복해서.
자신의 품에 있는 청초한 벚꽃을 꼭 껴안았다.
잠시후, 달달했던 열기가 잦아들자, 슬비가 얼굴을 붉힌 채 그에게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음료수를 연신 마셨다.
분위기를 탔다고 해도, 자신이 한 행동에 얼굴이 붉어지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세하는 되게 침착하네….나는 지금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데.
목이 타는 자신과 달리 그다지 변화가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살짝 뾰로통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자, 슬비가 조용히 그의 어
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때? 두근두근 거리지? 너도 당황해. 나만 이러는 건 불공평해. 나만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속으로 연신 외치며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슬쩍 그를 보려는 순간, 그도 그녀의 머리에 조용히 머리를 기댔다.
자…잠깐 뭐야…뭐야 뭐야….이…이건 예상 못 했는데…
예상치 못한 반격에 고동이 커져갔다.
작은 몸에서 난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고동이 울려퍼지자, 슬비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세…세하야? 무…무슨 일이야? 네가 기대오는 건 없었는데에…”
감정의 너울에 평소의 말투마저 무너뜨리며 입을 연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고맙고 미안해서. 이런 나를 좋아해줘서 고마운데….동시에….이런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녀와 함께 있다는 점에서 오는 행복과, 그녀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점에서 오는 미안함에 뭐라고 말해야 할 지 알 수 없어졌
다.
옆에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두고 가야 하니까.
옆에서 두근두근 거리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를 두고 가야 하니까.
그러한 진실에 웃을 수가 없었다.
그녀처럼 행복함을 만끽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다가온 그녀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기댔다.
이 정도까지는 욕심부려도 되지 않냐고.
자신 같은 바보에게 이 정도의 행복 정도는 허용해줄 수 있지 않냐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그녀에게 기댔던 것이었다.
“미안해. 네 기분 마저 상하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런 그의 말에 슬비가 고개를 들고는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세하야. 미안해 하지마. 네가 미안해야 할 건 아무것도 없어.”
“슬비야 그건….”
“나는 지금 행복해. 한동안은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게 조금 섭섭하긴 하지만, 영원히 못 보는 것도 아니고, 휴가 내고 널 만나러
갈 수도 있고. 그리고 연락하면 되잖아. 나는 네 모닝콜로, 너는 내 모닝콜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거잖아. 오히려 그건 나한
테는 최고로 기분 좋은 일인걸? 아침부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깨어난다니….얼마나 로맨틱한 일이야?”
자신과 눈을 마주하며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의 눈이 흔들렸다.
늘 그랬다.
그녀는 선을 넘어온다.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자신에게 하는 변명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와 눈을 맞추고, 손을 잡고, 자신을 끌어내어줬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너의 웃는 얼굴, 나는 엄청 좋아하니까.”
자신을 보며 활짝 웃는 슬비의 모습에 세하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싫다.
이런 자신이 너무나도 싫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당하겠다는 변명으로 그녀에게서 멀어지려고 하지 말 걸.
이럴 줄 알았으면 용기를 좀 더 내어볼 걸.
바꿀 수 없는 과거와 다가올 미래에 대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또 혼자가 되는 걸까.
이렇게 따뜻한 그녀의 온기를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되는데.
자신을 꼭 껴안는 그의 모습에 슬비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괜찮아, 세하야. 미래에 어떻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나는 네 앞에 이렇게 너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행복해.
다정하게 그에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조용히 그녀의 품에 기댔다.
고마워.
짧고 평범한 말이었지만 그녀의 말에 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담아 대답했다.
이윽고, 그녀에게서 떨어진 세하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자, 슬비가 쿡쿡 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우…웃지 마….나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했다고.”
“바보야. 그런 식으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고백을 받을 때, 각오했던 거야. 그리고, 평생 못 볼 것도 아니면서.”
“그치만….이렇게 있을 수는 없으니까.”
드물게 투정 같은 말투를 하는 세하의 모습에 슬비가 침대에 앉아 그에게 팔을 벌렸다.
“이리와. 오늘은 특별 서비스로 네가 하는 모든 어리광, 다 받아줄게.”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세하의 얼굴이 신호등의 빨간 불 마냥 달아올랐다.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는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연인들끼리, 단 둘이 있는 공간에, 저런 무방비한 상태로, 저런 말을 해버리면, 천하의 세하라고 할 지라도 끓어오르는 것은 있
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의 본능으로 상처를 줄까 라는 마음으로 겨우 억누르고 있는 걸,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싱글싱글 웃으며
자신을 재촉하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결국 그녀를 쓰러뜨렸다.
“세….하야?”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침이 꼴깍하고 넘어가는 소리가 괜히 크게 들려왔다.
“싫다면 안 할 거야. 너한테 상처 주고 싶진 않아.”
며칠이 지나면 한동안은 이렇게 닿는 것도 불가능한 관계이기에.
섣부른 온기는 오히려 아픔이 되는 걸 알기에.
자신의 한 때의 감정에 그녀가 슬프지 않기를 바랬다.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챈 것 일까.
슬비가 조용히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상처 안 받아. 오히려 고마워. 내가 유혹해놓고는 뭐하지만…이렇게 배려 받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거든.”
슬비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하에게 입을 맞추었다.
같이 나쁜 짓을 해보자.
그녀의 말을 끝으로 별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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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 뒤.
아침 해가 아직 얼굴을 다 내밀지도 않은 시간, 국제공항으로 기묘한 조합의 3명이 들어왔다.
“그만 울어요. 엄마. 저도 슬비도 안 우는데 엄마는 아까부터 왜 울어요….”
“이래서 아들은 키워봤자야! 엄마는 아들이 걱정 되고 걱정 되고 또 걱정 되어서 울음부터 나오는데 아들은 엄마 마음도 모르
고 계속 잔소리만 하고, 집 치우라고 하고, 빨래 하라고 하고, 밥 만드는 법 배우라고 하고….”
“내가 무슨 네다섯 살 먹은 애냐고요. 그리고 대부분은 엄마의 생활에 관련된 거잖아요. 저 없으면 집도 안 치우고 빨래도 안
하고, 밥도 대충 먹을 거면서.”
“그치만 아들이 해주는 게 제일 좋으니까.”
“그 아들 한동안 안 오니까 좀 하라고요. 정말이지 걱정하고 있는 쪽은 이쪽이라고요.”
누가 부모인지 모를 대화가 이어지자, 슬비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자주 찾아 뵐게. 걱정 하지 말고 네 몸부터 챙겨. 나 없다고 밥 굶지 말고.”
“내가 할 소리야. 정말이지 가는 날까지 잔소리만 하다가 가네.”
세하가 툴툴거리자, 슬비가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빙그레 웃었다.
“착하다, 착해.”
대담한 그녀의 행동에 세하가 얼굴을 붉히자, 옆에 있던 지수가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와 투닥거리며 티켓 수속과 짐을 맡긴 세하가, 일부러 웃음을 짓고 있는 지수와 웃음을 지으면서도 눈가를 실룩거리
고 있는 슬비의 모습에 두 사람을 꼭 껴안았다.
“에헤헤….세하가 안아줬다아…..이 온기 많이 많이 받아놓아야지이….”
“나도 우리 아들 냄새 좀 맡아놓아야겠다…냄새를 보존하는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다는 게 안타깝네…”
참으로 그녀들다운 말에 세하가 자신도 모르게 울컥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억제하며 그녀들을 더욱 끌어안았다.
한동안 못 볼 얼굴이 우는 얼굴이기는 싫어.
그게 세 사람의 마음이 이루어낸 공통적인 결론이었다.
이윽고 탑승을 준비해달라는 방송이 나오자, 그제서야 그는 그녀들에게서 몸을 뗐다.
“잘 다녀와 아들. 나중에 엄마가 슬비 데리고 놀러 갈게.”
“무슨 세트 메뉴처럼 오겠다는 소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하고 있어. 슬비야. 너무 맞춰줄 필요는 없어. 싫으면 싫다고 말해야 한
다?”
“나는 괜찮은데? 어머님이랑 통하는 부분 많아서 재미있어.”
“그렇지? 역시 우리 슬비가 아들보다 낫다니까~”
배시시 웃으며 의기투합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세하가 미소를 지었다.
세상 어떤 사람이 와도 절대 양보하기 싫은 두 사람.
게으르고 둔한 영원히 빛나는 나의 영웅, 서지수.
언제나 보고 싶은 작지만 거대한 나의 연인 이슬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자신을 보며 웃어주는 모습에, 괜히 허리에 힘이 들어갔다.
당당해지기 위해 떠나기로 한 이상, 최선을 다하자.
나의 자랑스러운 가족들에게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게.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짓고 있자, 슬비가 손을 까딱거렸다.
며칠간에 달달한 밀착 덕분에 그 의미를 잘 알게 된 세하가 몸을 숙이자, 그의 목에 그녀가 팔을 감고는 길게 입을 맞추었다.
마킹했어. 이세하는 내 거입니다 라고. 그리고….널 다치게 만들지 말아달라고 기도했어.
보석 같이 투명한 눈에 눈물이 고였지만 애써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다시금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다녀올게.
긴 말로도 짧은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모든 마음과 감정을 담아.
가장 소중한 사람을 향해.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건넸다.
“숙소 도착하는 대로 전화 줘. 안 자고 있을 거니까.”
“그냥 자. 어차피 도착하면 거의 잘 시간일 테니까.”
“알아서 할게. 그러니까, 내가 걱정되면 빨리 연락해.”
그녀의 투정 섞인 말에 세하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는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세하야.
걸어가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슬비가 달려와 그를 꼭 안았다.
보고 싶을 거야. 그러니까….자주 연락할게.
그거면 충분했다.
그가 가는 길에 축복을 내리는 말은.
그가 가는 길에 이어질 결말은.
품에 있는 작은 벚꽃 하나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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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그로부터 반년 뒤.
캐나다 토론토 지부 유니온 아카데미에서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려왔다.
신나서 달려나가는 학생들의 뒤로, 편안한 옷을 입은 세하가 느긋하게 교실을 나오자, 같은 시기에 다른 곳에서 발령을 받은
동료 교사가 세하를 반갑게 맞이했다.
“미스터 리.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미스 카트리나야말로 고생 많았어요.”
직원실을 향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천천히 걸어가자, 주변의 학생들이 그들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인기가 많으시네요. 하긴….원래부터 유명하셨으니까요.”
“과찬이시네요.”
느긋하게 보이는 그의 표정에 카트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시죠?”
“아니, 오늘따라 되게 마음이 편해 보이셔서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녀의 질문에 세하가 빙그레 웃으며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아침부터 슬비에게서 힘내라는 문자가 왔거든요. 그래서 오늘 뭐든 잘 될 것 같아서요.”
“슬비? 아, 피앙세 말이군요. 그런데 이거….펭귄 아니에요? 피앙세가 펭귄을 좋아해요?”
“엄청 좋아해요. 오죽 했으면 저번에 수족관에서 찍은 펭귄 사진 보내주니까, 다각도로 찍어달라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지 세하의 입가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애칭 있어요? 한국 사람들은 애칭 같은 걸 만든다고 들었는데.”
그런 그녀의 질문에 세하가 웃음을 지었다.
핑크 펭귄.
그게 그의 핸드폰에 저장된 그녀의 애칭이었다.
참으로 웃긴 것은 이 애칭이 정해질 시기가, 그들의 고백 그 다음 날이었다는 것과, 애칭이 정해진 계기가, 머리색과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누가 들으면 참으로 성의 없다고 할 것 같은 계기였기에, 애칭을 떠올릴 때마다 그는 웃음만 났다.
핑크 펭귄이라고 했을 때, 애칭이 색달라서 좋다고, 안 하던 애교를 뿌려대던 그 모습….귀여웠지.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동시에 아련했다.
아침 저녁으로 그녀가 깨어있는 시간과 자신의 시간이 겹칠 때면 매번 전화로 얼굴을 보는데도, 닿지 못한다는 점이 그에게는
아련함을 가중시켰다.
작은 손에서 느껴지는 강한 고동이 좋았다.
머리를 넘길 때마다 나타나는 작은 귀가 좋았다.
걸어갈 때 느껴지는 그녀 특유의 향기가 좋았다.
자신을 부르며 반짝이는 눈과 함께 손을 잡으러 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이 좋았다.
이슬비 라는 사람이 좋았다.
그렇기에 핸드폰의 사용빈도를 바꿔버릴 정도로 그녀와 찍은 사진들을 돌이켜보았다.
게임을 줄이고 언젠가 그녀의 휴가에 맞춰 보낼 데이트 코스를 짰다.
언젠가 다가올 그녀와의 결혼을 위해 저축을 시작했다.
언젠가 찾아올 그녀를 닮은 예쁜 아이를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그 모든 것에 있어, 귀찮음은 없었다.
“정말이지, 미스터의 피앙세는 좋겠어요. 이런 사람이 좋아해주니까요.”
“반대일 것 같은데요. 저한테 과분한 피앙세를 제 품에 가두고 있다고 생각할 때도 종종 있으니까요.”
그건 연애 못하고 있는 솔로들에게는 완전 아웃인 발언이라고요.
툴툴거리는 그녀와 함께 직원실로 돌아온 세하가 핸드폰을 한 번 더 확인했다.
한국은 지금 시간이 새벽 2시이려나….한창 자고 있겠네. 돈 아낀다고 에어컨 끄고 있으면 안되는데.
은근히 그런 부분에서 최대한 아끼려는 그녀이기에 걱정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괜히 전화를 걸고 싶었다.
잠이 덜 깬 상태의 그녀는 평소보다 잘 웃고 애교가 많아서 아침에 전화를 걸면 귀여운 하품을 하며 [우리 별님 안녀엉~슬비
일어났어요오~] 라고 말하는 것도 걸고 싶은 이유에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잘 자고 있는 그녀를 깨우긴 싫었다.
앞으로 5시간 정도 뒤에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네.
기분이 좋았다.
5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할 지 고민하는 것도 좋았다.
자기가 이렇게 누군가에게 열렬하게 말하는 타입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그렇지만 좋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 안 하는 그녀도 그와 대화할 때면 술술 이야기 하니까.
공평하고 사랑스러운 일이었다.
그 때, 카트리나 씨가 그에게 다가왔다.
“미스터 리. 공문이 하나 왔어요. 한국에서 새롭게 교사를 파견해준다고 하네요?”
“드디어 누나 쪽에도 여력이 생겼나 보네요. 그나저나 누가 오려나….”
“짐작 가는 사람들 있나요?”
“많죠. 교사로 오는 거라면 제이 아저씨나 트레이너 씨쯤 되려나요. 두 분은 베테랑이니까요. 사냥터지기 팀 쪽은 어지간한 일
이 아니면 이런 일에 지원도 안 하실 테니까 넘어가고요.”
자연스럽게 술술 이야기 하는 그의 말에 카트리나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편안하고 평범한 교사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나 그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영웅의 아들이 아닌, 또 다른 영웅.
새로운 세대를 이끄는 영웅의 필두라고 불리는 사람.
그게 이세하였으니까.
“그나저나 대단하네요. 우리는 한 명도 만나기 힘든 영웅들을 미스터는 다 알잖아요. 개인적으로 연락도 하고 살아요?”
“그야 같이 싸웠던 사람들이니까요. 한 번씩 놀리려고 전화하기도 하고요.”
저번에 나타에게 전화 걸었을 때가 걸작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했다가, 소영이 나타의 집에서 **한다는 폭탄발언을 받아버렸으니까.
결혼 언제 하냐는 질문에 호적만 먼저 올릴까 라며 놀리는 두 사람의 말투에 생각만 해도 웃음이 올라왔다.
슬비와는 다른 의미로 전화 하는 맛이 있는 곳이니까.
그 때, 세하가 가르치는 학생 중 하나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선생님~밑에 선생님을 찾는 분이 오셨어요~만나러 오셨다는데 약속은 안 했다고 하시네요.”
“또 기자들 아니야? 가십을 찾으러 오는 녀석들이 꼭 그런 소리 하던데.”
“그런가요? 엄청 당당하게 만나러 왔다고 하던데….아. 그러고 보니까 이런 말도 하던데….별님을 만나러 펭귄이 왔다고.”
그 말에 세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나갔다.
말도 안돼.
그럴 리가 없는데.
이제까지 아무 말 안 했잖아.
가슴이 뛰었다.
정말로 그녀가 맞다면.
잠들 때마다 옆에 있기를 그토록 바라던 그녀가 맞다면.
달려가는 다리가 점점 빨라졌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에는 마음이 다급했다.
거의 날아가는 수준으로 달려가던 세하가 문 앞에서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긴 모자를 쓴 원피스의 여성을 보고는 멈춰섰다.
그의 기척을 눈치챘는지 원피스의 여성이 모자를 살짝 올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오랜만이야, 세하야.
세상 그 누구보다 환하게 웃는 이세하의 단 한 명의 연인.
이슬비였다.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달려가는 속도를 미처 죽이지도 못한 채 달려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에 세하의 몸이 이완되었다.
“격렬한 환영 고마워 세하야. 이렇게 전속력으로 뛰어올 줄은 몰랐어.”
슬비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구슬처럼 굴러갔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느껴지는 따뜻함에 녹아 내릴 것 같았다.
자신의 품에 쏙 들어온 이 작은 벚꽃이 너무나도 좋았다.
“온다는 사람이 너일 줄은 몰랐는데….나는 제이 아저씨나 트레이너 씨 정도라고 생각했어.”
“뭐….두 분도 최종 후보들 이었는데 내가 가고 싶다고 하니까 두 분 다 양보 해주셨어. 조건은 이세하의 일이 끝나면 돌아온다
는 조건으로 파견 왔지.”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일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그녀였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실제로 보는 여자친구인데 이걸로 끝은 아니지? 기대하고 왔으니까 내 예상을 마구 뛰어넘어줘.”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말에 세하가 그녀에게만 들리게 중얼거렸다.
바로 집으로 가서 단계를 여러 가지 넘어도 상관없는데.
“얘…얘가 뭐…뭐라는 거야! 정말이지….반년 사이에 더 능글맞아졌어.”
슬비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도 딱히 싫다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오늘 밤은 좀 길겠네.
그녀에게만 들리는 작은 속삭임에 슬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일단 일부터 마치고 생각해. 여기 사람들이랑 이야기도 해야 하고 짐도 풀어야 하니까.”
“그러면 다 끝나면 오랜만에 해도 돼?”
“너.....너어 진짜아…..그….그런 건 둘만 있을 때에 하라구우….”
곧 터지는 건 아닐까 할 정도로 빨간 그녀의 얼굴에 세하가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 때 주변에서 히죽히죽 웃고 있는 학생들을 발견한 세하가, 머리를 긁적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한동안 시끄럽겠네.
그래도 좋았다.
시끄러워져도, 부끄러워져도, 힘들어져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왔으니까.
모든 것의 시작인 그녀가 옆에 있으니까.
그런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은 그가 학교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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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인사드리는 firsteve입니다.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사라졌던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최근 들어 시력이 너무 내려가서 이상하다 여겨서 잠시 집에 돌아갔더니 재수술을 해야하는 지경이 되었더라고요.
덕분에 인터넷은 커녕 핸드폰 조차 하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인해, 아무런 인사조차 못 드리고 있다가 이제야 인사를
드리네요.
지금도 인터넷과 핸드폰은 거의 못 합니다.
10분 정도 하면 눈에 핏줄 다 올라와서 눈을 못 뜰 지경 이거든요.
이 글도 후배 녀석한테 써놓은 노트를 주고 부탁해서 올리는 겁니다.
노트는 3개 정도 맡겨놓았습니다.
후배가 시간이 나는 대로 올리겠다고 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 작품은 블랙 나이츠를 올릴 거라고 하더군요.
제가 써준 양을 보고 욕을 한 바가지로 했습니다. 페이지가 왜 이렇게 많냐고 투덜거리더군요. 근데 이것도 비슷할 것 같은데
왜 욕 하는 거지.
뭐 제 변명은 여기까지 하고.
늘 하던 대로 후기를 쓰겠습니다.
이번 글은 조금 특별하네요.
예전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에게만 공개했던 단편 소설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 당시에 써놓은 걸 보니 지금보단 투박하지만 조금 더 순수하고 감정에 대해 묘사를 하려고 노력한 부분이 엿보여서 오랜만
에 글을 쓰던 시기의 순수함을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네요.
쓰는 내내 제 과거를 살짝 겹쳐 보기도 했습니다.
제대로 좋아한다고 말 못하고 끙끙대던 기억과,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사람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끊어져 버린 관계에
대한 안타까움이 모여서 이런 작품이 만들어 진 것 같습니다.
혹시 감정이 너무 치우쳐져 있어서 오글거림을 유발했다면 사과드립니다.
오랜만에 올리는 글입니다만 여러분의 마음에 읽으면서 따뜻해지는 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날씨가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firsteve였습니다.
p.s 댓글 써주시면 후배 녀석이 저한테 이야기를 해주니 감상평을 남겨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게임 스토리에 대해서는 후배 녀석이 열심히 게임하면서 알려주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최대한 재미있게, 더욱 읽고 싶어지는 글로 여러분에게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12월 24일 세상 어느 작은 도서관에서 여러분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