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설원 2019-11-28 14
※ 철수 이름 관련 날조 글(≒ 조금 긴 썰)
※ 철수는 물론 미래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기에 후에 밝혀지는 정보에 따라 리메이크 가능성 有
-이름 따위는 없다. 마음대로 부르도록.
-진짜 마음대로 부른다?
-상관없다.
-생각나는 대로 짓는다, 그럼? 음...김철수...
-그렇군. 알겠다. 내 이름은 김철수로군.
김철수라는 인간은 이렇게 생겨났다. 그리고 김철수라는 인간이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조금 간략하게 말하고자 한다.
* * *
이름 따위는 없다. 애초에 이름 따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말버릇처럼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따위’ 라는 수식어를 무의식적으로 붙이는 것처럼, 별 큰 의미 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최초의 기억부터 혼자였기 때문에, 나 혼자만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그런 거,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듯 했다. 혼자면 그런 듯 했다.
아니, 당신들에게는 조금 솔직해져도 될까. 없는 게 아니라,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추측을 해도, 남는 사실은
그래, 이게 맞다.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게다가 애초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텅 비어버린 인간일 뿐인데, 그런 게 중요할까? 싶었다. 이건 내적의 비틀림 문제이고, 외적으로도 있었다. 살아남기에 급급한 주변 환경은 이런 쓸데없는 문제에 시간을 허비할 틈을 주지 않았다. 해가 떠 있는 동안 어떻게든 살아남으면, 밤이 되어 동이 틀 때까지 또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가 뜨고 나면 밤 때와는 달리 또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그 곳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적이 많기 때문에 하루하루 이를 악물며 살아야하는 생존만을 위한 투혼을 해야만 하는 걸까? 그렇게 동적인 적군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곳에 머무르며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에 의해 목숨을 잃는 건 의외로 아주 적은 숫자였다. 오히려 가장 독이 되는 적은 정적일 뿐 아니라, 눈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처음 이곳에 떠밀려 왔을 때에서부터 혼자였다. 혼자 눈을 떴고, 혼자 돌아다니고, 혼자 살아갔다.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게 걸어 다니는 이방인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또 하나 신기했던 점은 넓지 않은 장소임에도, 한 번 본 얼굴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신기한 섬이었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바다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 있는 곳이 섬이라는 건 대략 짐작이 갔다.
그렇기에 여러 날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나를 부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나를 부른 건지조차 몰랐다.
“저기요!”
“...”
“이봐요, 거기 아저씨!”
“...”
“아저씨!”
“...지금 날 부른 건가?”
반복적으로 어떤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주변을 감지했다. 뒤돌아보니 보인 상대방은 조금 화가 나 있는 표정이었다. 아마 자신을 계속해서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럼 여기 아저씨 말고 누가 있겠어요?”
“...”
처음으로 말을 걸어주는 이라서, 처음으로 말을 나누는 상대라서 난 그냥 가만히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서 왔어요?”
“모른다.”
정말 모르니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상대방은 이 솔직한 대답마저 조금 마음에 안 든 눈치였다. 모른다고 내 딴에서 솔직하게 말한 것이, 아무래도 상대방한테는 조금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 모양이다.
나의 무성의한 대답에 상대방은 자신이 앉아있던 찬찬히 쓰레기더미 위에서 내려왔다. 내려다보는 얼굴은 앳된 것과 달리 왠지 모를 피로함이 느껴졌다. 상대방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 얼굴 보니 아저씨는 아니네. 뒷모습이 엄청 커서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
“이름은?”
이름.
지금의 나는 이름 석 자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온다. 이때까지, 적어도 이 섬에 도착하고 나서 한 번도 생각할 정도로 진지하게 고민하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름을 묻는 저 물음에 나는 왜 이렇게 가슴이 저려오는 걸까.
“이름 따위는 없다. 마음대로 부르도록.”
이것도 모른다고 대답하는 게 나을 터이지만, 아까와 같은 얼굴을 상대방의 얼굴에서 또 보이게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적당히 얼버무렸다. 이름 따위 없기 때문에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마음대로 부르라는 나의 대답에 상대방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아마 이 사람에게서는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기함 혹은 신선함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상대방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진짜 마음대로 부른다?”
“상관없다.”
“생각나는 대로 짓는다, 그럼?”
상관없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상대방은 그래도 내심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음...김철수...?”
“그렇군. 알겠다. 내 이름은 김철수로군.”
“으엑? 진짜 그걸로 가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오히려 무덤덤한 나랑 달리 상대방이 그 문제의 ‘김철수’ 라는 이름에 대한 반응이 더 획기적이었다. 그리고 묘하게...나를 설득하고 있는 기분도 들었다.
“잘 생각해봐. 진짜 그 이름으로 가게? 좀 더 멋진 이름이 있을 거 아니야!”
“그게 뭐가 중요한가. 지금의 나한테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닌데.”
두 사람이서 대화를 하고 있지만, 그 끝은 교묘하게 맞닿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나의 이야기만을 하고 있고, 저쪽도 저쪽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런 입씨름이 무의미하다는 걸 먼저 알아차린 쪽은 상대 쪽이었다.
여자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당신...아니, 철수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으니까...거기, 김철수 씨!”
“왜 부르지?”
“진짜로 대답하네...”
“내 이름은 김철수라고 하지 않았나?”
“...”
그렇긴 하다만, 이라며 여자의 혀끝에서 맴돈 그 말. 아마 내가 들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고, 거의 자신에게 하는 한탄 비슷한 무엇인거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 말이나 내뱉지 말 걸, 이라는 뉘앙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자는 인정했다. 무엇을?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김철수...하여간 진짜 이상해.”
“...”
“너는...어딘가 텅 비어있는 거 같아.”
“...”
비어있다. 그래, 그게 사실이지. 그 점은 나 스스로가 자각하고 있었다.
“비어있다, 라...”
비소(鼻笑), 나는 나 자신에게 비소(誹笑)를 쳤다.
“네 말대로 난 비어있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찾고 있지.”
“예를 들면 철수의 진짜 이름 같은 거?”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처음으로 긍정적인 느낌에 가장 가까운 표정을 지어주었다.
“찾으면 좋겠다. 아니, 꼭 찾아야지.”
“...”
“이름은 무척 중요한 거니까. 어쩔 수 없이 한동안은 김철수라고 불러야겠네.”
그 말은 당분간 같이 다니자, 라며 무언의 압박을 주는 거 같았다. 뭐, 한동안 나는 여자와 같이 지내기는 했으니 여자의 제안에 따랐다고 볼 수 있다.
* * *
여자가 나에게 강요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이름...이름은 중요하지.”
“...”
“아주 중요한 거야.”
“...”
“철수는 말이 너무 없네.”
처음만 자신이 지은 이름에 거부감을 보였을 뿐, 그 후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철수라는 이름으로 나를 곧장 불러주었다.
여자는 자신의 특기에 대해 ‘이름 짓기’ 라는 참으로 애매하기 그지없는 재능을 언급했다. 여자는 어떤 것이라도 이름을 붙여주었다. 물론 그것들은 대부분 쓰레기장에 나뒹구는 폐품들에게 붙이는 듯 했지만, 나처럼 사람의 이름을 지어준 경우도 아예 없어 보이지 않았다.
“동생 이름도 내가 지어주었어.”
“동생이 있었나?”
“응! 아주 귀엽고, 착해. 그런데 부끄러움이 많아서 철수는 못 볼지도 몰라.”
동생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여자의 얼굴은 가장 환해졌다. 그렇기에 여자가 여자의 동생을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건 아무리 둔감한 나라도 곧장 알 수 있었다.
길을 걷는데, 여자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아, 이런 데에 꽃이 피었네!”
“...”
“예쁘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희끄무레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얼핏 보면 먼지뭉치라고 생각할 만한 색인데, 여자는 기어이 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 섬은 이런 꽃이 보기 매우 드문 편이거든. 참 신기한 일이다.”
“그렇군.”
“이름을 지어야겠지...? 음, 미래? 아니야, 미래는 아주 소중한 사명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름 짓기가 특기. 나는 여자의 이런 자기소개를 들었을 때부터 줄곧 한 가지 의문점을 가지고 있었다.
“물어볼 게 있다.”
“응? 뭔데? 웬일로 철수가 먼저 질문을 하네.”
“그렇게 이름 짓기에 집착하는 이유가 뭐지?”
“...철수 눈에는 내가 집착하는 것처럼 보였구나.”
여자는 쓰게 웃었다.
“집착하고 있는 건 맞는 거 같아.”
“...”
“나는 여기에서 제법 오래 지냈어. 그래서 하도 많이 보아온 풍경이 하나 있어.”
그 광경이 무엇일지 바로 뇌리 속에서 떠오른 건 나 또한 그걸 많이 보았었기 때문일까. 나의 추측과 여자의 답변은 똑같이 겹쳤다.
“모두가 죽더라고.”
“...”
“그런데...아무도 그 사람들을 기억해내지 않아. 여기에서 죽는 건, 흔한 일이니까 그런 거 무엇 하러 기억을 하려고 하느냐...”
그것이 현실이다. 허나, 그 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여자는 나약했던 걸까, 아니면 강인했던 걸까.
“그래서 그 후부터 나라도 기억해주자, 싶어서 이름을 짓기 시작했어. 이름이 있으면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조금 더 기억하기 쉽잖아?”
“...그래서 내 이름을 붙여준 건가?”
“응. 원래는 김철수보다는 좀 더 멋진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는데...”
여자는 나에게 부탁했다.
“질문에 답해준 대가로 나도 철수한테 부탁할 게 하나 있어.”
“뭐지?”
“들어줄 생각은 있나 보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여자는 허탈하게 웃었다. 허나 곧 표정이 해맑아지는 것으로 보아, 나는 대충 짐작이 갔다. 저 얼굴은 여자가 동생의 이야기를 꺼낼 때에만 보여주는 것이기에.
“미래를 부탁해.”
“미래?”
“내 동생.”
“동생 이름이 미래인가?”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게 되면 바로 내 동생인 걸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이런 첨언도 붙이면서. 그리고 다시 자신이 발견한 꽃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이름을 지을 때의 여자의 얼굴은 잘 볼 수 없었다.
“이야기하다 보니 꽃의 이름을 정했어.”
잠깐의 쉼. 여자는 숨결을 토해내듯 입에서 그것을 쥐어짜냈다.
“행복.”
곧바로 스러질 거 같은 이름 모를 들꽃에게 지어준 이름이 참으로 감상적이다.
하여튼 내가 기억하는 여자의 마지막 말은 이거였다.
“행복해지면 좋겠다.”
주어를 말하지 않아, 그 대상이 누구를 향했는지 모를 참 모호한 말이었다.
* * *
그리고 여자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여자가 사라진 뒤로 줄곧 혼자였다. 이따금씩 여자가 떠올랐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이름 짓기를 좋아하고, 타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붙여준 여자는 정작 자신의 이름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말대로 특정된 대상을 부르는 무언가가 없으면 기억해내기도, 추억해내기도 영 쉽지 않다는 것.
그렇게 혼자 다니는 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또 다른 사람과 조우했다. 여자보다 나이가 어려보이는 소녀는 이상하게 커다란 낫을 손에 붙들고 있었다.
소녀는 내 등에 들린 총을 보고 잔뜩 경계하는 모양새였다. 그에 비해 나는 소녀를 경계할 생각이 없었다. 소녀를 보자마자,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도 남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만나게 되면 바로 내 동생인 걸 바로 알 수 있을 거야.
이름이 아마,
“...미래.”
“...!”
“그게, 네 이름인가?”
나의 물음에 소녀는 금방이라도 울 거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나에게는 긍정의 대답인 것처럼 보였다.
여자의 말이 옳았다. 보자마자, 그 소녀가 미래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만남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할지에 대해서 나는 아직 가늠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영 불안에만 치이지 않을 거라는 자신은 들었다. 처음은 어려워도,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는 쉬울테니.
그런 예감이 들은 건 내가, 이 이름을 내가 먼저 말했을 때였다.
“나는 김철수라고 한다.”
이름...그러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밝혀진 사실이 없기에 글쓴이가 임의로 설정한 것들]
1. 김철수라는 이름은 미래의 언니가 지어준 것
2. 아마 미래와 철수가 만나는 건 미래의 언니가 사라진 뒤의 일
3. 철수는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기억하는 것’ 과 ‘지금 현실의 상황’에서 갈등을 하고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