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세 사람의 동조(Link)

용기의방패 2019-07-10 8

'세크메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새하얀 백사장과 급하게 쌓아 올린 방파제, 약간의 자줏빛이 섞인 바다뿐이었다. 붉은 머리칼이 세찬 바닷바람에 휘날려도 둘러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들릴 수 없는,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안나…? 안나, 여기 있는 거냐?"

핏빛을, 장미를 연상케 하는 붉은 머리칼의 소녀 '세트 세크메트'는 고개를 멈추고 목소리를 내었다. 목을 타고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오는 듯했다. 겨우 낸 목소리는 앳된 모습과 달리 무겁기 그지없었다. 잠시나마 그리운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곁에 없음이 분명한 동반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은 관광 명소였다. 차원종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여름이면 발 디딜 틈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 혼자였다. 넓은 백사장에 그녀 홀로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사냥터 지기의 여름 휴가.

독일에서 도망친 하버트 웨스트 호프만과 미하엘 폰 키스크 총장을 쫓아 대한민국까지 온 그들은 두 사람의 행적이 발견되기 전까지 기약 없는 휴가를 받았다. 서로 다른 임무를 수행하느라 동분서주하는 두 팀이 한 곳에 모이는 드문 일이었고, 드문 시기였다.

세트가 낯선 곳에 홀로 앉아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휴가라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1분대의 볼프강 슈나이더가 해수욕장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볼프강을 잘 따르는 2분대의 루나 아이기스가 그에 동조했고, 같은 2분대 소속인 소마가 환한 미소와 함께 찬성의 의견을 내비쳤다.

상식이 부족한 세트는 '휴가가 뭐냐?'하며 물었고, 그녀가 믿고 따르는 선생인 파이 윈체스터는 '쉬는 날입니다. 맨날 선배가 노래 부르는 그거요.' 라고 답할 뿐이었다. 두 사람이 반대의 의견을 내어도 과반수였다. 두 분대의 인원을 합쳐 겨우 다섯이기 때문이었다.

"………."

세트는 무릎을 모아 당겨 안았다.

"안나…."

잠시 스쳐 지나간 회상에 떠오른 얼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낮게 읊조렸다. 그들은 보고자 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었다. 임무가 아니어도 만나고자 하면 만날 수 있었고, 누구 하나 떠나가지 않고 곁에 있었다.

하지만 이름의 주인은, 안나는 아니었다. 잠깐 들린 목소리에도 미련이 남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었고, 더는 만날 수도 대화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혼자라는 감각이 주변을 휘감았다. 소금기가 느껴지는 바닷 바람, 뜨거운 태양과 달리 온 몸이 식어버리는 듯한 싸늘함이었다. 어린 아이에 불과한 사고는 외로움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해 '춥다'고 느껴버렸다.

"전학생! 어디 갔나 했더니, 벌써 나와있었어? 다들 수영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니까 기다리자고 했잖아. 한참 찾았어."

그 추위를 몰아내준 것은 분홍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온 소녀였다. 프릴 수영복 차림의 소녀는 해운대의 백사장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방패와 함께였다.

"루나~ 같이 가자니까! 엥? 얘는 왜 여기 있어? 선생님들이랑 같이 나오기로 한 거 아니었어?"

추위가 떠나간 자리를 포근한 온기로 채워준 것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한 몸매를 뽐내는 비키니 차림의 여성이었다.

"땅딸이… 분홍이…. 나는 그런 얘기 못 들었다. 갈아입으면 여기에서 모이자고만 들었다."

루나와 소마였다. 세트는 자신이 지어준 두 사람의 별명을 부르며 겨우 맞이했다. 그제야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게 느껴져 인상이 찌푸려졌다. 루나는 느린 걸음으로 다가와 세트의 표정을 살폈다. 소마는 폴짝폴짝 뛰는 것처럼 경쾌하게 다가와 루나의 곁에 섰다. 하지만 활달했던 목소리와 달리 눈빛이 차가운 게, 세트를 깊이 살피는 모양새였다.

두 사람의 생각은 거의 같았다.

루나는 단 한 마디로 세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을 눈치챘다. 소마는 바로 앞에서 본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 다름을 눈치챘다. 출발은 달랐지만 도착점은 같았다. 두 사람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세트의 눈빛을 잠시 외면하고 서로 시선을 교차했다. 같은 분대, 같은 팀으로 활동한 시간이 있는 만큼 둘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교환할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었나본데.'
'옷 갈아입는 그 짧은 시간에? 다른 거 아냐?'
'그거야 모르지.'

짧은 정적이 이어졌다. 루나와 소마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세트의 양 옆으로 나눠 앉았다.

"에이, 뭐 그럴 수도 있지~ 우린 그걸 탓하는 게 아니야. 무슨 일 있었어?"
"나오기 전에 선생님들한테 혼난 건 아니지?"
"볼프쌤이 잔소리 했어? 아니면 파이쌤이 옷 갈아입을 때 뭐라고 했어?"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정적을 몰아냈다. 평소에는 어린 아이처럼 활달한 세트가 이처럼 풀이 죽어있는 모습은 독일에 있을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함께 활동한 기간이 길고 짧음을 떠나 동료였다. 루나는 가지고 온 방패, 아이기스를 곁에 두고 시선을 세트에게 두었다. 소마는 발에 닿는 모래를 힘있게 찼다.

거기에 담긴 의미는 같았다. 구태여 구분짓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세트는 두 사람을 한 번씩 번갈아가며 보고 이내 시선을 무릎 사이로 떨구었다. 고개도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아니다. 이건 세트의 문제다."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없었다. 세트, 세크메트는 두 사람에게도 안나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비록 자신의 안나와는 달라도, 그 무게가 같음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쉽사리 나오지 않는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아이는 침묵하고 말았다.

보기보다 성질이 급한 루나는 절로 찌푸려지는 인상을 애써 폈다. 이곳으로 나와 혼자 있었던 시간이 불만이라면 그건 세트의 잘못이 맞았다. 하지만 정말 이야기를 못 들었다면 다른 사람들을 탓할 수도 있는 노릇 아닌가? 괜스레 큰 소리가 나오려는 걸 겨우 억눌러 입을 열었다.

"전학생. 혼자 있게 한 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말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전해지지 않아."
"아, 아니다! 혼자 있어서 그런 거 아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였어? 말해주면 안 돼? 응?"

여신의 무구한 방패가 문을 열고 전능의 영약이 붙잡았다. 이름을 빼앗긴 괴물은 환히 열린 문을 나서야 할까, 말까를 한참 고민했다. 세트는 날카로운 송곳니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긴 했지만, 과연 그 이름을 터놓는 게 옳을까? 그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나…."
"어?"
"응?"
"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나가…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어봤다. 그래서 찾아봤는데… 없어서…."

아이의 순순한 고백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에게도 안나는 친구다.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여된 조각' 중 하나였다. 세트가 어째서 말하지 않고 잠시라도 버텼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루나는 괜스레 아이기스에 닿은 손으로 주먹을 꽈악 쥐었다. 소마는 평소에 내비치지 않는 슬픈 얼굴을 하며, 한숨을 토해냈다.

"안나…."
"그랬구나. 미안해, 괜히 물어봐서."

안나.

루나에게는 드러내지 못한 진심이었다.
소마에게는 잃어버린 감정의 편린이었다.

세트는 두 사람에게 안나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아는 안나와 다름을 이해했으며, 그 무게를 알기에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바닷바람이 스치는 소리만이 곁에 머물렀다.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내리쬐는 햇빛의 뜨거움도 잊은 모양이었다. 그만큼 생각이 많았고 심경이 복잡했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이 속에서 맴돌았다.

"안나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지."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의 안나'를 떠나 보낸 소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는 별다른 말 없이 시선을 옮겨 건너편에 있는 소마를 보았다. 웃음이 떠나지 않는 소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퍽 투명해서, 꺼내려던 말도 다시 주워담아야만 했다.

"나는 항상 안나를 생각하는데."
"응?"
"나는 안나를 잊어버리면 안 돼. 안나를 잊어버리면 그 애가 가르쳐준 감정도 잊어버리는 거고, 소중한 것도 잃어버리는 거잖아."
"분홍아…."

환청일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소마는 그 물음에 대한 자신의 답을 확실히 내놓았다.

"……나는, 조금 달라. 소마나 전학생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내 안의 안나는 아직 살아있다고 했어.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했어."
"…."
"하지만 안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어. 그래서 만약, 그런 물음을 듣는다면… 아마 제대로 답하지 못할 거야. 반가워서. 그리고, 고마워서. 아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보다 고맙다는 말이 먼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분홍아…."

루나는 조금 달랐다.

하지만 세트는 두 사람의 말에 담긴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반가움. 감사. 슬픔. 기쁨. 표현하지 못한 많은 감정들이 뒤엉킨 가운데에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뭉클, 하고 치밀어 오르는 응어리를 참지 못한 세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우우우우ㅡ!"
"저, 전학생? 갑자기 왜 그래?"
"하울링?"

루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세트를 보았다. 소마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 시선을 돌렸다. 세트는 늑대처럼 엎드린 자세로 길게 하울링한 후, 새하얀 레쉬가드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나는!"
"어?"
"응?"
"나는! 안나가 보고 싶다! 안나를 만나고 싶다! 그러니까, 다른 생각은 안 할 거다! 멋진 왕국을 만들어서, 안나를 기다릴 거다. 안나가 날 보면 웃을 수 있게!"

픽.

양쪽에서 웃음 소리가 터졌다.

"풋, 뭐야 그게."
"왕국~ 왕국 좋지. 기왕이면 맛있는 게 가득한 과자 왕국이 좋지 않을까? 안나랑 과자 먹고 싶다!"
"흥! 왕국은 세트 거다! 임금님이니까! 안나가 오면, 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게 해줄 거다!"
"치사하게! 안나를 독차지할 거야? 그렇겐 안 되겠는데!"

무거움을 떨쳐낸 세트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루나와 소마는 만면 가득한 미소를 띠며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안나가 만나고 싶은 마음은 같았고, 그녀의 생각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기다린다는 그 감정에 동조하여, 덩달아 무거운 기분을 날려버릴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파이! 파이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냐! 부하 녀석이 늦으니 찾으러 갈 거다!"
"아, 잠깐만! 또 혼자 뛰어가려고? 그러다 길 잃으면 어떡하게!"
"괜찮아~ 설마 잃어버리겠어? 우리가 같이 따라가면 되지! 그럼 파이쌤도 만나고, 안나도 만나고! 일석이조겠네!"
"아하하. 그것도 그렇네."

세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기분 좋게 기지개를 폈다. 안나를 생각하느라 부드러워진 마음 탓일까? 뜨겁게 내리쬐던 태양이 봄날의 햇살처럼 부드러워진 것 같은 기분은, 단순히 착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2024-10-24 23:23:56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