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잔잔한 파도의 아리아

스즈스카 2019-07-09 14

내리쬐는 태양빛.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모래 알갱이들. 저마다 부푼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는 피서객들.

 

뜨거운 여름의 해운대는 언제나 그렇듯 바캉스의 천국이었다. 차원종들의 습격이 있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사람들은 서로의 살결을 내비치며 제각각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햇빛에 피부를 태우는 커플. 꺄르륵거리며 뛰노는 아이들.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이 이끌리는 이성을 찾는 젊은 남녀들. 모두 함께 부산에서의 한 때를 즐기는 중이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유난히 눈에 띄는 분홍머리의 작은 소녀 한 명이 자기보다 조금 키가 큰 남학생에게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 이세하! 너 당장 휴대폰 안 끄면 진짜로 부숴버린다!”

 

, 시끄럽네. 넌 그렇게 화만 내니까 키도 안 크는 거라고.”

 

뭐라고!? 너 그거 이리 내놔! 차원종들 장난감으로 줘버릴 거야!”

 

위아래로 나눠진 비키니로 드러나는 몸매는 허전하다 못해 빈약할 정도였으나 오히려 그 점이 청순한 매력을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반면 인형처럼 보이는 소녀의 행동에선 박력에 가까운 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이슬비. 유니온 소속의 클로저 팀, 검은양의 리더를 맡고 있다.

 

슬비의 짜증 가득한 시선을 독차지하는 소년도 있었다. 흑갈색 머리카락에 평범한 검은색 눈동자를 한 그는 부모들이나 할 법한 슬비의 협박에도 아랑곳 않고 스마트폰 액정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세하라고 불린 소년은 거의 클리어에 가까워진 리듬게임에 집중하느라 자신이 무슨 소릴 했는지 떠올리지 못했다. 무신경하게 내뱉은 한 마디가 소녀의 콤플렉스를 건드리고 말았다는 사실조차도.

 

그로 인한 결과는 참혹했다.

 

분홍빛 바람이 불어왔다. 숨이 막힐 듯한 폭염 속, 해운대를 꽁꽁 얼려버릴 지도 모를 한기가 담긴 그것은 순식간에 세하의 손바닥 주위를 감싸왔다.

 

이 바람이 어디서 불어왔는지 알고 있는 세하는 본능적으로 휴대폰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적어도 애지중지 키워온 이 데이터만큼은 지켜내야만 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 사악한 도깨비의 손에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

 

살짝 엄지만을 까딱거리면 되는 그 찰나, 세하의 손바닥까지 파고든 바람이 선수를 쳤다.

 

“……?”

 

, 눈 깜짝할 새라는 말조차 길 정도의 찰나. 세하가 강하게 붙들고 있던 휴대폰이 모습을 감췄다.

 

어느 틈에 뺏어간 것일까. 슬비의 한쪽 손에 붙들린 휴대폰은 그대로 게임을 진행시켜, 붉은 글씨로 ‘GAME OVER’ 라는 단어를 화면에 내비치고 있었다.

 

끝났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만 것이다.

 

돌이킬 수 없다. 모든 것이 태초로 돌아간다. 저장되지 않은 데이터가 모조리 파괴되고 세하의 손에서, 가슴에서, 기억에서 사라져간다.

 

난 분명 경고했어. 제대로 듣지 않은 건 너야.”

 

! 방금 그게 마지막 판이었다고! 그거만 깨면 클리어였는데! 내 노세이브 원코인 클리어라는 인생 최대의 업적이이이!!”

 

시끄러워! 우리가 지금 놀러 온 줄 알아!?”

 

바들바들 손을 떨며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소년의 모습은 슬비에게 있어 중독자 이상 뭣도 아니었다. 반면 세하의 시점에선 게임의 폭력성을 실험하겠다며 피시방의 두꺼비집을 내려버린 뉴스를 연상케 할 정도로 악랄한 짓이었다.

 

어두운 노래와 함께 패배자임을 인식시키는 세하의 휴대폰 화면. 그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한 은발의 소녀가 다가왔다.

 

작은 입에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도로 빼내며 은색 장발을 길게 묶은 소녀는 세하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향했다.

 

이슬비의 말이 맞다, 이세하. 너도 이제 어엿한 클로저로서 자각을 하는 것이 좋다.”

 

티나 씨까지…….”

 

티나라고 불려진 은빛의 작은 소녀는 언뜻 보기에 슬비보다 더욱 초라한 몸매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신체가 대부분 기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안다면 누구든지 실례되는 생각을 뜯어고치게 될 것이리라.

 

마음만 먹는다면 그 어떤 여성보다도 파격적인 신체를 구성할 수도 있다.

 

비록 그 가녀린 팔뚝에는 아동용 팔튜브가 하나씩 달려 있고 허리에도 분홍색 꽃무늬가 들어간 튜브를 하나 더 차고 있었지만, 절대로 어린아이가 아니다.

 

티나가 와삭와삭 아이스크림을 씹어 먹으며 세하에게 말을 이어갔다.

 

오늘 우리의 임무를 잊어먹은 건 아니겠지. 이 시기에 몰리는 피서객들의 안전 확보 및 질서 유지. 그런데 느긋하게 휴대폰이나 바라보고 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군.”

 

척 보기에도 들뜬 사람(내지는 로봇)이 그런 소리를 해도 납득할 리가 없다. 세하는 그저 묵묵히 티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 . 그러네요.”

 

라고 영혼 없는 대답을 들려줄 뿐이었다. 티나는 의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소년을 지긋이 바라보며 마지막 한 입 남은 아이스크림을 아그작아그작 씹어서 삼켰다.

 

, 이세하! 기껏 티나 씨가 다시 설명을 해주는데 그게 무슨 태도야, 너는!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역시나 슬비였다. 허리춤에 양 팔을 얹은 채 분홍머리의 소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슬비의 진심을 담은 잔소리에도 이젠 진절머리가 나는 세하에게 피해는 0에 수렴했다.

 

예이, 예이. 그러니까 대충 앉아서 사람들 사고 안 나게끔 봐주라는 소리잖아. 그 정도라면 게임 하면서도 여유롭게 할 수 있다고.”

 

그런 게 되면 누구도 고생 안 하……!”

 

즉각 반론할 준비를 하는 소녀. 그 말을 틀어막은 것은 어디선가 쑤욱 다가온 음료수 캔 하나였다.

 

싸늘하게 식어있는 캔이 볼에 닿자마자 슬비는 작은 어깨를 한껏 웅크리며 토끼눈을 만들었다.

 

히야아앗!?”

 

어머, 꽤나 귀여운 비명이네요. 이건 앞으로도 괴롭힐 맛이 나겠는걸요?”

 

쿡쿡 웃으며 나타난 것은 하피. 티나와 같은 늑대개 팀 소속의 클로저였다.

 

매력적인 눈물점과 함께 선보이는 미소는 근처를 지나가던 남자들의 시선을 빼앗아가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세하조차도 귀신처럼 불쑥 나타난 하피의 기척보다는 그 눈웃음에 놀라고 있을 정도였으니.

 

물론 조금 다른 의미로도 하피는 매력적이었다. 오일로 반짝이는 피부 위의 검은색 원피스 수영복은 등 부분만 파여서 청초하면서도 성숙한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었다.

 

하피의 산뜻한 미소에 먼저 반하느냐 그녀의 외모에 먼저 반하느냐. 해운대의 뭇 청년들은 그 갈림길 사이에 서서 심히 갈등을 빚고 있었다.

 

모래사장에 쭈그려 앉아 티나는 텅 빈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깃발처럼 꽂았다. 그 주위로 모래를 끌어오더니 양 손을 살살 움직여 터널을 파듯 두꺼비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귀엽기만 한 티나의 행동에 신경조차 주지 못한 채 슬비가 꽥 소리쳤다.

 

하피 씨! 놀랐잖아요!”

 

후후, 죄송해요. 그래도 이 즐거운 공간에서 화만 내고 있는 것은 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이왕 부산까지 온 거, 조금은 어깨에서 힘을 빼는 것도 좋을 거라고 보는데요.”

 

눈웃음을 지우지 않고 하피는 딸기맛 탄산 음료를 슬비에게 건네줬다. 캔 표면에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혀있는 것을 보아하니 방금 막 아이스박스에서 꺼내온 것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뚱한 표정을 지은 채 캔음료를 받아 뚜껑을 연 슬비.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키는 소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하피도 손에 있던 무언가를 벌컥벌컥 마셨다.

 

고개를 들어 새콤한 음료수를 목 너머로 삼켰다. 시야 끝에서 하피가 뭘 마시는 것인지 보려 했으나 절묘하게 상표가 가려져서 실패하고 말았다.

 

캬아, 청량감에 숨을 내뱉는다. 적당한 때에 끼어들어준 하피 덕분에 슬비도 잠시 머리를 식힐 수가 있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좋은 기회일 지도 모른다. 검은양, 늑대개, 그리고 사냥터지기. 세 팀의 화합을 도모하는 목적은 둘째치고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일들에 잠시 쉼표를 찍을, 그런 기회일 것이다.

 

신서울에서 시작된 싸움은 어느덧 전 세계를 뒤덮었다. 그것에 종지부를 찍은 소년 소녀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버팀목이 되어준 어른들.

 

그 싸움의 끝에서 이런 휴가가 있어도 결코 나쁘진 않으리라. 생각이 조금 고쳐지니 세하에게 괜히 짜증을 낸 것은 아닐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딱딱한 리더로서의 임무는 조금 내려놓자. 융통성이라는 것은 이럴 때 발휘해야 하는 법이다. 슬비는 하피가 건네준 음료수 캔을 조금 바라보고는 조금 웃었다.

 

“……저기, 하피 씨. 고맙……,”

 

, 그럼. 전 이만 잘생긴 남자들이라도 낚으러 가볼게요. 역시 여름에 바다라고 하면 헌팅 아니겠어요?”

 

가벼운 미소가 망가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볼을 경련시키는 슬비의 모습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맛깔 나는 것이었다. 그제야 슬비는 하피가 마시고 있던 음료수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하피 씨! 해변에서 음주는 금지라는 걸 모르세요!? 게다가 백주대낮에 당당하게 헌팅이라니, 비상식적이에요!”

 

우후후, 조금 전까지 고맙다는 표정으로 절 바라봤던 꼬마 후배님이 또다시 꼬마 트레이너 님으로 돌아왔네요. 걱정 마세요. 선은 넘지 않을 테니까.”

 

음흉한 미소와 함께 하피는 도망치듯 저만큼 앞을 달려나가버렸다. 분명 위상력을 사용하는 낌새는 없었는데도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그녀의 신이 난 뒷모습을 향해 슬비는 참아왔던 고함을 내지르고 말았다.

 

선은 안 넘다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대체━━!”

 

 

 

***


 

, 슬비야……괜찮아?”

 

커다란 파라솔 밑, 슬비는 끙끙대며 검은양 팀원인 서유리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한번에 주입된 대량의 스트레스는 따가운 태양빛에 더해져 현기증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버렸다.

 

그대로 모래사장에 풀썩 쓰러진 슬비를 티나가 지체 없이 등에 업고 관리요원인 김유정에게 달려갔고,

 

『열사병이다. 당장 치료가 필요하다.

 

……라는 말 한 마디에 지금 이런 상황이 됐다.

 

열사병보다는 화딱지가 더 어울릴 법한 증상이었지만 당황해서 응급상자까지 가져오는 유정과 유리를 보자 슬비는 솔직하게 고백할 수조차 없었다.

 

그늘 밑에 누워있는 슬비와 그 옆에 앉은 유리. 검은 장발의 미소녀는 얼음팩으로 이마를 찜질해주며 지치지도 않는 듯 벌써 몇 십 분이나 부채를 흔들어주는 중이었다.

 

유리의 팔과 함께 흔들리는 꿈의 지방덩어리에 슬비는 오래간만에 질투를 느끼게 되었으나 그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끙끙거리는 와중에도 슬비가 힘겹게 말을 건넸다.

 

미안해, 유리야. 너도 놀고 싶을 텐데, 괜히 나 때문에…….”

 

으응? 에이, 사과하지 마. 우리 슬비 놔두고 놀면 나도 걱정돼서 안 된다구.”

 

해맑게 웃으며 대답하는 유리. 그 표정에 한줌 거짓이 없음을 슬비는 진작 알아채고 있었다.

 

하지만 하피의 말이 아까부터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왕 부산까지 왔는데.

 

백 번 맞는 말이다. 평소엔 꿈도 꾸지 못할 휴가를 모두가 함께 즐겨야 한다. 명목상 안전요원 활동을 맡고는 있지만 거기에 세 팀의 모든 클로저들이 매달릴 필요는 없으니 한두 명씩 교대로 남아있으면 그만인 일이다.

 

너무 고지식한 면모가 있다는 것을 슬비 본인도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의 성격이란 쉬이 고쳐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라며 슬비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신나게 놀아야 한다. 적어도 슬비 자신은 빼놓더라도 다른 팀원들 모두는 이 휴가를 재미있게 즐겨야만 한다. 슬비는 유리의 부채질하는 팔을 붙들며 생긋 웃어주었다.

 

놀고 와. 난 걱정하지 말고.”

 

……? , 그래도…….”

 

괜찮대도. 잠깐 누워서 쉬고 있으면 나을 거야. 아깐 티나 씨가 괜히 요란을 피웠을 뿐이니까 그렇게까지 안 해줘도 돼.”

 

유리의 손에서 부채를 가볍게 가져오며 슬비는 그저 작은 미소를 입가에 붙인 채였다. 힘이 빠진 목소리가 더욱 유리의 등쌀을 내몰고 있었다.

 

, 으응…….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 싶으면 꼭 불러야 한다? 알았지, 슬비야?”

 

알았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마지막으로 신신당부를 하며 유리는 천천히 파라솔 밖으로 나섰다. 힐끔힐끔 고개를 돌려 슬비를 돌아봤지만 상냥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그 모습에 도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바다에선 클로저 요원들끼리 공을 튕기며 놀고 있었다. 무리를 지어 즐겁게 놀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서는 유리를 보며 슬비는 다시 파라솔 밑, 큼직한 돗자리 위로 몸을 뉘였다.

 

사실은 아까부터 편두통이 끊이질 않는 슬비였다. 지금까지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열사병에 걸리고 만 것일까. 지끈거리는 앞머리에 얼음팩을 올려놓으며 분홍머리의 소녀는 중얼거렸다.

 

나도 놀고 싶다…….”

 

? 뭐라고 하셨나요, 슬비 양?”

 

슬비 스스로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거기에 대답하며 새로운 인영 하나가 나타났다.

 

하피처럼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 하지만 마음마저 훔쳐버릴 듯한 바람은 없었고, 이마를 시원하게 하는 냉기가 슬비의 기분을 침착하게 만들고 있었다.

 

, 파이 씨였군요. 무슨 일이세요?”

 

큼지막한 밀짚모자를 눌러 쓴 흑발의 여성, 파이 윈체스터. 하피처럼 글래머도 아니고 슬비처럼 슬림하지도 않은 중간 정도의 몸매였지만 들어갈 곳은 쏙 들어간 체형을 돋보이게 하는 비키니가 제법 잘 어울렸다.

 

파이가 얼음물이 담긴 페트병을 건네며 유리가 앉아있던 곳에 다소곳이 자리했다. 고개를 끄덕여 감사의 제스처를 취한 슬비가 살짝 몸을 일으켜 병에 있던 물을 조금씩 마셨다.

 

슬비 양이 쓰러졌다고 하길래 바로 달려왔죠. 앨리스 양도 엄청 걱정했다고요. 지금 바로 유니온의 구급팀을…….”

 

푸후웁! 요란하게 물을 뿜으며 슬비는 사래가 들린 목을 부여잡고 콜록콜록 기침을 연발했다.

 

파이는 놀란 나머지 슬비에게 다가와 등을 두들겨주기 시작했다.

 

, 괜찮습니까 슬비 양!? 지금쯤 앨리스 양이 구급팀의 호출을 끝냈을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콜록, 콜록!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전 괜찮으니까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열사병은 심할 경우 사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 예전에 한국에서 방영했던 프로그램 있지 않습니까? 뭐였더라……, 위기탈출 첫번째!”

 

“……거기서 본 내용은 대부분 잊는 게 좋으실 거에요.”

 

겨우겨우 기침이 멎은 슬비. 파이도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절대로 안도의 한숨이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한탄에 가까운 것이었다.

 

척 보기에도 가녀린 소녀는 괜찮은 상태가 아니었다. 꽤나 눈썰미 좋은 앨리스가 응급팀까지 호출하려 한 이유는 열사병 이외에도 있었다.

 

조금 충혈된 눈은 지난밤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시야도 흐릿해진 것인지 두 동공의 초점은 어딘가 어긋나있었고 계속해서 몸이 비틀거리는 데다가 볼도 붉게 달아올랐다.

 

과로. 그것도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넣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런 상태로 태양빛 아래에서 안전요원 업무까지 담당하는 것은 분명 무리였을 것이다. 며칠 동안이나 밤샘을 한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여지는데, 대체 이 팀의 어른들은 뭘 하고 있는 것인가. 화까지 치밀어 오를 정도였다.

 

게다가 같은 팀원들도 파이의 눈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리더라는 명목으로 한 명의 소녀에게 얼마나 많은 업무를 떠넘기는 것인가. 슬비가 이렇게 부산까지 와서 무리하는 것을 어느 누구도 말리지 않았단 말인가.

 

평소에 김유정 관리요원을 좋게 봐왔던 만큼 반작용으로 인한 분노도 상당히 커다랬다.

 

하지만 함부로 나설 수 있는 입장은 아닌 파이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을 건네봤다.

 

저기, 슬비 양.”

 

?”

 

겨우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제가 이렇게 참견하는 것도 우습지만,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슬비는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몰랐다. 그저 냉수를 홀짝이며 파이의 진지해진 눈동자를 마주보고 있었다.

 

힘들지 않으십니까? ……언제나 검은양 팀의 리더로서 일하는 거요.”

 

단 한 마디. 주저하며 천천히 내뱉은 한 마디.

 

그것은 슬비가 언제나 들어왔던 말임을 파이로선 알 길이 없었다.

 

슬비가 흐릿해진 눈빛을 아래로 떨궜다. 양 손으로 꼭 쥐고 있는 페트병에 맺힌 물방울이 뽀얀 허벅지 위로 똑 떨어졌다.

 

지긋이 그것을 바라보며 소녀는 작게 웃을 뿐이었다.

 

그게 리더니까요.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야만 하고 우수해야 하며 힘든 것을 내색하면 안 돼요.”

 

“…….”

 

파이는 슬비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런데 다른 팀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봐요. 검은양 팀의 리더 이슬비가 아닌,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 이슬비로 봐주네요.”

 

그건……참 다행이네요.”

 

, 다행이죠. 정말로 다행이죠.”

 

이어지는 것은 작은 침묵. 주위에서 들려오는 잡다한 소음들은 안개가 걷히듯 사라져갔다. 아이와 어른이 담소를 나누는 파라솔 밑의 그늘만이 별개의 공간으로서 존재하는 듯 했다.

 

슬비가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전 더더욱 열심히 해야만 해요. 고등학생 이슬비로서 면모도 보여줘야 하고, 리더 이슬비로서도 역할을 게을리 하면 안 돼요.”

 

그것은, 파이의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었다. 빛깔이 다른 두 눈을 동그랗게 만든 채 여린 소녀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봐 왔던 어느 어른보다도 의젓한 눈빛을 가진 한 명의 클로저가 있었다.

 

완벽해야만 해요. 팀원들을 안심시키고 뒤에서는 모든 업무를 깔끔히 수행해낸다. 그래야만 팀원 모두가 편해질 테니까요.”

 

, 잠깐만, 잠깐만요. 그럼 당신은……자기자신의 의지로 스스로를 혹사시키고 있다는 말입니까?”

 

놀란 나머지 파이는 슬비의 양 어깨를 붙들었다. 그 힘에 밀려 돗자리 위에 풀썩 쓰러진 슬비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척 보기에도 슬비 양은 쓰러지기 일보직전인데, 그걸 스스로가 바라고 있다는 소리입니까? 그러다가 정말로 잘못되기라도 하면요! 대체 누가 그걸 바란다는 겁니까?!”

 

저항을 할 의지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할 수 없었던 것일까. 맥 없이 돗자리 위에 넘어진 슬비를 뚫어져라 바라봤지만 파이로선 소녀의 진의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파이의 머리에서 떨어진 밀짚모자가 그늘과 양지의 경계에 떨어졌다. 슬비가 놓친 페트병이 모래사장 위를 굴렀다. 너저분하게 모래가 묻는 그것을 두 클로저 중 누구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꽈악, 얇은 어깨를 붙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피로로 인해 흐릿해진 동공. 푸석푸석해진 피부와 살짝 엿보이는 다크서클. 혹사가 아니라 자해에 가까운 노동의 증거였다.

 

이게 정녕 18살짜리 고등학생이 짊어질 무게란 말인가.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파이는 가슴을 파헤치는 듯한 격통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선지 소녀의 표정이 공허하게 보인 것은 왜일까. 어쩌면 파이의 기억 한 켠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한 아이와 겹쳐 보인 탓일 지도 모른다.

 

“……아파요, 파이 씨.”

 

조용히 들려오는 슬비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는 듯했다. , 번뜩 정신을 차린 뒤에야 파이는 지레 놀라며 슬비의 몸 위에서 비켜났다.

 

, 죄송합니다. 결례를 범하고 말았군요.”

 

짓누르던 무게가 없어지자 슬비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피로 탓에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듯, 소녀는 가녀린 팔을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부산까지 온 것일까. 대체 얼마나 참고 견뎌냈을지 파이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슬비가 살짝 손가락을 튕겼다. , 조금 엇나간 소리가 울리자 저만치 굴러갔던 페트병이 둥실 떠올랐다. 그 광경을 본 주위의 피서객들이 놀라거나 신기해하는 반응을 보였으나 파이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되지 않아요. 이래 보여도 정도는 지키고 있으니까요.”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하며 슬비는 파이의 물음에 대답했다.

 

제가 쓰러진다거나 하면 팀원들이 죄책감을 가지겠죠. 그렇게 되지 않게끔 항상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파이는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언제나 그렇듯 세하한텐 잔소리를 할 거에요. 유리의 응석을 받아줄 거고, 제이 아저씨한텐 리더로서의 조언을 구하겠죠. , 저한테 그림을 자랑하는 미스틸을 칭찬해줄 거에요. 유정 언니한테 덤덤하게 보고를 올린 다음엔 은이 언니랑 잠시 잡담을 떨겠죠. 그게 항상 이슬비라는 사람이 보여주던 모습이니까요.”

 

뚜껑을 열어 조심스럽게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슬비는 작게 숨을 뱉었다. 얇은 입술에서 뱉어진 호흡이 묵직하게 들려왔다.

 

파이는 바닥에 떨어졌던 밀짚모자를 주워들어 모래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까끌까끌한 챙 부분을 잠시 손 끝으로 만지작거리다 옆에 앉은 소녀에게 눈을 돌렸다.

 

생각보다 자기중심적이군요, 이슬비 양은.”

 

“……?”

 

생각도 못한 단어에 흠칫 놀라며 슬비는 눈살을 찌푸렸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불쾌감의 표시에도 파이는 무표정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쓰러지면 팀원들이 죄책감을 가진다고요? 천만해요. 이미 팀원들은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 차있을 겁니다.”

 

서슴없이 내뱉는 파이의 말은 틀림없는 제3자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슬비의 마음을 완벽하게 꿰뚫어 볼 수도 없고, 검은양 팀의 분위기를 전부 알 수도 없는 입장이다.

 

그렇기에 나올 수 있는 말도 있다.

 

주관적인 당사자가 아닌, 객관적인 타인이라서 집어낼 수 있는 사람의 심리가 있다.

 

아무리 내색하지 않는다고 한들 과연 이슬비 양의 무리하는 모습을 모를 줄 압니까? 숨기고 감춰봤자 모두 진작에 눈치채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해주는 겁니다. 그게 팀이고, 그게 동료라는 겁니다.”

 

점점 고조되는 목소리. 하지만 감정은 일정 수준에서 절제되어 파이의 말에 진정성을 더해주고 있었다.

 

슬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저 파이의 두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슬비 양의 상냥한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슬비 양의 그러한 상냥함이 팀원들에게는 역효과라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설령 처음 의도대로 팀원들이 당신의 속마음을 모른다고 해도 그건 결국 기만이고 거짓일 뿐입니다.”

 

, 그래도 다른 팀원들이 편안해진다면 저는 그거로…….”

 

그렇다면 슬비 양은요?”

 

파이답지 않게 냉정한 태도였다. 그녀는 슬비의 말을 뚝 잘라내고 간단한 물음 하나를 던졌다.

 

마치 의젓해지고 만 아이를 꾸짖는 듯한 어른의 모습. 파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슬비는 작게 신음했다.

 

두통이 이어졌다. 눈 앞이 뿌옇게 번져갔다. 귀까지 퍼져가는 열이 아려왔다.

 

멀어지는 시야의 끝에서 파이의 시선만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슬비 양이 다른 팀원들을 아끼고 챙겨준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정작 슬비 양은 누가 챙겨주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야 물론, 다른 팀원들이…….”

 

이내 슬비는 말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었다. 파이의 이어질 말이 예상이 됐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파이가 이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팀원들과 쌍방으로 돕는 리더가, 정말로 이렇게까지 지치고 피로에 찌들 수가 있을까요?”

 

차분하게. 평소 보여줬던 얼음과도 같은 객관성으로. 파이는 두 번째 물음을 내놓았다.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질문하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으니, 이것으로 짧은 문답은 끝나는 것이다.

 

슬비는 머릿속에서 파이의 말을 조합해냈다. 끼워지는 퍼즐 조각들 속, 소녀에게 유난히 충격적이었던 발언 하나가 귓가로 튀어 올랐다.

 

자기중심적.

 

항상 타인을 위해서 노력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파이의 단어 선택은 공격적으로까지 느껴졌었다.

 

슬비는 리더로서 모두의 모범이 되는 동시에 팀원들을 안심시키는 기둥이 되고자 했다. 내심 이타적이고 배려심이 깊다고 자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파이의 시점에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녀는 떠맡지 않아도 되는 짐을 스스로 만들어 어깨에 맸고, 아무도 원하지 않는 고통을 혼자서 짊어진 채 아파하고 있었다.

 

모두가 즐거워야 하는 바캉스에서 슬비 혼자만 마음속에서 바위와도 같은 무게를 떠안고 있는 중이었다.

 

꾹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밑으로 떨궜다. 바다처럼 깊고 푸른 슬비의 눈동자는 커다란 상실감, 혹은 허탈감으로 가득했다.

 

파이가 주섬주섬 밀짚모자를 들어올렸다. 끄트머리가 어수선하게 매듭지어진 그것을 바라보며 어른으로서, 선생으로서 말을 열었다.

 

슬비 양이 갖고 있는 리더상이 틀렸다고는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한다고 해도 모두가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을 들으며 슬비의 뇌리에는 방금까지 자신을 간호해줬던 유리의 표정이 떠올랐다.

 

언제나 바보처럼 해맑게 웃고 있던 동료가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한 눈빛을 보내왔었다. 항상 웃고 트러블이 생길 때마다 분위기를 정리해주던 친구가 아무런 말도 건네오지 못했다.

 

이미 팀원들은 당신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가득 차있을 겁니다.

 

파이의 말이 맞다. 유리가 뒤를 돌아보며 슬비에게 울상을 지었던 것은 분명 슬비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분명 슬비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계속 간호하겠다며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팀원의 모습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팀원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비의 가슴 한 켠에 끔찍한 죄책감이 파고들었다.

 

, 하고 머리에 무언가가 올려졌다. 가벼우면서 큼지막한 그것은 파이가 쓰고 있었던 밀짚모자였다.

 

파이가 생긋 웃어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의 뒤에서 거품을 물고 오는 파도가 보였다.

 

조금은 팀원들과 나눠도 괜찮아요.”

 

단 한 마디. 짧고도 간결한 말이었다.

 

사락사락, 밀짚모자 위에서 파이의 손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선생에게 소녀는 오래간만에 어깨에서 힘을 풀어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은 존경, 또는 감사의 표시였다. 슬비는 양 손을 들어 꾸욱 밀짚모자를 눌러 쓰며,

 

“……고마워요.”

 

라고 작게 대답했다.

 

해운대에 파도가 밀려온다. 분홍머리 소녀의 심금을 울리는 아리아도 잔잔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거품처럼 중압감이 녹아내리며 슬비는 살짝 눈을 감아 파이에게 몸을 맡겼다.

 

 

 

***

 

 

해가 서서히 저무는 시간대임에도 바닷가에는 피서객이 거의 줄지 않았다. 오히려 석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바다에서 장난을 치는 인파가 더욱 늘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으음, 하고 작게 목소리를 흘리며 슬비가 눈을 떴다. 눈꺼풀이 열리며 나타난 푸른색 눈동자는 평범한 한국인이 보기에 굉장히 이질적으로 다가올 법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의 제일 근처에 있던 것은 비슷한 색의 눈을 하고 있는 또래의 소녀였다. 검은색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부채를 흔들고 있는 소녀에게 슬비가 나지막이 말을 붙였다.

 

왜 안 놀고 여기 있어, 유리야?”

 

, 어어? 아니, 그게, 그냥……에헤헤.”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유리. 아무래도 피로를 견디지 못해 잠에 빠졌던 슬비를 계속 옆에서 간호해준 모양이었다.

 

그렇게 놀고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슬비는 속으로 생각하며 눈을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파이 씨는?”

 

? , 조금 전에 구조요원 교대하러 가셨어. 볼프강 씨가 계속 땡땡이 친다고 하니까 엄청 화를 내시더라.”

 

아마 그 뒤, 볼프강은 파이와 앨리스에게 된통 혼이 났을 것이다. 당분간 사냥터지기 팀에서 그 혼자만 휴가를 받지 못하겠지. 훤히 보이는 결말에 슬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직후, 유리에게 얼굴을 마주하며 슬비가 말했다.

 

너도 놀고 오라고 했잖아. 왜 여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

 

낭비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도 얘기했지만 슬비 네가 빠지면 신경 쓰여서 제대로 못 논단 말이야.”

 

유리가 시선을 밑으로 떨구며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친구의 진지한 대답에 슬비는 잠시 벙찌고 말았다.

 

그제야 슬비는 유리가 무릎베개를 해주고 있단 것을 알아차렸다. 폭신함에 너무 편안했던 탓일까, 유리가 코 앞까지 다가와있었음에도 슬비는 뒤통수를 지탱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다리가 슬슬 저려오는 듯 발을 몰래 꼼지락거리면서도 내색하지 않는 모습에 슬비는 조금씩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다리 아프지? 그만 해줘도 돼.”

 

아냐아냐, 괜찮아. 우리 슬비 고생하는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별 것도 아니지, .”

 

유리는 그렇게 말하더니 해맑게 웃어보였다. 석양을 등진 소녀의 웃음은 순수함 그 자체였다.

 

바닷바람에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보며 슬비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 파라솔 위로 펼쳐진 붉은 하늘과 금색 구름이 슬비의 흐릿했던 시야를 또렷하게 만들어주었다.

 

━파이의 말이 맞았다. 벌써 한 팀원은 슬비가 몰래 애쓰는 것을 알아차린 뒤였다.

 

직접 본 것이 아니라고 해도 눈치챌 수 있다. 그게 동료라는 것을 슬비는 까맣게 잊어버렸었다.

 

모든 것을 혼자 떠맡았다고 생각했는데, 검은양 팀원들에겐 걱정만 끼치게 된 셈이다.

 

자기중심적이었다. 자신의 예상대로만 모두가 움직이고 마음을 먹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검은양 팀의 리더로 막 부임했을 때랑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라며 슬비는 몸을 돌려 누웠다. 유리에게 등을 보이자 흠칫 놀라는 낌새가 직접 전해졌다. 안절부절 못하는 유리에게 슬비가 먼저 입을 뗐다.

 

“……그럼 좀 더 부탁해도 될까?”

 

아주 짧은 텀이 있었다.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

 

그리 말하며 유리는 부채질하던 손에 더욱 힘을 더했다.

 

저만치에서 다가오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같은 팀의 세 남자들이었다. 제각기 음료수와 간식 따위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세하는 슬비가 즐겨 마시던 딸기 우유를 들고 왔다. 제이는 김이 나오는 차를, 미스틸테인은 떡볶이를 고른 듯했다.

 

바다에 발을 넣은 늑대개 팀이 공놀이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버럭 소리치는 나타와 그에게 집중적으로 스파이크를 치는 티나. 술에 취해 깔깔 웃는 하피는 바이올렛과 레비아에게 달라붙어 주정을 부리고 있었다.

 

사냥터지기 팀의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인 것이 보였다. 모래찜질을 하며 쿨쿨 잠에 빠진 볼프강. 그에게 다가선 루나와 소마, 세트가 키득키득 웃으며 볼프강을 덮은 모래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파이는 그 뒤에서 코코넛 주스를 마시며 슬비와 잠시 미소를 주고받았다.

 

슬비 양은 혼자가 아닙니다. 파이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솔솔 풍겨오는 바다내음이 부채질로 더욱 커지며 슬비의 콧잔등에 얹혔다. 따뜻한 유리의 다리 위에서 슬비는 다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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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23:23:5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