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그 선배를 암살하는 법-中-

월하령 2019-07-09 3

#해운대 #수영복










“아~정말 즐겁네요. 만족했어요.”

 

“하하…하하하…….”

 

 

그로부터 대략 1시간 후,

묘하게 광택을 띄고 있는 하피의 웃는 얼굴을 마주한 파이는 한껏 피곤해진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정말로, 1시간 내내 옷만 갈아입혀 질 줄이야.

비슷한 옷만 입어왔던 지금까지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그, 그건 그렇고…이 옷….’

 


난생 처음 해 보는 열띤 패션쇼의 결과, 걸치고 있는 수영복을 내려다보던 파이의 얼굴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간다.

 



-어느 정도 폭이 있는 하늘하늘한 프릴로 장식된 상의


-악센트를 주기 위해서인지 한쪽 팔에만 묶어놓은 천 같은 형태의 액세서리


-두 줄의 끈으로 고정되어 옆이 트여 보이는 하의까지.

 



세상에, 망측해라.

이렇게 파렴치한 복장을 입어 본 적이 태어나서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파격적인 차림새가 아닌가.

 



“저기…여협? 이 옷…노출이 좀 많은 것 같은…데요.”


“비키니라면 그 정도는 보통이지 않나요? 그리고,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굉장히 잘 어울려요.”


“그,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노출도는 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거절했다간 기껏 권해준 옷을 거부해버리는 형태가 되어버릴 텐데?

아까의 실례를 사죄하기 위해서라도 꾹 참아야 하나?

갖은 고민으로 복잡하게 변해가는 파이의 얼굴을 바라보던 하피는, 고른 수영복을 들고 탈의실 쪽으로 향했다.

 


“요컨대,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말이죠?”


“구, 굳이 말씀드리자면…그, 그런데요.”


“그거라면 걱정 마세요. 사람이라는 건 비교대상이 있으면 그런 마음을 크게 덜어낼 수 있는 법이니까.”


“예?”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살랑거리는 몸짓으로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는 하피.

그리고 잠시 후, 문을 열고 그녀가 나온 순간-파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느끼고 있던 부끄러움이 싹 날아가는 충격을 받고 입을 벌리고야 말았다.

 


“이거 괜찮네요. 착용감도 나쁘지 않고.”


“……….”

 


그야 그렇겠죠.

 


-면적으로 따지면 가슴을 절반밖에 가리지 않은 상의.


-상의 가운데에서 괜히 시선을 집중시키는 수정 장식.


-자신이 입고 있는 것 이상으로 노출이 심해보이는 하의.

 


입은 사람의 우월한 스타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입기 전에는 ‘노출이 심하다' 정도로 받아들여지던 것이, 지금은 같은 여자인 자신마저 홀릴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무심코 ‘저 차림에 비하면 지금 입고 있는 수영복은 훨씬 얌전하잖아’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때요? 제 차림에 비하면, 파이 씨는 굉장히 얌전해 보일 것 같은데요?”


“그렇…네요. 덕분에 완전히는 아니지만 살짝 부끄러움이 가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파이 씨는 충분히 매력적이에요. 그런 차림으로 당당하게 나선다면…홀리지 않을 남자는 아마 없을 거라고요.”


“나, 남자라니!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튀어나온 기습적인 발언.

깜짝 놀라는 파이를 향해, 하피는 미묘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 선배에게 잘 보이려고 수영복을 사려고 했던게 아니었나요? 전 그런 줄 알았는데.”


“미리 말씀드렸잖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놀고 있는데, 괜히 분위기 깨고 싶지 않아서-.”


“그건 그냥 핑계인줄 알았죠.”


“끄으응….”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태도를 보아하니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괜히 옷 갈아입히는 인형이 된 것 같은 복잡한 기분에, 파이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여협께선 생각보다 짓궂은 분이셨군요.”


“후후, 미안해요. 하지만 잘 어울린다는 건 진심이에요. 당당하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들의 어지간한 남자 정도는 단번에 홀릴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진심이고요.”


“그런 식으로 칭찬을 받아 본 적은 없어서…좀 어색하군요. 그래도 좋게 봐 주시는 것 같아 기쁩니다.”


“속는 셈 치고 당당하게 나서보세요. 파이 씨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재미있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그 말과 함께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먼저 가게를 나서는 하피.

멍하니 거울에 비친 수영복 차림의 자신을 바라보던 파이는, 그녀가 했던 조언을 가만히 되뇌어보았다.

 


“당당하게….”

 

  

가만 생각해 보니, 조금 전 볼프강에게 놀림 받았던 일이 슬그머니 떠올랐다.

아까까지 고지식하던 자신의 모습이라면 또 ‘잔소리 한다’며 진저리만 치게 하겠지만…지금이라면?

 


"…….”

 

  

그래도 조금 부끄러웠던 탓일까.

매장 안을 둘러보던 파이는, 마침 눈에 띈 상품 하나를 집어 계산대로 가져갔다.

 


“실례합니다. 이 밀짚모자까지, 계산 부탁드리겠습니다.”

 

  



 







 

“으…괜히 주변이 신경 쓰이는데.”

   

 

밀짚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해변을 가로지르는 파이.

기분 탓인지 요원복을 입고 있을 때보다 시선이 더 쏠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당하게 행동해보라는 조언을 듣긴 했지만, 역시 스스로 실천하는 건 어려운 법이라 그런 걸까.

   

 

‘평정심…평정심….’

   

 

어릴 적, 마을에서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던 기억을 떠올리며 깊게 숨을 내쉬는 파이.

아주 조금씩 요동치던 마음이 잔잔하게 변해가려는 찰나,

   

 

“파이! 큰일났다-!!”


“?!”   

 

갑자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고개를 들어보니, 맞은편에서 붉은 머리의 소녀가 이쪽으로 맹렬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세트!”


“큰일났다! 큰일났어!"


“무슨 일입니까?! 아, 아니 그보다 옷도 갈아입었는데 어떻게 절 단번에-.”


“냄새로 알았다! 어쨌든! 선생님 녀석한테 큰일났다!”

 

  

선생님 녀석.

세트가 볼프강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었다.

설마, 그 느슨한 선배가 무슨 사건에라도 휘말린 걸까.

그것도 세트가 당황해서 달려올 정도로 심각한 사태에?

 



“침착하고 말해주세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서, 선생님 녀석이 사냥당하고 있었다.”


“네? 사냥이요?! 차원종입니까?!”


“아, 아니다. 어떤 여자들한테….”


“……? 위상능력자입니까?”


“아니…평범한 사람들이다.”

 


심각해지려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의문으로 가득 차오른다.

한없이 느슨해보여도 할 땐 하는 사람이, 특별히 위험한 것도 아닌 일반인들에게 ‘사냥’을 당하고 있다고?

 



“저기…세트? 그 말,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분홍이가 분명 이렇게 말했다. ‘볼프쌤은 지금 헌팅 당하고 있는 거야’ 라고….”


“…….”


“그리고 ‘재미있으니까 가만히 두고 보자’ 라고도….”


“……….”

  

  

다시금 밀려오는 두통에 파이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그 사람은 대체 민간인하고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아무리 쉬고 있다지만 명목상 ‘대기 중’에 헌팅? 정분이 났단 말인가? 그것도 일반인 여성에게?

 


“세트?”


“으, 응? 파이, 왜 그러냐?”


“그 바보…아니, ‘선생님 녀석’이 어디 있는지 알려줄래요?”


“표, 표정이 무섭다. 혹시 화난 거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금, 그 사람과 할 말이 많이 생겼을 뿐이에요.”


“아, 알았다. 이쪽이다!”

 


세트의 뒤를 따라 모래사장을 가로지르기를 잠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익숙한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흥미롭다는 얼굴을 한 소마.


-그 옆에서 우물거리면서도 시선을 한쪽에 고정시키고 있는 루나.


-그리고…그 두 사람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다른 여자’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망할 선배 놈!

 

  

‘학생들 보고 있는데 뭐 하고 있는-!’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달려가서 그대로 ‘격추’ 해버릴까?

오늘 하루 정도는 꽁꽁 얼려두는 편이 좋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

 

  

떠오르던 ‘몇 가지 방법’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는 파이.

그건 분명 좋은 선택이 아니겠지.

다들 쉬고 있는 마당에 괜히 화내서 분위기를 박살낸다면 얼마나 미안하겠는가.

지금 선택해야 하는 건 ‘원만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방법.

그녀는 그걸 위한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걸 위한 조건까지 갖추어진 상황.

그리고 아까 들었던 ‘매력적인 여성’의 조언.

범행현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짧게 심호흡을 한 파이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으, 응?”


“……파이 쌤?”

 


한창 구경하고 있던 루나와 소마의 곁을 매끄럽게 지나쳐 목표 대상의 곁으로.

당사자인 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볼프강의 곁에 도착한 파이는, 뱀이 먹잇감을 휘감듯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선배님?”


“………응?”


“지금 뭐 하십니까?”


“……어…어?”

 


반응이 늦어지는지 멍하니 상황을 파악하는 그를 향해, 슬쩍 모자를 들어올리고 아래에서부터 치켜뜬 시선을 보낸다.

목표를 홀리기 위한 여러 가지 수단 중 하나인 '시선을 빼앗는' 기술.

밀짚모자의 챙이 가져온 음영의 차이가, 그 시선을 한층 더 깊게 만들고 있으리라.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퍽 즐거워 보이시네요.”


“어어…응.”


“뭐 하고 계셨습니까?”


“자, 잠시 여기 여성분들과 환담을-.”


“그러셨군요. 환담이라.”

 


부드러운 표정과 입가에 지은 미소를 유지한 채 볼프강과 이야기하던 여성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파이.

어느새 그녀의 시선은 목표를 방심시키기 위한 부드러운 시선에서 상대를 긴장시키는 날카로운 것으로 변해 있었다.

 

“보시다시피 선배가 외국에서 오신 분이라 현지인 분들과 이야기 하시는 걸 즐겨 하시거든요.”


“아…아…네에.”


“어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도 기쁘게 생각하시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두 분은 여행 오신 겁니까?”


“그, 그런데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선배가 두 분의 시간을 빼앗아버렸군요.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여행을 즐겨주세요.”

 


목표를 해치우기 위해선 장애물을 치워야 하는 법.

차가운 시선이 먹혔는지 가볍게 위축된 여성들을 향해 부드럽게 축객령을 내리는 파이.

그러자,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을 법한 물음이 여성들에게서 돌아왔다.

 


“저기…당신은 볼프강 씨와 무슨 사이신데-.”


“예?”


“아, 아뇨. 그냥 좀 궁금해서….”

 


그렇게 말하는 두 여성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에 파이의 시선이 향한다.

낌새를 보아하니 전화번호를 얻어가겠다는 생각인가?

함부로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이 상황에서 저 시도를 확실히 막을 수 있는 대답은-.

 



‘어……?’

   

 

머릿속에서 떠오른 ‘답변’에 한순간 멈칫하는 파이.

지금 떠오른 대답이라면 확실하게 목적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그 뒷감당은?

 

  

“이, 이 사람은 저의-.”

 

  

잠깐 동안 생긴 사고의 공백으로 미미하게 떨리는 목소리.

머릿속에서는 이미 ‘그 말을 해도 되겠냐’고 경종을 울리고 있었지만, 이미 ‘암살’ 모드에 들어간 파이의 입은 멋대로 대답 내뱉고야 말았다.

 


“이 사람은 저의-소중한 사람입니다.”

 

  

순식간에 조용해지는 주위의 소리.

이상하리만치 크게 들려버린 자신의 목소리.

그 부담스럽기만 한 정적 속에서, 지켜줘야만 하는 제자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우와….”


“하으…?!”


“파이는 선생님 녀석을 좋아했던 거냐…?”

 



아, 이건 망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제껏 느낀 적 없는 종류의 강렬한 위기감에 휩싸이면서.

파이는 쐐기를 박는 것처럼, 의식의 흐름에 따라 결정타를 날리고야 말았다.

 

  

“그렇죠? 선~배?”

















p.s : 오우(팝콘)


2024-10-24 23:23:50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