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그 선배를 암살하는 법-上-
월하령 2019-07-08 3
#해운대 #수영복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 번쯤 ‘멋대로 말이 튀어나오는’순간이 찾아온다.
분명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한 적 없는데, 정신 차리고 보면 입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문장.
그 말로 인해 일어날 파장 따윈 생각지도 않고, 그저 ‘뱉어 낸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충동적인 행위.
스스로가 냉정하고 판단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이런 때 뒷감당이 안 되는 말을 내뱉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이 사람은 저의-.”
유감스럽게도 이건, 사냥터지기 2분대 아이들의 신임 교사-파이 윈체스터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이 사람은 저의-.”
“……뭐 하십니까? 선배?”
“뭐긴! 바캉스를 즐기는 중이다!”
“…….”
언제부터 두통이 대화만으로 덮쳐오는 통증이 되었었던가.
한쪽 손에 살짝 냉기를 둘러 이마에 가져가며, 파이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다시금 말을 꺼냈다.
“선배, 제가 이상한 거 주워 먹지 말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특히 바닥에 떨어진 거.”
“이 후배님이 누굴 거지로 아나…. 그런 걸 주워 먹은 적 없고, 그런 말을 들은 기억도 없는데.”
“그게 아니라면 선배가 보이고 있는 이상할 정도로 흥분한 상태에 대해선 뭐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만.”
“거 참 시끄럽네. 지금 내 기분이 얼마나 들떠 있는지 후배가 알기나 해?”
그런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져온 파라솔을 기세 좋게 모래사장에 꽂는 선배-볼프강 슈나이더.
어디서 구해왔는지 소위 ‘알로하셔츠’라 불리는 요란한 색감의 윗옷에 반쯤 눕는 자세로 앉을 수 있는 의자.
덤으로 칵테일이라도 제조하려는지 옆에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는 몇 종류의 술병이 올라가 있었다.
요약하자면, 완벽하게 ‘휴가’를 즐기려는 모습이다.
“판 깨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저흰 여기까지 휴가를 즐기러 온 게 아닙니다만.”
“무슨 소리! 하루 쉬는 것도 엄연한 휴가지!”
“…….”
아니, 엄밀히 말하면 ‘대기’ 명령이 떨어진 상태입니다만.
부산 시장과의 면담이 하루 미뤄지면서 생긴 공백이죠.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핀잔을 파이는 애써 삼켰다.
괜히 말해봐야 아픈 건 자기 입이었으니까.
“후후후…밀린 휴가만 모아도 몇 달은 되겠지만…하루가 어디냐…하루가 어디야…흐흐흐…으흑…흐으으…….”
솔직히 말하자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마당이라 무슨 말을 하던 소용없어 보였다.
밀린 휴가가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없던 동정심마저 생길 지경이니….
“그러는 후배야말로 좀 느슨해지는 건 어때? 기껏 쉬는 날인데 답답해 보이는 차림이나 하고 있고.”
“제 옷차림에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어딘가 잘못되었는지 옷차림을 둘러보는 파이.
티 없이 정리해둔 하얀 코트에 삐져나온 곳 없는 복장.
스스로 정돈하기야 했지만, 2분대 아이들을 이끌어야 하는 교사로서 훌륭한 복장이 아니던가.
“이상한 곳은 없는데….”
“답답하지 않아?”
“괜찮습니다. 냉기를 다루는 것 정도는 쉬우니까요. 지금도 전혀 덥지 않습니다만.”
“아니…그 뭐냐, 장소가 장소니까. 괜히 그렇게 껴입고 있으면 혼자 튀어 보이니까.”
“아…….”
그러고 보니 여긴 해변이었지.
한국의 관광명소로 유명한 부산의 해운대.
더운 여름이니만큼 다들 짧고 가벼운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시선도 그런 이유에서였던가.
“그래도 ‘대기’ 상태인 이상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르니-.”
“너무 그렇게 깐깐하게 굴지 마. 애들도 다 놀고 있잖아.”
“흠…….”
그 말에 해수욕장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파이.
약간 떨어진 곳에서 수영복을 입고 있는 검은 양 팀 일행과 늑대개 팀 일행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과 섞여 놀고 있는 2분대 아이들의 모습도….
‘즐거워 보이네요. 다행이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여태 힘든 일을 계속해서 겪었을 텐데, 저 나이대의 아이들은 저런 밝은 모습이 어울리는 법이지.
‘기억은…잘 나질 않지만.’
사냥터지기 성에서 있었던 흐릿한 기억을 뇌리 한구석에 밀어 넣으며, 파이는 짐짓 헛기침을 했다.
“아이들이 안심하고 쉴 수 있도록 교사인 저희들이 더 정신 차려야 하는 거 아닐까요? 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진심으로 하는 충고지만, 기회다 싶을 땐 그냥 다 내려놓고 쉬어! 그렇게까지 성실하면 그것도 병이야, 불치병.”
“아…….”
언뜻 듣기엔 글러먹은 말 같지만 담긴 박력이 남다르다.
아까 휴가가 밀렸느니 어쩌느니 했는데, 이것이 휴가가 밀린 직장인의 설움이라는 걸까.
“하지만 전 수영복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저쪽 수영복 가게 보여? 거기서 한 벌 구하면 되잖아. 돈이 없는 건 아닐 거고.”
“그거야 뭐….”
“게다가, 애들이 놀다가 네가 그런 옷으로 있는 걸 보면 괜히 긴장하지 않겠어? 무슨 일 생긴 건 아닐까 하고.”
“흐음….”
과연, 일리 있는 말에 파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면, 수영복으로 갈아입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기야 옷차림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자신이 똑바로 정신 차리고 있으면 되는 것을.
다만-.
“비싸지…않을까요? 관광지에서 파는 물건은 다들 값이 좀 비싸던데.”
유니온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계약금이라면서 받은 돈이 있어서 주머니 사정이 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필요 이상의 지출은 사양하고 싶은 것이 본심.
그런 파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거린 볼프강은,
“그거야 그렇겠지. 대충 상, 하의 합쳐서 1억 쯤 하려나.”
“네?! 이 나라의 물가는 그 정도로 비싼 겁니까?!”
겨우 옷이 1억이라니, 세상에나.
이게 그 말로만 들었던 저 멀리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벌어졌다는 인플레이션인가 뭔가 하는 걸까.
파이가 화들짝 놀라자, 볼프강은 입을 가리더니 끅끅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흐흐흐…당연히 농담이지. 그걸 믿었어?”
“선배!”
“이거야 원…진짜 생각 이상으로 귀여운 후배네. 그래서 애들한테 모범이나 되겠나?”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이죽거리는 볼프강.
밉상, 그 자체인 선배의 모습을 바라보던 파이의 손이 등에 묶어둔 사검의 칼자루로 향한다.
“선~배~님?”
“어, 어어? 야?! 여기서 그거 뽑으면 규정 위반-.”
“얼어라!”
볼프강이 손을 내젓는 것과 동시에 칼집에서 슬쩍 빠져나오는 사검의 칼날.
한 줄기 한풍이 두 사람 사이를 빠져나가고-.
“절 놀린 건 이 정도로 봐 드리겠습니다.”
“너…진짜…….”
꽁꽁 얼어붙은 파라솔과 의자를 바라보며 난감한 얼굴을 하는 볼프강.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지만, 사검의 냉기로 만들어진 얼음위에 맨살로 누웠다간 ‘한여름에 동상’이라는 희귀한 증상으로 병원에 실려 가겠지.
“해가 질 즈음에는 풀어드리겠습니다. 그럼 편하게 휴가 보내세요, 선배님?”
“하아….”
불과 조금 전, 두통에 시달리던 자신과 비슷한 얼굴을 한 볼프강을 향해 슬쩍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이고 모래사장을 가로지는 파이.
걸음을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볼프강이 한껏 좌절한 자세로 바닥에 엎어졌을 땐 약간의 가책이 느껴지긴 했지만-.
‘선배가 먼저 잘못했으니까, 괜찮겠지.’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합리화.
성실하던 그녀가, 그 금단의 오의를 약간이나마 맛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으, 으음….”
밉상인 선배를 골탕 먹이고 일단 수영복 가게에 온 것 까지는 좋았지만, 가게에 들어서는 순간 파이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종류가…너무 많아.’
가게 안에 수도 없이 놓여있는 형형색색의 수영복들.
문제는, 정작 그걸 사려는 사람의 옷을 보는 눈이 영 아니라는 점이었다.
“어쩔 수 없지. 옷은 몇 벌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하기야 마을에서 지낼 땐 비슷한 형태의 옷만 입고 지냈었고, 지금 가지고 있는 옷도 마을에서 가지고 나왔던 옷 몇 벌이 전부였었지.
지금 입고 있는 요원복도, 어디까지나 규격 디자인이고.
나름대로 맵시 있는 옷이긴 했지만, 스스로 고른 것이 아니다 보니 파이 자신의 센스와는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수영복이라는 건 이렇게 종류가 많은 건가?”
비키니, 원피스, 경영 수영복 등등….
개중에는 무심코 그녀가 기겁할 정도로 천의 면적이 작아 보이는 것도 있었다.
과연 저런 헐벗은 것처럼 보이는 옷을 입는 사람이 있기나 한 걸까?
‘…역시 잘 모르겠군. 대충 점원에게 물어보고 고르는 편이 나을지도-.’
결국 스스로의 센스 부족을 인정하며 대충 수영복을 고르려던 찰나, 파이의 눈이 슬쩍 빛났다.
“누구냐-!”
그녀의 손에 나타난 것은 날카롭게 갈린 짧은 얼음 칼날.
잘못 베이면 크게 다칠 수 있는 흉기를 파이는 망설임 없이 휘둘렀다.
“이, 이거 참…파격적인 반응이네요.”
“……? 당신은…!”
자신이 공격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파이.
방금 자신이 휘두른 칼날을 붙잡은 하피가 굉장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뒤에 서 있었다.
“암살 일족이라더니 정말인가보네요. 가볍게 장난 한번 치려면 목숨까지 걸어야 하고….”
“죄, 죄송합니다, 여협(女俠)!”
황급히 칼날을 없앤 파이는 허리가 반으로 접힐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뒤에서 기척을 숨기고 몰래 다가왔다고 해도 그렇지, 설마 같은 동료의 기척도 감지해내지 못할 줄이야.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너무 은밀하게 숨죽이고 다가오시는 바람에…적이 보낸 자객인줄 알았습니다. 정말 면목 없습니다.”
“앞으로는 깜짝 놀라게 하는 것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어요. 장난 한번 치려다 목에 구멍이 뚫릴 뻔 했으니.”
“으, 으으…….”
“…후후,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안 다쳤으니까 됐죠.”
그렇게 말하며 파이를 위 아래로 훑어보는 하피.
여전히 미안해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하피의 시선이 살짝 가느다랗게 좁아진다.
“그런데, 파이 씨는 왜 여기에?”
“수영복을 좀 사러 왔습니다. 괜히 요원 복장을 입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괜히 신경 쓰게 만들 것 같아서…. 그러는 하피 여협께서는?”
“그런 식으로 불릴 만큼 좋은 사람은 아닌데…. 우연스럽게도 저도 같은 용건이에요. 바다에 왔으니 수영복을 사야죠. 올해 신상이 들어와 있으면 좋겠네요.”
“신상…입니까?”
“네. 파이 씨는 어떤 수영복이 취향이시죠? 비키니? 부끄러워하시는 편이라면 파레오를 두르시나요? 아니면 의외성을 살려 대담하게 노출이 강한-.”
하피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수영복에 관한 이야기들.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파이는, 결국 자신의 상황을 이실직고 해버리고 말았다.
“시, 실은! 제가 옷을 보는 눈이 없습니다.”
“아…그런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종류가 많은 것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고요.”
“그랬군요.”
그 말을 할 때의 하피가 보인 눈빛을 확인하지 못한 걸, 파이는 한동안 후회하겠지.
“그래서 조금 전에도 여기 점원 분에게 부탁해서 그냥 추천을 받으려고-.”
“어머! 그건 안 되죠. 기껏 이렇게 스타일이 좋은데, 그걸로 본인이 만족할 수 있겠어요?”
“만족하고 자시고…저는 별로….”
“걱정 마세요! 제가 파이 씨에게 어울리는 수영복을 골라드릴 테니까. 기껏 바다에 왔는데, 제대로 즐겨야죠.”
“그, 그럼 여협께서 수영복을 고를 시간이 없어지는 건 아닐까요? 그러면 곤란-.”
“걱정 마세요. 전 이미 골랐으니까.”
곧바로 대답하며 망설임 없이 손을 뻗는 하피.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불과 조금 전, 파이가 보고 기겁했던-천의 면적이 눈에 띄게 작은 호피무늬의 비키니였다.
“그걸 입으실 겁니까?!”
“안 어울릴 것 같나요?”
“아, 아뇨! 어울리시기야 하겠지만-.”
“그럼 이걸로 하도록 할게요.”
사실, 현 시점의 하피에게 있어 자신이 고른 수영복의 디자인은 극히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옷 갈아입히기 인형-이 아니라 수영복을 고르는 여자아이.
이런 재미있는 상황을 최대한 즐기는 것이, 바로 휴가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그럼~어떻게 꾸며볼까요?”
“저, 저기! 부디 너무 부끄럽지 않은 걸로-.”
“걱정 마세요! 다 저에게 맡기시면 된답니다!”
그렇게 말하는 하피의 목소리에서 드물게도 한기가 느껴졌다고 한다면, 그건 파이의 착각이었을까.
하다못해 조금 전의 비키니 같은 옷만큼은 참아주기를.
파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단지 그렇게 비는 것뿐이었다.
p.s : 파이 선샤인 A타입 상하의 합쳐서 1억...커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