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아들 35화
검은코트의사내 2019-06-30 3
관리 요원이라는 건, 반 전체를 책임지는 담임 선생님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담당하는 학생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면 곧바로 그 선생님이 혼자게 되니까. 내가 성적 우수를 유지한 이유이기도 하다. 학생들을 담당하는 선생님의 반이 전교에서 평균으로 좋지 않는 점수를 맞거나 꼴찌를 할 경우에는 교감이나 교장 선생님에게 불려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교육자로서의 성적도 반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내가 공부를 잘한 것은 아니었다.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았을 시절에 나 때문에 담임선생님이 혼나는 모습을 목격해서다. 그 선생님은 내가 알파퀸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뭐라고 말도 못한 채 묵묵히 혼나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지금의 관리 요원도 어쩌면 담임 선생님과 똑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미성년자 클로저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게 된다면 관리 요원으로서의 능력평가에 반영이 된다.
이번에 유리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한 일에 대해서도 관리요원의 책임이 들어가게 된다. 여러 명의 클로저들을 모니터링하면서 하나하나 관리하려고 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보면 관리 요원도 극한 직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오늘 술 종류를 많이 고르시는 걸 보면 오늘 쌓인 스트레스를 술로 다 풀어버리려고 저러시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 많이 샀나?"
"제가 도와드릴게요."
누나의 카트 안에 담긴 것은 내것 보다 더 많아 보였다. 맥주 캔의 부피 때문인 걸까?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식재료는 이미 다 골랐기 때문에 나머지는 누나의 뒤를 따라다녔다. 머리가 어지러운 듯이 조금씩 비틀 거리고 있는데 신경 안쓰일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 * *
누나는 쓰러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런 일은 하도 많이 겪어서인지 어느 정도 내성을 가진 채 버티는 거 같았다. 마치 게임에서 중독증상이 나타나는데 독 내성이 강한 캐릭터가 독 효과를 남들보다 더 오래 버티는 것처럼 느껴졌다. 맥주 캔을 하루에 저렇게 다 마시지는 않을 거다. 내일도 일해야 되는데 아침까지 숙취가 안풀릴 정도로 머리아프지 않을 테니까.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지식이 있으니까. 교과서 외에도 건강과 관련된 서적도 찾아봐서 읽어보았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엄마와 나 자신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인 데다가 누구라도 다 알 수 있는 지식이니까. 알면 뭐하나? 생활 패턴이라는 게 있는데, 거기까지는 이겨내기가 어렵다.
"누나, 무거워 보이는데요?"
"어? 응. 괜찮아. 이 정도는 가뿐하게 들 수 있어."
내 짐은 가벼워보이는데 누나의 짐은 무거워보였다. 아무리 유니온 요원이라고 해도 하루에 근무하고 나서 지친 몸으로 그런 걸 드는 건 힘들어보인다. 유리처럼 억지로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마트 밖으로 나갔지만 무게 중심에 몸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힘들어하고 있었다.
"하아."
물건을 적당히 사야 되는 사례다. 아무리 많이 사고 싶어도 그렇지 커다란 봉지 안을 가득 채울 정도로 들고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도저히 눈 뜨고 못봐줄 거 같아서 나머지 한 손으로 그 봉지를 들어올렸다. 내 짐은 한 손으로 가뿐하게 들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에? 세하야. 이러지 않아도 돼."
"뒤에서 보면 너무 위태로워 보이거든요. 누나. 왜 이렇게 많이 산 거에요?"
"아하하하, 어른에게는 사정이 있는 법이란다."
사정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무게 때문에 봉지를 떨어뜨릴 거 같았다. 확실히 무겁다. 맥주캔 말고도 다른 식료품들도 들어있다. 물론 맥주가 더 많아보였지만 누나는 성실한 사람이니까 적당히 조절은 할 거라고 믿는다. 저기 주차장에 있는 붉은색 승용차로 다가간다. 나는 차종류는 잘 모르지만 요즘 유행하는 5인용 승용차라는 걸 알아보았다. 트렁크를 열어서 누나 짐을 넣어주기까지 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너에게 폐를 끼쳤네."
"괜찮아요. 누나. 그냥 제가 도와드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요."
내가 아니라도 지인이라면 누구나 나섰을 것이다. 안 나선다는 게 비정상이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처럼 티를 내고 다니는 데 안 나선다는 게 이상한 거다. 데이비드 국장님이나 서유리같은 요원들도 이 모습을 봤다면 달려들어서 도와줬을 거라고 확신한다.
"집에까지 바래다 줄까?"
"아뇨. 괜찮아요. 저는 위상력 능력자니까요."
"다음에 식사라도 대접할게. 고마워."
"아, 네. 조심해서 가세요."
정말로 괜찮은 건지는 아직 불안하다. 그렇다고 내가 대신 운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대로 그냥 보내주는 수밖에 없나? 누나는 한 손으로 흔들면서 해맑게 웃은 뒤에 차를 타고 운전한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게 딱 들어맞는다.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것보다 어른이 겪는 일이 더 힘든 법이다고. 아마 이런 걸 말하는 거 같았다.
* * *
다음 날, 데이트 약속, 신서울 내에서 유명한 놀이공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데이트하러 나가는 게 질투난다고 했었다. 나 참, 데이트 과정이 꼭 연인들만 나가는 게 아닌데 왜 그러나 모르겠다. 그냥 이성끼리 놀러가는 것도 데이트라고 다들 표현한다.
손목 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본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눈에 띄지 않는 편안한 복장을 하고 왔다. 예전에 아버지가 입었다던 분홍색 긴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었다. 이런 건 별로 유행에 속하지 않으니까 눈에 띄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감시는 붙겠지만 유리에게는 별로 피해갈 일도 없으니 그걸로 된 거다.
"세하야!!"
손을 흔들면서 달려오는 게 보였다. 활짝 웃으면서 달려오는 유리, 머리 스타일은 긴 머리 그대로였고, 하얀색 블라우스와 무릎이 조금 노출될 정도인 검은색 스커트를 입고 왔다. 가을인데 저렇게 입어도 되나? 여성 스타일은 내가 잘 몰라서 모르겠다.
"미안해. 내가 많이 늦었지?"
"응? 아, 괜찮아. 딱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으니까."
나는 원래 약속 시간보다 더 빨리 나오는 편이다. 그렇게 하라고 아버지가 가르치셨으니까. 아버지도 약속이 있을 때는 원할한 일 처리를 위해서 그 시간보다 더 빨리나간다고 했다. 물론 일 얘기였지만 데이트라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었다. 유리는 늦은 게 아니었다. 시간에 맞춰서 도착한 거니까.
"에이, 이럴 때는 나도 방금 왔다고 말하는 거잖아."
"무슨 소리하는 거야?"
유리도 고정관념을 가진 모양이다. 많이 하는 말이지만 그건 그녀가 늦게 왔을 때 하는 말이었다. 굳이 늦게 오지 않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필요가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사람들이 벌써부터 유리의 복장에 시선을 가고 있었다. 블라우스 차림도 있지만 치마 아래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다리를 보고 다들 빠져들었나보다. 뭘 바른 거야? 대체?
"세하야?"
"아! 미안해. 나도 모르게 넋이 나갔네. 저기, 들어갈까?"
"어? 세하야. 혹시 반한 거야? 그런거야?"
"놀리지 마."
심술궂은 표정으로 검지로 내 볼을 콕콕 찌르면서 말하는 유리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남자인지라 순간적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유리가 얼굴을 들이댈때마다 나는 측면으로 피했다. 매표소에서 자유 이용권을 구매한 뒤에 안으로 들어선다. 뭐부터 이용할 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리가 달려들었다.
"에잇."
"어? 뭐하는 거야?"
"데이트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알고 있는데?"
왜 내 팔을 잡아 끌어서 기대는 건지 모르겠다.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너무 적극적인 거 아닌가? 으윽, 위험해. 나도 그 남자들처럼 빠져들 거 같았다. 뭔가 부드러운 게 닿고 있었다.
"저기, 유리야. 닿고 있는데."
"에이, 밝히기는. 이럴 때는 그냥 좋다고 말하면 되잖아."
왜 이러는 거야? 오늘 번개라도 맞았나? 너무 충격적인 말인데? 뭐라고 반박해야 될지 몰라서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멍하니 쳐다보다가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보았다. 아, 그래. 맘대로 하라지. 오늘은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온 거고, 눈치도 있으니까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 그래. 네가 좋다면 어쩔 수 없지. 뭐부터 탈래?"
"저거!"
레일을 타고 빠르게 움직이는 열차다. 비명이 가득한 기구다. 나는 그렇게 하자고 답하자 그녀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