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가 인기가 많아 유정이 언짢을뿐인 이야기
사일로시빈 2015-02-19 9
유정은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허공에 대고 푸념을 했다.
다리를 쭉 뻗고 기지개를 핀 뒤에는 들고있는 커피잔에 입술을 댄다.
사내 카페테라스치고는 준수한 풍미를 자랑했지만, 사원증을 찍는 순간 급여에서 공제되기에 검은 양팀은 이용하질 않았다.
세하는 당장 게임으로 빈둥거리기에 바쁘고, 유리는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고 애쓰고, 미스틸은 쓴 것을 즐기지 않는다.
제이는 당장 무급으로 일하는 입장이라 그런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 게다가 커피보다는 녹즙을 즐길 남자다.
그나마 커피를 마실만한 슬비는 워낙 임무에 충실해서 그런 여유를 부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도 커피 친구가 있다.
캐롤은 늘 자신이 카페인 중독때문에 죽을 거라고 주장하는, 커피를 입에 달고 사는 여자였다.
유정은 캐롤이 그럴 때마다 나보다 열 살은 어리면서 배부른 소리하지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어른스럽게 참았다.
물론 새삼 자신의 나이를 자각하고 싶지않은 어린애스러운 감정이 더 컸다. 그녀는 애써 그런 사실을 부정했다.
난 철이 덜 들지도 않았고, 아직 젊으며, 아직 앞날이 창창하고, 일도 잘하고 성격도 모나지 않은 뭐하나 빼놓을게 없는 여성이라고!
물론 그렇게 되새김질할 때마다 왼편 어깨에 앉아 속삭이는 소악마 유정은 '아줌마 특유의 헛소리'라며 일침을 했다.
천사 유정은 뭘 하나하고 오른편 어깨를 보면 과로로 쓰러져 침을 흘리는 환상이 보이는 것이다.
캐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빨대에서 입을 떼고 묻는다.
"제이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요?"
아주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유정은 커피를 뿜을 뻔했지만, 숙녀의 교양을 최대한 발휘해 가까스로 참는데 성공했다.
대신 기도로 몇모금이 흘러들어간 탓에 오랫동안 기침을 하며 가슴을 두들겨야했다.
"제, 제이씨랑은 그런 사이 아냐! 얘는 무슨 소릴 하는거람."
캐롤이 특유의 젊고 예쁜 동그란 얼굴로 화사하게 햇빛을 반사한다. 큰 눈을 깜빡거리며 무심히 일격을 날린다.
"둘이 데이트도 했잖아요. 영화관에서."
".....데이트가 아니라, 그... 그건, 임무에 동행차..."
"저번에는 언니가 다리를 삐니까 여기까지 업혀왔구요."
"그 상황이면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음? 제이 요원을 좋아하는게 아니었나요?"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데 아니나다를까 유정은 손사래를 치며 강한 부정을 했다.
"그, 그냥 직장 동료일 뿐이니고...."
"하지만 제이 요원쪽은 분명...."
"날 놀리는걸 좋아할 뿐이야! 그런 사람이니까...."
"oh..... 그래요? 그럼 제가 대쉬해도 되는 거군요?"
"..........에?"
오세린이 근처에 있었다면 분명 '마음에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처에는 몇 사람 지나다니지 않았고, 그마저도 꽤 거리를 두고 스쳐지나갈 뿐이다.
캐롤은 커피잔을 양 손으로 모아쥐고 작게 웃었다.
"마침 이번에 사랑의 묘약을 개발했거든요."
"이상한거 먹이려고 하지마!?"
"물론 사소한 부작용이 있어서 특수한 성벽이 발현되서 로리콘이 되기도 하고..."
"사소하지 않잖아?!"
"성 충동이 강해져서 범죄자로 돌변할 수도 있지만, 여차하면 사살...체포하면 그만이니까요?"
"상냥한 어조로 무서운 말 하지 말아줄래? 제발 이상한 약 좀 쓰려고 하지마."
"하지만 궁금하지 않나요?"
그녀가 빙긋 웃으며 얼굴을 마주한다.
"제이 요원은 분명 멋진 남자인데, 장난만 치지 누군가와 진지하게 연애하지 않잖아요."
"......음.... 제이씨는 절대로 멋진 남자가 아니고... 캐롤은 제이씨에 비해 너무 어리고...."
"그러니까 약을 먹인 후에 진지하게 반하면 어떻게 되는지 임상실험을 해봐요!"
"진정해. 아무리 그래도 약은 안돼?! 허가받지 않은 약을 쓰면..."
하지만 유정이 주절주절 잔소리 보따리를 여는 사이 캐롤은 Bye라는 멋진 인사와 함께 토닥토닥 달려가 사라져버린다.
유정은 찰나의 순간 동안 본능적으로 캐롤을 막아**다고 생각했다.
때 맞춰 언제나 빈둥거리기에 충실한 소악마 유정이 귓불을 잡고 늘어졌다.
'왜 막아야하는데? 제이씨가 누굴 좋아하든말든 무슨 상관이라서?'
이제야 막 잠에서 깬 천사 유정이 비실비실 반박했다.
'그야 캐롤이 수상한 약을 쓰려고하니까 검은 양팀의 관리요원으로써...'
악마가 코웃음쳤다.
'너보다 젊고 예쁘고 유능한 캐롤이 굳이 약을 쓰지않고도 제이씨랑 사귀면? 그럼 못 막아?'
'.......하지만 제이씨는 늘 몸도 불편하고...'
'봐. 넌 계산을 하고있어. 너처럼 유능한 여자에게 카드빚 많고 골골대는 퇴물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그건.....'
'유니온 간부라도 되면 돈 많고 잘 빠진 부잣집 도련님이 청혼이라도 할 줄 알았어? 꿈깨.
네가 저번에 술자리에서 부장 멱살을 잡았던 순간 신데렐라 스토리를 끝났다고. 그리고 그렇게 재보다가 40줄이 되겠지!'
'아냐......'
'아니긴 뭐가 아냐! 게다가 제이씨가 너한테만 집적거리는줄 알고 은근히 콧대가 높아졌던거 아냐? 제이씨도 남자인데?
계속 그렇게 튕기다간 멀리멀리 날아가서 영영 못 붙잡게 되버린다고!'
유정은 어느새 생각보다 이 악마가 합리적으로 자신을 헐뜯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가지기엔 아깝고, 남 주기엔 아쉬운 그런 심보로 무슨 연애야 이 여자야! 국장님 식사제안도 다 거절하고! 배가 불러터졌지?'
'그래도 설마 제이씨가 나 외에 다른 여자한테...'
'사귀는 것도 아니면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걸 세간에서는 어장관리라고 해.'
'조금이라도 젊을 때 어장관리도 해**! 더 늙으면 아무도 거들떠** 않을 거라고!'
아뿔싸.... 천사쪽도 악마였다! 폭발한 천사(가짜)가 외친다.
'그럼 매일매일 허리에 파스 붙이고 살면서 골골대는 남자한테 시집갈 거야?! 카드빚 갚는다고 돈도 못 버는 남자인데?
여자 마음도 모르고 시덥잖은 농담이나 하고 이상한 녹즙이나 권하는 무드없는 남자잖아!
게다가 클로저라고! 언제 죽을지 모른단말야!'
마지막 말은 제법 가시가 있었다.
그녀가 언제나 가장 두려워하던 사실이 퉁퉁 불어 고기한테 잔뜩 뜯어먹힌채 물 위로 올라온 기분이었다.
더 이상 두 악마가 떠들게 놔둘 수는 없었기에, 유정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고 멋지게 컵을 휴지통으로 던졌다.
물론 멋지게 모서리를 맞고 튕겨나갔다. 그녀는 청소 아줌마의 눈총을 받으며 서둘러 객기를 부린 대가를 회수해야했다.
그 잘난 제이씨에 대해 자신이 가진 감정이 얼마나 복잡하든간에, 일단 중요한건 캐롤을 쫓아가는 일이 아니던가.
제발 오늘은 위에서 부를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녀는 하이힐을 질질 끌고 복도를 걸었다.
"늘 나노로봇을 복용한다는게 건강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
그 시각 제이는 정도연 요원에게 받은 스킬큐브를 삼키고 있었다.
물컵을 건네주던 도연이 뺨에 검지를 대고 잠시 신음하다 덧붙인다.
"물론 도움이 되죠. 혈관을 로봇이 타고 돌아다니는 시점에서 개조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고보니 그 친구는 요즘 어때? 개조수술 받은 특경대원이 있다면서."
"아주 좋아요. 저번에는 흉부 관통상 때문에 상태가 심각했는데, 부품을 교체하니 호전되더군요."
"그 친구 이름 혹시 알렉스 머피 아닌가? 막 유니온 간부는 공격할 수 없다던가 그런 비밀 코드 심어놓는거 아니지?"
도연이 어렴풋이 웃는다.
"전 인간을 지우고 조종할 생각을 해본적은 없어요. 비록 몸의 반이 기계가 되더라도, 그는 인간인 거죠."
"만약 내가 몸 절반이 차원종이 되도 내가 인간이라고 할 건가?"
"자신이 인간인지 아닌지는 스스로가 정하는 거 아닌가요?"
제이가 입을 다물자 도연은 뒤쪽에 서류철을 뒤적거리다가, 걱정스런 기색으로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그나저나 위상력이 정말 꾸준히 감소하고 있네요. 당분간은 레귤레이터로 출력을 좀 올릴 수 있겠지만요."
"개량형이라도 나왔나?"
"이번 보급품은 주문제작이에요. 차원종이 발생할 때의 차원위상력을 집속해서 제이씨가 쓸 수 있게 전환해줄 거에요."
말을 마치고 장비를 검토하던 그녀가 문득 걱정스러운 눈짓을 한다.
"너무 위험하다 생각하면 도망치는 방법도 있어요."
"....애들이 보고있어서 그럴 수는 없거든."
"역시 개조는 싫으신가요?"
"그것만 권하지 않으면 딱 좋았을텐데말야."
"뭐, 좋아요. 장비교체건은 상부에 보고해둘게요. 정기적으로 수리를 받으러 오시구요."
"고마워. 당신도 참 좋은 여자야."
도연은 희미한 미소로 화답했다.
"좋은 여자는 예전에 포기했어요. 좋은 과학자가 있을 뿐이죠. 그보다, 저쪽에서 누가 부르고 있는데요."
"음....? 캐롤이군."
캐롤은 빙글빙글 나선을 그리는 사이드업 포니테일을 발랄하게 흔들면서 손을 뻗어 인사했다.
"hi, 제이! 오늘도 혈색이 good이군요?"
"그런가? 난 매번 창백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말야."
제이의 시점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늘 쇄골 아래로 그늘진 계곡이 보였다.
우윳빛 피부와 남색의 셔츠가 대비를 이뤄서 더 선명하게 풍만한 윤곽을 그려내는 것이다.
고글을 끌어올리며 시선을 돌린다.
"특경대 뒤치닥거리만 해도 피곤할텐데 오늘도 건강해보이는군."
"아니에요. 특경대분들은 좋은 임상데이터니까요. 늘 참고가 되요."
제이는 대체 뭐에 어떻게 참고한다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그런 금기를 알고싶을 정도로 경솔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보다 제이 요원에게 궁금한게 있어요."
"음? 뭐지? 내 쓰리사이즈라도 궁금한가?"
"그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필요없어요."
"알고있어?! 나도 모르는걸!?"
"제이 요원의 이상형은 뭔가요?"
돌직구 2연타에 미처 가드를 올리지 못한 제이는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각혈은 참을 수 있었지만, 흐르는 식은 땀은 막지 못했다.
태연한척 한 손에 주머니를 찔러넣고 아무렇지 않은척 행동해본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사시나무마냥 흔들리는 한쪽다리는 전혀 진정시키지 못했다.
"이, 이, 이상형이라고? 그런게 왜 궁금한거지?"
"제 이상형이 제이 요원 같으니까요."
".....노, 노, 놀림받는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뭐, 이상형 정도는 말해줄 수 있잖아요? Try Try!"
어쩐지 뒤에서 도연이 굳은 것처럼 보였지만 제이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음..... 뭐.... 건강하고... 나랑 나이가 비슷한 여자가 취향이랄까... 역시 건강이 제일이지."
캐롤이 입을 세모꼴로 오므리고 무척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송은이 경정이 이상형이었군요.... impressive...."
"응?! 왜 그렇게 되는 거야?!"
깜짝 놀라 반문했지만 곧 제법 이상형에 부합하는 여자임을 깨달았다. 최근에 했던 대화를 떠올린다.
-여자라면 고백했을텐데말야.
-여자 맞거든요?! 고백하세요! 거절할거지만!
농담으로 했던 말들인데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이젠 좀 장난을 자제하는게 좋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려도 해본다.
"그건 그렇고 제이 요원 그거 아나요? 커피는 본래 음료로 즐기기 전에는 각성제로 쓰였다고 해요."
"..........음? 뭐어..."
"커피를 꾸준히 마실 경우는 카페인과 폴리페놀 성분이 해마의 노화를 억제해 치매를 예방할 수 있죠.
거기에다가 간경화, 통풍, 피부암 예방등에도 효과가 있다고 보고되고 있어요. 검증받은 약효를 체험해보고 싶지않나요?"
캐롤의 눈이 밤하늘을 반사하는 호숫가마냥 너무 눈부시게 반짝거려서 제이는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평소에는 차분하고 상냥한 어조로 말하는 그녀지만 흥분하면 어느새 몸을 기대고는 가까이서 말하는 버릇이 있다.
그러고보면 캐롤에게선 늘 은은한 커피향이 났다.
언제나 마시고 있으리라 짐작만 했을 뿐이지만, 과연 커피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제이 요원의 건강관리도 중요한 임무니까, 이 커피를 하루 두 잔씩 마셔보세요."
"음...... 뭐, 나쁘진 않겠군."
"2주동안 경과를 지켜본 후 복용량을 조절할 거에요."
"역시 임상실험이잖나. 참아달라고."
"한 잔만 마셔봐도 괜찮으니까요. 분명 스트레스가 날아갈 거에요."
제이는 그녀가 권하는 커피가 어쩐지 플라스크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커피향이 나고 있고, 색깔도 커피색이지만,
눈금이 그려진 세모난 유리병에 들어있는 모습이 생소하기 짝이 없어 선뜻 손이 가질 않는 것이다.
"역시 혼자서 마시기엔 좀 어색해서말이지. 같이 마시는게 어떨까싶은데."
살짝 떠보는 발언을 한다. 정말 수상한 약이라면 캐롤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면서 전 결과를 기록해야해서 곤란하다고 말할 것이다.
지능발달약을 먹고 3일 내내 수학문제를 풀어제끼던 박심현이나 강장제를 먹고 하루종일 물구나무서기를 하던 채민우는 어떻던가.
먹고 바닥을 뒹굴면 캐롤리엘은 "저런, 케이크는 거짓말이었어요. 이제 치료제 테스트를 할께요!"라고 말할 이면을 숨기는 여자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캐롤은 무척 산뜻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sure! 좋아요. 음, 그래요. 저랑 커피친구를 하지 않을래요?"
"커피친구는 뭘 하는 친구지?"
"그냥 남는 시간에 같이 차를 마시면서 친목을 다지는거죠. 커피뿐 아니라 제이 요원의 건강차나 다른 허브티도 마실 수 있겠죠?"
"그건 좀 흥미롭군."
이런 미녀와 차나 한잔 하면서 평화를 만끽하고 건강을 누린다는건 근래 들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가 아닐까?
의자에 앉은 캐롤의 옆이 트인 스커트 밖으로 옅은 커피색 스타킹이 신겨진 다리가 테이블 아래로 교차하는 광경을 상상한다.
잔을 식히기 위해 옆머리를 가지런히 잡고 고개를 숙여 바람을 불 때 오므려지는 입술이라던가,
테이블에 살짝 눌리며 팽창하듯 형태를 바꾸는 흉부라던가, 수증기 너머로 언뜻언뜻 비치는 쇄골이라던가.....
무척 남성성을 자극하는 주제임이 틀림없다.
물론 제이는 경솔하게 코피를 흘리며 그러죠! 지금 당장 그럽시다!하고 외칠 짐승같은 쉬운 남자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특경대는 어떤가.
의무요원 캐롤리엘이라 하면 진흙탕에 핀 연꽃같은 존재로, 그야말로 유니온의 아이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캐롤에게 간호를 받을 수 있단 사실만으로 오늘도 특경대는 접근제한지역에서 험하게 몸을 굴리고 있는 것이다.
만에 하나 캐롤이 약에 취해 "캐롤캐롤리~♪ 당신의 하트에 캐롤캐롤리~♪"하는 추태를 보이더라도,
"최고다! 캐롤쨩!"이라며 눈물로 폭포를 한줄 뽑아낼 위인들이란 이야기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캐롤과 마주하며 우아하게 차 한잔 마시며 하하호호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는게 목격되면 어떨까.
작전에 나갈 때마다 매의 눈으로 총구를 들이댈 것이 틀림없다. 뭐라고 말할지조차 대충 예상이 간다.
"고의로 요원님을 쏘더라도 좀 봐주십쇼!"
"초연냄새가 향기롭지 않으십니까?!"
"요원님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겠습니다!"
"무릎부상으로 퇴각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단순한 과대망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이는 어쩐지 오한이 들었다.
앞을 바라보니 어느새 캐롤이 병에다 입을 대고 들이키고 있다. 양손으로 공손히 잡고는 몇 모금을 참새마냥 삼켰다.
이후 병을 이쪽으로 건넨다. 아니, 적어도 잔에 담아줘야하지않을까.... 병 입구가 좁아서, 이대로라면 간접키스가...
자세히 보니 립스틱 자국이 보이는데....라며 떨리는 손으로 병을 받으려는데 누군가가 낚아챈다.
".........응?"
어느새 끼어든 도연이 비슷한 자세로 몇모금을 마셨다. 살짝 적셔진 입술을 핥으면서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학적인 맛이군요."
"정도연 요원도 커피를 좋아했나요? 말하셨다면 제가 더 끓였을텐데 아쉽네요."
"연구실 비품으로 커피를 끓이는건 역시 좋은 아이디어가 아닌 거 같네요."
"그런데 마셔보니 어떤가요?"
"평범한 커피군요. 아마 싼 믹스커피를...."
믹스커피 브랜드까지 감별해낼 기세였던 도연은 제이와 눈이 마주치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마치 충격적인 것을 본듯 동공이 이례적으로 부풀고, 이내 가슴을 움켜쥐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어쩐지 얼굴이 붉어진 거 같아 제이는 걱정스레 안색을 살폈다.
"괜찮나? 역시 이상한 약이었던거 아냐?"
캐롤이 살짝 볼을 부풀리며 발을 구른다.
"이상한 약이라뇨! 제 약들은 모두 정상이에요!"
"역시 약이었지?! 이봐. 괜찮아? 어디 아픈가? 내가 의무요원에게 데려다줄..."
그 의무요원이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눈 앞에 서있다. 제이는 약한 두통을 느꼈다.
도연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서둘러 시선을 끌어내려 바닥을 본다.
"아, 아뇨.... 아프진 않은데...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또 보죠, 클로저."
내뱉듯이 서둘러 말하고는 비틀비틀 자리를 떠난다. 어쩐지 아까보다 안색이 더 달아오른듯 하다.
제이가 캐롤을 붙잡고 따졌다.
"이봐, 대체 무슨 약을 먹인..."
"하읏!"
"........응?"
방금 엄청 위험한 소리를 냈는데. 그러고보니 어쩐지 캐롤도 상태가 좋아보이질 않는다.
조금 달뜬 얼굴에, 눈은 몽롱하게 녹아내린 빛깔이고, 숨결은 조금 덥다.
방금 전 붙잡혔던 한쪽 팔을 쓰다듬듯 문지르며 그녀가 조심스레 말한다.
"방금 굉장히 찌릿했어요...."
"역시 제대로 검증받은 약은 먹으면 안된다니까. 의무실로 데려다줄테니 좀 누워있으라고."
"아, 아뇨.... 그보다는...."
그녀가 비틀거리는가싶더니 품에 안겨오기에 제이는 깜짝 놀라서 두 팔을 위로 들어올렸다.
본의아니게 무장해제 자세를 취했지만 캐롤은 재킷을 조막만한 손으로 꼭 붙잡고는 뜨거운 뺨을 밀착해왔다.
전체적으로 푹신하고, 뜨거워서,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전염되어버릴 것 같았다.
제이는 아까보다 더 많은 식은 땀을 흘리며 이 의문스런 상황에서 탈출하려 애썼다.
"저기.... 어... 혼자 걸을 수 있는지 어떤지는 내가 잘 모르겠는데말야..."
"그냥 잠시만 이렇게 있어주시면... 안될까요...? please....?"
간절히 물 한모금을 원하는 햄스터마냥 간절한 얼굴을 들어 애처로운 시선을 던진다.
올려다보기의 위력이 너무 굉장해서 제이는 각혈할 뻔했지만,
숙녀에게 피를 묻힐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평정심을 지켰다.
캐롤이 속삭이듯 중얼거린다.
"이 기분.... 나쁘지 않네요... 오히려 이대로 조금만 더..."
"제이씨!!"
공간을 찢고 날아드는 날카로운 외침에 둘 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제이는 유정을 발견했다. 급하게 뛰어왔는지 평소에 잘 빗겨진 머리는 뻗쳐있고, 얼굴이 상기되어 있다.
어쩐지 심각한 표정으로 유정이 말했다.
"차원종이 출현했어요. 서둘러 출동해주세요."
".......또? 알았어. 금방 가지."
제이는 대답하고는 캐롤을 다독이며 떼어낸다.
"일단 급한 일이 생겨서말야. 나중에 계속하자고."
캐롤에게는 그 말이 무척이나 다정하게 느껴졌지만, 어느새 제이는 유정과 함께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는 아직 커피자국이 남겨진 플라스크를 든 뒤, 눈금을 확인했다.
"어쩐지 너무 마셨네요. 효과도 너무 좋은걸까?"
그녀는 도연이 사라졌던 방향을 바라본 후,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유정은 제이와 함께 사무실 문을 열었다. 제이는 어쩐지 바깥으로 나가지 않자 의아해져서 목을 긁는다.
"차원종이 나타났다면서? 애들은 다 어디있고?"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무거워보이는 입술 떼었다.
"........거짓말이에요. 차원종은 없어요."
유정의 속눈썹이 처마처럼 가라앉는 각도를 그린다. 방금 전까지 도끼눈을 뜨고있던 그녀가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요."
보통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뭐하는 짓이냐고 화를 낼 것이다. 누구라도 이런 일을 겪는다면 그럴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제이는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옅게 웃으면서, 바람이 빠진듯 부드럽게 말했다.
"뭐야, 없는건가. 다행이군."
"............."
"그래서, 왜 이런 장난을 쳤지?"
".........저도 잘 몰라요."
제이가 어깨를 으쓱인다.
"질투가 났으면 솔직하게 말하라고."
불씨가 옮겨붙은듯 유정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오른다. 열기를 토해내며 쏘아붙였다.
"아, 아니거든요!? 왜 제가 제이씨한테 질투를 하죠? 놀리지 말아주세요."
"뭐, 아니면 마는거지. 별 일 없으면 캐롤한테나 돌아가봐야겠군."
가볍게 던지며 그가 돌아서자 잠시 우물쭈물하던 유정이 성큼성큼 걸어와 재킷 소매를 붙잡았다.
"....가지 마세요."
"..........이건 또 신선하군."
잠깐 숨을 세며 말을 고르던 그녀가 눈을 치켜뜬다.
"그래요. 질투 맞아요."
"음."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맨날 나한테 데이트니 좋은 여자니 놀려놓고 왜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죠?"
"음....."
"저번에는 여고생한테 그러더니 이번에는 또 캐롤한테 그러고, 놀릴 수만 있으면 아무라도 상관없는 거 아닌가요?"
거기에는 아주 약간의 오해와 억울함이 있긴하지만 제이는 굳이 따지지 않고 몸을 돌려 유정을 바라보았다.
"아침에는 스포츠 신문에서 만화만 골라서 읽고, 앉아있을 때면 다리도 떨고, 늘 시덥잖은 말장난이나 하고,
휴대용 믹서기나 파스같은 이상한 거만 들고다니고, 잘 때는 해파리처럼 늘어져있고, 컴퓨터랑 바둑을 두면 지고....
제이씨는 최악이에요. 아저씨라는 단어의 나쁜 점만 모아놓은 사람이라구요.
근데, 근데 왜 저는 제이씨같은 남자때문에 늘 이렇게.... 이렇게... 바보같이...."
유정은 오랜만에 말을 쏟아내 숨이 찬 탓인지 답답한 가슴을 누르고있었다.
물이 가득찬 눈동자도 방금 그녀가 쏟아낸 단어처럼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왼쪽 어깨의 악마도, 오른쪽의 천사도 입을 맞춰 같은 말을 했지만, 마지막 말까지 만들어낼 용기는 없었다.
셋이나 입을 모았는데도 좋아한다, 라는 말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이 바보같아져서 유정은 분하다고 생각했다.
제이는 그녀의 말처럼 여러 방면에서 최악인 남자였기 때문에 백마탄 왕자님이 이럴 때 어떤 말을 해줄지 몰랐다.
단지 그녀의 눈물을 어루만지듯 닦아내며 담담하게 말했을 뿐이다.
"정말 이상하군. 우는 얼굴도 이렇게 예쁜 사람은 흔치않은데."
".....또 놀리기나하고..."
"놀리는 거 아니야."
"........."
"어깨라도 빌려줄까?"
".....이럴 때는 안아줘야죠. 정말, 멍청이...."
유정이 안겼을 때 제이는 뭔가 이가 빠진 조각에서 모서리가 맞춰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보면 사람은 서로 기대고있을 때 완성되지 않던가.
"오늘 술이나 한 잔 하러갈까?"
"......기왕이면 칵테일이 좋아요."
"비싸잖아."
"진짜 멋없어."
"그리고 일단 숙취대책부터 생각하자고."
"진짜 멋없어."
"두 번이나 말 안해도 알아."
제이의 능청에 유정은 살풋 웃음소리를 냈다.
제이는 조금 더 세게 안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유정이 까불지말라며 꼬집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다음날 슬비가 이게 결혼까지 1화쯤 남은거냐고 물었을 때, 제이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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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점점 길어지는 이유는 대체 뭘까요? 이 글은 뭔 자가증식을 하고앉았어...
제이유정은 어째 어른의 연애다보니 글도 연령대가 올라가는 기분입니다.
이 게임 12세 이용가인데 면목이 없네요....
캐롤은 이번에 광역 트롤링을 시전했군요. 캐롤 미안! 캐롤 싫어하지 않아요!
사실 캐롤이나 도연이나 전혀 주인공들과 썸타지 않는 NPC지만 이건 팬픽이니까 안심인걸로...
은이는 등장이 없었네요. 경정님 미안!
게임에서 스토리 진행해보면 알겠지만 제저씨는 참 피곤한 남자입니다. 평소에는 자기가 들이대는데 정작 여자가 들이대면 피함....
유정씨도 평소에 들이대면 츤츤거리는데 그렇다고 다른 여자들이랑 놀고있으면 평소보다 까칠하고....
이 두 철없는 어른들이 진지하게 연애하지 않는 이유는 역시 클로저라는 직업의 특수성 때문이겠죠.
이젠 영 쓸 소재가 없군요. 정말 게임을 접을 때가 되었나봅니다.
아무튼 즐겁고 덜 피곤한 명절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