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수] 野雪
SummerDia 2019-05-15 3
※ 개인적인 캐릭터 해석주의
겨울이었던 것만은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야, 그도 그럴 것이 눈(雪)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겨울에, 겨울은 아니더라도 아주 추운 날씨에만 보이는 기상현상이었으니까.
그 날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겨울이었다. 겨울이었고, 겨울이라고 한다면 자연스레 생각하는 매우 차갑고 추웠다. 사실 그 날만 유독 추웠던 것이 아니었다. 그 날 이전인 며칠 전부터 계속 추웠고, 우리는 이 겨울의 추위가 유독 매섭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우리의 처지는 벼랑 끝에 몰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손님과 마주하였을 때의 그 감정은 새로웠던 것이 당연했다.
-우와...
또한 입 밖으로 여과 없이 감탄사를 내뱉은 것도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 날은 이상하게 눈이 일찍 뜨인 날이었다. 겨울의 아침은 어수룩하다. 평소 깜깜하던 창밖의 풍경이 조금은 밝았기에, 난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전날 밤 피곤했는지 세상모르고 자는 동료들을 징검다리 삼아서 아주 조심스럽게. 목도리까지 두둑히 하고 나간 바깥에는 간밤에 내렸는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눈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고, 눈이 이렇게 많이 쌓여있는 것도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그 날은, 유독 그 날만큼은 그것이 못내 가슴 한 켠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치열한 싸움의 흔적이 남아있던 터를, 이렇게 다른 색으로 – 폐허일 때와는 아주 다른 깨끗하고,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것 같은 흰색이었다 – 뒤덮게 하다니 말이다. 불과 하룻밤 만에!
나는 발을 디뎠다. 처음에는 내 발목 부근의 높이까지만 올라오던 눈은 점점 앞으로 나아갈수록 허리춤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걸어갈수록 움직이기는 더 힘들었지만, 이상한 희열감도 생겼다. 춥지는 않았다. 바람이 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깐 멈춰서 뒤를 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길만이 흰 색 도화지에 자국을 남겼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이 눈밭을 처음 걸어보고 개척 – 이런 말은 너무 장황하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이런 것도 멋지다고 생각하던 소녀였다 – 까지 한 것은 내가 처음이었다. 아마 그거 때문에 계속 걸어가면서 느끼던 출처 모를 희열감을 느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눈밭에 잠시 뒹굴었다. 내 키의 절반이나 되는 높이의 눈밭이나 푹신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푹신하기는 했다. 피부에 맞닿는 이질적인 차가운 눈의 감촉만 없었다면 아마 침대라고 생각하여 잠을 청했을지도. 눈밭에 누우니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는 것으로 보아 오늘 날씨는 아주 맑을 거 같았다. 하늘에는 그 흔한 구름 하나 없어서 적막해보였다. 눈밭에는 나 혼자였다. 그 탓인지 평소라면 들지 않을 감상에도 젖어보게 되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눈밭을 나 홀로 독차지를 했다는 기쁨,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어여 지났음에도 이 눈밭에는 나 홀로 있다는 고독감 등등...
-...
고독감이라는 거, 나한테는 전혀 안 맞는 말인 거 같은데 말이다.
데이비드가 말했다. 지수 너는 참 강하구나, 라고. 웬만한 사람들은 그걸 대부분 칭찬으로 여길 것이다. 나도 그러했다. 만약 데이비드가 이 뒷말을 첨부하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 너스레를 피우하며 당연하다는 대꾸를 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그만큼 고독하고 쓸쓸해 보여.
-무슨 뜻이야, 데이비드?
-지수 너를 볼 때마다 높은 산 정상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들어.
-...
썩 칭찬이다? 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 표현이 틀리다고는 생각 안 한다. 오히려 그것보다 지금의 나를 더 잘 표현하는 것을 찾기 힘들 정도로. 높은 산에는 당연히 눈이 쌓여 있는 곳도 있겠지. 멀리 갈 것도 없이 한라산이나 백두산을 보면 답이 금방 나온다. 하지만 데이비드가 말한 ‘높은 산’ 의 높이는 아마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에베레스트 정상 부근 쯤? 그리고 그곳은 늘 눈에 쌓여있지.
마치, 지금 내가 누워있는 이 눈밭처럼.
-...
나는 항상 강해야 했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소녀가 이런 영웅적인 결심을 하는 것 자체가 특이하기는 하겠으나, 지금은 그런 자잘한 걸 떠들 때가 아니었다. 그만큼 우리는 절박했다. 손을 괜시리 그러쥐었다 펴보았다. 지금 손에 무언가가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무겁게만 느껴진다.
이 무게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도망치고 싶었을 때? 아주 가끔 있었다. 가끔은...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포기했다. 데이비드가 말한 그 높은 산에 홀로 있다는 그 기분, 그 기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싶지 않아서. 그런 고독은 나 혼자 알고만 있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만약 넘겨주어야 할 때가 온다 해도, 그 사람에게 최대한 늦장을 부리면서 전해주고 싶었다. 아마 데이비드가 말한 강하다고 한 부분은 이런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지수야!
-베로니카?
-거기서 뭐 해? 이렇게 날이 추운데...
갑자기 아는 목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베로니카가 낑낑거리며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이 눈밭을 거닐면서 만들어낸 길을 통해서. 나한테 다가온 베로니카가 다시 말했다.
-어서 들어가자. 감기 걸리겠어.
-괜찮아. 위상능력자가 감기에 걸리겠어?
-하지만...
-그리고 좀 더 여기에 누워있고 싶어. 조금은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야.
우리는 아직 어린데 말이야...왜 이런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베로니카와 나는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베로니카는 내 옆에 잠시 서있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
-풍경 좋다.
-그치?
-늘 삭막한 풍경만 보다 이런 걸 보니...무언가 울컥해지는 기분이야.
나도 그래, 라고는 차마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눈치가 빠른 베로니카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대략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우리 둘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감상에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베로니카가 그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결심한 건 대략 이런 것이었다.
좀 더 강해져야겠다, 라는.
-누님들! 거기서 뭐해?
-어어, 막내다!
-나 참...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투덜거리며 오는 막내의 레퍼토리가 방금 전의 베로니카와 비슷한 맥락이라 우리는 키득거렸다. 막내는 베로니카나 나보다 키가 더 작아서 우리는 쉽게 왔던 길을 힘들이며 다가왔다. 그래도 내가 먼저 밟고 온 것, 그 다음 베로니카가 밟고 온 것이 있어서인지 그래도 어찌저찌 우리에게 도착했다. 막내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눈이 왔었네.
-응. 예쁘지, 막내야? 이럴 때에는 눈싸움이라도 하는 게...
-그러다간 교관한테 혼날걸? 왠지 교관은 이럴 거 같아. 다음 작전 시에 방해가 될 거 같으니 오늘은 이 눈을 다 치우도록 하자...
-으으...진짜 그럴 거 같다...
막내가 제법 교관의 말투를 훌륭하게 흉내를 내어서 바로 현실감이 들었다. 우리 팀의 교관이란 사람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이 멋진 풍경을 즐기는 것도 생각보다 짧다는 걸 인지하자니 많이 아쉬워졌다. 그래서 나는 나를 둘러싼 2명에게 제안했다.
-그럼 우리, 교관이 일어날 때까지 실컷 놀까?
-응?! 도대체 뭐하고? 그보다 추워...빨리 들어가서 잠이나 더 자...
-어허, 막내야. 너는 꿈이 없구나. 눈싸움도 할 수 있고, 눈사람도 만들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날려먹겠다는 거야!?
-어째 누님이 나보다 더 어린애 같아...
이런 것이 그 때에는 필요했다. 꽉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이렇게 좋아하는 동료들과 함께 보내는 즐거운 시간이라던가, 아니면 여름에 바다에 놀러가 기진맥진될 정도로 수영을 하는 거라던가, 그것도 아니면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방학이라는 시간이 지배하고 있는 학교의 느긋한 흐름을 만끽하거나...
이런 것들을 해야만, 나는 이 다음에 있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침착하게, 그리고 누구보다도 강하게 결단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강해져야 했다.
결국 그 날 우리 세 사람은 눈싸움을 실컷 했었다. 종국에는 일어난 교관에 의해 눈밭을 전부 치우게 되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만큼 실컷 즐겼다. 그리고 그만큼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 때 우리 세 명이 뛰어놀았던 설원의 한복판을 가끔씩 꿈속에서 보곤 한다.
남들보다 먼저 앞서는 것, 누구보다도 먼저 높은 곳에 있는 것, 다른 이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 모두 내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괜찮다. 언젠가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내가 먼저. 내가 먼저 이정표가 되어주고 싶었다.
이것이 과거와 현재의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 힘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미래에도 난 이 역할을 주저 없이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후회? 는 안하려고 노력한다. 내 뒤로 따라올 그 무엇보다도 값진 것들의 반짝임을 보는 것이 훨씬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野雪(이양연 李亮淵, 1771 ~ 1853)
穿雪野中去 눈을 뚫고 들판을 걸어갈 때
不須胡亂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말자
今朝我行跡 오늘 아침 나의 행적이
遂作後人程 뒷사람이 밟을 길이 되리니
[작가의 말]
서지수로 관련하여 쓰고 싶었던 소재가 있었는데, 마침 오늘이 서지수의 생일이더군요.(5월 15일)
그래서 후다닥 써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서지수는 아주 강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어서. 사명감? 도 나름 건강하게 가지고 있고.
그냥 개인적인 캐릭터 해석이니,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시면 됩니다.
서지수 관련 글 쓰는 것은 이번이 두번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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