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knight 2부 5화 교차점(crosspoint Alpha)

firsteve 2019-04-28 3

들려온 목소리에 그의 사고가 일순간 정지했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익숙했던 한때 등을 맡기고 싸웠던 그녀의 목소리였으니까.
 
그러나 그들과 만난 건 7년 전 헤어질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때 나누었던 통신기가 이제서야 울려온 것이었다.
 
“레비아? 레비아. 너 어디야? 무슨 일이야!”
 
“세하님….저희 좀 도와주세요….트레이너 님이….트레이너 님이…..!”
 
울먹거리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하가 그녀를 진정시키며 그녀의 위치를 물었다.
 
세…세하님 여기는 캐나…지직….지직….도……지직…
 
레비아? 레비아!
 
다급하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노이즈가 끼기 시작하더니 이내 통신이 끊어졌다.
 
“오라버니…?무슨 일이신가요?”
 
“세하야….무슨 일 있어?”
 
하연과 슬비가 심각해진 세하의 표정을 보며 달려와 묻자, 세하가 짧게 답한다.
 
“레비아에게서 연락이야. 트레이너를 비롯해서 그 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서둘러 찾아야 해. 위치를 말하다가 끊겼어.”
 
“위험한 상황일 가능성이 높군요. 아라 아가씨를 불러오겠습니다.”
 
하연이 아라를 불러오기 위해 뛰어가자, 슬비가 세하에게 다가왔다.
 
“하연 씨 어디로 간 거야?”

“아라를 찾으러 갔어. 추적에 관해서는 아라를 이길 사람은 없으니까.”
 
애써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떨리는 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추적을 하더라도 시간이 늦어버리면 구할 수 없게 되어버리니까.
 
그가 고개를 들어 슬비를 보았다.
 
7년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예전부터 야위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불안감이 가속됐다.
 
빨리 구해야 해. 내가 구해야 해. 모두를 구해내야 해. 안 그러면…..
 
세하의 불안한 마음을 드러내듯 그의 손이 제어를 벗어난 채 떨리기 시작했다.
 
그 때, 그의 앞에 하연이 아라와 함께 나타났다.
 
“마스터. 사정은 오면서 들었습니다. 마지막 대화가 어디였습니까?”
 
“캐나다라는 것 같았어. 하지만 그 후에는 통신이 두절됐어. 추적 가능하겠어?”
 
“전파를 더듬어 가는 것처럼 연결되었던 위상력을 추적하면 됩니다. 두 분의 위상력은 닮았으니 나라만 안다면 추적하기 쉽습니다.”
 
아라가 공중에 홀로그램을 띄우더니 빠른 속도로 그녀의 위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찾았습니다. 주변에 cctv가 있군요. 해킹해서 영상을 비춰보겠습니다.
 
영상이 띄워지자 슬비가 숨을 삼켰다.
 
그것은 4명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원인이었다.
 
“….적성 반응이 많습니다. 이 인원과 저 상태라면 길어도 30분 정도가 최대군요.”
 
“30분이면 충분해. 위치는 특정된 거지?”
 
“네. 위치는 캐나다 토론토 킹스트리트 36번지입니다. 적성 반응 숫자는….”
 
“그건 됐어. 위치만 알면 됐어. 하연아. 저것들은 내가 정리하고 올 테니까. 슬비랑 다른 사람들을 부탁해.”
 
“아니요. 같이 가시죠, 오라버니. 적성반응이 여러 곳에 있어요. 오라버니 혼자서 처리할 수 있어도 위치가 안 좋아요. 그 분들이 다칠 수도 있어요. 제 능력이면 도움이 되잖아요?”
 
“나도 갈게. 나도 도움이 될 수 있어. 방어전은 내가 전문이잖아?”
 
두 사람의 굳은 의지에 세하가 한숨을 쉬었다.
 
꽉 잡아. 직접 전이할 테니까.
 
그의 말에 두 사람이 각자 팔을 꼭 붙잡자, 세하가 머리로 좌표를 설정하고는 전이를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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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람들에게 둘러 쌓인 채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늑대개팀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하아…..끝이 없네요….”

“동의한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정말이지…..마지막 춤을 이렇게까지 추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하피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요원들을 발차기로 만들어낸 충격파로 밀어내고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슬슬 포기해. 늑대개 팀. 너희들은 진 거라고. 가장 강력한 그 남자도 없고, 가장 귀찮은 그 녀석도 없는 너희들은 그저 약한 팀이다. 그리고 이 인원 수를 너희가 당해낼 수 있다고 보는 거냐?”
 
“웃기지 마세요……해봐야….아는 거라고요….!”
 
바이올렛이 대검 끝으로 위상력을 내뿜어 요원들을 날리지만, 그것도 잠시, 공간은 다른 요원들로 메워졌다.
 
“좋아….얼마든지 덤…..욱…..”
 
바이올렛이 힘을 끌어올리다가 피를 울컥하고 토해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하아…..하이…드…..”
 
“뭐야 벌써부터 망가진 거야? 재미없네. 얘들아. 이제 슬슬 장난은 그만 두고 잡아가자. 그리고 놀자고.”
 
대장으로 보이는 요원의 말에 요원들이 움직였다.
 
“덤벼보세요! 우리를…..늑대들을 얕** 말란 말이에요! 하!”
 
레비아가 위상력을 개방하며 앞에서 다가오는 요원들을 한 번에 날려버린다.
 
그러나 그것은 양날의 검.
 
무리하게 끌어낸 힘에 의해 레비아의 몸이 무너졌다.
 
흐려져 가는 시야에 레비아가 중얼거렸다.
 
도와주세요……세하 님……
 
그 때, 요원들의 앞에 익숙한 무언가가 떨어졌다.
 
“버스…..? 버스가 왜 갑자기 떨어져?”
 
요원들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버스의 모습에 의문을 표했다.
 
“이…버스는….설마….”
 
하피는 머릿속에 떠오른 한 사람의 대표적인 기술을 떠올렸다
 
자신의 자랑스러운 후배인 언제나 멋지고 당당했던 그녀의 기술을.
 
“우리 동료들한테서 떨어져!!!!가라!!!”
 
종처럼 울리는 맑은 목소리에 하늘에서 지하철을 비롯한 교통수단들이 지상으로 폭격처럼 내려왔다.
 
“이 목소리는…..”
 
“이슬비….인가….”
 
바이올렛과 티나의 말이 사실이라는 듯 작은 몸집의 사람이 그들의 앞에 사뿐히 착지했다.
 
“다들 괜찮아요?”
 
“슬비….양….어떻게…..여길….”
 
“세하가 데려다 줬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요.”
 
슬비가 늑대개 팀원들에게 다가오더니 자신의 위상력으로 보호막을 만들었다.
 
“겁먹지 마! 지원군은 한 명이다! 저 쪽의 방어막을 깨면 우리가 이겨! 밀어붙여!”
 
대장의 말에 요원들이 다시금 공격자세를 잡자, 슬비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내가 언제 혼자 왔다고 했어?”
 
“뭐?”
 
요원의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나옴과 동시에 그들의 앞에 가벼운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내려왔다.
 
“여전히 무모하고 격정적이라니까…..혼자 뛰어가면 어쩌자는 거야.”
 
“어라? 아까 전까지 격정적으로 걱정하시던 분은 누구셨죠?”
 
하연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자, 세하가 졌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하연아. 사람들을 부탁해.”
 
“네. 네. 알겠습니다. 방어의 권능 가동.”
 
하연이 허공에서 꺼낸 방패를 땅에 꽂자, 방패를 중심으로 반구형의 보호막이 펼쳐졌다.
 
보호막이 펼쳐진 것을 확인한 세하가 검을 꺼내들고는 보호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마….말도 안돼….어떻게….네가 여기에….”
 
“곧 죽을 너희가 알 필요는 없는데?”
 
세하의 눈이 차갑게 그들을 노려보았다.
 
“…..하연아. 여기 사람 없지?”
 
“네. 오라버니. 사람들 다 도망갔어요. 그러니까 마음 편히 싸우셔도 되요.”
 
그 말에 세하가 한 손에 검은 색의 불꽃을 형성한 채 웃음을 짓는다.
 
“자…..시작해볼까? 정의로운 요원님들?”
 
“퍼부어버려!”
 
대장의 말에 요원들이 사방에서 그를 향해 공격을 날려왔다.
 
그러나 그 공격 중 그의 몸에 닿은 것은 없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았지만 어느새 다가온 그의 검에 요원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이….이 괴물자식이…..!!!”
 
요원들이 수로 밀어붙이겠다는 듯이 동시에 공격하지만, 그는 간단하게 한 손에 모여있던 불로 그의 특수요원 시절의 오의를 해방시킨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라. 쓰레기들.”
 
순간 공간이 흔들렸다는 착각이 들 정도의 강한 충격파와 화염이 사방으로 펴져나가며 요원들을 태워버렸다.
 
“그 많은 인원들을…..한순간에…..”
 
“이게…..용의 힘…..인가요…..”
 
늑대개 팀이 각자의 느낌을 표현하며 세하의 경이로운 힘을 칭찬했지만, 정작 본인은 무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손을 털었다.
 
얘네 정식요원 맞아? 왜 이렇게 약한 거야….
 
투덜거리며 다가오는 세하의 모습에 슬비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네가 너무 강해진 거야. 아까도 봤지만…..많이 강해졌네.”
 
“너희를 지키려면 이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서.”
 
세하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말하며 다가오자, 티나가 총구를 그에게 겨누었다.
 
“정지해라. 이세하. 그 이상 다가오면 발포한다.”
 
“그래요. 세하 씨. 미안하지만 거기서 움직이지 말아주세요.”
 
하피가 카드에 위상력을 불어넣은 채로 그를 바라보자, 슬비가 다급하게 두 사람을 말렸다.
 
“여러분 진정하세요. 세하는 여러분의 적이 아니에요!”

“하지만 슬비 씨…..세하 씨에게서 느껴지는 이 힘은 분명 구역질 나는 차원종의 힘이라고요. 그런데도 믿으라고요?”
 
바이올렛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세하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저를 못 믿으시겠다면 할 수 없죠. 하연아. 보호막 해제하고 슬비 데리고 집에 가자.”
 
세하가 몸을 돌리자, 슬비가 다급하게 뛰어와서 그의 손을 잡았다.
 
“자….잠깐만, 세하야…..지…집에 가자니….그게 무슨 말이야? 늑대개 팀을 저대로 두고 가자고?”
 
“슬비야. 저 쪽은 우리를 믿지 않아. 나를 믿어주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신경 쓸 시간은 없어.”
 
싸늘하게 내뱉어진 말에 슬비가 얼어붙었다.
 
알고 있다.
 
그의 이 모습은 분명 7년 전에 신뢰가 망가져버린 곳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을.
 
그로 인해, 그가 얼마나 절망했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물러서고 싶진 않았다.
 
늑대개 팀의 걱정도 있었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그는 나쁜 일은 혼자 짊어지는 편이었으니까.
 
사실은 속으로 누구보다 여리면서 가장 나쁜 역할을 맡던 그의 옛 모습에 슬비가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부탁할게. 적어도 치료 정도는 받게 해줘. 7년 전에 우리가 같이 싸웠던 걸 생각해서라도….”
 
그녀의 말에 세하가 한숨을 쉬었다.
 
“너는 그렇게 배신당하고도 믿고 싶어?도대체 뭘 믿고?내 뒤에서 칼을 꽂을 수도 있는 사람들을 왜 내가 데려가야 하는데. 말해봐. 뭘 믿고 저들을 부르라는 건데?”
 
“그 말 그대로 내가 물을게. 너는 나의 어떤 점을 믿고 너의 영지로 부른 거야?”
 
슬비의 물음에 세하가 입을 다물었다.
 
“정곡 찔리면 입 다무는 건 여전하네. 그래. 네가 말 안 하고 싶은 그 말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제대로 된 논리적인 근거는 없지. 너도….나도…..그저 7년 전에 기억을 믿고 부르고 싶은 거야.”
 
슬비의 말에 세하가 말없이 서 있자, 레비아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왔다.
 
“세하 님……저도….부탁드릴게요….염치없지만…..몸이 회복 될 때까지만이라도…..저희를 도와주세요…..”
 
“레비아….”
 
“제 안의 힘이 필요하시다면 가져가셔도 되요. 제물을 필요로 하는 게 있다면 제 생명을 쓰셔도 좋아요. 그 대신…..늑대개 팀원들을…..트레이너님을…..나타 오빠를…..구해주세요….”
 
레비아가 눈물을 흘리며 그의 손을 꼭 잡자, 세하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하실래요. 따라오실래요?”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하연이 슬쩍 하피를 보며 물었다.
 
“……티나 씨. 바이올렛 씨. 무기를 내려요. 역시…..이세하 씨는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하피 씨…..이세하 씨는 차원종…..”
 
“바이올렛. 그건 하피도 나도 레비아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해봐라. 그가 우리에게 적대하는 편이었다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그건….”
 
바이올렛이 반박할 답을 찾다가 찾을 수 없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세하. 우리 늑대개 팀 4인은 너에게 투항한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인도적인 대우와 트레이너와 나타의 수색에 협조를 부탁한다. 이 조건을 들어준다면, 잠시 동안 7년 전처럼 공동전선을 유지해주겠다.”
 
“좋습니다. 일단 그걸로 합의하죠. 나머지 이야기는 저희 쪽에서 몸을 회복하신 뒤에 하시죠.”
 
세하의 말에 레비아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했다.
 
이윽고, 그들을 데리고 세하가 전이한 곳은 엘리가 있는 의료기사단 쪽이었다.
 
“마스터? 어째서 인간들이랑 왔어?”
 
“제 동료들이에요. 방금 전까지 전투를 해서 치료가 필요해요.”
 
“마스터의 소중한 사람의 소중한 사람들은 마스터에게도 소중한 사람들. 걱정마. 치료해줄게. 대신 조금 만질게?”
 
엘리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각자의 손을 꼭 잡아보더니 휙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세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스터. 회복실 써도 돼? 곧 의식을 잃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
 
레비아가 물어보려다가 휘청거리더니 이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레비아 씨! 이세하 씨. 당신 우리 레비아 씨한테 무슨 짓을…..역시 차원종 따위의 말을 듣는 게 아니….윽…..”
 
바이올렛이 이세하의 멱살을 잡고 따지려다가 자신도 마찬가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어라라…..저도 조금…..힘드네요…..미안해요 세하 씨….조금만….잠들어도…될까요?”
 
“푹 쉬세요. 일어나시면 몸이 많이 나아지실 거에요.”
 
후훗…..그거….기대되네요….
 
하피마저 바닥에 쓰러지자, 티나가 세하를 빤히 보았다.
 
“다들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나온 아드레날린의 효과가 끊어진 모양이군. 내 동체 또한 그러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세하. 잠시 수면모드로 전환하겠다. 뒷일을 부탁한다.”
 
티나의 눈에 초점이 사라지며, 바닥에 쓰러지자 세하가 한숨을 쉬었다.
 
“엘리. 회복실에 가서 술식 모조리 켜서 치료시켜줘. 피로 같은 안 좋은 건 다 날려버리게.”
 
“응. 맡겨줘. 마스터.”
 
엘리가 가슴을 통 치고는 자신의 기사들과 함께 회복실로 향했다.
 
“하하…..겨우 끝났….어라…..”
 
슬비가 말하다가 흔들리는 시야에 그만 균형을 잃자, 세하가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세….세하야? 어….어째서…..나…나를 안아 드는 거야?”
 
“바보야. 너도 환자야. 어디서 빠지려고. 너도 회복실에서 좀 쉬다가 나와. 나도 내 방에서 좀 쉴 거니까.”
 
세하가 버둥거리는 그녀를 침대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 이불을 덮어주고 돌아서려 하자, 슬비가 그의 옷을 붙잡았다.
 
자신도 어째서 잡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그가 떠나던 7년 전을 떠올린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던 불안감 때문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는 그가 옆에 있어주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설령 자신의 마음과 다를 지라도.
 
“슬비야. 이렇게 잡고 있으면 내가 방에 못 들어가는데….”
 
“아….미….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만….”
 
황급히 그의 옷에서 손을 뗀 그녀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그를 바라보았다.
 
“저기….세하야…..그…..있잖아……이제는….갑자기 사라지거나 하진…..않을 거지?”
 
그녀의 말에 그가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걱정 하지마. 이제는 갑자기 사라지거나 그런 일 없을 거니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온기에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 온기였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온기가 여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기뻤다.
 
“잘 자, 슬비야. 내일 보자.”
 
세하가 슬비를 뒤로 한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자,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연이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오라버니. 이야기는 잘 끝내셨나요?”
 
“응. 이제 너도 가서 쉬어. 고생했잖아.”
 
“네. 가서 쉴게요. 그 전에 뭐 하나만 물어보려고요. 왜…..그러셨어요….아까는?”

하연의 질문에 세하가 미소를 지었다.
 
“결국 모든 일이 끝난 뒤 난장판을 치워 줄 사람은 슬비를 비롯한 검은 양 사람들이나 늑대개 팀 사람들일 테니까.”
 
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유니온의 비리를 모두 없애버리고 나면 그 후 화살은 차원종이 되어버린 자기한테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고 인식되길 원했다.
 
그들이 빛이라면 자신은 그림자나 어둠 정도로 살면 된다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는 줄곧 믿어왔다.
 
그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하연이 조심스럽게 그를 품에 안았다.
 
“…..불쌍한 우리 오라버니…..그럴 필요 없어요. 오라버니는 틀리지 않았어요.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실 필요는 없다고요. 그런 삶도 살아본 사람이 잘하지 오라버니만큼 착한 사람이 그런 걸 하면 어색하기만 하다고요.”
 
하연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리자 세하가 한숨을 쉬며 몸을 떨어뜨리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아직까진 그렇게까지 내 마음이 힘들진 않아. 네가, 슬비가, 다른 기사단원들이,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그리고…..정미가 있잖아. 괜찮아. 날 [이세하]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몇 번이고 악의 편에 서 줄 수 있어. 그게 내가 용의 후계자가 된 이유고, 너희와 함께 있는 이유니까.”
 
처음부터 그랬다.
 
하연이 처음으로 그와 만났을 때부터 그의 마음은 언제나 이랬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용.
 
남을 위해 오물을 뒤집어 쓰는 용.
 
그럼에도 인간을 구하는 길을 걸으려는 용.
 
누군가를 사랑하는 용.
 
구상해온 모든 미래에 자기자신이 빠져있는 불쌍한 18살의 악몽에 갇혀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의 마음에 결국 하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래도…..하지 마세요. 정미님이 들으면….화내실 거에요.”
 
그의 마음을 굳게 잡고 있는 유일한 사람의 이름을 핑계 삼아, 자신의 마음을 돌려 전한다.
 
그것이 그녀가 늘상 해오던 것이었다.
 
그걸 잘 아는 그 또한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녀의 이름이 언급된 시점에서 이야기를 멈추고 물러났다.
 
걱정해주는 자신의 든든한 동료의 마음에 세하가 이번에는 진심으로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하연아.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
 
“네. 오라버니. 내일은 내부차원 쪽이 토요일이니까 시간 되시면 정미 님을 모셔오실래요? 만나면 되게 기뻐하실 것 같은데.”
 
“그건 내일 생각하자. 잘 자.”
 
세하가 손을 휘휘 저으며 방으로 들어가자, 하연이 가만히 문 밖에 서 있다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강하게 말 못했네…..나라는 애는 참모 실격이라니까….
 
하연이 문 넘어서 잠들어 있을 그를 생각하고는 주먹을 꼭 쥐었다.
 
그치만….난 포기 안 할 거야, 세하야. 나는 절대로 네가 행복을 포기하게 놔두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마음 약해지지 말자, 서하연. 넌 참모야. 기사단 참모장 서하연이라고. 내 작전의 끝은 세하, 너를 포함한 고통 받은 사람들이 제자리를 찾아서 행복해지는 거야. 그러니까….그런 마음 가지게 놔두지 않을 거야.
 
하연이 다시금 자신의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을 하며 문에서 돌아서 내려갔다.
 
하지만 그 때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린 단 하나의 이상함이 자신들의 계획을 얼마나 망가뜨리게 될 지 그녀는 그 때 전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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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삶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그렇기에 언제나 스릴을 원했고, 자신을 망가뜨리고, 스스로의 마음을 감추어가며, 여유로운 척, 아무렇지 않는 척, 살아왔다.
 
그래서였을까, 다시금 유니온에게 쫓기게 된 그 때에도 딱히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자신의 가족 같은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마음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 생기자, 그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마음이 몰려갔다.
 
그러던 어느 날….자신들의 날개를 잃어버렸다.
 
하늘을 수놓던 그 날개를.
 
자신들과 함께 했던 그 날개와 함께…..자신의 마지막 쐐기가 사라져버렸다.
 
무뚝뚝한 산 같던 그 남자를…..내가 버리고 왔어.
 
하피의 잠꼬대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버린 거야. 거기서….도망치지 말았어야 했어. 나는….그 사람을…..내가…..내가 가장…..지키고 싶었던 사람을…..내가 버렸어….
 
환영이 보였다.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이 자신의 목을 **오는 그의 모습에 하피가 버둥거렸다.
 
미안해요….미안해요……미안해요……
 
의식이 멀어져갔다.
 
또 다시 그녀는 악몽 속으로 내던져졌다.
 
현실이라는 악몽 속으로 그녀는 내던져졌다(끌어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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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피 언니! 정신이 들어요?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조금은 야윈 것 같은 자신의 자랑스러운 후배의 모습이었다.
 
“슬비…..씨…..?”
 
“하아….다행이다…..갑자기 괴로워 하시길래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았어요.”
 
슬비가 걱정된다는 듯이 바라보자 하피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나는. 그나저나….여긴 어디죠? 고급호텔의 방 같은데.”
 
“세하네 영역이에요. 이 방은 회복실이라고 하더라고요. 심신안정을 위해서 만들어둔 곳이라서 피로회복을 겸한 공간이라고 하네요.”
 
슬비의 말에 하피가 가만히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완벽하게 회복한 건 아니었지만 며칠 동안이나 몸에 축적되어 있던 피로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슬비 씨는 왜 여기 있나요? 혹시 저희를 감시하러 온 건가요?”
 
“아니에요. 저도 세하한테 여기 있으라고 눕혀져서요. 저도 세하 만난 지 몇 시간 안되었거든요.”
 
“네? 처음부터 세하 씨랑 함께 있었던 거 아닌가요?”
 
“늑대개 팀과 만나기 몇 시간 전에 다시 만났어요. 그 전까지는…..칼바크의 병대에서 일했고요.”
 
그랬군요. 그렇다면 그 때 본 뉴스기사가 잘못 된 게 아니었군요….
 
하피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자세한 내막은 그녀도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의 후배가 안 좋은 일을 당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끝까지 유니온 안에서 개혁을 시도하고도 남을 그녀가 나올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아까 전에 티나 씨가 트레이너 씨와 나타의 수색을 도와달라고 했는데….두 사람이랑 엇갈린 건가요?”
 
슬비의 질문에 하피가 이불을 꽉 쥐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7년 전부터 이어져 온, 브레이크가 망가진 경사면의 차처럼 굴러온 비참한 이야기를 자신의 입으로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 때, 다른 자리에 누워 있던 바이올렛이 눈을 떴는지 몸을 일으켰다.
 
“아가씨.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하이드……네….꽤나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것 같네요…..”
 
바이올렛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몸의 감각을 확인하고는 시선 끝에 걸려있는 슬비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비 씨…..”
 
“바이올렛 언니…...몸은 괜찮으신가요?”
 
“네. 푹 쉬었더니 나아진 것 같아요. 그나저나….여기는….”
 
슬비가 하피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말해주자, 바이올렛이 어딘가 불편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표정을 바꾼 채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이야기에 참여했다.
 
“트레이너 씨와 나타 씨 말이군요……하아….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하고 어디를 요약해야 할 지 모르겠지만…..일단 간략하게 이야기를 하자면….나타 씨랑은 7년 전에 헤어졌고, 트레이너 님이랑은 헤어진 지 한 달 정도 된 것 같네요. 저희가 추락한 게 한달 전 쯤이었으니까요.”
 
“추락이라면….램스키퍼가….추락했다고요? 하….하지만 그건 전함인데….대체….무슨 일이….있었던 거죠?”
 
슬비의 질문에 바이올렛이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말해도 되는 걸까…..슬비 씨는 차원종이 된 이세하 씨랑 같이 있는 동료인데…..이걸 말해도 되는 건가…..
 
그녀의 생각을 읽었는지 하이드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 외람되지만, 제 생각에는 말해주셔도 상관 없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지금 이슬비 요원님의 모습에서는 7년 전과 그다지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습니다. 그건 아가씨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좋아요. 하이드. 당신의 안목은 대체로 정확하니까…..이번엔 믿어보도록 하죠.”
 
바이올렛이 긴 한숨을 쉬고는 슬비를 바라보았다.
 
“…..7년 전 검은 양 팀 여러분들이 신서울에서 도주하고 계실 때…..저희 또한 뉴욕에서 도망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도달한 곳은 램스키퍼의 격납고였죠.”
 
바이올렛이 그 때 기억을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체포명령과 자신들이 남아 막아보겠다고 자신들을 보내준 베로니카와 쇼그의 활약.
 
거기까지만 있었다면 오히려 자신들은 그렇게까지 망가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격납고의 잠금장치를 해제한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들을 추격해오는 요원들에 황급히 탑승한 늑대개 팀이었지만, 요원들은 그것마저 예상했다는 듯이 염동력을 가진 요원들로 램스키퍼를 묶었던 것이었다.
 
그 때 그가 나섰다.
 
언제나 사납지만 그 누구보다 자신들을 아껴준 푸른 늑대가 늙은 늑대를 보며 말했다
 
꼰대. 내가 나가서 저 녀석들을 썰어버리고 곧바로 합류할 테니까 예전에 만들어 놓았던 집결장소에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어. 만약에 그곳에서도 그 녀석들이 있다면 다음 집결장소에 대한 암호문 남겨놔. 그거 보고 따라갈 테니까.
 
말은 쉬웠다.
 
그러나 밑에 있는 상대들은 정예요원들이었다.
 
아무리 사람과 싸우는 것에 익숙한 나타라고 해도 정면으로 붙는다면 이긴다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가장 현명한 수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번다.
 
그 어떠한 안건보다 합리적인 말이었지만 그녀는 달랐다.
 
나타 오빠. 안돼요. 혼자서는 안돼요. 아무리 오빠라고 해도 저 인원들은 불가능하다고요!
 
울먹거리며 그의 팔을 붙잡는 레비아의 모습에, 나타가 레비아와 눈을 맞추었다.
 
야. 이게 요즘 봐주고 있었더니 기어오른다? 나. 나타라고. 늑대개 팀의 늑대 중에서 사람 죽이는 거에는 도가 튼 걸로는 깡통보다 더한 게 나라고. 그러니까 꼰대랑 도둑 여자랑 깡통이랑 부잣집 여자 데리고 먼저 가 있어. 금방 따라갈게.
 
그 모습은 마치 마지막을 각오한 것 같은 모습이었기에 레비아는 싫다며 그와 함께 가려고 했으나, 가볍게 그녀를 기절시킨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쓰러지는 그녀의 모습에 애써 감정을 감추었다.
 
꼰대. 나중에 보자. 이 녀석들을…..잘 부탁한다.
 
그렇게 나타가 내려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해오는 요원들이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오는 공격들을 회피해가며 염동력을 쓰는 요원들만 골라서 자신의 쿠크리를 휘둘렀다.
 
이내 기체가 출발만큼 저항이 없어지자, 트레이너는 그에게 귀환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대화가 들릴 턱이 없는데도, 빠르게 전법을 바꿔 램스키퍼 전체에 공격을 하는 요원들의 모습에 나타가 요원들을 공격하면서 외쳤다.
 
빨리 가라고 꼰대! 그 녀석들까지 잃고 싶지 않으면 더럽고 추잡하게 질척거리지 말고 빨리 가라고!
 
나타의 외침에 트레이너가 입술을 꽉 문 채, 반드시 합류하라는 명령을 남기고는 램스키퍼의 엔진을 최대치로 발휘해 격납고를 떠났다.
 
“그리고 저희가 합류하기로 했던 지점에서 나타 씨를 기다리고, 발각되었을 때는 또 다시 장소를 옮겼다가 다시 가보기도 했지만…..없었어요. 뉴스도 없었고요.”
 
바이올렛이 주먹을 꽉 쥐었다.
 
구하지 못했다는 마음이, 행동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워서, 그 순간, 아무것도 못한 채 그를 보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슬프게 했다.
 
“그럼….7년 동안은 어디에 계셨던 거에요?”
 
“…..램스키퍼의 스텔스 기능을 써서 숨어있었어요. 물론 발각이 되면 자리를 옮겨야 했기에 대부분의 식량이나 필수품들은 주변의 마을이나 상점에서 간간히 조달하며 램스키퍼 안에서 지냈고요.”
 
 바이올렛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것은 그녀가 의지했던 또 하나의 사람과 날개가 꺾인 이야기일 거라는 것은 슬비도 어렴풋이 눈치를 챘다.
 
그러나 그녀의 입이 다시금 열리기 전, 그녀의 말을 고운 목소리가 막았다.
 
바이올렛 님…..그만….해주세요…..
 
“레비아 씨……언제….깨어난 거에요? 설마 저희가 이야기를 할 때부터…..”
 
“네…..다 들었어요. 다 듣고 있었어요….”
 
레비아가 이불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제발….제발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말아주세요….싫어요……듣기 싫어요….”
 
레비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하자 하피가 한숨을 쉬며 레비아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슬비 양. 레비아 씨의 상태가 아직 그리 좋지 못하네요….나중에….다시 말해줘도 될까요?”

“그러세요. 하피 씨. 그리고….미안해. 레비아. 쉬고….있어….”
 
슬비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와서는 벽에 기대 주르륵 미끄러졌다.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듣기 싫은 이야기를 들을 때의 저 표정을.
 
떠올리기도 싫은 이야기를 떠올릴 때의 저 표정을.
 
막을 수 없을 만큼 울컥울컥 차오르는 저 감정을.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7년간 자신도 그랬으니까.
 
세하가 남긴 머리장식을 만질 때마다 마음이 진정됨과 동시에 울컥울컥 눈물이 차올랐으니까.
 
미안해요…..미안해요……미안해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말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내렸다.
 
한 가지 분명한 건…..그녀와 그녀들은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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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감정을 진정시키고 그녀는 주머니에 곱게 접어두었던 쪽지를 꺼내어 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늑대개 팀이 깨어나기 전, 자신의 침대 옆에 선반에 올려져 있었던 간략화 된 약도였다.
 
분명 여기로 가면 되는 것 같은데….
 
쪽지에 그려진 약도를 보며 걷던 그녀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우아하게 장식된 문에 살짝 놀라고는 이내 문을 살짝 열었다.
 
“어머? 슬비 님. 벌써 일어나셨어요? 아직 조금 더 쉬어도 되는데….”
 
“괜찮아요. 일어나니까 무척 개운했는걸요. 그나저나 여긴….”
 
슬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하연이 미소를 지었다.
 
“여기는 회의실이에요. 저희가 주로 작전 입안을 하고 회의를 하는 곳이죠. 방금까지도 보고 받는 중이었어요.”
 
“아…..죄송해요. 나중에 다시 올까요?”
 
“괜찮아요. 오라버니. 슬비 님도 들어도 되는 거겠죠?”
 
“당연한 건 묻지 말아줘…..슬비라면 언제든지 환영이지.”
 
의자에 앉아 있던 세하가 빙그레 웃음을 띄우고는 다시금 앞에 있는 아라에게 설명을 부탁했다.
 
“그럼 이어서 설명하겠습니다. 늑대개 팀이 발견된 장소로부터 수색의 범위를 넓힌 결과, 램스키퍼의 잔해를 확인했습니다. 지금은 헤카테 님이 이끄는 개발부에 인계되어 수리중에 있습니다.”
 
“잔해 확인 결과는 어땠나요, 아라 아가씨?”

“처참하다고 밖에 말할 방법이 없더군요. 말 그대로 완전 파손입니다. 다행히도 인공지능 영역이나 그런 면은 손상 받지 않았지만 내부를 비롯한 외부까지 전부 박살이 났습니다. 그리고…..그곳에서 전투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파여진 공간이나 주변의 상태로 보아서는 상당히 강한 위상능력자인 것으로 추정됩니다만 그 위상능력자도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잔해에서 다량의 혈흔이 발견되어 데이터 베이스에 등록된 사람들과 대조해보았습니다.”
 
“다량의 혈흔이라니…..늑대개 팀은 그렇게까지 다치신 분은 없었는데….”
 
“확실히 늑대개 팀의 데이터베이스에는 일치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램스키퍼의 데이터베이스까지 찾아 대조해본 결과……사망처리가 되어있는 참전용사의 데이터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트레이너 씨…..
 
세하가 쓴 미소를 지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아라 아가씨. 그 혈흔의 주인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 되었나요?”
 
“잔해에 남은 혈흔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흔적들이 거의 다 흐릿하게 남거나 인위적으로 지워진 흔적이 보이기에 저의 부대원들로서는 흔적 찾기가 힘들 걸로 예상됩니다. 그렇기에 제가 직접 가서 찾아볼 생각입니다만….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는 확답을 못할 것 같습니다.”
 
아라의 말에 슬비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기 세하야…..아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트레이너 씨 뿐만 아니라 나타도 유니온에게 붙잡혔다는 것 같아. 7년 전에…..늑대개 팀을 구하기 위해서….나타가 홀로 싸웠다고 해….뉴욕에서….”
 
“7년 전 뉴욕…..아라야. 나타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되고 있어?”

“추적하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나타 씨의 대한 건 더욱 찾기가 어려울 듯싶습니다. 애초에 램스키퍼에 흔적이 남아있는 트레이너 씨와 달리 나타 씨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도 않은데다가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검은 양 팀 분들처럼 무언가 특별한 행동을 해서 포착이 되었다면 모를까….”
 
아라의 말에 슬비가 주먹을 꽉 쥐더니 세 명에게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릴게요. 나타도.....찾아주세요.”
 
“슬비 님…..”
 
“무리한 부탁하고 있는 거 알고 있어요. 유니온을 무너뜨리는데 힘을 쏟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고 나타를 찾을 여력 같은 건 없다는 건 듣지 않아도 아는데……”
 
슬비가 고개를 들어 세 명을 바라보았다.
 
“저는…..내버려둘 수 없어요. 레비아가 울고 있어요. 늑대개 팀 모두가 힘들어해요. 저는 그 감정을 아니까…..자신의 소중한 사람이 사라져서 못 볼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아니까….내버려둘 수가 없어요. 부탁드립니다……나타를….제 동료를…..찾아주세요….”
 
다시금 고개를 숙이며 부탁하는 그녀의 모습에 하연이 다가와 그녀를 바로 세웠다.
 
“걱정하지마세요. 트레이너 님도 나타 님도 모두 찾아낼 거에요. 그러니까 고개 숙이지 말아주세요. 저희를 믿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을 낼 수 있으니까요.”
 
하연의 따뜻한 말에 슬비가 울컥했는지 눈물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하연이 그녀를 품에 꼭 안고는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 동안 마음고생 많이 하셨어요. 슬비 님…..괜찮아요…..당신의 동료들은….저희가 확실하게 돌려드릴게요. 그러니까 안심하고 기다려주세요. 오라버니와 기사단인 저희들이 반드시 찾아드릴게요.
 
그 말을 기점으로 그녀 안에 있던 무언가 풀어진 것 마냥 눈물을 쏟아졌다.
 
달리 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저 그녀는…..
 
“고맙습니다….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한참을 그녀의 품에서 울었을까.
 
슬비가 자신이 이제 겨우 두 번 본 사람의 품에서 울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과 창피함이 섞인 얼굴로 빠르게 떨어졌다.
 
“죄….죄송해요……”
 
“괜찮아요. 오히려 저는 저를 믿어준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는걸요?후훗….오라버니. 슬비 님 좋은 분이네요.”
 
“내가 괜히 인간 시절에 의지한 게 아니야. 얼마나 괜찮은 애인데.”
 
세하가 느긋하게 말하자, 슬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예전의 검은 양 팀 같아서.
 
더러움을 알았지만 그래도 순수함을 믿고 달렸던 7년 전처럼.
 
너무나도 그리운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입가가 풀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늑대개 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세하야…..늑대개 팀….마음 고생이 많이 심했던 것 같아….어떻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 부분은 너에게 맡길게. 아무래도 나랑 우리 애들은 차원종이라고 그쪽에서는 조금 꺼려하는 느낌이 드니까. 미안해. 너도 힘들텐데….”
 
“아니야. 괜찮아. 날 구해줬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괜찮다는 듯 웃는 슬비의 모습에, 세하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힘들면 꼭 말해줘. 예전처럼 혼자서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7년 전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세하의 모습에 슬비가 괜스레 코 끝이 찡해졌다.
 
너야말로 혼자서 감당하지 말란 말이야. 나쁜 사람 행세 그만해. 잘 하지도 못하면서.
 
퉁명스럽게 답이긴 했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세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늑대개 팀한테 가볼게. 무슨 일 있으면 불러줘.”
 
슬비가 회의실을 나가려다가 문득 생각난 한 가지 생각에 그를 향해 돌아보았다.
 
“세하야.”
 
“응? 할 말 있어, 슬비야?”
 
“…..고마워……돌아와줘서….그리고…..늑대개 팀을 안 버려줘서….고마워.”
 
“…..”
 
“내가 기억하고 있는 세하랑 달라지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 마음을…..인간의 마음을 버리지 않아줘서….고마워, 세하야.”
 
슬비가 회의실을 빠져나가자, 세하가 닫힌 문을 향해 중얼거렸다.
 
“달라지지 않았다….인가…..정말이지…..안 바뀐 사람이 누군데…..”
 
“오라버니……”
 
세하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는 쓴 웃음을 지었다.
 
“격하게는 안 변했지….무너진 게 아니라 마모된 거니까. 살인에 익숙해지고 피를 보는 것에 익숙해지고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게 익숙해진 내가…..예전과 같을까…..뿌리까지 맑은 너희들과 다르게 나는 뿌리부터 아무것도 없었는데.”
 
밝은 빛을 동경했다.
 
누구보다 빛나는 자신의 어머니를 동경했다.
 
모두에게 사랑 받는 어머니의 모습을 동경했다.
 
세상의 모두가 부정한다고 해도 자신은 정의로운 길을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다고.
 
자신도 빛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그가 용이 된 후 처음으로 폭주해 자신의 안을 보았을 때,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절대로 어머니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안의 모습은 절대로 빛을 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공허한 묘지 같은 자신의 마음 속에 무엇을 채워 넣든 언젠가 사라져버릴 거라는 것을.
 
그렇기에 잃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의 편만큼은 잃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걸 위해 그는 자신의 감정이 마모되는 것을 택했다.
 
자신의 사람에게는 7년 전처럼 감정을.
 
적에게는 무심할 정도로 냉정하게.
 
그 결과 그는 힘을 얻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자신은 절대로 7년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한 발만 잘못 내디디면 그대로 망가져버릴 거라고.
 
“웃기는 일이지…..감정을 마모하는 걸 택했는데….그럼에도….이렇게까지 힘들다니…..나도 아직 멀었나봐….”
 
세하가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너무나도 아팠다.
 
잃고 싶지 않아서 대신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택해버린 그의 말로를 아는 것처럼 그는 그저 웃음을 지었다.
 
그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오며 한숨을 쉬었다.
 
역시 여기 있었네. 정말이지….사람 걱정 시키고 말이야….
 
들려온 목소리에 세하가 의자에서 몸을 떼자, 목소리의 주인이 다가오더니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또 혼자서 이상한 생각했지?”
 
“아니야. 그저 조금 마음이 복잡해졌을 뿐이야.”
 
“거짓말 하지마. 표정이 애써 감정을 추스르려고 할 때의 표정인걸.”
 
빤히 자신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에 세하가 졌다는 듯이 그녀에게 대답했다.
 
“방금 전에 슬비가 고맙다고 하면서 나한테 안 변했다고 하더라…..사실은 모두가 싫어할 만큼 변해버렸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그의 표정에 그녀가 그의 머리에 딱밤을 먹이고는 그와 눈을 마주했다.
 
“바보야. 사람은 누구나 변해. 너도 나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변해. 그리고 모두가 싫어한다는 소리 하지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널 싫어하게 되어도 적어도 나는 네 옆에 끝까지 있을 거니까.”
 
올곧은 눈이 그의 마음 속을 휘저었다.
 
동시에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있던 무서움이라는 감정이 되살아났다.
 
이 사람을 놓치기 싫다는 생각과 이 사람마저 잃어버리면 정말로 죽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꼭 껴안았다.
 
“괜찮아, 세하야. 나는 네 편이야. 네 옆에 영원히 같이 있을 너의 반려자 라고.”
 
“…..넌 왜 항상 나를 작게 만드냐….나는…..매번 이렇게 너한테 구원만 받잖아…..어쩔 때는 내가….구해주고 싶은데….”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18살의 시간에 멈춰버린 이세하의 말에 정미가 그를 품에 안은 채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게는 너와 만난 모든 시간이 구원이고 행복이니까. 남편을 지지해주는 건 멋진 아내의 조건 중 하나잖아?
 
가벼운 듯 진지한 그녀의 말에 그가 그녀의 품에 더욱 파고 들었다.
 
조금만 더 어리광 피우게 해줘.
 
칭얼거리는 듯한 그의 말투에 그녀가 하연을 살짝 돌아보며 말했다.
 
“세하를 빌려가도 될까요, 언니? 제가 세하한테 어리광을 좀 부리고 싶거든요.”
 
“정미 님이라면 얼마든지요. 급보가 있다면 제가 오라버니한테 따로 연락을 할게요.”
 
“네. 고마워요, 언니. 자, 세하야.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이야기 하자.”
 
정미가 말을 하며 오른손을 휘젓자,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졌다.
 
두 사람이 사라진 뒤, 회의실에 남은 하연이 아라를 슬쩍 바라보았다.
 
“아라 아가씨. 그럼 최대한 빨리 정보를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참모장님의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죠.”
 
아라마저 회의실에서 떠나자, 하연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걱정 할 필요는 없었나…..그래도….혹시 모르니까 준비는 해야겠지.”
 
하연이 손을 뻗어 성의 시스템에 접속을 하고는 가장 최신의 보고 내용에 적힌 보고서를 확인하며 중얼거린다.
 
“…….어디까지 떨어질 생각일지 궁금하네요. 겨우살이나무 님. 그리고…..상처입은 백합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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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firsteve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지에 썼던 것처럼 개인사정으로 쓰는 시간도 양도 예전에 비해서 많이 적을 겁니다.

불규칙하고 퀄리티도 들쭉날쭉하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자 여러분 저와 함께 지옥행 완행 열차에 올라탈 준비 되셨습니까?
2024-10-24 23:23:04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