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큐브 ver.J - 2부

브로유리 2015-02-18 3

 "거 디자인하고는…. 이래서는 내가 무슨 실험 대상이 된 것 같잖아."

 "너무 그러지 마요, 제이 씨. 데이터를 측정하는 데에는 이렇게 깔끔한 편이 편하니까요."


 제이의 불평에 유정은 사춘기 소년을 달래듯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물론 제이도 이렇게 깔끔한 편이 보는 입장에서는 편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제이는 큐브에서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큐브의 안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었다. 넓지만 꽉 막힌 공간. 바닥과 벽의 장치들을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는 삭막한 공간. 그 누구라도 이런 공간에 계속 머물고 있으면 정신이 버티지 못하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제이의 눈에 큐브의 공간이 무언가와 겹쳐져 보였다.


 '으윽….'




 차원전쟁 당시, 쑥대밭이 된 도시.


 모든 것이 파괴되어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황량한 전장.


 여기저기 널브러진 차원종의 잔해.


 그와 거의 비슷한 수만큼 널브러진 사람들의 시신.


 그리고 그곳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




 "…제, 길…."


 갑자기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으로 짚은 채, 제이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낮은 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폐허라면 지금의 강남이 더욱 그 때의 모습과 비슷할 텐데, 왜 이런 곳에서 그 모습이 생각나는 걸까.


 "제이 씨? 왜 그러세요, 괜찮아요?"

 "괜찮아, 유정 씨. …그보다도 시작하려면 아직 멀었어? 좀이 쑤신다고."


 다급하게 묻는 유정에게 제이는 급히 이마에서 손을 떼고 손을 내저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하지만 유정은 여전히 제이가 걱정되는 눈치였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괜찮다니까. 그렇게 걱정되면 내가 나왔을 때 한 번 안아주지 그래?"

 "…조금 있으면 큐브가 가동될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요."


 넉살좋은 제이의 말에 유정은 곧바로 큐브의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제이는 아쉬운 듯이 머리를 긁적이고는 다시 한 번 큐브를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여러모로 기분 나쁜 공간이다. 잡념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는 위를 바라봤다. 그러자 벽 중앙의 윗부분에 크게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UNion'


 "…그래. 이게 다 저 망할 놈들 때문이지."


 물론 그것 때문이 아니라는 건 잘 안다. 평소에도 틈만 나면 유니온에게 적개심을 표하던 제이지만,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더럽고 불쾌한 기분이 들 리가 없다.


 단지 그에게는, 그저 이 찝찝한 기분을 떨쳐낼 필요가 있었을 뿐.


 "이거 기분이 영 좋지 않아…. 그런 의미에서라도 얼른 처리하고 나가야겠어."


 때마침, 큐브가 가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 씨! 이제 곧 차원종의 입체영상이 나타날 거예요. 긴장을 풀지 말고 임하세요!"

 "알았어, 명심하지."


 손을 들어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곧바로 전투태세를 갖추는 제이. 그의 앞에 스캐빈저 한 마리의 입체영상이 나타났다.


 "오, 이건 진짜 차원종 같은데? 유니온 녀석들, 이런 건 쓸데없이 잘 만든단 말이야."


 제이가 새삼 유니온의 기술력에 다시금 감탄하고 있을 때, 스캐빈저의 뒤로 몇 마리의 차원종의 입체영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또 몇 마리가 나타나고, 또다시 몇 마리가 나타나고. 제법 수가 불어난 차원종 떼와 마주하게 된 제이는, 어느새 약병을 하나 따서 내용물을 입에 들이붓고 있었다.


 "…잡담할 시간은 끝났다는 건가? 그 전에, 약빨 한 번 받아볼까…!"


 입가를 한 손으로 쓱 문지르고 호흡을 가다듬는 제이.


 "좋아, 그럼 해보자고!"


 기합을 충분히 넣고, 제이는 차원종들에게 달려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 많던 차원종들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큐브에는 오직 제이만이 남아있었다. 입체영상이었기 때문에 차원종들의 잔해는 없었지만, 여기저기 패인 바닥과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가쁜 숨을 몰아쉬는 제이를 보면 누구나 격렬한 전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리라.


 "후우…. 이거…, 생각보다도 훨씬 힘이 드는데…."


 처음에는 머릿수가 많은 D급 차원종들 뿐이었다. 그것들을 모두 처리하고 '이 정도라면 제법 할 만한데'라고 생각한 순간, 그 뒤로 아까보다는 적은, 하지만 다수의 C급 차원종들이 나타났다. 약을 한 병 더 들이키고 그것들을 모두 처리하자, 마지막에는 검은 양 팀을 가로막았던 강력한 적수들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말렉…, 칼바크 턱스…, 엠프레스 코쿤…. 저것들이 한데 모여서 나에게 덤벼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지…."


 차원전쟁에서야 별 거 아닌 수준이라고 하지만, 분명히 그들은 각각 강력한 힘을 가진 개체들. 거기다 몸도 예전만 같지 못한 제이에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결국 특제 약물을 하나 들이키고 나서야 제이는 그들을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후들거리는 무릎에 손을 얹고,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제이는 중얼거렸다.


 "후우…. 이게 다… 애들이 나보고 아저씨, 아저씨 해서 그런 거야…."


 자기가 한 실없는 말에 홀로 피식하고 웃는 제이. 만약에 아이들한테 이 소리를 했다면, 분명히 다들 '아저씨를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뭐가 문제냐'라고 장난스런 핀잔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유정이 웃으면서 보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또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제 밖으로 나가서 애들한테 엄살이라도 좀 부려볼까라고 생각한 제이.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갑자기, 큐브가 아까보다 훨씬 큰 소리를 내며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이거…. 아직 끝나지 않았단 건가?'


 다시 자세를 잡고 주변을 경계하는 제이. 그런데 그의 뒤로,


 "이봐, 무리는 하지 말라고. 건강이 제일이잖아. 안 그래, 친구?"


 …분명 큐브의 안에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은 없을 터였다. 칼바크 턱스, 엠프레스 코쿤 같은 인간의 말을 할 줄 아는 차원종이 구현되어도 어디까지나 입체영상일 뿐, 자아를 가지고 자신에게 말을 걸 수는 없는 법. 오싹한 느낌에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실체를 확인한 제이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모르는 얼굴도 아니잖아?


 모르는 얼굴일 리가 있는가. 지금도 그는 그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제이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제이 그 자신의 모습이었다.



 "…유정 씨,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런 장난은 하나도 재미없다고."


 자신, 정확히는 자신의 모습을 한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제이는 큐브 밖에서 자신을 보고 있을 유정에게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소용없어. 네가 무슨 말을 하던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겐 전해지지 않는다. 그 뿐만이 아냐.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알 수가 없지."


 능글맞게 웃고 있는 남자의 조롱에 제이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그가 알고 있는 유정은 적어도 이런 걸 가지고 장난을 칠 여성은 아니었다. 또 남자의 태도로 미루어보아, 유감스럽게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건 필히, 이미 이 큐브 안에 누군가 숨어들어 왔다는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너, 뭐하는 놈이냐."


 그가 내뱉은 말의 의미, 그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다. 하지만 미간의 주름을 통해서 얼굴에 훤하게 드러나는 분노와 살기 잔뜩 서린 제이의 목소리는 상대를 위축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남자는 그에 기죽는 일 없이 오히려 더욱 능청을 떠는 것이었다.


 "'뭐하는 놈이냐'라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보면 알잖아?"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남자는 말했다. …기분 나쁜 녀석이다. 말투와 행동이 성질을 돋우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녀석은 나와 다르다. 녀석은 나와 같지 않다.


 하지만 확실하다. 믿고 싶지 않지만 너무나도 명확하다.


 그래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은 해야만 한다.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제이는 남자에게 물었다.


 "…'나는 너다'…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것 봐, 잘 알고 있잖아."


 예상했던 대답이다. 그러면서도 듣기 싫었던 대답이다. 또한 역겨움을 느낌과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다. 멍청한 질문인 줄 알면서도 제이는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내가 둘일 수가 있는 거지?"


 제이의 질문에 남자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이는 전투태세를 갖추고 굳은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볼 뿐이었다. 한참을 웃던 남자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하하, 이거 정확히 말을 해줘야겠군.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려나."


 그는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할 말이 참 많지만 말이지. 너도 내가 길게 얘기하는 건 별로 좋지 않잖아? 그렇지? 그래서 이걸 어떻게 간단하게 설명해야 할 텐데…."

 "……."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남자를 노려보는 제이.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누군지 간단히 설명하도록 하지."


 남자 역시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제이가 보기에도, 그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었다.




 "나는 말하자면…. 차원종이 된 너라고 할 수 있겠지."

2024-10-24 22:23:31에 보관된 게시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