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파이] 190321
SummerDia 2019-03-21 7
※ 현대물 대학생 AU
※ 몇몇 설정 날조 및 개인적인 캐릭터 해석 주의
“아.”
‘비가 오네.’
방금 도서관에서 나온 파이 윈체스터는, 변화무쌍하게 변한 날씨를 보고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아침만 해도, 아니 최대한 양보해서 파이가 도서관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날씨는 아주 좋은 편이었다. 그런데 몇 시간 만에 이렇게 변덕스럽게 비를 내리는 하늘에게 파이는 의아함을 느꼈을 뿐이다.
‘우산도 없는데.’
평소에는 가방 한 구석에 접이식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파이였지만, 요 근래 날씨는 아주 좋은 편이었고 오늘자 일기예보에서조차 비 – 소나기 – 가 온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따라 가방에 들어간 책이 많은데다 하나같이 적잖은 무게를 자랑하여 파이는 아무 생각 없이 짐을 줄이자는 의도로 오늘 하루만 우산을 놓고 왔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고 해야 할까? 갑작스러운 소나기였는지 파이처럼 건물 입구에서 어물쩍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고, 그마저도 밖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제대로 된 우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 적었다. 오히려 소나기에 미처 대응할 처지는 아니지만 마음은 급해서, 임시방편으로 가방이라도 머리에 쓰고 뛰어다니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였다.
파이도 잠시 저 사람들처럼 가방을 간이 우산 삼아서 5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 하숙방으로 갈까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가방은 너무 무거웠고, 천 재질의 가방이 5분 이상동안 막기에는 비의 양이 상당했다. 파이는 오늘 하필 우산을 놓고 온 것, 천 재질의 가방을 가지고 온 것, 천 가방이 젖어서 상하면 안 되는 중요 전공서적을 많이 가지고 온 것, 총 3가지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파이는 시간이 그렇게 촉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오늘 도서관에서 저녁 시간까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할당량을 금방 끝내서, 실로 오랜만에 느긋하게 오후 시간을 보낼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던 참이었다. 우산이 있었다면 오히려 운치 있다면서 근처 카페에 가서 남은 오후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파이는 잠시 입구 쪽에서 다시 도서관 실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 비를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도서관에 다시 들어가서 느긋하게 앉아서 있는 것이 훨씬 효율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실제로 오래 서있자니 아무리 체력이 좋은 파이라 하더라도 오른쪽 어깨에 걸친 가방이 무거운 건 사실이었다.
만약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와 자신의 몸을 가린 그림자가 없었더라면 파이는 망설임 없이 도서관 안으로 다시 들어갔을 것이다.
“이런, 이런.”
“...”
“어째 오늘따라 우산을 놓고 가나 했는데...이럴 줄 알았지.”
저 빈정거리는 말투가 참 마음에 안 들었지만, 사실 고마운 마음 또한 같이 들었다. 어찌 되었건 지금 파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산이었으니까.
“선배...”
파이는 얼굴을 ** 않아도 상대방이 누구인지 뻔히 알겠다는 듯 망설임 없이 곧장 호칭을 내뱉었다. 파이의 선배 겸 파이가 하숙하고 있는 집주인의 아들인 볼프강 슈나이더는 낮게 웃었다. 방금 전까지 집에 있었는지 편한 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은 모습이었다. 파이가 현재 볼프강의 차림새에 신경이 쓰이는 것처럼, 볼프강은 다른 부분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그 호칭은 밖에서는 되도록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선배를 선배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부르죠?”
“뭐, 그런 거 있잖아. 사귀는 사이끼리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 제법 많은 걸로 아는데?”
“...”
아, 그리고 그 앞에 수식어에다가 하나 더 추가. 파이의 현(現) 남자친구 겸 첫사랑. 하지만 파이는 부러 볼프강에게 볼프강이 첫사랑이라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볼프강의 성격상 여러모로 귀찮아질 거 같아서였다. 파이는 그런 거 신경 쓸 시간에 빨리 집에나 가지요, 라는 의미로 볼프강의 옆구리를 툭- 쳤다. 자신 있게 몇 보 먼저 앞서가는 파이에게 우산을 대주며 볼프강은 파이의 옆에 붙었다.
* * *
-파이 윈체스터입니다.
-너, 진짜 네 동생이랑 똑같이 생겼다.
아마 이게 볼프강과 파이가 처음 만났을 때 처음 나눈 대화였을 것이다. 역사적인 첫 만남이라고 해도 되는 순간인데도, 이렇게 무드 없는 건 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볼프강과 파이는 중국 어느 유명대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파이는 다른 지역 대학에 진학 중이었는데, 오랜만에 동생 슈에 윈체스터를 보기 위해서 왔다가 ‘우연히’ 슈에와 같이 있던 볼프강도 같이 본 것이다. 당시 볼프강은 슈에가 다니던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었고, 영어가 능숙한 슈에가 거의 볼프강의 책임자가 되어서 잘 붙어 다닌 탓이었다.
볼프강의 어찌 보면 무례한 말에 파이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쌍둥이니까요.
-와...영어 발음이 거의 원어민 수준이다?
이건 볼프강이 슈에를 처음 보았을 때도 한 칭찬 중 하나였다. 당연하겠지만 파이와 슈에 자매의 피에는 영국계가 섞여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영어가 중국어만큼 능숙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파이와 슈에의 눈은 평범한 중국인에게는 볼 수 없는 푸른 벽안 – 동생 슈에 쪽은 언니보다 색이 훨씬 짙어서 어쩔 때는 보라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 이었다.
볼프강은 이때까지 파이의 벽안만큼 맑고 청량한 벽안을 본 적 없다고 장담했다. 그 부분도 볼프강이 파이에게 반한 부분 중 하나였으리라.
각설하고, 요약하자면 볼프강은 파이에게 푹 빠졌다. 거의 절친 급이 된 슈에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자 슈에는 눈매가 가늘어지면서 볼프강에게 말했다.
-와, 저 이런 전개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정말이에요?
-내가 거짓말 잘하는 못미더운 사람으로 보여?
-네.
-...
이러나저러나 하늘의 운명인지 장난인지 파이도 볼프강에게 약간의 호감이 생겼다. 전화, 편지, 메일 등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다.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 볼프강은 독일로 돌아가고 파이는 졸업을 하게 되었다. 파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가고 싶다는 말을 슈에에게 했을 때, 슈에는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지나가듯이 슈에가 물었다.
-볼프강 슈나이더 씨 때문에 그래?
-어? 어어...어떻게 알았어?
-무예전공자인 언니가 독일 대학을, 그것도 독문과로 간다고 했을 때부터 알았지. 그 사람, 독문과 전공이잖아.
-...
하필 가려는 대학도 볼프강이 석사 과정을 열심히 하는 대학이라고 하니까. 슈에는 별말 없었다. 그저 조용히,
-응원할게.
파이를 응원할 뿐. 그리고 이런 말도 뒤에 덧붙였다.
-슈나이더 씨가 괴롭히면 주저 말고 나한테 말해. 내가 막 혼내줄게!
-...고마워.
역시 파이에게는 동생 슈에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생전 처음으로 나가게 된 해외, 그것도 독일. 파이는 독일 공항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일을 기억한다. 볼프강이 마중을 나온 것. 자신이 독일로 온다는 말을 편지나 메일에 일절 쓰지 않았는데도 볼프강은 귀신같이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슈에라는 훌륭한 오작교가 있었던 덕이었다.
그게 인연이 되었는지 하숙도 볼프강의 집에 비어있는 3층 방에서 하게 되었다. 미리 귀띔을 준 건지 볼프강의 부모님도 파이를 크게 환영해주었다.
학기를 준비하는 몇 개월 동안 볼프강은 옆에서 파이를 많이 도와주었다. 독어가 서툰 파이를 위해 간단한 수업도 해주고, 자신이 몇 년 동안 독문과에 다니면서 깨달은 자잘한 팁 같은 것도 알려주면서. 파이의 어학 능력은 생각보다 대단해서 어려운 단어만 빼면 무난하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렇다보니 어느새 볼프강과 파이는 영어와 독어를 섞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게 되었다.
“왜 그래?”
볼프강이 한눈에 봐도 생각이 퍽 많아 보이는 파이의 옆얼굴을 보며 물은 말이었다. 그제야 파이는 자신이 볼프강과 말없이 걷기만 했다는 걸 깨달았다. 파이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비가 오니 감성이 풍부해지는 걸까? 답지 않게 이런저런 생각이 제법 많아지는 파이였다. 그리고 현실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다는 걸 파이는 알아챘다.
파이가 궁금한 눈빛으로 볼프강을 올려다보자 볼프강은 피식 웃었다.
“이런 느긋하고 비도 오는 오후에, 그냥 집에 들어가자니 아쉽잖아? 카페라도 가자고.”
“...”
“왜? 어떻게 원하는 걸 그렇게 정확하게 짚어내냐고 묻고 싶은 거지?”
“아니요...당장에 원하던 건 아니지만 꽤 괜찮은 생각이라고 생각하네요.”
볼프강은 파이를 보면 척하면 착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파이는 볼프강에 대해 그 정도의 수준에 오르지는 못했다. 본래 눈치가 빠른 사람이기에 그런 걸까? 그 덕택도 있었지만 파이는 볼프강이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 자신을 눈 담아 왔다는 걸 훗날에 깨달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습관, 입버릇, 울고 싶을 때는 꼭 달리기를 해야 한다는 것 등등. 어찌 보면 참으로 방대한 데이터인데 그걸 일일이 다 알고 기억하려는 볼프강의 능력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이런 파이의 반응에 볼프강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직후에 볼프강이 파이에게 말해준 해답은 참 걸작이었다.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널 엄청 좋아하고 있으니까 당연한 거야.
* * *
비가 와서 한적한 카페 창가 자리에 두 사람은 자리를 잡았다. 볼프강은 아메리카노 종류를, 파이는 항상 우유가 들어간 유음료를 마셨다. 케이크는 두 사람이 좋아하는 초콜릿 무스 케이크. 카페에 흐르는 잔잔한 음악은 한껏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를 무르익게 해주는 데 충분한 역할을 했다.
“힘들지?”
“네?”
요 근래 도서관에서 거의 지내다시피 하는 파이가 걱정이 되어서 꺼낸 말이었다. 시험이며 과제 제출이며...안 그래도 서툰 독어로 해야 한다는 것이 볼프강은 늘 마음에 걸렸다.
사실 슈에에게 파이가 자신이 있는 대학으로 유학을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볼프강은 내심 놀랐다. 자신 또한 이런 행동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게다가 긴가민가했다. 슈에는 일단 자신에게 그렇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막상 독일에 온 파이를 보았을 때는 끌어안아주고 싶을 만큼 반갑고 고마웠다.
파이는 찻잔을 내렸다.
“괜찮아요. 익숙해졌어요. 가끔 재밌기도 하고요. 이걸 선배하고 말하면 선배가 그에 대해 아주 신나게 해설을 해주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 그럼 요즘 무엇을 배우지?”
“지난주부터 리처드(Richard)...”
“리하르트(Richard).”
볼프강이 영어식 고유명사에 익숙한 파이에게 독일식 발음으로 정정해주었다. 파이는 잠시 헛기침을 하면서 요즘 배우고 있는 문학가에 대해 장대한 설명을 했다. 눈빛이 반짝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파이는 그 사람의 글이 마음에 드는 거 같았다. 볼프강은 커피를 한 모금 홀짝 마셨다.
“난 그 사람 문학관 마음에 안 들던데.”
“왜요? 호탕한 것이 전 마음에 무척 들던데요.”
“넌 그러고 보니 그런 거 좋아하잖아. 하지만 그 사람의 글은 너무 날이 서 있어. 공격적이라는 거지.”
“음...확실히 그런 느낌은 있더군요.”
독일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면서 무작정 독일 대학에 유학을 오고, 그것도 자신이 원래부터 전공하던 것이 아닌 다른 학과로? 볼프강은 가끔씩 묻는다.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난 절대 못해. 볼프강은 쓰게 그 사실은 인정한다. 그래서 지금 파이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다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요즘 중국어를 파이 몰래 배우고 있다. 파이와 중국어로 대화를 하고 싶어서.
파이는 가끔씩 볼프강에게 핀잔을 줄 때가 있었다. 예를 들으면 이런 식.
“가끔 슈에에게 연락도 좀 하고 그러세요. 슈에가 선배 안부 정말 궁금해 해요.”
“네 동생은 나 엄청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설마요. 슈에가 얼마나 선배 이야기를 많이 물어보는데요.”
“대체적으로?”
“음...슈나이더 씨가 잘 해주냐? 대다수 이런 거네요.”
아직도 날 못마땅하게 보고 있는 건 맞는 거 같은데? 볼프강의 대꾸에 파이는 흐음...그런가요? 라며 고심하기 시작했다. 볼프강은 밝은 화제로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CC로 유명하던 거 같은데?”
“CC가 맞을까요? 저희, 제가 이 대학 들어오기 전부터 사귀던 사이였는데 말이죠.”
“커플은 커플이잖아.”
그리고 이건 아주 좋은 전환이었다. 볼프강은 아까 파이가 싹둑 잘라버린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그래서 그런데 그 선배라는 호칭 좀...”
“아, 선배는 선배라고요! 도대체 여기서 뭘 더 원합니까?”
“난 그게 불만이야! 오죽하면 네 동생이 날 부르는 슈나이더 씨가 더 정감 있게 느껴진다니까?”
“...미스터 슈나이더?”
“...장난 하냐?”
솔직히 파이에게 있어서는 볼프강을 ‘선배’ 말고 달리 부른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는데 문득 볼프강의 어머니가 볼프강을 부르는 호칭이 기억났다.
“...볼프?”
“...!”
그 순간 파이는 탁한 편인 볼프강의 벽안이 또렷하게 빛이 나는 걸 보았다! 볼프강은 말문이 막혔다. 그걸 그 입에서 그렇게 들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좋기는 한데...! 좋기는 한데...좋은 거랑 별개로...
“...”
“...”
“...”
“...그냥 선배 해.”
이 화끈거리는 얼굴을 매번 파이 앞에서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결국 볼프강은 호칭 바꾸는 건 일단 한 수 접어두기로 했다. 파이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볼프강과 달리 꽤나 차분했다. 솔직히 그 ‘볼프’ 라는 애칭도 파이 혼자 구상한 것이 아니고, 이미 수천 번이나 불러주었을 – 볼프강의 부모님이라든가 –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렇게 새로워하고 좋아할만한 일이었는가에 대해서.
저렇게까지 좋아한다면...
‘가끔씩 볼프라고 불러줘야겠다.’
골려 먹이는 것도 겸해서.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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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짤 하나 보고 연성한겁니다.
2. 중간에 볼프랑 파이가 말하는 '리하르트' 라는 문학가 실제로 없습니다.
3. 위상력이 없는 세계로 써서 슈에도 살아있고, 파이와 볼프의 눈도 벽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