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하유리] 190318
SummerDia 2019-03-18 6
※ 짧음주의
※ n년 후의 세하와 유리 날조
-입꼬리, 꼭 올릴 것!
매우 중요한 사항이 있는 일을 앞두고 제 연인은 이상한 당부의 말을 남겼다. 그 당부와 관련되어 세하는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입꼬리를, 올려?
-웃으란 말이야, 웃음! 미소! 스마일!
유리는 자기가 직접 웃어 보이는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부러 검지로 입꼬리를 정상이라면 올라가지 않을 곳까지 올려가면서. 뚱한 표정으로 세하가 아무 반응이 없자, 유리는 작전을 바꾸어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는 길을 선택했다.
-물론 지금 가는 자리가 결코 웃을만한 자리도 아니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 또한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이 전부겠지만, 세하는!
-...
-무표정이면 정말 얼굴이 무섭단 말이야.
-...그렇게 보여도 될 거 같은데.
세하는 소극적이게 대꾸했다. 유정이 유니온을 바꾸어**다고 말을 한 것은 몇 년 전의 일. 교복을 입던 아이들은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도 몇 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유정이 이들의 앞에서 약속을 한 것에 대한 열정이 식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유정이 하는 일에 대해 적극적으로 도움도 주고, 어떨 때는 직접 나서기도 했다. 세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번 청문회에 먼저 나서자고 한 것도 오히려 세하였다.
-제가 담판 지으러 갈게요.
그리고 세하가 말한 그 담판을 짓는 날이 바로 오늘. ‘힘 내’ 나 ‘응원할게’ 라는 말을 유리에게서 듣고 싶었던 세하한테는, 지금의 유리의 말이 매우 생뚱맞은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득 보게 된 신발장 옆 거울 속 비추어진 자신의 얼굴이 지금 너무 경직되어있다는 걸 자각하자, 세하는 유리가 한 말이 무슨 뜻을 또 내포하고 있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긴장 풀어. 잘 되어질 거야~ 라는 의미.
자신은 지금부터 닥칠 과정에 모든 것이 신경이 몰린 반면, 유리는 이미 모든 일이 다 잘 풀어지는 미래 – 물론 그렇게 되길 바라는 – 의 상황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그렇기에 세하 또한 유리가 은근슬쩍 제시한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상기시킬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현재의 고난보다는 미래의 희망찬 것을 상상하는 게 더 기운이 났다. 세하는 그런 유리의 배려에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고맙다는 말은 당연히 잊지 않았다.
-고마워.
-아, 역시 우리 세하. 웃으니까 더 잘생겼네!
-...그 말은 몇 년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네.
-익숙해지지 않아도 돼. 그건 어차피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
적당한 농도 오고갔던 신서울 어느 아파트 현관 앞에서의 일이었다. 세하는 잠깐 그 과거를 회상했다.
이게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니...그 때는 그래도 나름 마음이 차분했던 거 같은데, 지금은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쿵쾅거리고 있다. 계속 심호흡을 하는 세하를 유정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보았다.
“저, 세하야...괜찮니?”
“괜찮아요. 제가 지원한 일인데요.”
언젠가는 자신도 직접 맞닥뜨려야 했던 일이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 몰랐던 척 하기는 싫었다.
회의실로 유정과 함께 들어가니 벌써부터 ‘나는 반대요.’ 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사람들이 한 가득이었다. 세하는 설마 이렇게 대놓고 싫어하는 기색을 보인다는 것에 놀라워했고, 한두 번 겪은 것이 아닌 유정은 ‘그럼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여유 있게 자신이 가지고 온 종이를 정리하는 위엄까지 보였다.
-입꼬리.
슬쩍- 무언의 주문 같은 그 말이 떠올라서 세하는 의식적으로 살짝 올렸다. 하하호호 웃는 낯은 아니더라도, 옅은 미소 정도를 유지하는 건 사회 생활을 하는 이상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세하는 생각했다.
문제는 지금 자신들의 앞에 있는 이들은 그런 거 따위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생존권의 축소에 대한 불만을 퍼붓는 사람들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처음에는 포커페이스로 – 세하보다는 몇 번이나 다녀보았던 – 시작했던 유정도 시간이 지나갈수록 일정 단어가 상당히 거칠게 나가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의자에 앉아있는 절대 다수의 인물들도 덩달아 점점 격앙되어갔다. 심지어 불적절한 말들을 서슴지 않는 소수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 혼잡한 상황에서 세하는 자기만은 침착하게 있으리라고 무한한 다짐을 했다. 적어도 이 상황을 냉정하게 수습해줄 차가운 머리를 지닌 인물이 한 명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최면까지 하면서.
세하 본인이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면 참 쉬운 일이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기에 상당부분 괴로웠다. 옆에 유정이 없이 저 혼자 이 사람들을 대했더라면 이렇게 평온한 미소를 지으면서 우두커니 서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세하는 유리와 옆에 같이 지내면서 몇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모든 감정은 시시각각 내비치면 안 되는 것. 앞서 언급한 내용은 세하가 클로저가 되기 전에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하지만 그 뒤로 덧붙여지는 문장은 그 후에 추가된 것이 맞았다.
둘째, 단, 너무 참지는 말 것.
이 문장이 왜 갑작스럽게 떠올랐는가. 임원 하나가 그만 도를 넘어선 말을 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서지수 같은...”
“...”
쾅--!! 세하는 항상 머리보다는 몸이 움직이는 타입이었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세하 자신이 자각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미 책상을 향해 주먹을 내리친 후였고, 그 책상은 이제 본연의 모습을 찾을 수도 없을 만큼 너덜너덜해졌다.
회의장에 순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세하는 이런 상황 속에도 의식적으로 표정을 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거친 행동과는 달리 얼굴은 차분하다는 말이었다. 임원들은 놀랐으나, 유정은 무덤덤했다. 만약 유정 또한 당황을 했다면 세하는 다시 냉정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겠으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적절한 분노는 협상을 인도하는데 훌륭한 지름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아침에 들었던 말이 왜 자꾸 귓가에 들리는 것인지.
-세하는 무표정이면 정말 얼굴이 무섭단 말이야.
‘아...’
하지만 유리였어도 유정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자신을 말리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그래서 세하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
아, 걍 다 때려치워버려.
* * *
유리는 저녁 시간 즈음에 돌아온 세하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 피곤했지?”
“조금...”
“그럼 오늘은 저녁을 시켜 먹을까?”
저녁을 비롯한 식사 담당은 늘 세하였다. 하지만 유리는 피곤해 보이는 세하에게 억지로 부탁하여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의 세하의 행동은 두 가지였다. ‘아냐, 괜찮아. 뭐 먹고 싶어?’ 라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부엌으로 가던가, ‘뭐 먹고 싶은데?’ 라며 유리의 음식 의사를 물어보는 거나.
메뉴를 단도직입적으로 정한 적은 없었다.
“오늘 저녁은 전복죽이 좋겠어.”
그래서 유리는 세하에게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응? 왜 그러는데?”
“죽 쑤었어.”
아주 기가 막힌 비유를 하는 세하에게 하는 유리의 대답은 걸작이었다.
“거기다가 두부 한 모만 겻들이면 금상첨화겠네.”
“...”
“...”
“...미안.”
말이 없다가 세하는 갑자기 사과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유리는 그런 세하에게 ‘왜 세하가 사과해?’ 라는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이렇게 덧붙였다.
“그 사람들이 화날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
세하는 부정하지 않았다.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이 그 증거였다.
“응.”
“역시.”
유리도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다는 눈치였다. 사람은 급작스럽게 변하지 않는다. 느리지만 천천히 변하는 게 원래의 순리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유정을 필두로 한 개혁 집단은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니까. 미움을 받고, 공격도 받는 건 당연한 것이다.
넥타이를 풀어 내리는 세하의 뒤통수로 유리가 물었다.
“그래서...지금은 괜찮아?”
“약간? 일단 하고 싶었던 말은 그 사람들 앞에서 다 하고 왔어.”
“유정 언니 놀란 거 아니야?”
세하가 어떤 말을 했는지 대강 아는 거 같은 유리의 분위기에 세하는 살포시 웃었다. 그래...그 순간을 기점으로 세하의 입에서 방언 터지듯 말이 나오기 시작하자 처음에는 무덤덤하던 유정도 종국에 가서는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으니까. 그래도 회의실에 나오면서 ‘잘했어.’ 라고 말을 한 걸 보면 유정도 유정 나름대로 세하에게서 대리 만족 같은 걸 얻지 않았나 싶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세하는 소파를 향해 다이빙하듯 몸을 내던졌다. 수트를 벗자마자, 오늘 알게 모르게 맞서 싸웠던 피로감이 갑자기 밀려왔던 탓이었다.
“그래서 오늘은...좀 쉬고 싶어.”
“죽 같은 거 먹어도 돼? 나 같으면 죽 하나로는 힘이 안 날거야.”
생각해보니 그렇다. 뭐, 드립치려고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니 꼭 죽을 먹으라는 법도 없었으니까. 세하는 상반신을 반쯤 일으키며 말했다.
“그럼 치킨 어때?”
유리도 이견이 없는지 이렇게 되물었다.
“음료수는?”
“알아서 해줘.”
세하는 다시 소파에 몸을 마저 누웠다. 몸이 노곤한 것이 잠이라도 쏟아질 거 같았다. 신기했다. 같이 살고 있는 집에 온 것만으로도 긴장이 이렇게 녹아버리는 것이.
‘내 집’ 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
“...”
세하는 신중하게 메뉴를 고르고 있는 유리의 옆얼굴을 보았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 지금은 그저 휴식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싶었다.
아, 그냥 그거로 하자. 즐거운 우리 집, 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