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하] Empty
SummerDia 2019-02-25 3
※ 이세하 ‘트리아이나 리벨리온’ 태스크포스 스토리 각색
※ 일부 대사 각색 有
※ 재활 겸 쓰는 짤막한 글(추후에 같은 소재로 리메이크 예정)
“자네는 달랐네.”
저 말을 듣는 걸 소년은 매우 싫어했다. 넌 우리랑 다르잖아, 넌 우리와 달리...등등 이런 말들은 소년이 적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지겹게 들은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말들 속에는 언제나 공통점이 하나 존재했다. 소년이 되물었다.
“다르다고?”
그 목소리의 끝은 살짝 떨려있었다.
소년은 내심 긴장이 되었다.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도 안 가는 이에게까지 저 말을 들었을 때에도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는 제 몸뚱이가 참으로 가엽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얼마만큼 상처를 받으며 살아온 걸까, 나 자신은. 그러나 축음기에서 타고 나오는 목소리는 의외로 김이 빠지는 소리를 내뱉었다.
“자네는, 텅 비어있었네.”
“...?”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괴물, 그런 말과 비슷한 소리는 아니었지만 소년을 뜨악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문장이었다고 생각한다. 소년 아니, 이세하는 질색해했다. 생전 처음 듣는 소리로 인한 당황스러움이 아닌, 이제는 그런 부분에서조차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에 말이다.
* * *
“분위기를 바꾸어서 잠깐 제군에게 질문을 좀 하겠네. 제군은 ‘텅 빈’ 병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나?”
-텅 비었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지?
“말 그대로일세. 텅 비어있는, 내용물이 하나도 없는 것이 바로 눈에 들어오는 투명한 유리병이라고 치세나.”
-묘하게 구체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내 착각이 아니겠지?
“그건 제군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아. 내가 듣고 싶은 건 제군의 그런 생각이 아니라, 텅 비어있는 유리병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겠나?”
-비어있구나...거기서 끝일 거 같아.
“그럼 그 유리병을 제군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보세. 그럼 어떻게 하겠나?”
-별로 눈에 가지는 않는데 거기서 또 무언가를 해야 해? 음...유리병은 재활용이 가능하던가.
“하하하! 제군은 아주 재밌는 답을 내놓았군.”
-무슨 의미야, 백작.
“그 말 그대로일세. 자네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는 유리병을 쉽게 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네. 사실 내가 원한 답은 그런 답은 아니었네만 그래도 참 재밌는 답변이었네.”
백작과 말을 주고받던 이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작은 신이 나서, 말을 일부러 더 하게 되었다.
“자네 말대로지. 비어있는 병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 하지만 그 병 안에 마실 수 있는 식수 같은 것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 주스라든지, 아니면 제군이 가끔씩 즐겨 마시는 에너지 드링크라든지.”
-...놀리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나 빨리 해.
“어이쿠, 본의 아니게 화나게 만들었다면 미안할세. 하지만 이제부터가 본론이라네.”
물을 담은 병, 주스를 담은 병 등등...그 안에 무언가를 조금만 넣기만 해도 그 병이 가지고 있던 가치는, 비어있을 때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생기지 않는가! 고작 내용물이 조금 담겨져 있다 해도! 그 안에 들어있는 그 무언가가 그 병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지! 백작의 장황한 연설이 듣기 싫었는지 상대방은 잔뜩 짜증이 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또, 또 이상한 소리나 하는 거 맞잖아.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면 상처를 받는다네. 그리고 자네가 재활용품에 넣어야겠다고 고민한 그 비어있는 병이 바로 자네를 뜻하는 것이니 그것에 더 상처나 받지 말게나.”
-...
“아, 물론 자네는 병 따위가 아니지. 살아있고, 생각도 하고, 고민도 하고, 상처도 받는 인간이니까. 그냥 비유가 그랬던 걸세.”
내가 이 꿈의 무대를 통해 본 자네는 마치 그러했다고 비유를 한 거뿐이니 실망하지 말게. 자네는 물론 그 병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방은 이미 백작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 잡은 거 같았다.
-고작 그 말 하나 하고 싶다고 그렇게 장황하게 말을 했던 거야?
“아니, 아니. 난 그저 신기했을 뿐일세. 인간들의 원동력은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욕망, 그리고 그 욕망이 인간을 꿈에 가득 채우게 만드는 거지. 마치 주스나 에너지 드링크 같은 것처럼.”
-네 말을 듣고 보니 이제야 감이 오네. 지금의 난 그냥 지금이 좋은 거야. 더 이상 이루고 싶은 것도 없는 거라고.
“흐음.”
백작의 심심한 반응이건 말건 상대방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오히려 네 말 덕에 깨달았어. 지금의 난 그런대로 괜찮게 살고 있구나, 라고.
“...그런 관점도 있군.”
백작은 동의를 했지만 상대방의 의견에 전적으로 마음을 빼앗긴 건 아니었다. 백작이 본 인간은 앞서 말했듯이 꿈으로 가득 차 있고, 그걸 통해 생각도 하고 행동도 하는 그런 생물이었다.
텅 비어있다는 건 이루고 싶은 꿈이 없거나, 아니면 이미 이루었기에 그랬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사실은 그 작은 자리 하나 조차 만들기 버거워하는 것일까. 그렇기에 부러 자신을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소년은 정확히 모르는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마음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있고, 그 마음 대부분에는 휑한 공간만이 자신을 반겨주고 있으리라는 것을. 소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혈기왕성한 힘과는 전혀 다르게, 좁고 어둑하기까지 하다.
비어있으면 채우면 그만. 백작이 언급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소년은 그 부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백작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아 그의 의견을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신에게는 그런 여유조차 없다고 본인이 단정을 지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여유, 한계, 리미트...그걸 무한대로 뻗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이 연무극장이건만! 제군은 그걸 잘 활용을 하지 못하는군! 극장의 주인으로서 참으로 안타깝다네. 백작은 잠깐 탄식했다.
그리고 궁금증도 같이 생겼다.
“과연 제군은 그 자리 그대로에서 만족하는 날이 계속 이어질까?”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씩 무너지게 된다면, 아니면 어떤 계기로 인해 미처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를 손에 넣게 된다면, 그 비어있는 병에도 무언가가 채워지게 될 날이 오지 않을까? 백작은 그런 억측을 했다. 억측이라고 한 이유는 이 사실을 알려주어도 당사자가 믿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자네 또한 나의 지적 호기심을 무한히 채워주는 인간.”
제군 같은 손님이 불편하게 있다고 해도 언젠가는 분명! 제군도 이 극장을 좋아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네! 자네는 분명 그런 존재일 테니까.
그러기에 오늘도, 이 연무극장의 막은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