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큐브 ver.J - 1부
브로유리 2015-02-17 5
"…뭐? 승급 심사?"
"그래요, 유니온에서 당신에게 승급 심사를 치를 자격을 주겠다는 공문이 내려왔어요."
이곳은 G타워 옥상. 얼마 전, 차원종의 대대적인 침공에 의해 파괴된 강남을 수복하기 위해 유니온에서 강남 광장을 대신하여 임시 거점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널찍한 땅을 내버려두고 한 건물의 옥상을 거점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금 강남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거침없이 날뛰는 차원종들과 그에 의해 파괴되어 무너져 내린 건물들.
여기저기서 치솟는 불길과 차원간섭 현상이 뒤섞여 붉은 색과 초록색으로 물든 거리.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수많은 건물들과 자동차들의 불빛으로 화려하게 수놓았던 번화의 도시는, 이제는 불길의 붉은 빛과 차원간섭 현상의 초록빛이 처참하게 궤멸된 폐허를 비추는 죽음의 도시로 변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승급 심사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을 준다니. 키가 큰 백발의 남성은 선글라스에 다부진 손을 가져다 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여튼 유니온 놈들, 이런 상황에서도 뒤탈이 없도록 수작을 부리는 건가…."
그의 이름은 제이, 검은 양 팀의 보호요원이다. 그는 차원전쟁 당시에 울프팩 팀의 요원으로 활동했던 경력이 있다. 그 활약으로 유니온 내에서 역전의 용사라고까지 불리는 그였지만 어쨌거나 그는 현재 수습 요원의 위치. 물론 다른 검은 양 팀의 멤버들 역시 아직 수습 요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것이 문제인 이유는 지금과 같은 긴급 상황에는 수습 요원이 아닌 정식 요원이 파견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취소된 국제회의에 참여하러 서울에 온 세계 정상들의 호위에 정식 요원들이 배치되었기 때문에, 강남 탈환에 파견된 요원은 오직 검은 양 팀뿐이었다. 만약 사태 해결이 된 후에, 이런 긴급 사태에 배치된 것이 오직 수습 요원들뿐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유니온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리라.
이번에 승급 심사 자격을 준 것은 틀림없이 그것 때문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제이의 손 위로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제이의 눈치를 살피던 검은 양 팀의 관리 요원, 김유정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이 씨…."
"후…. 나도 알아, 유정 씨."
유정의 말에 제이는 손을 떼고 말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간에 이건 확실히 좋은 기회라는 것을 말이지."
어찌 되었든 승급 심사라는 것은 흔하지 않은 기회다. 정식 요원으로 승급하게 된다면 겉으로나마 유니온으로부터 대우를 받게 된다. 위상력의 2차 리미트를 해제할 수 있도록 허가도 받게 되고 말이다. 차원전쟁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그에게 그런 제약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지만,
'아무렴 뭐 어때, 수습 요원으로 승급할 때도 그랬는데.'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제이다.
"…좋아. 그럼 승급 심사를 치르도록 하겠어. 승급 심사 내용을 전해 달라고."
"알겠어요. 어… 그러니까, 우선 첫 번째 과제는… 그게…."
제이의 말에 유정은 유니온으로부터 받은 공문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이는 피식하고 웃음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맨 처음 유정 씨가 관리 요원에 배치되었을 때도 매뉴얼을 뒤적이고 있었지.'
본인은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지만, 누가 들어도 틀림없이 매뉴얼을 보고 읽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때는 현장에 B급 차원종이 출연했기 때문에 더 놀려먹지 못했지만, 만약 그랬다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그 외에도 평소의 행동을 보면 똑 부러진 유능한 인재지만, 의외로 이런 허당끼도 있는 제법 귀여운…
"…제이 씨, 내 말 듣고 있어요?"
"음? 뭐라고?"
그새 매뉴얼에서 과제를 찾아냈는지, 유정은 제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으, 으음. 미안해, 유정 씨. 그래서 첫 번째 과제가 뭐라고?"
"두 번 말 안 하니까 잘 들어요. 첫 번째 과제는 큐브의 클리어에요."
"큐브?"
유정의 말에 의하면 큐브는 차원압력 발생장치를 이용하여 과거에 만났던 차원종들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시뮬레이션을 만들 수 있는 장치로, 이 큐브가 만든 차원종 입체영상과 싸워서 모두 해치우면 과제가 클리어 된다고 했다.
"과거의 기억을 바탕을 토대로 입체영상을 만든다라…."
유정의 설명을 듣던 제이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반쯤 농담을 하는 투로 말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이지만, 차원전쟁 당시의 녀석들이 튀어 나오거나 하지는 않겠지? 몸도 예전 같지 않은데 그런 녀석들이 나오면 곤란하다고."
"그, 그건 걱정하지 마요. 최근 검은 양 팀에서 활약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다고 해요."
"그래?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유정과 마주보던 제이는 몸을 돌려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과제를 수행하러 가기 전에 제이는 항상 이런 식으로 몸을 풀었다. 어깨를 돌리고 있는 제이에게 유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이 씨, 혹시…. 그 때의 기억, 아직도 또렷하게 나는 거예요?"
유정의 질문에 제이는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잠깐의 침묵.
유정이 '괜한 말을 했나.'라고 생각하던 순간, 제이는 다시 뒤돌아서서 유정을 마주보았다. 선글라스 때문에 보이지는 않지만 유정은 제이가 자신을 사나운 눈으로 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괜한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순간,
"설마, 방금 내 말을 진지하게 들었던 거야?"
유정이 고개를 들어보니, 제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거 당연히 농담이지. 설마 진짜로 차원전쟁 당시의 녀석들이 튀어나올 거라고 내가 생각했겠어?"
그 말에 유정의 눈이 동그래졌다. 얼굴이 붉어진 것은 덤.
"뭐, 뭐, 뭐예요, 그게! 나는, 나는 진짜 ㄱ…!"
"하하. 미안해, 미안해. 그런 걸로 농담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말이야."
제이는 미안하다는 손짓을 하고는 다시 뒤돌아서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이의 표정은 살짝 굳어있었다. 말로는 농담이었다고 말했지만,
그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끔찍한 전쟁을,
그 괴로운 기억을.
'…그래도 유정 씨가 그걸 몰라서 물어봤을 리는 없지.'
걱정해서라고,
자신이 말을 자르지 않았더라면 유정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데도, 왜 자신은 굳이 말을 잘랐을까. 그 말을 듣기 싫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뭐, 그런 건 되었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제이는 슬슬 스트레칭을 마무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자, 이제 슬슬 과제를 하러 가볼까."
제이는 손에 깍지를 끼고 기지개를 한 번 쭉 켰다. 그 상태로 몸을 뒤로 젖히자,
'우두둑'
G타워 옥상에 울려 퍼지는 굵고 묵직한 소리. 그리고 그 소리의 주인은 바닥에 엎드린 채로, 등에 손을 대고는 죽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으윽…. 너무 무리하게 몸을 풀었나…."
"…에휴. 아무튼 제이 씨도 참…."
고통에 몸부림치는 제이에게 다가가, 유정이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무리하지 마요, 건강이 제일. 아닌가요?"
"…그거 어디서 굉장히 많이 듣던 소리 같은데."
유정의 말에 제이는 멋쩍게 웃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쨌든 고마워, 유정 씨. 덕분에 조금 나아진 것 같군."
"아, 아, 아니, 뭘 이런 걸로…."
말을 더듬는 유정을 향해 제이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큐브에 갔다가 오도록 하지."
선글라스를 고쳐 쓴 뒤 그는 에드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걸어가던 제이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유정에게 말 한 마디를 던지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리는 하지 않을게."